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신앙이 아닌 것이 기독교 신앙인 것처럼 판치는 매우 심각하고 위험한 신앙의 혼잡한 시대속에 아무런 분별없이 쉽게 빠져가고 있습니다.
<혼잡한 신앙세대>
우리 주변에는 드러나진 이단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들 보다 더 위험하고 무서운 것은 기독교 신앙을 혼돈케 하는 것들입니다. 실로 혼잡한 다원주의시대 입니다.
지금의 교계흐름은 사람들의 기대에 잘 맞게끔 만든 이교신앙이나 세상 인본주의 사상을 기독교 신앙에 접목시키고 관심과 호응이 좋도록 적절하게 혼합시킨 것들이 판치고 있는 시대 입니다. 그 중에 세계적으로 마치 신세대 종파운동처럼 확산되어진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적극적 긍정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이 땅에는 초교파 적으로 확산되어 설교강단에서나 신학교 교단에서나 세미나 및 임직식 등 여러 집회에서 반드시 나오는 주 강조 내용이 되어버렸습니다. 심지어 교회를 알리는 전단지나 전도지에 보면 안된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문제의 해결이요 성공의 비결인 저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지라는 내용이 나와 있음을 봅니다. 모두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보고 사고하는 방식을 가져야 좋고 잘된다고 강조함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 안에 확산된 적극적인 사고 방식의 주 내 용들을 살펴보면 다들 잘 알겠지만 이렇습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라. 안돼, 못해, 틀렸어, 불가능해 하는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라. 마음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라 그러면 이루어진다. 매사에 적극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라. 여기에 성공과 행복의 비결이 있다."
사실 이런 사고방식은 어떤 성질의 존재를 내표적으로 나타내는 인간의 사고와 인식에 대한 철학적 관점이고 개념인 것입니다. 문헌에 의하면 이런 식의 사고방식은 고대 동서양의 정신연금 수사들로부터 전승되었다고 합니다. 근대에 와서 이런 사고방식은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이나 심령과학과 동조를 이루고 의식 개발이나 의식 개조나 정신적 치료 방식으로 활용내지는 적용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것들이 기독교 신앙에 들어와서 그런 사고방식이 마치 매우 좋은 믿음의 자세요 마땅한 중심처럼 되어 버렸는지 그 요인을 찾아보면 기독교 지도자들이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자들이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기독교에 적용시킴으로 인해 큰 영향을 마치게 된 것입니다.
<적극적 사고방식을 신앙으로 끌너 들인 자들의 영향>
우리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이라는 책을 저술한 노만 빈센트나, 자기 안에 가능적 사고를 가짐으로 불가능이 없다는 로버트 슐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4차원의 세계라는 저술을 통해 긍정적 구상화를 강조한 조용기 목사를 잘 압니다. 무엇보다 대단하게 보이는 성공을 실재를 보여주는 이들의 영향이 적극적인 사고방식이 좋은 신앙이나 올바른 믿음의 자세처럼 널리 확산되어 받아드려지게 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올바른 진리의 신앙 지식이 없는 것이 큰 요인이겠지만...
이들의 저술한 책을 통해 이들이 강조한 내용들을 복음적인 입장에서 살펴볼 것 같으면 터무니없는 것들이 너무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긍정적이고 적극적 사고방식이 모든 것을 이루고 성공케 한다고 주장합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볼 것 같으면 노만 빈센트는 "습관적으로 당신의 마음을 점령하고 있는 사고방식이 당신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잠재력 있는 자신의 힘과 능력을 믿으며 패배와 절망을 가져다주는 부정적 생각을 버리고 확신과 실현에 찬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지라! 그러면 성공하고 행복해진다"고 그는 강조합니다. 그는 신앙도 자기능력의 수단이며 자기 개발과 자신감의 수단으로 간주하며 기도도 뇌 속에 있는 수많은 축전지 같은 잠재력을 불러 일으킨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로버트 슐러는 모든 성공의 비결이 가능적 사고 안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가능적 사고는 자기 사랑이나 자신감을 가지는데서 온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밉다고 하면 메아리쳐 돌아온다고 하며 그러나 나는 할 수 있다, 불가능은 없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가능적 사고라는 것입니다. 목회의 성공요인도 바로 긍정적인 사고에 달려있다고 합니다.
또한 조용기 목사(4차원세계)는 노만 빈센트와 로버트 슐러를 종합한 것 같습니다. 그의 주장을 보면 "누구나 자기정신 속에 생생한 상상을 하고 그것에 초점을 맞춤으로 그 실재를 낳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미래가 잉태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는 긍정적 구상화가 성공의 열쇠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노만 빈센트의 주장과 같은데 확신감으로 자세히 구체적으로 그림을 그리며 바라라는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신랑감을 구체적으로 그리며 상상하라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키, 학벌, 직장 등을 그려서 정해 놓고 기도하면.된다는 것이고 대학을 가기 위해서도 구체적으로 정해놓고 그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실현된다는 주장입니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그렇게 구체적으로 기도하라고 강조함을 종종 보는데 다 이런 영향 때문입니다.
