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신] 인간시장(7권) 69. 친일 특공대

[물 안 개]

친일 특공대 창문을 열어도 신선한 바람은 불어오지 않았다. 지하실 방에 갇혀 있는 생활이 덜 지겨운 것은 지애라는 계집애와 함께 있기 때문이었다. 마음 놓고 거리를 활보한다는 것만 가지고도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를 깨닫기 시작했다. 지애의 말로는 내가 걱정하고 있는 바깥의 동정에 대해 염려할 게 하나도 없다고 했다. 내 필적을 그대로 옮겨 쓰는 친구가 있어서 은주 누나와 원섭이를 안심시킬 만한 편지를 보내기도 했고, 내가 원하는대로 다혜에게도 결별의 사연을 보냈다고 했다. 좋은 돈벌이가 생겨 급히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그럴 듯한 사연을 남긴 것이고 다혜에겐 좋은 여자가 생겨 길고 긴 방황의 늪에서 빠져 나오게 되었으니 내 걱정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서 좋은 남자를 만나라는 사연이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웃었지만 겉으로는 조금 아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곧 이동하게 돼요." 지애가 짐을 꾸리며 말했다. "어디로 가나?" "아마 바닷가로 가겠죠." "바닷가라면 배를 타겠군. 지금 해수욕하러 가진 않을 테고." "그래요." "나를 비밀리에 일본으로 데려가는 거겠군." "비행기는 안전하지 않으니까요." "철수예요. 노출되면 안 되니까요." 나는 탈출의 기회가 드디어 내 앞에 왔다고 생각했다. 이들이 자랑하는 각종 컴퓨터와 전자장비가 이동하는 사이에 내가 탈출한다면 감시망을 교묘하게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능하면 전자 장비를 부숴 버리는 게 현명한 방법이라는 생각도 했다. 전자장비만 부수어 버리면 그들의 믿는 감시기능 뿐 아니라 나를 꼼짝 못하게 하는 원격조정도 불가능하게 될 것 같았다. 단순한 고장이라면 쉽게 고칠 수 있지만 완전히 못 쓰게 만들어 버리면 내가 탈출해서 안전한 곳까지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을 벌수 있을 것 같았다. 식구들 그리고 친구들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내가 일본으로 끌려가는 게 확실해졌다. 모든 걸 비밀로 처리하던 이들이 어떤 해안에서 비밀리에 배를 타게 된다는 것과 목적지가 일본이란 것까지 알려 준 것은 철수 결정을 누군가 내렸기 때문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 결정은 아마 일본에 있는 본부에서 내렸을 것이고 나는 내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될 게 뻔한 것이었다. 지애 표현으로는 비행기가 위험하다고 했다. 그것은 장비 운반에 따른 위험 부담보다는 나를 공항을 통해 끌고 가기가 어렵다고 생각한 때문인 것 같았다. 않았다. 밀수선박처럼 잠입하는 루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이동을 결심한 것인지도 모른다. 분주하게 짐을 챙긴 뒤의 지하실은 휑뎅그렁 했다. 누가 보아도 보통 지하실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지애는 짐 챙기는 사내들을 채근하여 천장 속으로 보이지 않게 설치한 복잡한 전선 가닥들을 파묻어 두라고 일렀다. 전자장비의 크기나 무게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는 작은 덩치였다. 얼핏 나를 경비할 사내들의 숫자와 이동하며 생길 수 있는 경비의 허점을 생각해 보았다. 바닷가에 도착하기 전에 탈출을 시도하는 방법이 가장 안전할 것 같았고 그들이 성능 좋은 무기를 믿고 방심했을 때를 눈치껏 알아차려야만 했다. "여기 있는 사람 다 가는 거야?" "아뇨. 서울로 돌아갈 사람은 가고 우리와 함께 갈 사람은 따로 출발해요. 왜요?" "식구가 많으면 남의 눈에 쉽게 띌 것 같아서 하는 소리야." "그런 걱정은 말아요. 우리를 조금은 무시하는 것 같아요." "나도 살아야잖아." "정말이세요?" 지애는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사내야. 한번 하겠다고 약속했으면 해야지. 속에 칼이 들어와도 싫으면 싫다고 했어야지, 하겠다고 약속해 놓은 마당에 "정말 고마워요." 지애는 내 손을 꼬옥 잡아 주었다. 나를 감시하는 인원은 다섯 명이고 운전사와 지애를 돕기 위해 특별히 일본에서 파견되었다는 친구가 따라 붙게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웬만한 무기로 무장을 했다면 기회를 보아 기습하여 처치할 수 있지만 그럴 만큼 보통 무기를 지닌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기회는 마지막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번 말려들어 일을 저지르고 나면 정말 그때는 빼지도 박지도 못하는 상황에 부딪힐 것 같았다. "눈을 가려 드려요." 지애가 건강한 사내에게 말했다. "철저하군." "이해해 주세요.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요." 나는 아무 말없이 그들이 눈을 가리는대로 내버려 두었다. 철수 준비가 끝나자 지애는 내 손을 잡고 지하실 계단을 빠져 나왔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신선한 공기를 흠씬 느낄 수 있었다. 