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에 대한 나의 소감
정홍택
신문을 보니 이 곳 필라델피아의 외화를 보여주는 미국 영화관에서 한국 영화 <시>를 상영한다는 광고가 났습니다. 얼마 전 내가 처음 보고 참 재미도 없고 골치아픈 영화라고 투덜거렸던 생각이 나서 미국 사람들이 과연 이 영화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을까 걱정부터 앞서더군요. 영화 경력을 보면 2010년 칸 영화제를 비롯하여 한국 최우수 영화 대상을 휩쓸었고 주인공 미자로 분한 윤정희씨가 이런 저런 수상을 많이 하더니 각본을 쓴 김기덕 감독은 청룡상을 거부해 또 한번 유명세를 타기도 했지요.
영화를 보고 났을 때의 실망감이 생생하게 생각납니다. 감독이 왜 영화 제목을 <시>라고 했는지 이해도 되지 않고 뒷맛이 영 개운치가 않았습니다. 제목에 끌려서 시적 분위기를 기대하며 시간을 쪼개 보았는데 영화의 상황이나 전개가 제 기대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그랬나 봅니다. ‘젠장 이게 무슨 영화야’ 하며 공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는데 마음의 눈도 같이 열렸습니다. ‘아, 그렇구나!’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마음에 정리가 되면서 우선 이 영화에 나오는 3代(Three Generation)가 떠 올랐습니다.
노인 세대 — 한 5–60년 전 한국이 잘 살기 전까지만 해도 여느 집이나 안 방에서 할아버지가 "어험" 기침하시면 식구 모두가 조용해 지며 안채 쪽으로 귀를 기울였죠. 그건 할아버지가 무서워서라기 보다 경외의 마음에서죠. 영화 속에서의 이 노인은 반신불수의 몸을 아들 집에 얹혀살고 있는데 할아버지로서의 위엄도 후손들에 대한 사랑도 찾을 수 없고 얼굴에는 오직 심술과 이고(Ego)만이 가득합니다. 그의 유일한 희망은 죽기 전에 섹스 한번 멋지게 해보는 것으로 몰래 바이아그라를 장롱 속에 감추어 두고 있습니다. 섹스 파트너 후보로 목욕도우미 미자(윤정희 분)를 마음에 두고 기회를 엿보다가 은밀히 간청을 합니다.
아버지 세대--옛날에는 위로는 부모님 모시고 아래로는 자녀들 돌보며 살았던 이 중심 세대도 어지간히 변했습니다. 고등학교에서 남학생들이 집단 성추행을 해, 피해 여학생 아네스가 자살한 사건이 터지자 학교 선생들은 선생대로, 부모는 부모대로 쉬쉬하며 무슨 수를 써서든지 이 위기에서 빠져 나갈 궁리만 합니다. 돈으로 피해자 가족의 입을 막고 기자의 눈을 가리려는 은밀한 숙의만이 계속됩니다. 피해자에 대한 연민의 정도, 사회정의에 대한 의협심도, 애들 잘못 가르친 것에 대한 반성 같은 걸 전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학교 당국과 부모들의 반응을 영화는 아무런 비판 없이 담담히 보여 줍니다. 가난한 농부 딸 피해자의 초라한 장례식에는 미자 혼자만이 도둑같이 왔다 갑니다.
아이들 세대--학생들이 작당하여 교내 과학실에서 여학생 한 명을 계속 성추행하여 자살에까지 몰고 갑니다. 그 가해 학생들 중의 한 명이 미자의 손자입니다. 미자는 피해 여학생 아네스의 사진을 손자의 책상 위에 놓고 그 애의 반응을 주시합니다. 죽은 애 얼굴을 보면서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무표정, 액자의 얼굴이 안 보이게 뒤로 돌려놓지조차 않는 이 아이를 보며 미자는 절망합니다.
미자는 이 사회에 동화할 수도 없고 영향을 미칠 수도 없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여기서 살아 가려면 옛날의 기억을 하나 하나를 잃어가는 길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의사로부터 알츠하이머 증상이 발전해 간다는 진단결과를 듣습니다. 길에서 우연히 김용택시인의 시(詩) 강좌 학생 모집 광고를 보고 수강신청을 합니다. 강사 김 시인은 시(詩)야말로 이 시대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는 길임을 학생들에게 가르칩니다.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내듯 시(詩) 강의로 학생들의 마음 속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시심(詩心)을 끌어 올리려 합니다. 그는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한 사람씩 돌아가며 얘기를 하게 해 그것을 시 쓰는 마음에 접목시키려 합니다. 학생들은 끝내 마음의 우물에서 시심을 담아 내지 못하고 대신 쓰레기 음담패설만을 길어 올립니다.