또한 조용기 목사는 "인간은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3차원을 지배하는 4차원적인 영적 존재임으로 이런 자기 상상력을 통하여 자기 자신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더 좋고 성공된 실재를 낳기 위해서는 매사에 "긍정적 사고방식 또한 긍정적 언어를 품고 사용하고 긍정적 구상화를 구체적으로 품으라는 것입니다.
이들의 주장을 종합해 보면 통일적으로 적극적 사고방식이라는 인간의 의지적 사고력에 중심을 두고 있음을 봅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할 수 있다라는 인간의 긍정적, 적극적 사고방식을 성공내지는 자기 기대의 실현에 만능으로 보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런 적극적 사고방식이 무한한 잠재력, 정신력을 일으키고 또한 하나님의 능력을 불러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고 문제삼아 구분해야 할 것은 이들은 이런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기독교 신앙에 적용시키거나 아니면 신앙과 같은 동류로 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주권이 없고 죄아래 있는 인간을 모르는 발상>
그렇다면 나는 할 수 있다라는 긍정적 의식, 생각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면 우리는 연약하고 한계를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서나 주변 많은 사람들로부터 생각대로, 마음대로 안된다는 얘기들을 자주 들어 봅니다. 보통 사람들치고 다 잘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다가 안되고 막히고 하니까 좌절하고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죄인 된 인간들의 상태는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허용작정 안에서 그것도 사탄의 지배하는 죄의 본성이 원하는 대로 따라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작정하시고 주권적으로 이루어 가는 하나님의 역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세상사람들도 그 굴레는 벗을 수 없고 특히 하나님 백성 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 속에 구원으로 이끄시는 주권적인 섭리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더 자기 원대로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도록 성령의 소욕이 거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갈 5:17)
누가복음 12:15-21절에 보면 예수님의 한 부자 비유가 나옵니다. 그는 많은 것을 수확하여 큰 창고에 가득 채우고 매우 긍정적인 사고 방식을 말합니다. "내 영혼아 여러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때 하나님이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하십니다. 또 야고보서 4:13-16절에 보면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아무도시에 가서 일년을 있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고 마음먹고 적극적으로 힘쓰며 기대하는 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런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분명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긍정적으로 마음먹고 그것이 그대로 실현된다고 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가장 적합한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백성이라면 마땅히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가 죽든지 살든지 하고 이것저것도 하게 된다고 고백해야 할 자들 아닙니까? 그런데도 인간의 의지인 적극적 사고를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여긴다면 허탄한 자랑이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높게도 하시고 낮게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는 하나님이 주권 적인 역사를(삼상2:6-8) 무시, 외면하는 악한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오히려 그런 우리 자신을 부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분명 말씀했습니다(마16:24). 이 말씀이 나오게 된 동기는 베드로가 자기 인간의지를 굽히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향해 "사단아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라고 책망하시면서 그런 자신을 부인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의지가 약하고 부정적이였던 우리 믿음의 조상들>
우리가 잘 아는 모세를 그런 사고방식으로 따져 본다면 그는 매우 부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할 애굽으로 가라고 명하셨을 때 그는 여러 번 못한다고 자신은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모세의 고백은 자신을 아는 고백이었고 그런 것은 자신이 할 수 있다라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될 일이 아님을 아는 자였던 것입니다.(출4:1~14)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도 애굽에서 왕자로 젊었을 때에는 자기 민족의 구원에 대해 나름대로 비전을 가지고 매우 적극적으로 덤벼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수포로 돌아가 버렸고 이젠 양이나 돌보는 그저 힘없는 한 늙은이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런 그가 할수 없고 못한다고 부정적으로 말했지만 하나님이 하셨고 그를 그렇게 쓰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고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져가는 하나님의 일이오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주께 사로잡히기 전에는 자기 일에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도 열심했던 것은 다름 아니라 교회를 핍박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깨닫고 나서야 자신은 알지 못할 때 육신의 일에 누구보다 더 열심하는 자로 그것은 오히려 훼방자요 교회를 핍박하는 자였음을 고백하면서(갈1:13~14,딤전1:13)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그런 자기 의지나 육신 중심의 생각을 주 앞에 쳐서 굴복시켜야 된다고 강조한 것입니다.(고전9:27)
그래도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주장하는 자들은 부정적인 사고를 절대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결국 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은 두 가지 문제를 낳게 됩니다. 그중 하나는 하나님 앞에 인간들의 의지, 즉 육체의 소욕인 자신들의 욕망적 기대나 소원에 대한 중심이나 사고방식을 버리거나 부인하지 않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어지길 바라는 신앙은 없고 대개가 하나님의 능력과 그 도움을 통해 자신의 기대나 소원성취를 바라고 적극적으로 잘되고 만사형통하기만 구하는 이교도적 신앙과 같은 중심을 찾게 하고 자신의 중심과 원하는 세상중심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신앙이 방해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많은 교인들의 눈을 분별력 없게 만들고 하나님 말씀으로 세상을 보고 죄인되고 죄의 본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부정스런 인생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세상은 분명 죄아래 있어 형벌속에 사는 존제들입니다. 모든 것이 잘되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방향으로 가게 되며 우리 인생은 죄의 본성으로 타락하여 사탄의 근성의 지배로 그 마음이 원하는 욕망을 따라 사망의 삶을 살아 가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고 했습니다.(엡2:1~3) 구원받은 우리에게도 아직 육체의 옛사람 근성이 남아 있어 아직도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의 모습이 작용하고 있는데 바로 그런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하고 하나님과 원수 된다고 했습니다(롬8:6-7). 그런데도 이런 우리 육체의 소욕이 앞서는 중심을 부인하지 않고 적극적으로만 생각하고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솔로몬을 통한 하나님 말씀의 계시는 해 아래 인생의 모든 수고가 헛되고 헛되다고 했습니다(전1:2). 꿈이 많으면 헛된 것도 많다고 했습니다. 세상사는 인생은 일평생을 어두운데서 먹으며 번뇌와 병과 분노가 저에게 있다고 했습니다(전5:17). 또 시편기자는 여호와께서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신다고 했고(시94:11) 사람들은 헛된 일에 분요하며 그림자같이 다니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른지 알지 못한다고 했고(시39:6) 또한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증거했습니다(렘17:9).
