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녀 여사(1893~1975)】 "봉오동 병참대장이자 독립군의 어머니"
봉오동 기지 만든 최운산 장군의 부인독립군의 딸로 14살때 결혼해 안살림‘재봉틀 부대’ 꾸려
수천명 군복 제작애국청년들 식자재 마련·공급 책임도
할머니 김성녀(1893~1975) 여사는 독립군의 후손이자 아내이자 그 자신 독립운동가였다. 1960년 찍은 가족사진, 뒷줄 왼쪽부터 큰오빠 최윤주·아버지 최봉우·어머니 차연순·둘째동생 최형주, 앞줄 왼쪽부터 큰할아버지 최진동 장군의 손녀 최영미(미국 거주)·최성주(필자)·할머니 김성녀·둘째오빠 최흥주. 최성주 주주통신원 제공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이미 독립군의 딸이었다. 그가 어린 시절 독립운동을 하고자 러시아로 건너갔던 아버지와 오빠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할아버지 최운산 역시 청나라와 국경분쟁 때 무력 충돌을 불사했던 민족주의자 최우삼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런 두 사람의 혼인은 운명으로 맺어진 역사적 부름이 아니었을까.
14살이던 1907년 혼인과 함께 신한촌 봉오동 건설에 참여한 할머니는 남편이 마적으로부터 조선 동포들을 보호하고자 100여명의 봉오동 사병부대를 창설하자 군부대의 안살림을 책임졌다. 애국청년들이 수백명으로 늘어나 봉오동 숲을 벌목하고 새로운 연병장을 만들 때도, 베어낸 나무로 병사들이 머물 대형 막사를 지을 때도, 자택 둘레에 거대한 토성을 쌓고 사방에 대포를 배치해 1915년 본격적인 독립군기지를 완성할 때도 매순간 함께하며 아버지와 오빠를 돌보듯이 독립군들의 일상을 보살폈다.
할머니는 북간도와 연해주의 모든 독립군이 힘을 합쳐 통합독립군단 ‘대한북로독군부’를 조직할 때 8대의 재봉틀을 마련해 수천 독립군의 군복을 제작했던 ‘바느질 부대의 대장’이었다. 군복을 넉넉히 만들어둔 덕분에 봉오동전투 때 허수아비에게 입혀 일본군의 눈에 잘 보이도록 산 정상 쪽에 배치하는 위장작전도 쓸 수 있었다. 또한 봉오동 주변에 분산 주둔한 각 연대로 간장·된장·고추장까지 모든 식자재를 아낌없이 배급한 ‘손 큰 병참대장’이었다. 봉오동에는 어떤 위기에도 물러섬 없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던 ‘여장부’ 김성녀와 부녀자들이 있었다. 1919년 3월26일과 5월18일 최 장군과 형제들이 왕청현 백초구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했을 때도 할머니는 여성들을 이끌고 동참했다.
“우리 독립군에게 밥을 해주시고, 독립군들의 군복을 지어주셨고, 독립군들의 모든 살림살이를 도맡아 해주신 이 분이야말로 진짜 훈장을 받으셔야 할 독립군이십니다.” 1960년대 초, 최 장군의 부하였던 한 독립군이 할머니를 찾아와 인사를 드리며 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