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 진상조사와 전두환(全斗煥) 비리 수사는 군부를 자극하는 시한폭탄이 될 것인가. 한국은 과연 [쿠데타도 민중혁명도 불가능한 나라]가 되었는가. 군 수뇌부가 최초로 털어 놓은 [정치와 사회에 대한 별들의 솔직한 생각]
<1988년 6월 월간조선>
국민 없는 군대가 무슨 필요가 있소
{그때 군인 한 사람이 군경가족이 있으면 나오라고 했읍니다. 10여명이 우루루 몰려 나갔지요. 이들이 빠져나가자 군인들이 골짜기 주변을 뺑 둘러섰어요. 그때 내 옆에 있던 문판대씨(당시 40세)가 손을 번쩍 들더니 고함을 질렀읍니다. [대장님, 죽어도 말 한 마디하고 죽읍시다. 국민 없는 나라가 무슨 필요가 있소?] 군인들은 문씨를 향해 총을 놓았읍니다.
문씨는 맞지 않고 그의 열 여섯 살 먹은 딸이 맞고 쓰러졌어요. 이어서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들리며 총알이 우리를 향해 쏟아집디다}(생존자 임분이 할머니의 증언). 1951년 2월 국봇?의하여 집단학살 된 거창 양민 7백19명 가운데 세 살을 밑도는 젖먹이가 1백 명, 4∼10세 어린이는 1백91명, 11∼14세 어린이가 68명이었다. 즉, 14세 아래인 어린이가 모두 3백59명으로서 전체 피살자들의 꼭 절반이었다.
한국의 민군(民軍)관계사에 있어서 가장 큰 비극으로 꼽히는 거창 양민학살사건은 국군이 공비토벌을 하면서 공비출몰지구 안에 살던 양민들에게 분풀이를 한 사건이었다. 그 현장에서 터져 나왔다는 절규―{국민 없는 나라가 무슨 필요가 있소?}는 결국 {국민 없는 군대가 무슨 소용이 있소?}란 뜻의 항변이었다. 그러나, 4·19때 계엄군으로 진주한 국군은 이승만(李承晩)정권에 반대하는 시위자들을 방관함으로써 [국민의 군대]임을 실증하였다.
5·16 쿠데타 이후 군은 정치담당세력으로 등장, 국민과 직접 부대끼는 위치에 서게 되었으나 반군(反軍)감정은 심하지 않았다. 기자가 사병으로 복무求?1960년대 말 서울 시내버스 안내양들은 사병들로부터는 차비를 받지 않았다. 주는 차비를 슬며시 되돌려주는 안내양의 눈길엔 동병상련의 따뜻함이 있었다.
그때는 군복이 국민들을 상대로 어리광을 부릴 수 있게 하는 일종의 특권이었다. 열차나 시외버스에 무임승차를 해도 어른들은 눈감아 주었고, 휴가 나온 병사들은 [고생하는 졸병]이란 단 한가지 이유로써 가끔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칙사대접을 받곤 했다. 기자는 이 무렵 내무반 동료3명과 함께 휴가를 나와 나흘간 동해안을 무전 여행하였다. 손자를 군에 보낸 할아버지는 잠을 재워주고, 오빠를 군에 보낸 처녀는 감자를 삶아오고…
이런 식으로 푸짐한 대접을 받아 그때 쓴 여행경비가 1천 원에도 미달하였던 기억이 새롭다. 1972년 10월17일 10월 유신 선포를 계기로 국군은 계엄군으로서 다시 거리에 나타났으나 박정희(朴正熙)대통령에 대한 증오감만큼 군대에 대한 반감은 강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군대는 [독재권력의 하수인]으로 매도당하던 경찰과는 다른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었다. 1979년 10월16∼20일의 부마사태는 군에 대한 국민들의 호감을 반감으로 돌리는 최초의 계기였다. 당시 朴正熙 대통령은 초장에 과감한 진압을 한다는 방책을 써 공수부대 3개 여단을 내려보냈다. 이들은 개머리판과 몽둥이로써 시위자뿐 아니라 무고한 행인들을 무차별 구타하였다. 부산의 경우, 공수부대원들 에게 얻어맞아 다친 시민들의 약 80%가 머리에 상처를 입었다. 뇌좌상, 뇌진탕, 전두부 파열상, 후두부 파열상, 안면열창, 안면부 내부열창, 전신타박상, 뇌경막 손상….
부마사태가 호감을 반감으로
거창 양민학살사건 이후 처음으로 국민들은 살기 띤 군인들을 보았다. 적을 상대로 가장 어려운 전투를 하도록 훈련시킨 특수부대를 비무장시민들 사이에 풀어놓음으로써 국군이 국민을 상대로 작전(?)을 하는 사태가 빚어졌고, 그것은 일곱 달 뒤 광주에서 일어날 비극의 예고편이 되었다. 1979년 12월12일의 사태는 군부 내 유혈하극상을 연출하였다. 육군참모총장은 영장 없이 연행돼 물 고문을 당했고 그를 연행하는 과정에서 다친 한 대령은 하반신을 못 쓰는데도 소장까지 진급했고 전역 뒤에는 골프장을 선물 받았다. 이 사건은 군의 명령체계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국민의 뇌리 속에 심었다. 이듬해의 광주사태는 민과 군 사이에 협곡을 팠다. 이 사태를 취재한 몇 안 되는 경상도 기자 중 하나였던 나의 광주 사태론은 이런 것이다.
