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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화 난(亂)-1
동해방주는 용음십이수와 건곤팔장은 서로 우위를 가리기 어려운 무공이며, 용개 풍시종은
십대고수다운 면모를 갖춘 뛰어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생사를 건 결투로 대면하기보다
술 한잔을 나누는 자리에서 만났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에 안타까움이 들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만남은 피를 부르는 자리였고 서로가 책임지고 있는 부하들은 생사대전을
치르고 있었다. 인정이나 사정을 베풀 여유가 두 사람에겐 없었다.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서로의 목숨을 취해야 했다. 동해방주는 그런 현실이 안타까웠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아~, 이런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조금만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것인데... 인연이 이
런 것인가.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목숨을 취해야겠구나.'
동해방주는 용음십이수와 건곤팔장의 대결을 조금 더 연장시키고 싶었지만 사해방이 밀리는
전황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사해방의 대방주로 그들의 생명을 지켜야 했다. 용개 풍시종
의 목숨을 최대한 빠른 속도로 취해야 했다.
동해방주는 독문내공인 건곤대진력(乾坤大眞力)을 극한까지 운용해 건곤팔장의 후반 삼절초
인 건곤일척(乾坤一擲), 건곤만리(乾坤萬里), 건곤개벽(乾坤開闢)을 연속으로 펼쳤다.
"허억!"
용개 풍시종의 안색이 새하얗게 탈색됐다. 하늘을 뒤덮는 먹장구름처럼 몰려오는 장력은
과히 해일과 같았고 막아낼 자신도 없었다. 동해방주의 내공은 용개 풍시종이 예측한 것보
다 반 수 위였던 것이다.
풍시종은 아득하게 몰려오는 건곤팔장의 위세에 기가 질렸다. 그러나 몰려오는 손님을 빈
손으로 반길 수는 없듯이 용개 풍시종은 용음십이수의 정화인 용비어천(龍飛御天)을 세 번
이나 연속으로 펼쳐 건곤삼절장을 대항하기로 했다.
콰콰쾅.
무려 세 번에 걸쳐 굉음이 터져 나왔다. 가히 청천벽력(靑天霹靂)이 따로 없었다. 몰아치
는 광풍과 굉음은 두 사람이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게 할 정도였다. 그러나
언제나 상하는 드러나듯 멀쩡하게 서있는 동해방주에 비해 용개 풍시종은 뒤로 다섯 걸음이
나 밀려나 있었다.
"우와와~."
사해방의 무인들은 함성을 지르며 기쁨을 드러냈다. 그리고 한참 유리한 전황을 몰아세우
던 복수혈의 무인들은 정반대로 안색이 굳어져버렸다.
"대단하네. 풍 방주."
"흐흐흐, 고맙소이다. 나는 그동안 음양팔반장과 흑성장이 내 장법과 자웅을 겨룰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소. 비록 나에게 건곤팔장이 용음십이수에 못지 않다는 말한 사람이 있었지만
인정하지 않았소. 그러나 이제는 그의 말을 인정하오."
"나 역시 그동안 용음십이수를 그리 높게 치지 않았었네. 하지만 지금은 건곤팔장에 못지
않음을 인정하네."
전력을 다해 장력을 사용한 덕분에 두 사람은 잠시 기력이 빠져 대화를 나누었지만 결코 대
결을 멈출 생각은 없었다. 상대를 칭찬하며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내력을 복구하고 있었다.
동해방주는 용개 풍시종에 비해 내공이 높지만 나이가 많아 내력을 복구하는데 시간이 걸렸
다. 용개 풍시종은 동해방주보다 빨리 내력을 복구할 수 있었지만 내상을 입은 게 문제였
다. 두 사람은 최대한 빨리 내공과 신체 상태를 정상으로 돌리는데 전력을 다했다.
"내 수하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네. 이만 끝내야겠네."
동해방주가 먼저 선전포고를 했다. 역시 내상이 용개 풍시종의 발목을 잡았다. 상대가 동
해방주인 이상 내상을 안고 싸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용개 풍시종은 선택권이 없었다. 동
해방주는 이번에 끝장을 내려는지 건곤팔장 전 초식을 한꺼번에 펼쳤다.
천지개벽과 같은 건곤팔장의 위세를 막기 위해 용개 풍시종은 용음십이수 전 초식을 펼치는
것을 선택했다. 몽환포영을 펼친다면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고 피할 수 있지만 그 뒤가 문
제였기 때문이다. 동해방주를 확실하게 격살할 기회가 생길 때 사용할 계획이었다.