모든 것에 절망한 미자는 마침내 길을 떠납니다 아네스가 자살한 다리를 향해서. 가는 도중에 시 강좌 교실에 들려 김 시인과 학생들 앞에서 자작 시 <아네스의 노래>를 낭송합니다. 미자가 낭독하기 시작한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한가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소리 들리나요
……………
후반에 가서는 미자 대신 아네스의 목소리가 대신해서 시를 끝냅니다.
……………………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 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교실을 나와 뻐스를 타고 시내가 흐르는 그 다리에 도착합니다. 난간에 서서 물끄러미 아래를 내려다 보는 미자. 시냇물은 예와 같이 조용히 흐르고 있습니다. 미자는 자기가 이 세상에서 마땅히 서야 할 곳을 찾지 못한 또 하나의 아네스임을 발견합니다.
이 영화에 대해 나는 내 나름대로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창동감독은 이렇게 우리에게 묻고 있구나.
“윤리가 무너지고 도덕이 상실되며 권위가 없어진 이 시대에 우리가 설 곳은 어디인가?"
“과연 우리는 다가 올 미래에 더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는 기대를 걸 수 있을까?"
영화 <시>를 보고 나서 새삼 주위를 둘러 보았습니다. 모두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 있죠. 마치 어느 행성에 갔다가 오랜만에 돌아온 사람처럼 말입니다. 내가 입은 옷도 하는 말도 주위 사람들과 다르게 시대에 뒤진 것 같았습니다. 또 하나 깨달은 게 있었습니다. 윤정희가 영화 속에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모자랑 옷을 입고 어설프게 연기한 것이 사실은 이런 마음의 상태를 보여주려는 감독의 의도가 아닌가 하는 것이죠. 그러자 또 한 가지가 꼬리를 물고 나왔습니다. 영화 첫 장면, 아직도 낭만을 캘 수 있는 개울물 가에서 애들이 놀고 있을 때 어떤 물체가 흘러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점점 다가 와 클로즈업 되어 보니 시신이었고 이 시신을 설명이라도 하듯 불쑥 나타난 <시>라는 타이틀. 시가 죽어 있는 이 시대를 영화는 처음보터 얘기하고 있었구나
재미 없는 시대에 살면서 재미 없는 영화를 보고 나는 머리도 식힐겸 밖에 나가 걸었습니다. 푸르른 하늘에는 아직도 흰 구름이 흐르고 있었고 길가 검은 나무들은 봄을 맞아 물이 오른듯 생명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곧 이 나무들에 푸른 잎이 돋겠고 꽃이 피고 새들은 다시 지저귀겠지요. 그래, 나도 한번 내 마음에 두레박을 내리어 보자. 걷던 내 다리에 힘이 솟아 나는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첫댓글 동창회지에 선배님이 쓰신 이 글 읽고 그렇쟎아도 혹시 카페에 안 올라오려나 하고 기다렸습니다.
정말 현 한국사회의 도덕불감증과 변태적인 가치관을 잘 꼬집은 이야기 같습니다.
선배님의 글을 읽은후 가위눌린 것 같이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었읍니다.