5·17계엄 확대 이후 광주에 투입된 공수여단은 부마사태 때보다도 더욱 과감하게 진압작전을 폈다. 시민들은 겁에 질려 달아났다. 그러나 공수부대원들의 가혹행위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보자 시민들은 쫓기던 쥐가 고양이에게 대어들듯 들고일어났다. 이런 동물적 분노가 광주사태의 기폭제였다. 광주사태를 무력으로 수습한 국군은 정권을 차지하였다. 국민들 눈에는 12·12사태도, 광주사태도 군사쿠데타를 위한 전 단계 상황으로 비쳐졌다. 세계에서도 유례가 드문 돈독한 한국의 민군 관계는 [상관에게 총질하는 군대] [국민에게 총검술 하는 국군]으로서 낙인찍히면서 급전직하의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군부의 개방 정책
1985년 6월 말 국회에서 광주사태가 재론돼 시끄러울 때였다. 서울 잠실의 큰 거리에서 한 청년과 한 사병이 싸우고 있었다. 몇 대 얻어맞은 청년이 돌아서 가다가 화를 참지 못하고는 갑자기 돌멩이를 들더니 그 사병을 향해 던졌으나 빗나갔다. 사병은 청년을 추격했다. 청년은 차도로 뛰어 들어갔다. 택시가 급브레이크를 밟았으나 청년을 살짝 들이받았다. 청년은 뒤뚱뒤뚱 일어서더니 앞으로 몇 걸음 옮기다가 자빠지고 말았다. 슬로우 비디오 같은 장면이었다. 이때 두 40대 남자가 달려가더니 그 사병을 붙들어 엉덩이를 걷어차고 뺨을 갈기기 시작했다.
어디서 모였는지 10여 명의 행인들이 우루루 몰려가 합세하여 그 사병을 집단 구타하는 것이 아닌가. 그 사병은 {졸병이 무슨 죄가 있읍니까?}하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국민들에게 어리광을 피울 수 있게 했던 군복이 어느새 증오심을 폭발시키는 징표가 돼버린 것을, 이 [작은 광주사태]를 목격했던 기자는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해의 6월 사태는 군에 대한 민의 거부감이 총체적으로 표출된 결과였다. 부마사태나 광주사태에 적용한 공식대로라면 수백 개 공수여단을 풀어놓아도 시원치 알았을 터인데 우리 국군은 굉장한 인내심으로 자제하였다. [또 다시 국군의 손에 피가 묻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군의 발목을 붙잡았을 것이다. 어쨌든 6월 사태 때 국군이 보여준 자제력은 참으로 오랫만에 군에 대한 호감의 소재가 되었다. 노사분규 때 울산시내가 중장비로 중무장한 노동자들의 독무대가 되어도 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내일 나온다. 모레 나온다. 하던 군은 끝내 나서지 않았고 대통령선거는 치러졌으며, 정권의 정통성 시비는 한 고비를 넘겼다.
이런 전환기를 맞아 군에서도 매우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지난 4월20일 수도방위사령관은 국방부 기자들을 부대로 초청, 1시간30분간에 걸쳐 상당히 솔직한 간담회를 가졌다. 국외의 언론에 의해 군부의 강경파의 대표라느니, 쿠데타설의 장본인이라느니 하여 여러 번 구설수에 올랐던 수방사령관은 {정치적 시각에서 수방사를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그는 {내가 외신에 86회에 걸쳐 언급되었고 쿠데타를 일으킬 후보자라고 지적을 당했는데도 계속 아무 것도 안하고 있으니 더욱 궁금한 모양이다}고 농담도 했다. 그는 자신을 {합리적 정의파} {역사를 거스르는 강경파는 아니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사령관은 {우리 군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단이 되고 싶지 않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 다음날엔 특전사령관이 역시 국방부 기자들을 초청, 테러방지 훈련상황을 보여준 뒤 기자들과 한담을 했다. 사령관은 {특전사가 머리에 뿔이라도 난 집단인 듯 인식되어 온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오늘의 만남이 오해를 씻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광주사태에 대해서는 우리도 할 말이 있다}고 했고 {군인은 정치적 결정이 내려졌을 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집단이다}고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국군 보안사령관도 국방부 기자실에 찾아와 대화를 나누었다. 정권 안보에 가장 중요한 보안사, 수방사, 특전사 등 이른바 3사(司)의 사령관들(모두 중장)이 보여준 이런 적극적인 태도는 달라져 가는 군의 언론 및 국민관(觀)의 일단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군기법 개정 움직임도
언론에 대한 적극적 자세는 지난해 여름에 국방부장관으로 취임했던 정호용(鄭鎬溶)씨로부터 비롯되었다. 鄭씨는 지난 2월 노태우(盧泰愚)대통령 당선자에게 업무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군이 개방적 자세를 취하겠다고 보고했었다. 그 직후의 간담회에서 국방부 기자들이 {군사기밀보호법의 개정도 고려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것도 생각중이다}고 답했다. [군기법 개정검토]라는 기사가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움직임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오자복(吳滋福)신임 국방장관도 새 대통령에 대한 업무보고에서 군기법 개정을 추진중이라고 말했다. 군기법 개정은 군에 대한 보도의 활성화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인데, 이것은 오히려 군의 필요에 의해서 추진되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민군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 국민들에게 군대의 실상을 알려야겠는데, 그러자면 언론활동을 크게 제약하고 있는 현행 군기법을 고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 것이다.