낙엽이 바람에 날리어 뒹구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고 근처에 까치가 울고 있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경기도 일원의 어떤 별장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이 밤이지?" "그래요." "그렇다면 내 눈을 가릴 필요가 없잖아?" "참으세요." 지애의 목소리는 냉랭해졌다. 자동차 내부가 넓은 것으로 미루어 개조한 카고 트럭처럼 느껴졌다. 자동차가 서서히 움직였다. 내리막길을 조심스럽게 내려가는 차체가 몹시 흔들렸다. 포장되지 않은 길이 끝나자 지애는 가렸던 안대를 풀어 주었다. 짐작했던대로 안락한 소파를 갖추어 놓은 복개트럭이었다. 나란히 앉은 지애 뒤엔 건장한 사내 둘이 입을 꽉 다문채,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앞좌석의 두 사내는 벌써 바둑판을 놓고 마주한채 나를 흘깃흘깃 쳐다보았다. 일본 녀석과 또 한 사내는 운전석에 탄 것 같았다. 기재는 나무 상자에 담겨져 뒷자석에 실려 있었다. 운전석과 연결된 인터폰 색깔이 진홍색이었다. 차체 천장에 매달려 있는 불빛의 광도가 일정한 것으로 미루어 같았다. 사내녀석 네 명의 표정이나 덩치가 만만찮아 보였다. "이 친구들도 우리나라 사람인가?" "그래요." "벙어리는 아니겠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스피커에서 소음이 들려 왔다. "장총찬 씨, 편안히 누워서 갑시다. 지루한 여행이니까 쉬시는 게 좋습니다." 스피커를 통해 울려 나온 얘기였다. 이쪽에서 얘기하는 소리를 저쪽에서 듣고 하는 소리였다. "심심한데 얘기나 좀 하며 갑시다." "말귀 어두운 양반은 아닐 텐데 왜 그러십니까?" "잠이 오지 않는데 억지로 자란 "서로 몸 생각합시다." 사내의 말투는 상당히 기분 나쁜 투였다. 내가 기죽을 사내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려 두고 싶었다. 물론 내 마음 속으로도 운전석에 앉아 있는 세 명의 사내가 어떤 유의 사람인지 짐작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말씀이 좀 심하십니다. 어차피 한배에 타고 앉은 사람끼리 이건 너무 삭막하잖소?" 지애가 내 말을 막으려고 했지만 뿌리치며 이렇게 말했다. 네 명의 사내는 한 손을 가슴에 찌른채 나를 노려보기만 했다. 아마 가슴 깊숙히 감추었던 무기를 쥔 것 같았다. 그 무기가 얼마나 성능이 좋은 무기인지 "말씀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좀 조용히 하자는 겁니다." 아까보다는 훨씬 점잖은 목소리였다. 아마 말하는 사내가 인솔대장일 것 같았다. 옆에서 건드는 사내도 없었고 이쪽 칸에서 대꾸하는 사람도 없는 것이 조직체에서 상당히 높은 서열의 인물인 것 같았다. "누군지 모르지만 인사나 합시다." "장인복이라고 합니다." "나하고는 종씨 아뇨?" "그렇군요." "뒤로 오쇼. 심심한데 바둑을 두든 한판 쪼든 합시다." "전혀 못합니다." "그럼 뭣 때문에 사슈?" "이따 내려서 정식으로 인사를 합시다. 장인복이란 사내가 이렇게 말했다. 지애가 더 이상 말을 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나는 못 이기는 체 소파에 기대앉았다. 두 녀석은 바둑판으로 되돌아갔고 나머지 두 녀석은 여전히 내 뒤에 꼼짝도 않고 앉아서 나를 지켜 보았다. 바둑알을 교묘하게 감추어 둘 수만 있다면 네 녀석 쯤은 간단하게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운전석에 앉아 있는 사내들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바둑알을 챙기기로 마음먹었다. 표창 대신 자석식으로 만들어진 콩알만한 바둑알이라도 숨겨 두어야만 했다. "어이, 자네 바둑솜씨 괜찮은데 나하고 한판 할까?" 지애가 물었다. "서너 판 두고 나면 졸음이 오겠지 뭐." "그럼 한판 둬 봐요." 지애와 내 표정만 주시하고 있던 두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네가 좀 나은 것 같으니 나랑 둬 보세." 한 사내가 엉거주춤 서 있었다. "둬 봐요." 지애가 명령하듯 말하자 사내는 엉덩이를 깊숙하게 의자에 붙이고 바둑판을 손바닥으로 쓰윽 닦았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 두기 위해 자석식으로 된 바둑판으로 준비한 것 같았다. 나는 담배부터 피워 물고, 내 행동만 유심히 관찰하는 사람들을 한번 휘둘러 보았다. 결정적인 시기에는 큰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열 알 이상은 감추어 두어야 할 것 같았다. 사내는 내게 백돌을 내밀었다. "한번 둬 보고 바꾸든지 하지 뭐." 나는 바둑 두는 일에 관심이 있던 게 아니기 때문에 사내가 내미는대로 바둑알을 잡았다. 얇은 쇠붙이가 달려 있어서 바둑판에 달라붙는 바둑알이었다. 한 주먹을 쥐고 속기하듯 따라붙었다. 사내녀석도 나처럼 성질이 급했다. 급수가 그리 높지 않은 녀석이라는 판단이 섰다. 감시하는 눈초리가 아무리 많아도 바둑알을 주머니 속에 집어 넣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는 생각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바둑알을 챙겨 감추는 못할 거라는 생각과 바둑알 가지고 무기가 되지 않을 거라는 상식적인 생각 때문에 감시의 눈초리는 점점 희미해져 갔다. 