오늘 비데오샵에 나가서 혹시 있으면 사다가 봐야 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이 영화를 보셨나요? 이런 영화는 재미보다는 의미를 찾으며 대사 하나하나, 장면 하나하나 음미하며 보면 그런대로 좋습니다. 제가 처음 보았을때의 잘못을 피하시라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시에 나오는 미자. 사고뭉치 손자와 자살한 여자 아이 .. 남의 일인줄 알았던 미자가 손자를 통해서 보는 세상이야기. 시를 배우는 60세 여노인의 이야기는 별것이 아니지만 그녀는 치매 초기다. 어려운 내용도 아니면서 젊은이들의 성교육부재.. 무엇인가 기분이 얹짢았다 "시" 라는 제목은 미자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시문학을 배워서일까? 돌보는 남자에게서 돈을 받아내는일은 재미있는 일중에 하나라고 할까? 하여간 이창동감독의 "밀양" 이라는 영화도 용서라는 태마를 다루었던것으로 기억한다 용서를 밀양에서 말하고 시에서도 피의자의 가족이 피해자의 가족을 용서할수 있을까? 영화를 보고난후 입맛이 많이썼다
한국에서는 기독교가 너무 성해서 그런지 '용서'라는 말이 너무 남용되는 것이 이창동감독이 밀양에서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 믿고 나서 아들을 죽인 사람을 교도소에 까지 찾아가서 용서해 주려고 했는데, 면회하고 나오며 까무래친것 왜일까요? 시선을 돌려서 일본은 가만 있는데 우리만 용서 어쩌고 하는건 또 무업니까. 용서란 잘못한 사람이 회개하고 가해자에게 와서 빌 때 가능하지 피해자가 먼저 용서 어쩌고 하면 이건 또 하나의 말 앞에 놓은 마차'가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지금 재난에 처한 일본을 돕는 것은 다른 차원에서 (과거지사에서 떨어져서) 우리 민족의 인류애의 표현이고요.
밀양에서 신애의 경우 자기가 먼저 용서하기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그 원장을 용서하였다는 말에 분노를 느끼지요 인간의 연약함이지요 그녀가 택한 하나님에 대한 복수를 작심하고 교회와 성도들을 훼방하는 모양은 현재 교회의 모습이지요 부끄럽게도요 밀양에서는 신교를 그리고 시에서는 구교를 ...밀양을 보고서도 시를 보고서도 그리스도인의 참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물론 그런 각도에서 안볼수도 있지만..저는 지진 방송과 더부러 당황스런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쳐가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올린 글처럼말이야요
일본에 대한 문제.. 저는 일본에 대해서는 악한 성품으로 돌아가요 지금도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하는 정신대 근로자 할머니들에게 아직도 사과 없는 일본 정말 치가 떨려요. 그런데 이번 지진으로 고생하는 그들에게 보여주는 따뜻한 손과 그들이 아직도 사과하지 않은것을 다 용납하는것은 아닙니다 일본이라는 나라를 용서가 안됩니다 그들이 독일처럼 사과하여 오지 않는한..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용서 하라 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이스라엘 에루살렘 백만인 학살박물관에 써있는 말 <용서 하라 그러나 절대 잊지마라 잊으면 다시 당한다>라는 유대인들의 각성의 방법 .. 저는 지금 일본이 용서도 안되고 잊어지지도 않으니 ..
일본인에 대한 생각에 동감합니다. 조금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잠간 이런 생각도 해 보았지요. 일제 36년, 한국전쟁, 남북분열, 중국의 공산화, 남경사건 등 등 일본은 이제까지 그 수많은 아시아 국가들에게 피해만 주었고 특히 한국 전쟁에서는 큰 이익을 얻었지요. 우리 아시아인들이 당한 그 숫한 피해가 얼마나 아픈건지 이제 그들이 조금은 알게 되지 않았을까 하고요. 우리가 꼭 복수하겠다고 벼르지 않아도 용서하겠다는데 왜 용서를 빌지 않느냐고 득달거리지 않아도 사필귀정, 세상은 길게 보면 또 제가 한 일은 제가 받게 되더라구요.
선배님께서 내리신 결론 “윤리가 무너지고 도덕이 상실되며 권위가 없어진 이 시대에 우리가 설 곳은 어디인가?"“과연 우리는 다가 올 미래에 더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는 기대를 걸 수 있을까?"
에 공감합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이 결론이 옛날로 부터 오늘에 이르기 까지 물러나는 세대가 새로 등장하는 세대에 대해 품었던 생각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언젠가는 끝이 오겠지만 그 때 까지는 이런 질문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그런대로 굴러 가겠지요, 저 역시 영화의 주인공 미자 처럼 세상에 동화될 수도 없고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도 없는 존재이지만 제게 주어진 하루를 열심히 살아 봐야 하겠습니다.선배님! 감사합니다.