군기 법은 보호해야 할 [군사상 비밀]을 엄청나게 넓게, 또 모호하게 규정해 놓고 있다. 국방부 보도규정(84년 1월28일 제정)은 한술 더 떠서 [군 출입 기자는 공보관의 승인 또는 안내 없이 기자실·공보관실 및 편의시설을 제외하고는 국방부 청사를 출입할 수 없다]고까지 규정, 출입기자가 아니라 [보도자료배달부] 역할밖에 할 수 없도록 해놓고 있다. 그러나 육군본부 등 실병 지휘관들은 군기법 개정움직임에 대해서 썩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는 태도이다.
육군의 한 고급지휘관은 {법을 개정하지 않고 운영의 묘를 기하면 된다. 우리는 적의 사단장 이름도 다 모르는데 이쪽에서만 일방적으로 노출되어서야 되겠는가}고 말했다. 그 동안 군기 법은 부대내 사고 등 지휘관 개인의 문제들을 은폐하는 데 이용된 면도 있어 군기법 개정에 대한 현역장성들의 태도는 소극성을 띠고 있는 것이다.
민정당에서도 대통령선거 때의 득표전략의 하나로 행정직 사관 특채제도(이른바 유신사무관 제도)를 폐지하고 보안사의 민간사찰을 축소하는 등 군의 사회참여를 규제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유신사무관 제도를 통해서 1977∼87년 사이 11년간 행정부로 들어온 장교출신들은 5백86명이었다. 행정고시 출신자들의 약 3분의 1을 차지, 관료세계에서 뚜렷한 맥을 형성한 제도였다.
군부의 반발이 거세었지만 정호용(鄭鎬溶)장관이 단안을 내려 이 폐지안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민정당의 한 간부는 {예산의 3분의 1을 쓰는 군에 대하여 그 동안 효율적인 통제가 없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 엄청난 예산을 국회에서 심의할 때 보면 국방부에선 예산 자료를 국회의원들에게 나누어주었다가 30분 뒤 회수해가 버리는데, 5조 원이 넘는 예산을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파악하겠는가. 군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통제는 언론에 의한 것이다. 아울러 군의 정치개입에 있어서 제도적 장치로 존재했던 보안사의 정치기능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육사 34기 출신 장교들(대부분이 소령)은 지난 5월7일 오후에 육군사관학교 회관에서 임관 10주년 행사를 가졌다. 이들은 이 자리에 정승화(鄭昇和)씨를 초청했다. 鄭씨는 34기 생도들이 2∼4학년을 거칠 때 육사교장으로 근무했었다. 지난 5월13일엔 재향군인회가 예비역 장성들에게 북한의 최근동향을 보고하는 자리에 鄭씨를 초청했다.
정부는 지난해 12월23일 국무회의에서 병역법 개정안을 의결, 국회에서 통과시켰는데, 그 내용은 정승화(鄭昇和), 김계원(金桂元)씨와 같이 유죄판결을 받고 보충역으로 계급이 강등된 전직 장교들에게 계급복권을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이 조치에 따라 재향군인회에서 발행하는 장성회원 명부에도 이들의 이름이 실리는 등 장군 대접을 다시 받게 되었다. 이것은 군이 민군관계 뿐 아니라 군내부의 갈등 해소에도 전향적 자세로 임하고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달라지고 있는 건은 군과 여전뿐이 아니다. 김대중(金大中) 평민당 총재는 이번 13대 총선 때의 부재자 투표가 공정했음을 인정하고 군을 높게 평가하는 발언을 했고, 김영삼(金泳三)씨도 [성숙한 국군]이라고 추켜세웠다. 어차피 새 국회는 국정조사·감사권을 가진 데다가 야당연합세력이 과반수를, 차지함으로써 군도 더 이상 성역으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돼 있는 것이다.
