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2024 10.27) 말씀/요한 11:25-26 히 3:13
카르페디엠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 11:25-26)
여러분 이런 말 있지 않습니까. 과거는 없다. 미래도 없다, 유일하게 존재하는 시간은 현재뿐이다. 아무리 왕년에 무엇을 했다 해도 그것은 지난 허상이지 실제가 아닙니다. 또 아무리 밝은 미래를 내다보며 희망을 갖는다 해도 그 역시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는 시간입니다. 그렇다고 과거도 중요하지 않고 미래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를 결정짓고 미래를 실재화 시키는 것이 현재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과거에 아주 잘 나갔습니다.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돈도 있고, 명성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재에 실패자로 살아갑니다. 그러면 과거 이야기도 실패의 스토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잘 나갈 때 겸손하고, 잘 나갈 때에 베풀고 나누며 살았어야지 그렇게 잘 나가는 사람이 거지꼴이 되었네 하고 현재가 과거를 결정짓습니다. 또 현재 어렵고 힘들지만 참고 인재하며 충실하게 자기 일을 해 나갑니다. 일하면서도 책도 읽고 공부를 틈틈이 합니다. 믿음생활도 열심히 합니다. 그러면서 남을 생각하며 섬기고 베푸는 일도 합니다. 이런 사람을 보면서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저놈은 앞으로 잘 될 놈이야. 현재의 성실한 삶을 보면서 미래 역시 잘 될 것을 보는 것입니다. 봉사하는 것도 현재, 열심히 일하는 것도 현재, 남을 섬기는 것도 현재,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것도 현재입니다. 현재 시간을 소흘이 여기면 계속 과거로 흘러가는 것이고, 미래도 역시 기약 없이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쇼펜하우워는 과거에 사는 사람도 없고, 미래에 사나느 사람도 없다. 현재야말로 생명이 확실하게 점유하고 있는 유일한 형태이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사람들의 모든 일상적인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지만 특히 우리의 믿음생활 이야말로 현재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현재 살아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유명한 목사님,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강해를 읽다보니 출애굽기 말씀을 설명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모세를 부르실 때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신 말씀입니다.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출 3:6) 이 말씀을 이렇게 풀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살았을 때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이 살았을 때는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살았을 때는 야곱의 하나님, 이제는 너의 하나님 이라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예수님도 부활이 없다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이 말씀을 인용해서 부활의 의미를 설명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재입니다. 본래는 정확한 시재라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었고, 이삭의 하나님이었고, 야곱의 하나님이었느니라 하는 것이 맞습니다. 대과거, 과거, 현재. 그런데 모두 똑같이 현재 형을 쓰고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고, 이삭의 하나님이고, 야곱의 하나님이리라는 것입니다. 지금 조상들이 죽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 안에서는 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지금 현재 산자의 하나님이심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전에 목사님은 해석을 잘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 현재 살아있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현재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현재 하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현재적인 믿음을 갖고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현재적 믿음만이 살아있는 믿음으로 우리 안에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마리아 마르다 가정에 나사로가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제자들도 마리아 마르다도, 또 함께 하는 유대인들도 당시에 현재적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원망했습니다. 마르다가 이틀이 지난 후에 오신 예수님께 원망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과거 아닙니까? 네 오라비가 살리라고 말씀하시니까 뭐라고 합니까? 마지막 날에는 다시 살 줄을 믿나이다. 이는 미래의 이야기입니다. 현재가 없습니다. 과거적인 신앙 미래적인 신앙을 붙들고 사는 것이 이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의 삶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리아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 11:25-26) 지금 현재 믿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덤에 가서 바로 즉시 죽은 나사로를 불러내셨습니다. 