맞아요. 어떤 글에서 공자님도 그 시대의 젊은이들에 대해 상심하며 걱정하는 글을 남겼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이제 조금 달라요. 그 시대의 100년 변화가 우리 시대는 1년도 안되어 나타난다고 하니 우리가 걱정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요. 세상 일엔 우리가 할 수 있는일이 있고 없는 일이 있으니 잘 구분해서 할 수 있는 일 우리에게 주어진 이 하루를 잘 살아갑시다.
선배님의 글 읽고나니 이 영화 보고싶어 지네요.
이창동 감독이 장관이 되기 직전 그의 영화가 팜스프링스 영화제에 출품 선정되어 영화제 주최측에서 감독과 시사회 관객의 대화를 위해 통역할 사람을 구한 적 있었어요
우리나라 영화니까 봉사하는 셈치고 제가 자원해서 이 감독과 반나절을 같이 보낸 적 있지요. 구수하고 재밌고, 영어도 통역 뭐 별로 필요없을 정도로 잘 하던걸요. 영어교사 였대요.
전 한국문화와는 동떨어진 채로 산 지가 오래되어 이창동이 누군지도 모르고 겉으론 쪼까 촌스러워 보이는 사람도 영화감독이구나 그랬는데...그 영화제 끝나고 돌아가서 곧 장관이 되었길래 깜놀! ㅎ
그러니까 그 사람이 욘사마 처럼 배우가 되지 않고 감독이 되었지요. 사람 중엔 겉이 예쁜 사람, 속이 더 꽉 찬 사람들이 있쟎아요. 예쁜 사람들이 이 사람 앞에선 꼼짝 못하고 하라는 대로 하지요. 이 분이 각본도 쓰고 감독도 했죠. 그런데 사상이 쪼끔 좌향이죠. 좌향이라기 보다는 무엇에서든 반항하고 전향적이라고 해야 되겠지요. 하여간 김영신동문, 굉장하네요. 영화제에 나가서 통역도 하시고. 만세. 나도 깜놀.
聽子가 없은 시를 쓴다는 것은 話子에게 가장 괴롭고 가슴 아픈일입니다 그러나 청자의 수준이 낮아 시가 외면 당할 때는
문제를 다릅니다 한 사람의 청자가 있더라도 시를 써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시와는 별도로 도덕성에서 결론을 내리셨군요
“윤리가 무너지고 도덕이 상실되며 권위가 없어진 이 시대에 우리가 설 곳은 어디인가?"
한국에서 도덕이 떨어진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황폐된 땅에서도 자라는 나무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도덕성을
갖춘 소수 젊은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에 의해 나라가 자랄 수 있다는 게 저의 외람된 결론입니다
한 사람의 청자가 없더라도 시는 써야 합니다. 마치 반 고호가 한 사람도 사 준 사람(한 사람 있었던가?)이 없더라고 계속 그린 것 처럼. 글이 있고 붓이 있어 남길 수 있다면 쓰셔야죠. 하여간 여기 이 카페에는 수준 높은 청자들이 수두룩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전 도덕성도 낭만과 연결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이 영화도 시와 우리 가슴에 있는 도덕이 부부처럼 동거한다고 생각한 거는 아닐까요? 도덕성을 갖추 소수의 젊은이들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이창동감독이 디오게네스가 대낮에 등불을 들고 다니듯 이 영화를 만든게 아닐까요. 로봇은 아무리 사람과 똑 같이 만들어 졌어도 도덕성도 없고 낭만도 없죠.
자라나는 세대 의 도덕성을 건전한 가정교육 과 진정한 기독교 (제경우 엔) 정신 으로 교화 시켜야 한 다고 생각 합니다. 아직도 미국이 건재한 바닥 에는 기독교 사상 으로 어릴때부터 몸에 배어 자라난
말없는 대중 (Silent majority) 이 열심히 자기들의 분야 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 이라고 생각 합니다. 특히나 불우한 이웃 을 돕는것 은 우리처럼 힘들여 애써서 하는 일이 아니고 당연 히 누구나 해야 하는 일로 여기는 국민 이라 여겨지기 때문 입 니다, 대통령 의 하는 일이 마음 에 안 들 어도 그를 위 해 열 심히 기도 하는 성도들 을 많이 보 아 왔읍니다.
동감입니다. 저도 똑같은 내용의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대통령 선서식때 성경에 손을 얹고 서약하는 전통을 보면서도 저 전통이 흔들리지 않는 한
미국은 최강국일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몇 년 전부터 그걸 트집잡는 political correctness의
목소리가 커지길래 좀 걱정했었습니다. 저는 기독교 신자가 아닌데도요.