군대는 늘 대통령 편이다
지난 4월 말 기자는 수도권에 배치된 한 육군 부대의 지휘관 집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부관이 전화를 받았다. 기자가 신분을 밝혔더니 부관은 바로 그 지휘관에게 전화를 연결해 주었다. 기자가 용건을 이야기했더니 그 장성은 아주 간단하게 {좋습니다. 만납시다}고 했다. 다음날 오후 그의 사무실에서 기자는 2시간동안 인터뷰를 했다. 장군다운 몸집에 늘 웃음 띤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매서운 눈매를 지닌 50대 초반의 그는 {저는…}이란 말로써 운을 뗀 뒤 인터뷰에 응한 이유를 설명했다.
{몇 달 전에 어떤 기사에 저의 이름이 나온 적이 있었어요. 일본에서 퍼진 루머를 인용하는 등 잘못된 내용이 많은 기사였읍니다. 제가 중간에 사람을 넣어 그 기자에게 이야기하도록 했읍니다. [우리가 외국인 사이도 아니고 같은 서울의 하늘 아래서 사는 데 최소한 나를 만나고 써야 할 것 아닌가] 그 기자는 [군 장성들 한테 접촉을 하려고 해 보았자 될 것 같지가 않아 시도를 하지 않았다]고 하더랍니다. 그런 일도 있었고, 조기자께서 민군관계의 재정립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저도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인터뷰에 응한 것입니다. 제가 너무 쉽게 응해서 놀라셨죠?}
익명을 전제로 하고 그는 솔직하게 자신의 사견(私見)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군의 정치적 중립에 대해서?
{여기에 대해서 오해가 없어야 한다. 군은 늘 대통령 편이다. 대통령은 헌법에 따라서 군의 통수권자로 돼 있다. 통수권자란 표현이 좀 어려운데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국군총사령관이요 원수(元帥)다. 국군은 국민이 뽑은 대통령에게 충성해야 하며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정치적 중립이다}
-지난 총선 때 군의 부재자 투표가 공정했다고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에 충성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농부들이 농정을 잘 하겠다는 후보를 지지하는 것이나 군인이 국방을 잘 하겠다는 후보를 지지하는 것이나 같은 맥락이다. 다만 지금까지의 부재자 투표에서 문제가 있었다면 그것은 과잉충성 때문이었다. 군의 교육수준에 맞게 홍보를 해야 하는데 드러내놓고 누구를 찍으라고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오는 법이다. 나는 어느 교수가 신문에 쓴 정치인의 자질에 대한 칼럼기사를 부하들에게 홍보하도록 하는 것으로써 그쳤다}
광주사태는 이미 역사이다
-최근 수도방위사령관과 특전사령관이 국방부 출입기자들을 부대로 초청하여 군의 입장을 설명해 주었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는데….
{노태우 대통령도 군 지휘관들에게 여러 번 언론과의 벽을 허물고 대화의 창을 트라는 당부를 하고 있다. 군 쪽에서도 언론과 접촉을 하고는 있으나 언론사 사장들, 논설위원, 편집국장 등 상층부 사람들과 어울려 골프나 치는 정도로 끝나 별 무 효과였다. 언론에서는 계급이 아니라 현장에서 뛰는 일선기자들의 생각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언론과 군, 그리고 민과 군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가 상대방의 존재와 논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자기집단의 기준으로써만 상대를 저울질해서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 내가 대위 때 어느 군 출입기자가 내가 모시던 상관(장성)에게 말을 놓는 등 무례하게 구는 것을 보다 못해 항의를 한 적이 있었다. 그 기자는 이에 대해 기자의 행동논리, 즉 기자는 당신 같은 대위를 대하는 자세나 참모총장을 대하는 자세가 같아야 한다. 기자는 위계질서에 구애받아서는 안 된다는 등의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나는 그 말을 듣고 비로소 언론의 생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오늘날의 장교는 옛날처럼 기자들에게 지적 콤플렉스를 가지고 치부나 열등감을 덮어두기 위해 대화를 꺼리던 그런 장교들이 아니다. 대통령께서도 이제는 우리 군이 덮어둘 치부가 없으니 터놓고 언론을 대해 보라고 당부했다. 앞으로는 군의 자세가 달라질 것이다}
-광주사태의 처리가 새 국회와 주요쟁점이 될 것 같은데….
{민간인만 죽은 것이 아니라 진압군인들도 많이 죽었다. 이제는 화합적 차원에서 다루어야 한다. 언론이 국민의 과격한 요구를 자제시켜야 한다. 그것은 역사적 미래를 위해서 필요한 일이다. 일본의 가등청정을 불러다가 임진왜란의 책임을 지라고 할 수 없듯, 이제는 광주사태를 역사적 사건으로 보고, 거기서 교훈을 발견하도록 애써야 할 때다}
-광주사태를 깊게 다루면 군이 자극을 받는다는 뜻인가?
{우리 군은 그런 문제로 자극을 받을 만큼 덩치가 작지 않다. 지난 총선 때 군이 그토록 수모를 당했지만 누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하던가}
-군내의 실권을 소위 하나회 인맥이 장악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는데….