자동차는 쉬지 않고 달렸다. 세 판째 들어서자 사내는 비로소 이렇게 한마디를 했다. "제가 서너 점 깔까요?" 몇 번 말을 시켰지만 일체 대꾸하지 않던 사내였었다. "그게 편하시다면." 이미 나는 충분하게 바둑알을 챙겨 넣은 후였다. 남의 주머니 깊숙한 곳에 있는 현금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내 주머니 속으로 옮겨 넣을 수 있는 게 내 솜씨라는 걸 사내들이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이 가지고 잇는 내 기록에는 내가 빌림굿의 명수라는 걸 지적하지는 않았다. 담배 한 대 피워 물면 서너 개씩 감출 수가 있었다. 그러나 바둑알이 눈에 띌 만큼 줄어들게 할 수는 없었다. "이제 그만 두지." "잘 배웠습니다." 사내가 두 번째로 입을 열어 한 말이었다. "한숨 자 두지 그래요." 지애가 자리를 내주며 말했다. "화장실은 없나?" "저쪽예요." 자동차 뒤쪽에 간이 화장실까지 갖추어 놓은 치밀성에 나는 내 탈출 계획이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났는데도 여전히 자동차는 달리고 있었다. 지애가 생글거리며 웃었다. 이들의 비밀 아지트에서 출발한 것이 막 어두워질 때였으니까 오후 여섯 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을 것이고 자동차 안에서 보낸 시간이 거의 일곱 시간이니까 이들이 계획한 목적지에 거의 다 왔을 것 같았다. "오래 참았어." "배를 타면 심심하진 않을 거예요." "배가 기다리고 있어?" "처음엔 작은 배지만 조금 가면 좋은 배가 기다리고 있어요." "이젠 슬슬 얘기를 해도 되는지 모르겠네." 운전석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그래도 대꾸가 없었다. "장인복 선생, 다 왔습니까?"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소음이 시끄럽게 들려왔다. 일곱 시간이 넘도록 자동차는 한 번도 쉰 적이 없었다. 삼십여 분쯤 더 비포장도로를 달린 자동차가 멈추었다. "눈을 가려야지?" "여기선 괜찮아요." "마중 나오는 사람은 있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나는 속으로 일이 더 복잡하게 얽혀 간다고 생각했다. 내가 해치워야 할 사람의 숫자가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자동차 뒷문이 열렸다. 신선한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캄캄한 밤하늘이 유난히 맑아 보였다. 사내들은 나를 에워싼 채 내렸다. 자동차가 서 있는 곳은 바닷가였고 있었다. "수고스럽지만 여기서부터 걸으셔야 합니다. 모퉁이만 돌아가면 됩니다." 장인복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내가 앞장서며 말했다. 캄캄한 밤, 호젓한 산모퉁이 길, 운전사를 뺀 여섯 명의 사내와 지애, 그렇다면 지금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 말없이 따라갔다. 앞선 장인복과 지애의 발자국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뒤따라오는 다섯 명의 사내를 흘낏 돌아다보았다. 어둠에 익숙해져서 윤곽을 알아볼 수 있었다. 호주머니 속의 바둑알 감촉이 좋았다. 바둑알을 양쪽 손으로 움켜쥐었다. 지애와 장인복은 혈을 눌러 주저앉히고 방법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바싹 지애를 따라붙으며 가볍게 목 뒤의 혈을 짚었다. 그 순간 한 발짝 앞선 장인복이 돌아섰다. 장인복이가 복부를 쥐고 주저앉았다. 나는 돌아서며 다섯 명의 사내에게 바둑알을 날렸다. 바람을 맵게 가르는 소리가 났다. 사내들이 길바닥에 뻗어 누웠다. 차례로 몸을 뒤져 소형 무성권총을 모조리 빼내었다. 지애의 주머니에서도 마찬가지로 무기가 나왔다. 살상무기가 아니라 가스 총이거나 신경마비탄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뻗어 누운 사람들을 모조리 혈을 짚어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 없게 만든 뒤에 바닷가 보였고 밤눈에도 여러 명의 장정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접근하는 것은 위험한 노릇이었다. 돌아서서 트럭이 서 있는 쪽으로 우회했다. 뒷문이 열린 채 트럭은 불빛마저 꺼 놓고 있었다. 살금살금 접근하자 운전사가 고개를 내밀었다. "누구?" 나는 대꾸없이 운전사를 갈겼다. 운전석에 엎드린 채 혈을 짚어 놓고 뒷문으로 들어섰다. 지렛대를 꺼내 전자장비와 컴퓨터 장비를 모조리 부수어 버렸다. 분해가 가능한 것은 분해해서 숲속으로 던져 버렸다. 제아무리 기술이 좋은 사람이라도 재생하기 어렵게 만들어 버렸다. 한기가 느껴지는 밤이었다. 사내들을 숲 속에 끌어다 눕혀 놓고 지애와 장인복이만을 끌고 내려왔다. "이젠 실토를 하지 않으면 물귀신을 만들어 버리겠다. 입을 열면 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 신세도 저렇게 된다." 내가 가리킨 전자장비를 바라본 장인복이는 몸을 부르르 한 번 떨었다. 지애는 눈을 내리깔았다. "살아 돌아가기 싫으냐?" "아니오. 우린 아는 게 없소." 장인복이가 고통을 참느라 숨가쁜 소리로 대꾸했다. "내가 혈을 풀어 주지 않으면 넌 그렇게 고통스럽게 죽는다. 말해라." "풀어주면 하겠소." "그런 안 돼." 