같은 맥락으로, 이민 온 사람들이 미국의 좋은 점 때문에 이민 왔으면서
이민 온 후에는 소수민족의 권익이나 평등의 보장이란 명분으로 그 좋은 점의 뿌리를
뽑아버리기에 앞장서는 걸 보면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만세. 동감입니다. 미국의 진정한 힘은 바로 이런 Volunteer적 정신에 있고 이것은 기독교에서 나왔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영화 ":시"를 찾아서 보겠습니다.
보세요. 그리고 감상을 적어 주세요.
이 영화 다운만 받아 놓고 멀리 치워 놓고 있었는데, 언제 시간되면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전 보면서 동시에 공감을 하고 느끼는 영화를 좋아하지, 보고 나서 며칠이 지난 다음에 아~ 이 영화에서 감독이나 작가가 전하려는 메세지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영화는 좀 꺼려집니다. 어차피 영화란 많은 관객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큰 돈을 들여 제작하는 것인데, 메세지를 전달하는 방법이 너무 현학적이거나 철학적이면 많은 사람들이 그 뜻을 이해하기 힘들죠.
책은 읽다가 너무 어려우면 잠시 덮어 두고 생각하며 글쓴이의 의도를 생각하다 다시 집어 들고 읽으면 되지만 영화란 장르는 한 번 시작하다 내용을 이해하기 너무 어려워도 중간에 멈추고 생각하다 다시 보기도 힘든데다가, 이해하기 어려우면 중간에 그냥 때려치우기 쉽상이고 다시 거들떠 보지 않게 됩니다.
이번 주말엔 깐느 영화제 대상을 탄 신과 인간 (Des hommes et des dieux)을 보려 합니다.
나도 그 의견에 동감합니다. 영화나 소설은 우선 재미가 있어야 하고 재밋게 보면서 의미를 같이 터득하면 금상첨화겠지요. 너무 재미만 쫒다 보면 금방 보고 잊혀지는 멜로드라마에 치우치게 되고 가끔 이런 영화를 보면 그 땐 좀 지루하지만 그 뒷맛은 오래 갑니다. 우리가 어렸을땐 세상에 설탕만 있으면 됬지 왜 소금이 있을까 혼자 생각했는데 철이 들고 보니 우린 쓴 것을 더 찾게 되지요. 소금, 커피, 담배, 그리고 지금은 커피 중 커피 에스프레소. '시'는 말하자면 에스프레소. 애들은 가라.(농담)
정홍택 동문님 제가 어쩌다가 이 영화를 못보아 아쉬웟는데 이렇게 세밀히 묘사 해주셔서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본것 같습니다 히 간파 한것 같습니다 .3세대간 가치관의 불협화음 ...한국에 사는 우리들은 젊은 세대들의 자기 중심적 사고 방식에 아연 실색하며살고 있답니다 50대 아들들은 졸아 들어서 대응도 못하고 .가슴앓이를 하는 노년들이 너무 많답니다
어쩜 동문님의 해설이 더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의 의중을 정
그들의 태도에 타이르지도 못하고 .. .좋은 예로 대학물을 먹고 남편이 곧잘 나가는 직장에 있는 며느리들은 시어머니와 함께 산다면 이혼하겠다 고 엄포를 놓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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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걸요. 좋은 영화나 감독은 영화 속 장면이나 대사에 여러가지 의미의 물건이나 말을 교묘하게 집어 넣지요. 술레잡기 처럼 찾는 재미도 많지요. 한번 더 보면 또 더 많은 것을 찾을 것 같습니다. 가슴 앓이 노년들이 많지요. 제 주위에도. 공자님도 종시속이라고 했지요. 어쩝니까. 요샌 아들들이 대 놓고 엄아한테 얘기한데요. 자기 마누라 신경 자극하지 말라구요. 곱게 늙는 법의 책을 몇권 읽으니 우선 놓는 연습. 자기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안주하고 애들은 가끔 찾아가서 해줄것 해 주고만 오라고 하데요. 이건 외국도 마찬가지 같습니다. 최근 독일 영화 '사랑이 남긴 것들'을 보았는데 그 곳 늙은이들도 같아요. 자식들이라고 부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