{과거에 하나회가 있긴 했으나 과장된 면이 많다. 육사 11기 생도들 중에 북한 출신생도들이 사조직을 만드니까 거기에 대항해서 대구 출신들이 중심이 돼 하나회를 만든 것이다. 인맥은 어떤 조직에서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인맥이 어떤 일을 했는가이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
-12·12사태를 하나회의 작품으로 보는데….
{하나님께 맹세코 이야기하지만 12·12사태는 군이 정치담당세력이 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은 아니었다. 그 뒤의 상황이 군을 그런 쪽으로 몰아간 것이다. 지금도 나는 생생하게 전두환 장군이 대통령이 되지 않으려고 버티던 모습을 기억할 수 있다. 군인보다도 일부 정치인, 언론인, 종교인들이 더욱 간절하게 전두환 장군에게 대권을 맡아달라고 빌었다는 것을 나는 증언할 수 있다}
-유신사무관 제도가 폐지된 데 대하여 장교들의 반발이 있는가?
{2년 전에 나는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에게 유신사무관 제도를 없애달라고 건의한 적이 있었다. 지망자도 점점 줄어들고 무수한 장교들을 사회로 유출시키고 싶지 않아 이제는 이 제도를 없애고 군이 떳떳하게 되어야겠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의를 했었다. 군은 피라밋 조직이기 때문이 중간에서 승진에 탈락한 장교들이 끊임없이 사회로 나가야 하고 사회는 이를 품어주어야 磯?
그러나 지금 국민의 분위기가 이를 거부하는 몸짓을 하고 있으니 우리가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정년을 연장하는 방법으로 장교들의 사회진출을 억제하려 하고 있다. 군은 늘 신진대사가 잘 되어야 신선한 체질을 유지할 수가 있는데, 정년의 연장으로 노령화되는 경향이 생기고 진급속도도 늦어질 것이지만 이것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애국가에도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사랑하세]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지금은 우리 국군이 괴롭지만 나라를 사랑해야 할 시점이다}
-군인들만큼 애국을 즐겨 말하는 이들도 없을 것이다. 애국이란 무엇인가.
{애국이란 말은 너무 추상적이다. 나는 국가이익의 추구가 애국이라 생각한다}
-현 시점에서 국가이익은 어떻게 정의되는가?
{복지의 확대가 국가이익이다}
-군인이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자주 지적되고 있는 것은 군인은 체질상 명령과 법 절차를 혼동하기 쉽고 법치국가의 원리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어느 신부가 쓴 글에서, 장군들은 부하들을 부속품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는 대목이 있어 매우 섭섭했던 기억이 있다. 우리 세대에서 정규 육사출신들만큼 민주주의 교육을 제대로 받았고 이에 대한 훈련을 지속적으로 받은 이들도 많지 않을 것이다. 누가 뭐래도 전두환 전 대통령은 고 박정희 대통령보다 더 민주적이었던 지도자로 평가받을 것이다.
군에서 없어져야 할 것은 카리스마적인 독선이지 권위 그 자체가 아니다. 지휘는 합법적 권위로써 할 수 있지만 통솔은 인격으로, 또 민주적 리더쉽으로 해야 한다. 지휘는 아버지처럼 통솔은 어머니처럼 하는 것이다. 우리 군대는 밑으로 갈수록 훨씬 더 민주화되어 있다는 것을 국민들이 믿어주었으면 한다}
-지난해 6월에 군대가 나서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였다고 보는가?
{솔직히 말해서 군은 그때 큰 위기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군이 개입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보았고, 아직도 정치력으로 사태를 해결할 여유가 있다고 판단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6·29선언이 바로 그 해답이었다. 우리는 옛날부터 노태우 대통령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분이 위기를 충분히 타개해 나갈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군이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 사태를 주도했기에 기다릴 수 있었다. 군이 모르는 인물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이번 국회의원 선거의 결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잘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군인은 최악의 상태에 빠져서도 좌절하지 않고 최선의 해결책을 논리적으로 도출해내도록 훈련받은 사람이다}
전두환 수사는 파국 불러
-바람직한 민군 관계에 대해서….
{지금처럼 군을 멸시하면 통치를 할 수가 없다. 멸시 당하면 반발하는 법이다. 민은 군을, 군은 민을 이해해야 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문무협동국익 추구체제를 확립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세계사적으로 봐서 문무관계가 제대로 정립될 때 비로소 국운이 트였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문관우위의 국정운영방식을 채택하였다. 우리 역사가 해외로 뻗지 못하고 한반도에서 정체된 원인이 문관위주의 통치방식에 그 이유가 있다고 본다. 군사정권이라고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문무관계의 균형을 잡기 위한 계기로 파악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5·16이후 한국인이 해외로 진출하고, 민족의 에너지가 폭발하게 된 데도 군인정신이 기여한 바가 있다. 유럽에 가 보니까 동상은 주로 장군이더라, 군인은 명예를 가장 중시하는 직업인이다. 유럽의 머리 좋은 문관들은 군인들의 명예심을 충족시켜 줌으로써 군인들의 사기를 높이는 등 아주 고 단수로 다루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의 문관들도 군인들을 증오, 멸시하지만 말고 다루는 방법을 공부해야 한다}
-5공화국 비리와 관련하여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에 대한 직접적인 조사나 수사의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한 군부의 생각은?