혈을 강하게 짚이면 내장기가 모두 뒤틀려 생똥을 싸면서 날뛰게 되는 것이었다. "합니다." "좋다. 너희들은 누구냐?" "일본 신민회(新民會) 소속 한국 책임자들입니다." "신민회가 뭐하는 데냐?" "간략하게 대답해라." "야쿠자입니다." "왜 나를 유인했느냐?" "그건 우리도 제대로 모릅니다. 회장님이 직접 만나겠다고 해서......" "이유가 뭐냐구?" 사내는 대굴대굴 구르더니 목과 배를 움켜쥐고 말했다. "한국 지부 책임을 맡기시려고 한 것 같습니다." "왜 말로 않고 납치했느냐?" "말로 하다간 큰 사고가 생길 것 같고 여러가지 눈치 챌 것 같다는 소리를 얼핏 들었소." "전자장비는 더 있지?" "없습니다." "너희들을 데리러 온 놈들은 누구냐?" "우리 일꾼들입니다." 나는 여기서 시간을 끌면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다.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대로 해라. 운전사를 깨어나게 해 줄테니 오던 길로 다시 간다." "좋소. 혈은 풀어 주시오." "나도 같은 말을 하겠다. 조금만 지애를 운전석 옆자리에 태웠다. 장인복이를 뒷좌석 소파 위에 눕히고 운전사의 혈을 풀어 주었다. 또 모퉁이를 돌아나오는 사이에 지애는 고통을 참느라 가슴을 붙잡고 몸을 떨었다. 지하실의 그 지옥 같은 생활에서 내가 그나마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지애 때문이었다. 사랑스러운 계집애였다. 나를 포근하게 해 주기 위해 헌신적으로 옷을 벗은 여인이었다. 바깥바람을 쐬고 싶어하는 내게 창문을 열어 주기도 했고 호송하는 사이에도 내 손목을 묶지 못하도록 세심하게 배려를 한 여자였다. 그런데 지금은 아주 초라한 여인으로 가엾게 내 가슴에 안겨 헐떡이고 있었다. 입에서 쏟아져 나와야 할 엄청난 이들의 흉계를 알아내기 위해선 참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참아." "다 말할 테니 살려 주세요." 지애가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든 인적이 뜸한 곳에 차를 대세요." 내 말에 운전사는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트럭이 멎은 곳은 산모퉁이의 한적한 산길 아래였다. 운전사와 지애를 데리고 뒷자석으로 들어갔다. 장인복이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바지에 흥건하게 오줌을 싸 놓았다.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라. 혈을 풀어 줄 수 있는 길은 딱 하나다. 내가 묻는대로 않으면 이대로 삼십분도 살아 있을 수가 없다. 나는 급한 놈이다. 너희들이 납치 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나는 우리 어머니와 누나를 보호하러 가야 한다." "풀어 주십쇼. 다 말할 테니." "믿을 수가 없다." "다 깨진 판입니다. 장총찬 씨가 그냥 물러서지 않을 사람이란 걸 압니다. 만약 우리가 붙잡히거나 실패할 경우엔 서로가 서로를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실패했을 때 우리는 누구의 손에든 죽는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차라리 이렇게 된 판이라면 장총찬 씨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보호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애 말해봐!" 나는 지애의 머리채를 들어올리고 "내 주머니 속에 극약이 있어요." "장인복의 말이 사실이야?" "그래요. 우린 실패하면 우리 조직원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인다는 걸 알아요." 나는 지애가 말한 주머니 속에서 극약이 든 캡슐을 꺼냈다. 장인복이와 운전사의 주머니 속에서도 똑같은 극약이 발견되었다. 나를 감시하다가 도리어 나에게 당한 채 산속에 버려진 사내들도 지애와 장인복이가 말한대로 똑같은 보복을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도 그런 거냐?" "마찬가지 신세가 됩니다." "지금 바닷가에는 몇 명이나 있고 어떤 무기를 갖고 있지?" "대여섯 명 될 겁니다. 무기는 우리들과 장인복이가 이렇게 말했다. "아녜요. 그들은 특수무기를 가졌어요. 가면 안 돼요. 위험해요. 정말예요. 장 선생한테 속는 거예요." 갑자기 지애가 용쓰듯 이렇게 말했다. 장인복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운전사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작은 소리로 말했다. "미스 민 말이 옳아요. 그들은 고성능 전자무기로 무장했어요." "살려줘요. 제발......" 장인복이는 내 무서운 눈빛을 쳐다보고 한쪽으로 비켜 서며 이렇게 말했다. "누구 말이 맞느냐?" "미스 민 말이 맞습니다." "공을 세우고 싶었습니다. 정말입니다. 하고 싶은 겁니다." "그 말은 맞다. 너는 조금 더 고생을 해야겠다. 네 입으로 솔직한 고백을 할 때까지. 만약 이번에 또 거짓말을 하면 너를 바닷가로 데려다 주겠다. 일본에 끌려가서 보복당하게 해 줄테다." "제발 한 번만 봐 주십쇼. 추호도 거짓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지애와 운전사의 혈을 풀어 주었다. 지애는 소파에 주저앉아 숨소리를 가다듬고 있었고 운전사는 의자를 끌어당겨 얌전하게 앉았다. "총찬 씨, 저 사람도 풀어 주세요. 