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도 다카토라, 충무공을 잘못만난 처세의 달인
도도 타카토라 초상(사진=위키피디아)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는 이순신장군의 무패신화와 얽혀 임진왜란 당시 정말 주구장창 패전을 이어나간 일본의 수군대장이다. 이로 인해 국내에서는 항상 꽤 무능한 인물로 알려져있지만 사실 일본 내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일반 사병에서 다이묘까지 성장한 입지전적인 인물로 유명하다.
일본 내에서 도도 다카토라는 요즘으로 치면 이직을 상당히 많이 한, 철새 정치인으로도 유명하다. 평생 주군을 10명이나 갈아 모셨으며 그 스스로도 "주군을 7번 바꾸지 않는다면, 무사라고 말할 수 없다"란 말까지 남겼을 정도로 이직의 신이었다.
아시가루 창병에서부터 올라간 그는 끝없는 이직을 통해 녹봉 80여석 정도의 무장에서 다시 2만석 규모의 소영주로, 마지막엔 32만석 규모의 대영주가 됐다. 그러다보니 의리를 중요시여기는 사무라이들에게선 상당히 비난을 많이 받았지만 그 스스로는 "자신이 어느 편인지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야말로 지조"라며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계속 줄을 갈아타며 승승장구하던 그가 만난 최악의 숙적인 이순신장군이었다. 임진왜란에서 이순신장군을 만난 뒤 만날 때마다 모든 전투에서 참패했다. 심지어 도저히 질 수 없는 전투로 알려진 명량해전에서는 300여척의 함선을 끌고가서 13척의 이순신 함대에 박살이 났으며 그 스스로도 화살을 맞아 부상까지 당했다.
그렇다고 그가 수군에 완전히 무능했던 인물만은 아니었다. 이순신장군이 모함을 받고 잠시 삼도수군통제사가 원균으로 바뀌었을 때는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수군을 대파하며 큰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그도 이순신장군을 상대로는 도저히 승리를 거둘 재간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일본 사극에서도 극화시키기 어려운 인물 중 한명이라고 하는데 명량해전에서 너무나 큰 전력차이의 패배를 당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지략이 뛰어난 장수이자 평생 20개가 넘는 성을 쌓은 축성의 달인이며 모략, 군사 등 모든 면에서 능력을 발휘했다. 문학이나 다도 등에도 능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한편으로는 꽤나 소탈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다이묘가 된 이후 도미를 대접받은 자리에서 "출세를 하니 이런 진미도 먹을 수 있다"고 기뻐했다 전해진다. 당시에는 평민이라도 재산이 어느정도 있는 사람들은 흔히 볼 수 있던 도미에 감격한 것은 젊은 날 고생이 그만큼 심했을 것이란 추정이다.
훗날 메이지 유신 때 그의 이름은 또 한번 유명세를 타게 되는데, 그의 후손들이 결정적 순간에 막부군을 배신하면서 줄을 갈아타며 철새 이미지를 다시한번 부각시킨 덕이었다. 1868년, 도도 다카토라의 후예인 도도가문의 영지, 이세 번은 메이지 정부군과 막부군이 싸운 가장 큰 전투 중 하나인 토바 후시미 전투에서 막부군을 배반했다.
원래 에도 막부에서는 "전투가 일어나면 선봉은 히코네의 이이 가문과 이세의 도도 가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도도 가문을 신뢰했다고 한다. 그러나 형세가 불리해지자 잽싸게 막부를 배반하고 조정군 쪽으로 돌아선 것. 이를 두고 일본사람들 모두 제 조상 버릇이 어디 가나며 비웃었다고 한다. 결국 일본에서는 자신은 물론 가문까지 모두 철새 정치인으로 남고 만 셈이다.
그나마 도도가문은 타카토라의 마지막 자존심만은 지켜주며 또다른 일화를 만들었다. 메이지 정부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덤인 닛코(日光)의 동조궁(東照宮)을 공격하라 명을 내리자 "다카토라공이 이에야스께 입은 은혜가 있다"며 끝까지 거부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