{그 분은 퇴진 뒤에 이런 사태가 오리라고 예견하셨지만 단임 정신을 지켰다. 이것은 위대한 용기다. 야당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추궁을 고집하면, 그것은 그들이 공약한 정치보복금지와도 위배된다. 그 분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어차피 노태우 대통령으로까지 연결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역사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미 두 사람의 전 대통령이 암살되거나 해외망명하지 않았던가. 이것으로 충분하다.
어떤 경우에도 전두환 전 대통령을 해외로 보내는 사태가 일어나서는 안 된다. 세계가 우리나라의 정치수준을 비웃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캐게 되면 김영삼, 김대중씨인들 온전하겠는가. 적당한 선에서 자제되어야 한다. 특히 야당의 태도에는 제동이 걸려야 한다. 노태우 대통령이 직접 국민을 설득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제동이 안 걸리면 모처럼 마련한 이런 좋은 상황이 파국으로 갈 수도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테러 같은 것이 일어난다면? {공권력이 그 분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물론 군도 공권력의 일부다. 그런 사태는 막아야 한다}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군부의 대표적 인물인 이 장성은 헤어지기 직전에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했다. 12·12사태의 배경에는 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 대한 정규 육사출신 장교단의 의리가 깔려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朴대통령이 시해된 현장 가까이에 육군참모총장이 와 있었고, 후배장교들의 의심을 받으면서도 용퇴를 하지 않는 정승화(鄭昇和)총장에게 강한 불신을 보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무인들의 독특한 심리구조인 상관에 대한 복종과 의리가 전두환씨에 대해 어떻게 나타날지는 주목할 만한 묘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슬 추는 장교들
지난 5월7일 기자는 서울 근교의 모 군단지역을 찾아갔다. 오늘의 장교들은 어떤 모습인가를 알고 싶었다. 기자의 안내역을 맡은 군단 정훈과장 장(張)중령(43)은 한양대학을 졸업, 1968년에 간부후보생으로 입대, 20년간 장교생활을 한 사람이었다. 그는 서울개포동에 18평짜리 아파트를 1천3백만 원에 전세로 살고 있다고 했다. 아내와 두 자녀는 그 아파트에 두고 자신은 군단내의 장교 아파트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50여만 원의 월급, 가운데 15만원은 혼자서 쓴다. 관리비와 연료비가 월 3만원쯤 지출된다.
서울의 집에는 한 달에 한번씩 2박3일의 외박허가를 받아 다녀오고 2주에 한번쯤 가족이 부대 아파트로 찾아온다고 했다. 이렇게 떨어져 살게 된지는 7년째. [요즈음은 대령급까지도 당번병을 없앴기 때문에 아침 저녁으로 밥을 지어먹는 것이 귀찮아진다}고 했다. 20년 군 장교 생활 중 이사를 열 여섯 번했는데, 모두 아내가 짐을 꾸렸다고 한다.
국립 공원처럼 조경이 잘 된 군단사령부 건물의 2층 집무실에서 군단장(중장)은 기자를 맞았다. 악수할 때 손아귀 힘이 세고 몸집은 우람하나 늘 웃음을 띠어 여유가 있어 보이는 50대 초반의 서울출신 장성이었다. 기자와의 인터뷰 자리에는 군단 보안부대장(대령)과 정훈과장이 배석했다. 군단장은 {나는 후방이 안 보이고 전방만 보인다}면서 정치와 관련된 질문에 대한 답변을 피하려고 했다.
그와의 3시간 대화는 언론과 군의 입장을 서로 천명하는 데 머물렀다. 군단장은 자신의 논리를 굽히거나 설득 당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군대는 쌍팔년도 군대가 아니다}면서 [군이 내부로부터 민주화돼 가고 있는 점들]을 설명해 주었다. 그는 군내 민주화의 사례로서 구타의 금지, 사병들에 대한 발표력 교육, 골육지정으로 부하를 통솔해야 한다는 소신 등등을 이야기하였다.
그는 상관으로서의 통솔방침이 ①솔선수범 하여 저절로 따라 오게 한다. ②따라오지 않으면 설득한다. ③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명령 등 강제 수단을 동원한다는 3단계 방침이라고 했다. 군에서는 구타 등 기합을 없앤 대신에 훈련을 강화했고, 문제사병들은 군기교육대로 보내 1∼2일간씩 완전무장하의 구보 등을 하게 하고 있다. 그는 군인문화의 장점도 강조했다.