쿠콰쾅.
두 사람의 내공이 격돌한 지점에서 터져 나온 굉음은 사해방 전체를 뒤흔들었고, 강렬한 폭
풍은 반경 십장이내를 날려버렸다. 강렬한 충격파는 사해방과 복수혈의 혈전을 잠시 멈추
게 만들 정도였다.
"크으윽.."
"커억!"
동해방주와 용개 풍시종은 반작용으로 발생한 충격파를 받고 뒤로 밀렸다. 특히 용개 풍시
종은 내상이 악화돼 피를 토했고 동해방주마저 가벼운 내상을 입었는지 전신을 부르르 떨었
다. 동해방주는 용계 풍시종의 내상이 가볍지 않다고 판단했다.
더 이상 시간이 지나면 사해방이 세력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치명상을 입을 것이라고
예상한 동해방주는 내상을 무릅쓰고 공격을 감행하기로 했다. 동해방주는 용개 풍시종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달려갔다.
쾅.
"커어억."
동해방주의 강렬한 몸통박치기는 용개 풍시종을 인사불성으로 몰아버렸다. 무려 이십여 보
나 뒤로 밀려난 용개 풍시종은 쇄골이 박살나고 내장이 파열된 충격 속에서도 결코 정신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동해방주의 공격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동해방주는 건곤팔장을 쏟아냈고 용개 풍시종은 방어하는데 급급했다. 더 이상 공격을 허
용하다가는 목숨을 보장할 수 없을 정도였다. 동해방주는 양손바닥을 현란하게 허공을 수
놓다가 용개 풍시종의 심장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건곤팔장과 함께 장씨 문중의 양대절
학의 하나인 혼원지(混元指)를 사용한 것이다.
"헉!"
용개 풍시종은 안색은 창백하게 변했다. 동해방주의 기습공격은 상상조차 못할 정도로 빨
랐고 무시무시한 내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제 피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퍽.
혼원지는 가차없이 용개 풍시종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런데 심장에서 구멍이 나고 선혈이
흘러야 했는데 용개 풍시종은 물거품처럼 터져 나가더니 꿈결처럼 사라져버렸다. 용개 풍
시종은 몽환포영을 사용해 위기에서 벗어난 것이다.
"몽환포영!"
동해방주는 용개 풍시종이 사용한 개방의 비전지학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놀랍소이다. 본 방의 제자들도 모르는 몽환포영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 정녕 놀랐소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일세. 이백년간 배운 자가 없어 사장(死藏)된 몽환포영을 구현시키다니..."
환상처럼 나타난 용개 풍시종을 바라보는 동해방주의 눈에는 감탄의 기색이 가득했다.
"나는 몽환포영으로 귀하의 목숨을 거둘 계획이었소. 그러나 그 무시무시한 지력 앞에서는
더 이상 방법이 없어 몽환포영을 드러내고 말았소."
"자네는 몽환포영을 과신하는군."
"과신하지 않소. 나는 몽환포영은 믿을 뿐이오."
용개 풍시종의 신체가 또다시 물거품처럼 변하더니 허공 속에 녹아들었다.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으니 내 건곤팔장과 혼원지도 무용지물이지. 그러나 자네도 몽환
포영을 사용하고 있는 동안 용음십이수와 같은 강렬한 공격은 사용할 수 없지 않은가. 그렇
다면 자네는 무엇으로 나를 이기겠는가."
동해방주는 몽환포영의 허점마저 파악하고 있었다. 용개 풍시종은 그 점 때문에 초반부터
몽환포영을 사용하지 못했다. 하지만 동해방주의 빈정거림을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
"한 방울의 낙수가 바위를 뚫소."
"그러나 매우 많은 시간이 필요한 법이네."
동해방주의 반론은 차가웠다.
퍼벅.
용개 풍시종은 동해방주의 반론을 말 대신 주먹으로 대답했다.
"크윽..."
동해방주는 보이지 않는 용개 풍시종의 공격을 받아 신음성을 내며 휘청거렸다. 강한 공격
을 아니었지만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무방비로 당해 만만치 않은 타격을 당한 것이다. 그
러나 용개 풍시종의 공격을 받는 순간 동해방주는 그 위치를 순식간에 파악했다.
"이대로 당할 수는 없지."