제자들과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현재적인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런 현재적인 믿음이 있어야 두려움 없이 항상 변함없이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소개하신 것도 현재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심어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과거에 바로를 두려워하여 도망갔던 경험 그리고 앞으로 입술이 둔하고 말도 잘 못하는 자가 바로 앞에 나아갈 때 오금이 저려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낼수 없을 것입니다. 제자들도 마리아, 마르다, 유대인들 그리고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 다 마찬가지입니다. 진짜 믿음은 현재적인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막연히 나중에 잘 되겠지 하며 살아갑니다. 지금 믿음의 씨를 뿌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미래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나중에 잘 하겠다는 하는 사람이 있지만 지금 잘 하지 않으면 나중에 하고 싶어도 하지 못 할 때 가옵니다. 사랑한다 말하는 것도 지금, 잘 해주는 것도 지금, 섬기는 것도 지금, 말씀을 듣고 전하고 가르치는 것도 지금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비싸고 귀한 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황금? 소금? 지금입니다. 지금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지금을 잡는 사람은 과거 미래 다 잡는 것입니다. 과거 미래 모두 진실이 아니며 과거,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현재이며 현재만이 진실하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3장 13절을 보면 여기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격려하고 권면하고, 힘을 주고 일으켜 주는 것도 오늘. 지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 톨스토이의 단편선 ‘세 가지 질문’이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왕이 성자를 찾아가서 인생에서 풀지 못한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내용입니다. 첫 번째,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인가? 두 번째,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세 번째,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성자의 대답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을 정성으로 섬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가족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당장 심정지가 되어 쓰러졌을 때 지금 나를 일이키고 119를 불러줄 사람이 멀리 가족입니까. 옆에 있는 사람입니까?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읏이 낫다는 말도 그런 뜻 아니겠습니까? '톨스토이'가 여행 중 한 주막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 주막집에는 몸이 아픈 딸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톨스토이가 가지고 있던 빨간 가방이 좋아 보였는지 그 가방을 달라고 졸라댔습니다.'톨스토이'는 그 빨간 가방에는 짐이 있고 지금은 여행 중이라 줄 수 없으니,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다시 들러서 주겠다고 아이에게 약속했습니다. 얼마 후 여행을 마치고 약속대로 그 아이에게 가방을 주려고 주막집에 들렀을 때, '톨스토이'는 그가 떠난 뒤 그 아이가 곧바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톨스토이'는 그 아이의 무덤을 찾아가 '비석'에 한 글귀를 새겼습니다. 그 글은 "사랑을 미루지 말라!"는 말 이었습니다. 내일은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시간은 나의 '게으름'을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사랑할 때'요, "가장 값진 시간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말씀도 믿음의 현재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줍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지금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십자가의 사건도 부활도 과거의 사건이나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날마다 순간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죄 짐을 내려놓고 주님과 더불어 날마다 부활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십자가 앞에 나아가 죄 짐과 인생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지 않는다면 언제 용서를 받고, 언제 새롭게 살며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현재적으로 우리는 용서하고 용서받고, 지금 내려놓고, 자유하고, 지금 기뻐하고 지금 감사하고, 지금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실제적인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6: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도 지금 받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이 은혜의 손을 내밀 때 벌떡 자리를 들고 일어나야지 내일 내일 미루면 기회는 지나가는 것입니다. 베데스다 못가에 38년된 병자가 은혜가 닿지 못하니 38년이 그냥 지나지 않았습니까? 이런 그에게 주님이 찾아오신 것은 두 번 다시 없는 기회 였습니다. 