{군은 정의감·애국심 등 정신적 가치를 행동의 기준으로 삼는 집단이며, 사회는 물질적 가치를 기준으로 삼는 집단이다}면서 군의 도덕적 우월성을 말하기도 했다. 군단장은 또 {우리는 이제 국민적 모럴을 만들어 가야 할 때다. 일본은 충성심, 중국인은 신의, 영국인은 페어플레이 정신, 미국은 청교도 정신을 국민적 가치체계의 중심으로 잡고 있는데 우리는 그런 것이 없어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군이 국민들에게 정신 교육의 도장 역할을 해야 한다고도 했다. {드라큘러와 상대하고 있는 우리는 시행착오를 어떻게 하면 최소화할 것인가를 놓고 민군이 같이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 그는 {이것이 전방에 있는 한 군인의 울부짖음이요}라고 하면서 일어났다.

이념교육 시키는 여자장교
군단장 및 참모들과 함께 장교식당에서 기자는 점심식사를 했다. 장교들은 월급에서 돈을 떼내 이 식당을 운영하면서 하루에 점심 한끼만을 여기서 먹는다. 사병들은 자유 배식제라 하여 먹고 싶은 만큼 먹을 수 있게 돼 있다. 군단에서는 사병용 매 월별의 메뉴표를 만들어 식단과 열량뿐 아니라 식품의 계약단가·납품회사까지 공개하고 있었다. 1인1일 급식비는 1천4백75원, 1일 열량은 4천55칼로리, 식단은 주식과 국외에 반찬 세 가지가 기본, 매일 한 개씩의 달걀을 나눠주고 쇠고기는 월 3회, 돼지고기는 월 12회, 닭고기 월 8회, 어패류는 월 31회씩 공급한다고 메뉴표에 적혀 있었다. 식사도중에 한 예쁜 여 중위가 나서더니 매일 그러는 듯 10분 강연을 시작했다.
강원대학을 졸업하고 정훈장교로 뽑힌 여 중위는 좌경·용공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저도 대학생 때는 철없이 데모에 가담한 적도 있었다}면서 여 중위는 {공산주의는 그 이론은 괜찮은데 실천에서 문제가 있었다는 식의 환상을 척결하기 위해서는 그런 환상에 빠진 젊은이들을 아량으로써만 대해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몇 년 전부터 도입된 여자 정훈장교 제도는, 우선 예쁜 용모의 장교가 강의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장병들의 집중력을 북돋우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했다.
군은 이들 여자 장교가 결혼을 해도 계속 복무를 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다. 식사를 끝내고 군단사령부 건물 앞을 지나갔니 수십 명의 장교들이 햇빛 아래에서 허슬을 추고 있었다. 술집무대에서나 보아 온 허슬을 대낮에, 그것도 장교들이 출 줄이야, 군단장은 {군산문화의 단점인 메마른 정서를 순화시키기 위해 허슬과 가곡 부르기를 장려하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관측소에서
군단사령부내의 군인아파트에 가보았다. 영관, 위관급, 장교들이 쓰는 아파트인데 평수는 연탄 보일러식 12평형이었다. 방이 두개인데, 현관이 좁아 벽에 선반을 붙여 신발을 진열해 놓고 있었다. 정광재(鄭光在)대위(34·제3사관학교출신)의 아파트였다. 앳돼 보이는 얼굴에 단정한 몸가짐을 한 아내 오정애(吳正愛)씨(30)는 6년 전에 결혼하여 다섯 번 이사를 했는데 2년 전에 이곳으로 온 다음에는 한 시간 거리인 서울로는 한번도 외출을 간 적이 없다고 했다. 남편이 받아오는 약 30만원이 월급에서 적금으로 10만원, 공제회에 5만원씩을 넣고 네 식구가 15만원으로 생활해 간다는 것이다.
정훈과장 장(張)중령은 {서울 사람들은 군인 아파트라고 하면 자기들이 살고 있는 30, 40평형을 연상해서 군인들이 잘 살고 있다고 오해하는 데 실상은 이렇습니다}면서 {위관급 장교의 거의 전부, 영관급 장교의 70∼80%는 전세 집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미리 준비해둔 듯 장교가 사회직장인의 월급을 비교한 표를 내 놓았다.
지프는 비포장도로를 2시간 가량 달렸다. 대한민국의 온 산하가 신록의 꽃밭으로 변한 것 같은 5월 초순이었지만 휴전선으로 가는 길의 주변은 삭막하였다. 민들레도, 복사꽃도 보이지 않았다. 들에는 늙은 농부들이 대부분이고 젊은이들이 드물었다. 꽃과 젊은 여자가 사라진 풍경은 계절에 상관없이 스산했다. 북괴군이 점령하고 있는 1천m급 고지에 의하여 감제 당하고 있는 우리측 고지의 관측소(GP)에서 정규육사출신의 대대장 신(申)중령은 절도 있는 브리핑을 해주었다.