거짓말하면 내가 알려 줄 테고 저 사람이 틀리게 말하면 내가 지적할 거고 저 사람이 말 안하면 내가 할 거예요. 정말 나를 믿어 어차피 제거당해요. 그러니 저 사람도 사실대로 말할 거예요. 우린 가족들이 인질로 잡혀 있다시피 해서 할 수 없이 나선 사람들예요. 물론 출세하고 잘 살기 위해 자원하기도 했죠." "좋아. 장인복이 너도 들었지? 여차하면 정말 다시는 네 꼴을 안 보겠다. 미스 민에게 물어 봐도 되겠지만 네가 한국의 책임자니까 너를 상대하겠다는 뜻이다." "하나님께 맹세하겠습니다." 나는 미스 민 말대로 장인복이의 혈을 풀어 주었다. 흥건하게 오줌을 싼 그대로 소파에 비스듬히 기댔다. "전자장비는 보다시피 박살을 냈다. 그러니 안심하고 내가 묻는대로 대답해라." "먼저 부탁할 게 있습니다. 그 일본인을 많습니다. 그는 이번 납치 계획의 총책임자이고 일본 신민회의 간부니까요." 장인복이의 말이었다. "맞아요. 그가 입을 열면 진짜 내막을 알 수 있어요." 지애가 덧붙였다. "우선 내가 알아야 할 게 있다. 전자장비가 파괴돼도 보복작전을 할 수 있냐?" "불가능합니다. 새로 들여오기 전에는." "내가 총찬 씨 편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장비가 파괴됐기 때문예요." 지애의 말은 솔직한 고백인 것 같았다. "한마디로 하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냐?" "장총찬 씨를 일본인으로 바꾸는 겁니다." "나를 바꿔?" "변신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한국의 장총찬 씨가 아니라 일본의 대리인으로 일본 암흑가의 명령을 받아 활동하게 만들기 위한 겁니다." "왜?" "그 이면은 정말 우리도 잘 모릅니다. 얼핏얼핏 들은 바로는 암흑가의 신탁통치라는 게 제일 기억에 남는 정도입니다." "신탁통치? 아하!" 나는 장인복이의 말에 쉽게 이해가 되었다. 나는 한때 거꾸로 내가 일본 암흑가를 원격조정하여 일본인들이 우리에게 시덥잖은 행위를 할 때마다, 예를 들면 독도가 어쩌고 할 때마다 일본 신문사를 귀찮게 구는 행위를 지시하고 싶었다. 나는 신탁통치라는 생각보다 총독같은 녀석을 한 명쯤 만들어 놓고 조종을 마음대로 하고 싶었었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는 주먹보다는 돈이 많아야 된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생기는 게 없으면 그런 일을 앞장설 나의 대리인이 생기기 어렵다는 판단이었다. "그럼 내가 그놈들 표현으로 하자면 이곳 총독이냐?" "그런 셈입니다." "허수아비 하나는 제대로 잘못 짚었구나." "자세한 내막은 일본인이 알 거예요. 우리에겐 그 이상의 깊은 내용은 알려 주지 "운전기사 양반, 난 당신을 믿겠소. 당신이 생각해서 어떤 것이 당신의 살 길인가 판단해서 도망을 가든 그 일본 녀석을 데려오든 하시오. 분명히 말해두겠는데 나나 당신이나 한국인이요. 그리고 우린 우리답게 살아야 됩니다. 이용당한 뒤에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당신들은 희생을 당할거요. 더 이상 말 않겠소. 당신이 판단하시오." 운전사는 지애의 손을 잡고 말했다. "맞습니다. 믿어 보십시오." "우린 한 핏줄이오. 그냥 하는 얘기가 아니라 피가 끓어서 하는 소리요." "압니다. 나도 처자식이 있고 살아야 할 놈입니다." 사십줄 가까운 운전사가 밧줄과 쇠막대와 산길을 내려섰다. "나머지 사람들 걱정은 마십쇼. 두어 시간 후면 저절로 깨어날 테니까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요. 거기에 내 핸드백 있을 테니까 가져오시고 내 연락처를 적어서 그 사람들 주머니에 넣어 주세요." 지애가 이렇게 말했다. "장 형, 그러느니 차라리 그 사람들을 다 데리고 가죠. 그들도 죽기 싫어서 장 형 편이 될 거요. 상황이 이렇다는 걸 알면." 장인복이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직 당신들을 다 믿지 못하고 있어. 무슨 말인가 알아?" "압니다. 그러나 그들도 한국인입니다. 내 부하들입니다. 살려내야 합니다. 만약 배에 싣고 떠난다면 그들은 제물이 됩니다." "총찬 씨, 장인복 씨 말이 맞아요." 나는 뛰어가서 운전사를 불렀다. 운전사는 우리 얘기를 듣고 신바람이 났는지 운전석으로 올라갔다. 우리 네 사람은 운전석에 모두 끼여 앉았다. 스몰라이트만 켠 채 자동차가 달렸다. 아까 그 지점에 차를 세워 놓고 우리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내가 눕혀 놓은 그대로 그들은 누워 있었다. 운전사와 장인복이가 바퀴 달린 기구로 열심히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망을 보던 지애가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난 총찬 씨를 사랑했었나 봐요."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장인복이의 말만 믿고 바닷가로 달려갔다면 지금쯤 무슨 꼴로 다시 잡혀 있을지도 모른다. 지애는 그 순간에 나를 구하기 위해 같은 편이면서도 장인복이의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려 주었다. 며칠 동안 살을 맞대고 살았기 때문에 정은 남아 있었다. "우습죠?" "인생은 그런 거니까." 겨우 이렇게 대꾸했다. "내가 누군가를 이렇게 열심히 좋아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럴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그래요. 