건곤팔장과 혼원지가 허공을 향해 쏟아졌다. 빈 공간이지만 용개 풍시종의 기척이 파악된
장소였다. 그러나 동해방주의 공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몽환포영은 단순한 눈속임이 아니
라 최상승의 신법이었다. 용개 풍시종은 동해방주의 공격은 간단하게 피하고 역공을 했다.
퍼버벅.
"허억..."
흉부에 세 번에 걸쳐 타격이 오자 동해방주는 신음소리를 흘리며 두 걸음이나 뒤로 밀려 나
갔다. 복수혈의 무인들은 도깨비 장난에 놀아나 어쩔 줄 모르는 동해방주의 모습과 환상과
같은 몽환포영의 위력에 환호했다. 그들은 승리가 눈앞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낙수가 바위를 뚫으려면 엄청난 세월이 필요하듯 용개 풍시종
의 산발적인 공격은 동해방주에게 치명상을 주지 못했다. 게다가 동해방주는 공격을 받는
순간 용개 풍시종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물론 건곤팔장이나 혼원지로 공격해봐야 몽환포영
앞에서는 허사에 불과하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갈!"
동해방주의 강력한 사자후는 산천초목이 떨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진정 무서운 건 다른 곳
에 있었다.
"크아악..."
용개 풍시종의 비명소리가 갑자기 터져 나왔다. 그리고 허공에서 물거품과 안개가 모인 곳
에서 튀어나온 풍개 용시종은 피를 뿌리며 추락했다. 흉부는 새까맣게 타버렸고 안색은 밀
랍보다 하얗게 변해 있었고 귀와 코, 입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서, 설마... 무형살인강(無形殺人 )."
복수혈 무인들은 돌발적인 상황에 어리둥절하다가 일우 대사가 경악하며 내뱉은 말을 듣고
는 진저리쳤다. 무형살인강은 강기를 사용하는 공격의 극치로 방어의 극치인 호신강기와
반대되는 무공이었다. 근 백년이내에 호신강기나 무형살인강을 익힌 절대고수는 없다고 알
고 있는 그들은 동해방주의 역량에 놀라움을 넘어서 공포에 빠졌다.
"사부님!"
풍개 용시종이 더 이상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인사불성이 돼 쓰러진 모습을 본 팔걸사는 일
제히 뛰어들었다. 팔걸사의 세 사람은 용개 풍시종에게 달려갔고 남은 다섯 사람은 동해방
주에게 달려갔다. 그들은 동해방주의 공격을 막으려 한 것이다.
그러나 무형살인강을 억지로 펼친 동해방주는 더 이상 힘도 내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젠 작은 동물이 와서 건드려도 쓰러질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다섯 명이나 달려드는 화
급한 지경에 처하자 동해방주는 무형살인강을 다시 한번 펼쳐야했다.
"으악."
"크아악."
다섯 사람은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무형살인강은 그들을 새까맣게 태워버렸다.
팔걸사의 다섯 사람은 허공에서 재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흐윽..."
동해방주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주저 앉아버렸고 그 장면을 목격한 복수혈의 무인들은
두 눈에 핏발을 세우며 외쳤다.
"죽여라!"
복수혈의 무인들이 일제히 달려들자 사해방 무인들도 돌진했다. 소강상태에 빠져 있던 격
전이 또다시 불이 붙었다. 복수혈 무인들은 동해방주가 무력해진 절호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생사를 도외시하고 덤벼들었다.
기회를 놓쳐 동해방주가 살아난다면 앞으로 자신의 목숨은 고사하고 가문과 혈족 전체가 멸
망의 구렁텅이에 빠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해방주의 가공할 무위를 이길 수 없
다는 두려움이 그들을 광분하게 만들었다.
복수혈 무인들이 광분할수록 사해방 무인들도 거세게 막아섰다. 두 세력은 광란에 빠진 맹
수들이었다. 희부성과 해룡단의 단주는 가공할 혈투의 장에서 빠져나와 땅바닥에 주저 앉
아 있는 동해방주에게 달려갔다.
"사돈어른 괜찮습니까?"
"대방주님. 무사하십니까?"
두 사람은 동해방주에게 동시에 질문했다. 동해방주는 대답할 여력조차 없는지 고개만 끄
덕였다.
"하아~. 다행입니다."
동해방주가 내상을 입었지만 치명상은 아니었고 탈진한 상태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한 희
부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겨우 3성에 불과한 무형살인강을 연거푸 사용한 게 문제였네. 두 사람은 잠시만 호법
(護法)을 서주게나."
"알겠습니다."
