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이 되여서 백두산 꼭대기에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
라는 정상석이 세워지길 바라며...
회갑
2007.5.26. 백무동 야영장 입니다
김수훈님 - 들꽃님네 3살 위상이까지 한없이
고맙고 감사 하답니다
저는 이사진을 볼때마다 미소지어지고 흐뭇 하답니다
여러분 모두들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맛있는 시간
우측에 전면의 김용규선생님 (현재 거제 외포초등학교 교장 당시 사량도 분교장) 께서
돼지고기 목살과 개조게를 두박스 갖고오셔서 모두들 잘먹었습니다
우선 먼저 오신분들이 맛있게 요기를 하는것 같습니다
헤어지기전
공수님가족과 들꽃님팀은 자정무렵
진로님 신후님등은 새벽에 떠났기에 사진에는 없네요
칠순
2016.5.27. 상주 백화산 한성봉 입니다
이영진님 - 김성준님 고맙습니다
한성봉
좌로부터 공용철님(부산) 김성준님(군산) 오해봉
이영진님(전주) 김진수님(하동) 입니다.
100회 행사 (지리산 제석봉)
행사를 마련해준 조문환 청우산악회장님이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조문환 회장은 74년 겨울에 1사단 12연대 10중대로 전입왔습니다
전입 신고를받고 신병3명에게 조고만닭 2마리와 라면한봉지를
주면서 셋이서만 한나절 자유롭게 먹으면서 쉬도록 했습니다
신병이 온다기에 부식으로 지급된 닭을 두마리 남겨두었습니다
당시 라면한봉지는 10개가든 큰봉지 였습니다
닭고기에 소금과 마늘만넣고 끓여서 잔뼈까지 다발라먹고
그국물에 라면10개를 끓여서 다먹었다고 했습니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받으면서 라면을 배부르게 먹어보는게 소원 이었는데
그소원을 그날 풀었다고 했습니다
전남 나주 동강면의 부잣집 아들인 조문환회장은 그렇게 맛있는 닭고기는
그날 평생 처음먹어 보았다고 여러번 이야기 했습니다
76년봄에 중대장 임기를 마치고 광주 31사단으로 발령나서 헤어졌습니다
그후 편지도 몇번 오가다가 전역후에 찾아왔기에 신통하다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40년 가까이 이렇게 좋은인연으로 가족들까지 가끔씩 만나는게 참으로
고맙고 흐뭇 하답니다
[문환아 우리 죽을때가지 이렇게 정을나누며 지냈으면 좋겠다
이제는 중대장님 이라고 하지말고 형이라고 불러주면 좋겠다]
(실록 정순덕의 기록) 중 대성골
1952년 1월 17일은 지리산 온 골짜기를 가득 메워버릴 것처럼 함박눈이 내렸다.
그날 날이 저물면서 빗점골, 거림골, 신흥 등지의 방면에서 빨치산이 대성골로 몰려 들기 시작했다.
다음날 새벽쯤에는 어디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눈 덮인 대성골 전체가 빨치산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순덕이 가늠하기에도 1만명의 대병력이 대성골에 빽빽히 들어찬 것이다.
빗점골 의신부락 뒤쪽에서 토벌대들이 언제 야포를 끌어다놓았는지
금세 대성골로 포탄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스무발 이상이 동시에 작렬했다.
귀청이 찢어질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달아나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희생자는 산더미처럼 불어났다.
토벌대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훤히 내려다보며 토끼몰이를 하듯 포위망을 좁히며
포격을 퍼부어대니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동작이 빠른 지휘관이나 전사들은 토벌대와 정면으로 부딪치며 포위망을 뚫고 나갔지만
대다수는 독 안에 든 쥐처럼 빠져나가지 못하고 죽어 자빠졌다.
발에 걸리는 것이 시체들이었다.
하루 종일 퍼부어대던 포격과 총격도 해가 지면서 주춤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쪽 하늘에서부터 비행기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 위에 떨어지는 시커먼 물체는 휘발유가 가득차 있는 드럼통이었다.
비행기 편대는 네 번, 아니 다섯 번 쯤인가 대성골 골짜기에
마개가 빠져 있는 드럼통을 삐라처럼 뿌리고 다녔다.
그러자 마지막 편대에서는 주먹만한 것을 골짜기 곳곳에 삐라처럼 뿌리고 다녔다.
바로 소이탄이었다.
그 순간부터 하얀 눈으로 덮여 있던 대성골은 시뻘건 불바다로 변해버렸다.
벗어나 뒤집히다.
항일투사 30인 의총
항일의병전쟁이 불타오르던 1908년.
지리산에서도 수많은 의병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1908년 1월 말, 설을 앞두고 의신마을에 들어온 지리산 의병들은
마을 서당에 본부를 두고 현재의 지리산역사관 뒤편 언덕에 초병을 두고 벽소령 길목을 경계했다.
그리고 마을사람들에게 베를 나누어 주어 겨울을 나려고 토시와 길목을 만들게 했는데
1908년 2월 2일, 설 당일 아침 철골에서 마을로 접근하던 승려로 가장한 일본군을
발견하고 발포하면서 항일의병대 80여 명과 일본군의 전투가 개시되었다.
일본군의 유인술에 속아 항일의병대의 위치가 노출되고 말았다.
이틀에 걸쳐 의병대는 치열하게 싸웠으나 일본군의 압도적인 화력을 감당할 수 없었고
무려 50여 명이 전사하였으며 생존자는 지리산을 넘어 후퇴했다.
이 전투 과정에서 마을 주민 희생자도 발생했다.
마을 주민들이 전사한 의병들의 시신을 수습하였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그 의병총들이
훼손되고 사라져감을 안타까워 해서 의신마을 주민들이 나서고 하동군민의 뜻을 모아
보전하기 위해 노력한 끝에 이 의병총을 정비하였다.
그게 2011년의 일이었다고 비문에 적혀있다.
오래전 어떤 책인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어디에서 읽었든 글에 그런 부분이 있었습니다.
어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침공하면 침공을 당한 나라에서는 반드시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저항하는 자와 앞장서서 협력 또는 공조하는 자.
이런 앞잡이들 중에는 침공한 쪽으로부터
확실한 신뢰를 얻기 위해 침공한 쪽 보다 더 충성스러운 자가 나타나기도 한다고 합니다.
작금의 시대 상항을 보고 있자니, 그 말이 참으로 와 닿습니다.
일본 사람 보다 더 친일의 작태로 설레발을 치는 자들의 꼴을 보고 있자니, 환장할 노릇입니다.
이곳 <항일투사 30인 의총>을 지나면서 그런저런 이유로 환장한다는 단어를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애국자이거나, 나라를 깊이 사랑하는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이 땅에 태어나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제가 느끼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칠순,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