마음도 이젠 편해요." "내려가지." 바닷가는 움직임이 별로 없었다. 연락은 이쪽에서 먼저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뒷좌석엔 늘어진 사내들이 아무렇게나 바닥에 누워 있었다. "장인복 선생, 이 사람들을 깨어나게 할 테니 선생이 설득을 시켜 주시오." "문제는 일본인입니다." "일본 사내는 깨우지 않겠소." "뒤는 한번 믿어 보시고 가능하면 빨리 여기를 뜨지요." "그럽시다." 자동차는 포장도로에 들어서자 어둠을 가르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뒤칸으로 가서 얘기를 하며 가는게 좋잖아요?" 지애의 제안이었다. "글쎄." "우릴 이젠 믿어도 돼요. 칸막이를 열어 놓으면 이 차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어요. 그리고 조금 있으면 날이 밝을 테니까 바닷가의 배는 떠날 수밖에 없어요." "먼저 얘기를 좀 해 주지. 일본애들이 왜 그런 짓을 해야 했는지를." "내가 아는 얘기와 짐작이 가는 느낌으로는 일본 사람들이 모든 분야를 지배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어요. 그러나 세세한 내막은 알 길이 없어요. 어찌나 비밀이 강조되는지 다른 팀과 접촉도 못하게 할 정도예요." "지애 같은 여자가 빠져들 만큼 대우는 해 주나?" "해 줘요. 일본에 데리고 가서 여왕처럼 대접해 주고 돈도 충분하게 대 줘요. 우리가 요구하면 미안할 정도로 넘치게 해 주더군요." "아까 들으니까 인질로 사람을 잡아 두는 모양이던데?" "장인복 씨 같은 경우엔 애가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어요. 물론 장학금을 주는 곳은 신민회죠." "지애는?" "차차 얘길 할게요." "그렇다면 장인복 씨도 아는 게 별로 없겠군?" "그럴 거예요. 나보다는 할 얘기가 많은 사람이긴 하지만요." "전자장비는 왜 가지고 왔지?" "실험하기 위해서죠. 그래서 일본인이 따라온 거예요. 우리를 감시도 하고 전자장비를 어떻게 사용하면 가동할 수 있는지를 미리 점검해 봤나 봐요." "빌린 거래요. 별장인데 일본인들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진 사람네 건가 봐요. 우리도 주인이 누구인지 몰라요." "왜 하필 신갈 근처였지?" "서울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고속도로를 이용하기 편한 데다가 별장이 한적하니까 남의 눈에 띄지 않잖아요." "정말 내가 사는 집에 무슨 장치를 해 놓았나?" "아녜요. 총찬 씨 자동차하고 가게에는 도청장치를 했지만 폭파장치를 했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화면으로 보니까 우리 집이 박살나는 게 있던데." "그건 만든 거예요. 총찬 씨를 겁 주기 "장인복이가 그들을 배반하면 어떻게 되지?" "청부업자를 보내서 해꼬지를 하기 쉬워요. 걱정되는 게 일본에서 공부하는 애죠" "장인복 씨 입장이 그런데 내 편이 되어 줄까?" "판단이 안서요. 일본인을 잡아 두라고 한 것을 보면 배반하겠다는 뜻 같기도 하고...... 어쩌면 일본인과 자식을 교환하기 위해서 그랬는지도 모르죠. 아무튼 솔직하게 얘기하기 시작하면 다 털어 놓을 사람예요." "일본 녀석의 지위가 어느 정도지?" "아마 고위층일 거예요. 일본에서 만날 때도 상당한 발언권자라는 걸 알 수 "운전사 아저씨도 쉬어야 할 테니까 어디든 적당한 곳에 세워 주고 가다가 큰 도시가 나오면 알려 줘. 피곤하니까 쉴 곳을 우선 마련해야지." "나는 괜찮습니다." 운전사가 여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차는 지금 어디에 있지?" "누님한테 갖다 드렸어요." "눈치 채지 않게 했겠지." "의심이야 했겠지만 걱정 안해도 될 만큼 조치했으니까요." "차를 세우죠." 트럭이 길가에 멈추었다. 운전석과 뒷좌석을 연결하는 인터폰도 작동하지 못하게 철저하게 부숴 버린 게 후회가 되었다. 이렇게 되돌아올 수만 있을 거라는 기대였다면 전자장비도 부수지 않았을 것이다. 뒤칸으로 올라서자 장인복의 밝은 표정과는 대조적으로 사내들은 긴장한 표정이었다. "내 말에 따르기로 했으니 안심하십시오." 장인복의 말이었다. "웬만한 건 알겠는데 우리가 급하게 처리할 일부터 장인복 씨께서 말씀해 주시죠." 나는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에 웬만한 일은 애까지 인질로 잡혀 있다는 그의 말에 따를 참이었다. 다른 거라면 몰라도 인질로 잡혀 있는 그의 아들만은 구해 주고 싶었다. "고바야시가 입을 열어야 압니다." "저 친구가 고바야시요?" "그렇습니다." "장인복 씨 아들이 인질로 잡혀 있다는 걸 압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구해 낼 겁니다. 고바야시와 교환을 하든 내가 몸을 버리든 말입니다. 그러니 내게 무엇이든 아는대로 얘기를 해 주십쇼." "장 형만 믿겠습니다. 여기 있는 친구들도 믿어 주세요. 본래부터 내 편입니다. 이번 일에 가담한 것도 나 때문입니다." "장인복 씨는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웬만하면 내가 소문이라도 들었을 텐데요. 그건 사실이었다. 전혀 기억에도 없고 그의 족보가 드러나지 않을 만큼 베일에 싸인 사내였다. "족보가 없습니다." "그럼......" "한때 체육 선생까지 했던 사람인데 일본에 갔다가 이렇게 됐습니다." "저 친구들은 제자겠군요." "그렇습니다." "급하니까 먼저 얘기를 시작하죠." "어디서부터 시작해얄지 모르지만 이와 이렇게 된 마당에 숨길게 뭐가 있겠습니까?" 