이렇게 세상과 인생에 대해 말씀의 시선으로 바로 볼 줄 알 때 우리는 부정되고 불의하고 악한 세상과 죄로 버림받아 보이는 잠시적인 세상중심으로 살려는 인생들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그러나 아직 그런 육체의 욕망으로 살려고 하나님을 그렇게 찾으려는 부정되고 불신앙적인 모습이 있는 우리 자신들을 돌아 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부정과 불의를 긍정으로 보면 안된다!>
오늘날 부정적으로 보지 말고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몰지각한 지도자들로 인해 한국교회 교인들은 맹신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부정된 자들이나 부정된 가르침이나 부정된 모습으로 가는 교회들을 부정적으로 분별하지 못하게 하고 그런 잘못된 것들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좋게 적극적으로 보라는 괴리나 엉터리 논리에 빠져 거짓과 부정과 잘못된 신앙과 잘못된 교회의 모습들까지도 좋게 보고 긍정적으로 여기는 맹신적인 상태로 가는 위험에 처해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그릇의 겉만 깨끗게 하고 무덤에 회칠하려하고 높은 자리나 사람들에게 칭찬 받으려고 외모나 외식적인 행위로 꾸미려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그러나 그들 속에는 온갖 불법과 외식과 더러운 것이 가득하니 이들을 조심하며 저희를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23:25:28) 또한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든 당시 부정한 교권주의자들과 하나님의 집을 이용 불의한 유익을 위해 장사하던 자들을 내어 쫒으신 것입니다.(마21:12~13) 예수님의 말씀의 교훈은 이런 거짓된 선지자, 거짓된 신앙, 사람들에게만 잘 보이려는 잘못된 외식적인 신앙들을 잘 분별하여 피하고 멀리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부정한 것들을 부정한 것으로 보고 분별하여 멀리할 수 있는 우리의 말씀중심의 기준과 올바른 분별력을 가져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일부 잘못된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외형중심의 교회나 자기 욕망을 앞세우는 성공중심으로 하는 목회에 대해 건전한 비판을 못하게 하고 분명 잘못되고 부정되는 것인데도 그렇게 지적하면 왜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냐며 바로 보는 입장을 못 가지게 잘라버리는 의도를 가지고 적극적인 사고방식만 자꾸 강조하는 자들도 종종 있음을 봅니다.
이렇게 적극적인 사고방식은 주 안에서 바르게 찾아야 자신의 모습을 오히려 못찾게 하며 또한 전적인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위험한 인본주의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인본주의가 신앙처럼 교회에 들어와 미혹하며 혼란케 하는 요소들이 있음을 보고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고 경계를 시킨것입니다(골2:8).
적극적인 사고방식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또한 기독교 신앙에 합하는 자세도 아닙니다. 물론 그것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일반적인 세상 삶에 대한 사고방식으로는 어떤 도움이 되고 의식이나 생각을 바꾸어 주는데 효과가 있을 수 있어도 구원을 이루는 기독교 신앙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철학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세상사람들의 삶의 한 사고방식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생각이라도 좋게 하고 살아보자는 한 주의요 주장에 불과 합니다
구원을 이루는 기독교 신앙은 적극적인 사고방식이 없어도 복음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되는 것이며 아무리 부정적인 사고방식과 비관적인 상태에 빠져있어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택하시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의"의 역사속에 하나님의 주권대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참 신앙은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다고 되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다고 안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서 언약된 은혜로 만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 된 우리의 삶의 모든 것도 이런 인간적인 사고방식에 따라 되고 안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 속에 되어짐을 알고 교회안에 들어와 건전한 복음신앙을 혼돈케 하고 하나님 주권주의 신앙을 방해하는 이런 인본주의 요소들을 분별해 내야 할 것입니다.
교회된 우리가 이제 가져야할 사고 방식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복음적인 사고 방식입니다. 즉 복음에 합당한 신앙으로의 전환입니다. 진리를 깨닫고 그것으로 모든 것을 보면서 사는 방식이요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사는 중심입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복음적인 입장을 분명히 가지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