그가 이 기회를 놓쳤다면 다시 40년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는 자리를 들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기회도 현재 지금뿐입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현재이듯이 자유, 평안, 행복도 모두 현재만이 진실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독서모임에서 <죽은 시인의 사회>책을 읽게 되는데. 이 책을 보면 미국에 가장 좋은 사립고등학교 엘튼 아카데미에 키팅이라는 국어 선생이 부임합니다. 이 학교는 오직 전통, 명예, 규율, 최고라는 네가지를 기치를 들고 엄격하게 교육하여 아이비리그 대학을 목표하는 명문 고등학교입니다. 오직 장래에 성공을 위해서 규칙과 순종을 강조하는 학교입니다. 그런데 이 학교에 키팅선생이 들어오면서 일이 벌어집니다. 이 선생도 이 학교 출신으로아주 우수한 학생이었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깁니다. 규율을 강조하는 권위적인 다른 선생들과 달리 자유롭고 평온하고, 강한 친밀감이 느껴지는 선생이었습니다.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월트 휘트먼의 시를 인용해서 자신을 “오 선장님, 나의 선장님”이라고 불러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도 이 학교 출신이지만 자기처럼 공부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월튼의 기념 전시관으로 데리고 가서 졸업한 이 학교 출신들의 사진을 보여줍니다. 거기서 한 학생에게 542쪽 시의 첫 번째 연을 읽어보라고 합니다. 장미꽃 봉우리를 따려면 시간은 언제나 말없이 흐르고 오늘 이렇게 활짝 핀 꽃송이도 내일이면 시들어버릴 것이다. 장미꽃 봉우리를 따려면 지금! 학생이 시 낭독이 끝나자 키팅 선생은 다시 한번 시를 되풀이 읊어주고 이같은 감정을 카르페디엠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이 뜻을 아는 사람? 라틴어 박사가 손을 들고 오늘을 즐겨라고 대답하자 그러면서 왜 시인이 이런 구절을 사용했을까 묻습니다. “시인이 무척 바빠서요?” 아니야 아니야, 우리가 구더기 밥이기 때문이야. 다 아는 사실아니야? 우리는 누구도 결국 다 숨이 끊어지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아무도 이 운명에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졸업생들의 사진을 보라고 합니다. 이들도 우리처럼 60년 전 70년전 성공을 꿈꾸며 살았다. 그런데 그들의 웃음은 어디있고, 그들의 휘망은 어디로 갔나? 꿈을 마음껏 펼쳐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대부분은 세월을 아쉬워하며 무덤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능력이 시간이 없어서 그랬을까? 천만에 그들은 성공이라는 전지전능한 신을 뒤쫓는데 급급해서 소년 시절의 품었던 꿈을 헛되이 써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지금은 땅 속에서 수선화의 비료신세로 떨어지고 만 것이지. 그리고 가까이 와서 이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어보라고 합니다. 그 순간 어디서 나지막한 속삭이는 소리가 들립니다. 카르페디엠! 오늘을 즐겨라. 자신들의 인생을 헛되이 낭비하지 말라! 학생들은 모두 깊은 생각에 잠긴 채 벽의 사진들을 뚫어지게 쳐다봅니다. 카르페디엠 오늘 즐겨라! 죽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입니다. 책의 주제입니다. 물론 쾌락적인 의미보다 오늘 현재를 잘 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현재야말로 진실한 시간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현재를사는 우리들에게 주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늘, 현재! 여러분,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예수님 때문에 행복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우리는 행복 할 수 없었습니다. 부자가 되고 잘 나가는 것, 그것이 행복이 아닙니다. 누구나 다 죄로 인해 결국 죽고 심판을 받게 되어 결국 썩고 구더기 밥이 되는데 어떻게 행복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 만나고 우리는 믿음으로 행복한 자가 되었습니다. 지금 비록 가난하고, 아프고, 사업에 실패하고 일이 잘 안되어 힘들어도 결코 불행한 자가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구원받은 자이며 승리를 보장받은 자들입니다. 아무것 없어도 지금 우리는 예수가 있습니다. 지금 죽어도 우리에게는 영원한 천국이 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기도하며 행복한 삶을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빈다. 그리고 주 안에서 그 행복을 널리 퍼트려야 합니다. 나도 행복하고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사는 삶, 살며 사랑하며 배우고 누리고 나누며! 진실한 시간은 현재밖에 없습니다. 카르페디엠!. 이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마지막 신명기 33장 29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ㅇ리에게 현재라는 시간을 주셨습니다. 현재가 과거도 만들고, 미래도 결정하는 것입니다. 오늘 현재 주님의 음성을 듣고, 오늘 현재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붙들고 감사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오늘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합니다. 오늘 감사하는 기회를 내일로 미루지 말아야합니다. 지금 용서를 빌고 용서르 받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일, 일 년 후, 10년 후 하다가 많은 재물만 남겨놓고 본인조차 행복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떠납니다. 과거와 미래를 붙들고 살면 그렇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늘이라는 현재시간을 믿음으로 붙들고 카르페디엠 하시기 바랍니다. 내 일 종말이 와서 오늘 행복의 사과 나무를 심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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