희부성과 해룡단주는 각각 좌우에 서서 운기조식을 하는 동해방주를 보호했다. 동해방주는
건곤팔장의 내공법인 건곤대진력과 혼원지의 내공법인 혼원일기공(混元一氣功)을 이용해 무
형살인강을 수련했다. 폐관수련까지 감행했지만 겨우 삼성(三成)에 도달했을 뿐이었다.
건곤대진력과 혼원일기공은 최상승의 내공이었지만 악삼이나 진룡거사 송자헌이 익힌 태을
진결과 홍몽진결에 비해 격이 떨어졌다. 두 내공을 융합해도 무형살인강의 형식만 겨우 드
러내는 것이 한계였던 것이다. 남궁경홍이 연환섬전장법을 연속으로 펼쳐 장력을 압축해
억지로 장강을 만든 것과 같은 것이다.
동해방주는 사방이 피에 미친 맹수들이 광란을 벌이고 있는 현장의 한가운데에서 눈을 감고
편안하게 운기조식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동해방주를 보호하는 해룡단주와 희부성은 긴장
이 가득했다. 생사혈투를 벌이는 자들보다 더한 긴장 속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복수혈과 사해방의 격전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두 세력 모두 상대를 몰살시키지 않는 한
멈출 생각이 없었다. 물러서면 다음에 막을 수 없는 보복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복
수혈이나 동해방주가 잘못되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해방의 무인들은 한치의 양
보도 있을수 없었다. 두 세력의 혈전은 동녘에 빛이 떠올랐음에도 멈추지 않았다.
팔마당의 총단은 잿더미로 변하고 있었다. 타오르는 화염을 붉은 적의를 입은 120여명의
무인들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은 혈방의 정예인 칠혈대에서도 최강으로 불리는 혈영대였
다. 혈영대는 홍면금살군의 긴급지령을 받고 팔마당 총단을 기습했던 것이다.
빈집을 공격해 심리적인 압박을 가하자는 심마의 계획을 홍면금살군도 생각한 것이다. 홍
면금살군은 금면객이 총단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하자 곧바로 혈영대를 움직인 것이다.
모용혜는 그 사실도 모르고 혈방 총단을 공격하다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던 것이다.
혈영대의 대원들은 불타오르는 팔마당 총단을 바라보며 간밤에 벌어진 격전을 생각하고 있
었다. 전력이 빠져나간 팔마당의 총단을 공격하는 건 싸움이 아니라 도살에 불과하다고 가
볍게 생각했던 그들의 예상과 처절한 격전을 벌려야 했다.
총 180명에 달하는 혈영대의 삼분지 일인 60여명이 팔마당 총단을 태우는 화염 속에 화장
(火葬)을 당하고 있을 정도로 처절한 격전을 벌렸다. 살아남은 혈영대 대원들의 안색은 비장
함과 피곤함이 섞여 있었다.
"가자."
"대주님. 심한 격전을 방금 치렀습니다. 현재 대원들은 매우 피곤한 상태입니다."
혈영대 대주에게 반론을 펼친 인물은 부대주였다.
"방주님의 명령이다. 우리는 명령에 따라 살고 명령에 따라 죽어야 한다."
"그러나 이 상태로 남해방 총단을 향한다는 건 무리입니다. 최소한 3일은 쉬어야 합니다."
"휴식은 이동 중에 한다."
혈영대 대주의 뜻은 확고했다. 그러나 부대주도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살아남은 120여명
은 하나같이 상처를 입었고 중상자도 20여명에 달했다. 이런 상황에서 무리한 강행군은 심
각한 상황을 초래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대주님. 그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나도 안다. 그러나 우리는 감행해야 한다."
"대주님!"
"명령이다. 나도 이런 명령을 내리는 것이 편치 않다는 것을 알기 바란다."
"흠... 알겠습니다."
혈영대 대주의 눈에 떠오른 안타까움을 보는 순간 부대주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고 말았다.
칼로 살아가고 칼로 죽는 인생이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암담한 현실이 부대주의
가슴을 스산하게 만들었다.
"팔마당 총단을 완파했다는 보고를 방주님께 올리고 바로 출발하도록 준비하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부대주는 홍면금살군에게 소식을 전할 전서구를 날린 뒤 혈영대를 재정비했다. 혈영대는
쉬지도 못하고 곧바로 남해방을 향해 진격했다. 그리고 혈영대가 남해방 총단을 눈앞에 둔
시점에 홍면금살군과 온마 동곽은 충격적인 보고를 동시에 접했다.