장인복은 입술에 침을 발랐다. "전자장비가 우리 손에 들어올 줄 알았으면 부수지 않고 큰 흥정거리가 될 수 있었을 겁니다." 장인복의 목소리는 침착해졌다. 그 옆에 누워 있는 고바야시는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다른 사내들은 다 풀어 주었지만 두었다. 그들의 철저한 정신무장을 아는 장인복이의 부탁이기도 했다. 자해할지도 모른다는 귀띔을 해 주었다. "부서지지 않은 걸로 위장할 수도 있지요. 청계천에 가면 저 정도는 재조립해서 쓸 수 있을 겁니다. 궁금한게 많습니다. 얘길 하시죠." "일본에서 공부하면서 어떻게 하다가 여자를 만났고 그러다 보니 경제적 도움을 받을 데도 생겼습니다. 그게 잘못이었지요. 그러나 잘못이란 걸 안 것은 얼마 전이었고 사실 내면으로는 출세할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발을 뺄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자식놈이 인질로 잡혔고 동거해 온 일본 여자도 그 끄나풀이었으니까 오래 전부터 나는 이렇게 "장인복 씨의 과거 얘기를 듣자는게 아닙니다." "압니다. 그렇지만 그 얘기를 해야 말이 풀립니다." "해 보시죠." "그들에게 얽매인 거나 이렇게 된 상황을 변명하자는 게 아닙니다. 얽매일 수밖에 없도록 개인 사정이 심각했었기 때문에 나도 자청해서 가담한 겁니다. 조건도 좋고 대우도 좋습니다. 부족한 게 없이 대 주기 때문에 한번 가담한 사람이면 빠져 나오기 힘듭니다. 문제는 그들의 복수심입니다. 내가 고바야시를 잡아 달라고 한 것은 첫째 내 자식을 구하겠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고바야시가 입을 열면 정확한 사정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렇게 거대한 조직에서 단순하게 나를 얻기 위해 이런 작전을 펴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더 큰 음모가 숨어 있으리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내 짐작으로, 내 느낌이 잘못 될 수는 있지만......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다시 지배하려는 움직임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짐작이 갑니다. 오래 전부터 느낀 것이니까요." "부끄럽게도 나도 그 대열에 끼였던 사람입니다." "나도 말할 주제가 아니지만 무심하게 살아 온 건 사실입니다." "새로운 침략 형태라고 표현하면 지나친 것인지 모릅니다만 일단은 그렇게밖에 "어떤 점에서 그렇게 느꼈습니까?" 나는 가슴이 뛰는 걸 감출 수 없었다. 장인복이란 사내는 그들의 일당이었으면서도 양심까지는 어쩌지 못한 것 같았다. "정확하게 어떤 것이라고 설명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분위기는 나도 무식하고 못 배운 놈이 아니니까 알 수 있지요." "분위기라도 얘기를 해 주시죠." "그러지요. 그들이 얘기하는 걸 얼핏얼핏 들었는데 다른 분야는 어느 정도 통치가 가능하도록 계획대로 움직여지는데 암흑가만은 아직도 땅띔도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던가요?" "그렇습니다. 장 형이 지난 번에 정도니까요. 그때 사실 장 형을 없애려는 계획을 세운 그룹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한국측의 대리인으로 장 형을 선택한 것은 찬성과 반대가 팽팽한 끝에 모종의 지시를 받고 결정된 것 같았습니다." "모종의 지시라면?" "감을 잡을 수 없지만 짐작컨대 이번 한국 진출에 자금을 댄 세력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쪽 신민회 자금 루트를 아시나요?" "모릅니다. 다만 신민회 간부가 더러 요정 출입을 한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요정이란 무슨 뜻이죠?" "일본 정치가들은 내놓고 그룹별로 요정 출입을 합니다. 요정 정치라는 말도 있잖아요." "정확한 증거나 상황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 느낌엔 정치적 음모가 숨어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그렇게 무리하면서까지 한국에 진출할 까닭이 없습니다. 언젠가 일본에 사는 외국인에게 들은 얘기가 있습니다. 일본은 약아서 경제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세계 침략 계획을 착실하게 수행 중이라고요. 옛날엔 직접 총독이 앞장서고 총칼로 침략을 했지만 이제는 창씨개명이나 군화발로 통치하지 않고 대신 경제인과 정치인을 통해 친일파를 양성하여 겉으로는 아무 표도 나지 않게 총독을 임명하는 수법을 쓴다고 말입니다. 특히 한국 같은 나라에는 옛날에 통치했던 환상이 아직도 일본인 머릿속에 남아 있어서 가장 실험성이 강한 "장인복 씨도 그런 걸 느꼈나요?" "그러니까 말씀 드리는 겁니다." "그 외국인 얘기가 일리 있는 얘기지요. 우리가 정신 바짝 차려야 할 얘기군요." 나는 일본에 갔을 때 의외로 나를 도와 준 인물이 많다는 걸 곰곰 되새기며 장인복이의 말을 들었다. 민지애가 흑장미와 연관이 있을 거란 생각을 처음부터 지우지 못한 것도 이제야 숙제가 풀리는 것 같았다. "만약 내가 일본까지 끌려가고 그들의 하수인이 될 수밖에 없다면 결국 내가 무슨 짓을 하게 됐을 것 같습니까?" 가장 궁금한 부분이었다. "글쎄요...... 여러가지가 생각납니다. 