홍면금살군은 그전까지 팔마당 총단을 붕괴시키고 남해방 총단을 향해 진격한다는 혈영대의
보고를 받고 매우 흡족해 하고 있었다. 숭명도로 분산된 세력을 전멸시킨 심마의 세력이
끼어드는 바람에 열세에 빠졌지만 승운이 넘어 왔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요마 모용혜가 이끈 별동대가 금면객의 세력에 의해 몰살당했다는 보고서마저 받았
을 때에는 승리가 눈앞에 다가왔다고 생각했다. 비록 금면객의 수하들이 모용혜의 별동대
를 공격할 때 혈방 소속의 무인들까지 가리지 않고 공격했다는 내용은 눈에 거슬렸지만 크
게 신경 쓰지 않았다. 큰 일을 치를 때에는 소소한 일은 눈감아야 했기 때문이다.
홍면금살군은 부하들을 독려해 불리한 세력 속에서도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그러나 북해방
이 강북 전체에 퍼져 있는 혈방의 분타를 공격한다는 보고는 홍면금살군을 경악하게 했다.
게다가 관군이 황하72수로채를 초토화시키고 있다는 보고는 더욱 심각한 문제를 초래했다.
황하72수로채의 수적들은 벌써 다섯 달째 치르는 전투를 지겨워하고 있었다. 또한 수많은
동료들의 죽음은 수적들을 허약하게 만들었다. 죽음을 불사하고 덤비던 수적들이 제 생명
을 지키기에 급급한 오합지졸로 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 제 집이 초토화됐다는 소문은 치명적인 문제를 만들어냈다. 황하72수로채의
각 채주들이 부하들을 이끌고 전장에서 이탈하기 시작한 것이다. 홍면금살군과 황하수로채
의 총채주조차 야반도주를 감행하는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런데 혈방의 세력이 급속도로 약해졌지만 팔마당은 공격을 감행하지 못했다. 그들 역시
혈방과 별차이 없을 정도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팔마당 총단이 혈영대의 공격
을 받아 괴멸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급속도로 사기가 저하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악재의 시초에 불과했다. 별동대가 의문의 조직에 몰살당했다는 소식은 온
마를 비롯해 취마, 수마, 심마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장강수로연맹의 총단과 각 지
부들이 관군의 공격을 받아 쑥대밭이 됐다는 보고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 소식을 들은 장강수로연맹의 수적들은 전선에서 이탈하기 시작했고 얼마 안 돼 전력은
거대한 공백(空白)이 생겨 더 이상 전투를 수행할 능력을 잃어버렸다. 천하를 뒤흔들었던
장강수전은 이렇게 용두사미(龍頭蛇尾)로 끝나버렸다.
홍면금살군과 황하수로채의 총채주가 타고 있는 선박이 삼십여척의 배들로 구성된 선단을
이끌고 파양호를 떠났지만 사마가 탄 배와 장강수로연맹의 맹주가 탄 배는 남아 있었다.
그들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했던 것이다.
관군이 대대적으로 나설 적도 없었지만 이렇게 급습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
다. 그들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담한 현실에 넋을 잃고 주저 앉아버렸다. 그러나 그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 없었기에 장강수로연맹의 총단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백은 그들의 움직임을 싸늘한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홍면금살군이 떠나고, 팔마당의
세력이 자신들의 터전으로 향하는 것을 그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다. 그들의 움
직임은 강백의 눈에 낱낱이 드러나 있었다.
"드디어 다섯 달에 걸친 전쟁이 끝난 것인가."
"그렇습니다. 강 장군님."
"훗, 잿더미로 변한 제 집들을 보고 넋이 나가겠지."
"단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장군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강백은 고개를 돌려 의문이 있다는 부장을 바라보았다.
"무엇인가?"
"어째서 저들을 지금 공격해 괴멸시키지 않는 겁니까?"
"그건 간단하네. 저들은 지금 전투를 멈추었지만 끝내지는 않았네. 아직 긴장이 풀리지 않았
다는 것이지. 한마디로 지금 저들의 상태는 불과 같네."
"그럼 저들을 그냥 나두는 겁니까?"
부장의 질문을 받은 강백은 스산하게 웃었다.
"물론 아니네. 이렇게 끝낼 생각이라면 황하와 장강, 대운하에 퍼져있는 전 천호소가 움직여
저들의 본거지를 소탕할 필요가 없었지. 오히려 지들끼리 싸우게 나둬 제풀에 세력이 약화
되는 걸 구경하는 게 낫지."
"그럼 저희는 언제 움직이는 겁니까?"
"이보게 부장. 전쟁은 전략과 전술로 구성돼 있네. 전략이 전쟁의 목적이라면 전술은 수행하
는 수단이라고 볼 수 있지. 우리의 목적은 저들의 멸망이지만, 또한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한
의 피해를 주자는 것이네."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움직여야겠는가?"
강백은 부장에게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소장의 생각으론 저들이 지쳐 있고 절망에 빠져 있는 현 시점에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건 자네가 잘못 생각했네. 저들은 분명 지쳐있고 절망하고 있을 것이네. 하지만 더 큰 감
정이 저들을 지배하고 있네. 그건 바로 전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긴장감과 이해할 수
없는 처지에 빠진 자신들 모습에 대한 분노이네. 저들은 아직 불덩이라네."
"그렇다면 언제 공격해야 합니까?"
부장은 싸우고 싶었다. 근 다섯 달 동안 전투를 구경하는 동안 피가 끓어올라 더 이상 참
을 수 없는 지경까지 간 것이다.
"저들이 잿더미로 변해버린 본거지를 본 다음이네."
"그 시점이 가장 좋은 공격시기라는 것입니까?"
"그렇다네. 저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절망의 현장에서 분노를 토해낼 걸세. 그 뒤엔 모든
의욕을 상실해 암울한 상태가 되겠지. 즉 불을 토해냈으니 물이 오는 이치일세."
"불처럼 타오르는 기세가 사라지고 모든 의욕이 사라진 그 때를 노리자는 것이군요."
부장은 그제 서야 강백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맞네. 그 때 우리가 움직이는 걸세. 물론 동시에 황하에도 똑같은 일이 생길 것이네. 이 모
든 작전은 한 도독께서 작성하고 운영하시는 것일세."
"한 도독이라면... 오군도독 한우령 대장군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부장은 깜짝 놀랬다. 갑자기 군부의 최고 지휘자 중에 한 명의 이름이 튀어 나와서 놀랬다
기보다 한우령이라는 이름이 그를 경악하게 했다.
"그렇다네. 우리는 그저 한 도독의 명령대로 움직이면 되네. 지금까지 진행된 상황을 본다면
우리는 털끝하나 다치지 않을 것이야."
"그럴 겁니까. 그러나 한 도독께서 우리를 지휘하고 있는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당연하네. 이 사실은 장강의 수적을 궤멸시킬 책임자인 나와 황하의 수적을 책임질 장 천
호만이 알고 있다네. 물론 조정의 높으신 어른들도 알기는 하겠지만 그 수는 얼마 되지 않
을 걸세. 그만큼 비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지."
"소장을 믿고 비밀을 밝힌 장군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강백에게 허리를 숙였다. 군사비밀을 함부로 누설한다는 것은 중
죄였다. 그런데 단순한 군사비밀정도가 아니라 특급으로 분류될 정보를 아랑곳하지 않고
밝힌 강백의 행동은 과감한 것이다. 부장은 강백이 자신을 그만큼 신뢰한다는 사실이 가슴
이 메였다.
"그만 하게나. 어차피 우리는 앞으로 반년은 같이 있어야 하네."
"일개 수적들을 처리하는데 반년이나 소모한다는 겁니까?"
"장강의 수적들을 뿌리 채 뽑으려면 그 정도 시간은 필요하지. 어째든 우리도 슬슬 이동하
세. 지금부터 사냥은 시작해야 하네."
"알겠습니다. 장군님."
부장은 강백에게 허리를 숙인 뒤 숙영지로 향했다.
'한달 간은 몰이꾼 노릇을 해야겠군. 하지만 넉 달 동안은 끝없는 사냥이다. 흐흐흐...'
숙영지로 향하는 부장의 걸음은 가벼웠다. 부장은 빨리 가서 군사들을 닦달해 정신상태를
뜯어 고쳐야겠다고 결심했다.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할 때에 예전처럼 늘어진 정신상태
를 가지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강백이 슬슬 이동하자는 명령은 출발하기 전에 군사들의 상태를 점검하라는 뜻이 포함
돼 있음을 부장은 잘 알고 있었다. 부장은 강백이 자신을 신뢰하는 만큼 확실한 보답을 해
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보답은 군사들을 하나같이 최상의 병력으로 만드는 것이었
다. 이제 군사들의 행복한 군생활은 종말을 맞이했고 악몽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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