예를 들어 친일파를 욕하는 사람을 못살게 도와서 결국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일본 상품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일에 일익을 보태거나 일본의 간접침략에 방해가 되는 인물이 있으면 폭력으로라도 막아서는 일을 하게 됐을 거란 생각도 듭니다. 또는 마약 밀매나 처녀 수출 따위를 도맡는 배후 세력이 될 수도 있지요. 말하자면, 내 느낌이 맞아떨어진다면 친일 특공대 역할을 하게 됐을 거라 이거죠." "친일 특공대?" 나는 그 낱말에 움찔했다. 과연 내 자신이 민족의 자존심을 늘 생각해 왔는가 하는 데 대한 아픔도 생겼다. 그들의 앞잡이였던 장인복이 만큼 나는 우리 나라를 잊어 버린채 그냥 살아 왔는지도 모른다. 모릅니다. 고바야시도 모를 수가 있을 만큼 그들은 철저한 비밀 집단입니다." "어디든 쉴 만한 곳에 도착하면 그때 저 친구의 입을 열게 할 겁니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열게 할 겁니다. 그리고 장인복 씨 가족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협상을 할 겁니다." "고맙습니다." 장인복은 말을 더 이어 나가지 못한 채 부하들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개인적으로 불행한 사람으로 전락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를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가면 그의 일상은 풍족한 생활이 보장됐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비밀을 지키기 위해 배반자를 꼭 처단한다고 했을 때 단순한 암흑가의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으리라곤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일본이란 나라의 현장을 보고 온 나로서는 경제대국이란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어린 마음으로 일본이란 나라만 떠오르면 일본 국민 전체를 미워한 적도 있었다. 일본도 선량한 국민은 많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간접침략을 자행한 오명을 나누어 가져야 하는 것이다. 알 수 없는 나라. 이렇게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어쩌면 세계가 모두 다수의 보통 사람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굴러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입으로는 누구나 평화와 사랑을 부르짖으면서 행동은 그렇게 하고 있지 것은 힘이었다. 그러나 힘이란 또 어떤 괴물인지 나는 알고 있다. 힘은 누구나 갖고 싶은 것이고 힘을 지니면 누구나 변하는 게 자연의 법칙일지도 모른다. 물리적인 힘만 소유한 자들은 결국 이 지구덩어리를 멍들게 했다. 예수와 석가모니가 힘이 있었을까? 가장 힘없는 존재였으나 결국 가장 힘센 존재가 되었지 않은가. 그들은 물리적인 힘은 진정한 힘이 아니라는 걸 영원히 증명할 것이다. 한 시간 가까이 장인복은 그가 느끼고 본 얘기며 신민회의 움직임과 인적 구성 따위를 아는대로 죄 털어놓았다. 장인복의 추측은 비교적 공정성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있는 기회가 생겼고 일본 여자를 만나 동거생활을 하다가 빠져든 그 길이 한때의 실수였음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인질로 잡힌 자식을 구해 줄 것을 간청하고 있는 장인복의 솔직성을 나는 인정하고 싶었다. 거짓말로 얼버무리고 넘어갈 수도 있는 입장이었다. 그는 내가 묻지 않아도 자신이 그동안 나를 납치하기 위해 취한 행동을 소상하게 설명하기도 했다. 군대를 동원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총독을 파견하여 합병을 하는 따위는 수십 년 전의 얘기고 이제는 경제계와 정치계를 막후에서 조종하는 새로운 통치를 하려는 것 같았다. 하나님, 당신은 아십니까? 생각하는 거 아닙니까? 인류 역사를 훑어보면 약육강식이 판을 쳤습니다. 당신의 묵인 아래 이루어진 것이겠죠. 도대체 당신은 어떤 존재입니까? 인류를 정말 사랑하는 겁니까? 까놓고 말해서 하나님, 당신은 혹시 능란한 사기꾼 아닙니까? 당신은 이 세상을 사랑한다고 했지만 사랑의 증거가 뭡니까? 사람이 살아 있게 지구를 만들어 준 것만 봐도 사랑한 거라고 하겠죠. 그런데 그 지구 안에 사는 사람 꼴이 어떠한지 아실 거 아닙니까. 일본애들이 지금 장난하고 있는데 말릴 생각은 없으슈? 속아넘어가는 게 바보다 이거겠죠. 잘해 보슈.

[묘안당]

소설만화같이 잼나게 보았어요...캄캄한데서 바둑알로 네다섯명을 때려눞히는 만화...ㅎㅎ 표창이라도 수긍이 갈똥말똥할텐데...하여간 주인공이 살아야 하니까....알겠습니다...허긴 우리나라가 해방될때 일본이 망해 돌아 가면서 50년후에 다시 보자고 했다는데 소설이 나올 무렵이 50년째 되던해 였을테니까 그무렵 경제침략이라~온갖 추리력으로 우리들의 정신을 일깨워주는 소설 잼나게 보았습니다...물안개님 늘 수고 해주심에 감사합니다

[나리아리]

잘봤어요..

[미혜]

감사히 잘봤읍니다~!

[새처럼]

잘 봤습니다,, 감사 합니다,,

[그리운남촌]

잘 읽고갑니다~~

[김성갑]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