비무장지대 내의 적과 우리측 GP사이의 거리는 불과 수백m, 적은 휴전선 북방 50마일 이내에 전 병력의 75%를 배치, 재배치 없이도 남침이 가능하다고 申중령은 말했다. 지난해에는 북괴군 GP에서 우리 쪽 GP로 사격을 가했다. 한 사병이 부상당해 사단이 전투준비태세에 들어갔던 상황을 申중령은 긴장감 있게 설명해 주었다.
완강하면서도 날렵한 몸집을 갖고 있어 전형적인 야전장교의 인상을 풍기는 申중령은 딱딱한 브리핑을 마친뒤 사담(私談)이 시작되자 기자가 월간조선 5월 호에 썼던 [전두환(全斗煥)의 인맥과 금맥의] 한 대목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조기자께서는 우리 장교들을, 정치장교(Political Officer)와 순수 야전장교(Field Officer)로 구분하셨던데, 꼭 그렇게 나눌 수가 있을까요, 저는 그 기사를 읽고 처음으로 하나회에 대해서 알게되었는데 군을 너무 정치적 시각에선 다룬 것 같았어요. 너무 상업적으로 군을 기사감으로 삼는 데는 반대입니다}
申중령은 또 {우리 사회의 문제를, 군사정권이 들어서기 전부터 있었던 문제까지도 전부 군인들의 책임이라고 전가시키는 것 같다}면서 {어쨌든 지난 대통령선거로 군정시비가 일단락 되었으니 이렇게 고생하는 우리를 더 이상 섭섭하게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다. 그의 말은 단호했으나 말투는 아주 겸손했다. 광주사태, 12·12사태 등에 대한 그의 논리는 언론의 시작과는 판이한 것이었다. 申중령은 기자 앞이라서 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는 듯했다.
{우리를 내버려두어 다오}
관측소에는 전방입소 훈련을 받고 있는 충북대학교 학생 3명도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입소할 때는 놀러 가는 기분으로 왔는데 철책선에서 사병들과 같이 근무하면서 이야기를 해보니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걸으면서 존다}는 말의 뜻을 비로소 실감했다는 한 학생은 {역시 서로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신(申)중령은 {군복을 입고서는 시위현장 부근을 지나가기가 쑥스럽게 되었으니 이게 무슨 비극이냐}고 애타듯 말했다.
돌아오는 길에 기자는 전주가 고향인 모 연대장의 숙소에 들렀다. 늦은 밤이었다. 15년간 특전사에 근무한 적이 있다고 하기에 광주사태에 대하여 물었다. {군인은 임무가 부여되면 이를 달성해야 하는 조직이다. 그 방법론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시위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으면 반드시 수행해야 한다. 이런 군대의 논리를 민간인의 관점에서 평가해서는 서로가 영원히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는 자기부대의 송중학 중사가 이웃에 사는 중풍 걸린 노인을 부모 대하듯 모시고 있다는 미담을 들려주면서 꼭 기사화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미담이 민군 관계를 개선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우리 군이 국민의 군대임을 보여주는 사례다}고 했다. 이 연대장에 따르면 공수부대에서는 광주사태 이후에는 부대원들에게, 외출을 할 때는 민간인에게 공손히 대하도록 각별히 교육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갑종간부후보생 출신인 연대장은 4년 전에 서울 개포동에 4천만원짜리 아파트를 샀다고 한다. 월남전에 종군하여 월급을 저축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는 것이다.
20여년 간 장교생활 끝에 지금 그만둔다면 일시불로 퇴직금을 받을 경우 약 2천7백만 원을 타게 된다고 설명한 그는 20여 년간 셋방살이를 할 때 집주인으로부터 괄시받았던 추억담을 한참 털어놓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장(張)중령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 아버님께서 저의 셋방에 와보시고 하도 딱하니까 두 아이 가운데 큰놈을 데리고 가셨어요. 한 2년간 키워주셨죠. 제가 전방만 돌아다니는 바람에 2년 동안 한번도 가보지 못했어요. 2년만에 아이를 만나러 갔는데, 이놈이 저를 보고, [형!]이라고 하는 거예요, 가슴이 북받치면서… 그래서 당장 큰놈을 데리고 올라왔어요}
정병주(鄭柄宙)씨의 충고}
기자는 육군의 지휘부를 장악하고 있는 현역 장성들과 반대편에 섰던 이들도 많이 만나 보았다. 정승화(鄭昇和/전 육군참모총장), 정병주(鄭炳宙/12·12당시 특전사령관·육군 소장 예편), 김진기(金晋基/12·12당시 육군헌병감·준장예편), 강창성(姜昌成/전 육군보안사령관·소장예편)씨 이외에도 하나회를 수사했던 보안사 장교 등등….
이들의 생각이 현역과 다르리라는 선입감을 갖고 만났다. 그러나 국민과 군의 관계에 대한 인식은 현역장성들과 거의 같았다. 광주사태에 대해서도 그러하였다. 최근의 격동기에서 사나이답게, 그리고 군인답게 깨끗한 처신을 했다고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사람은 鄭炳宙 전 특전사령관이다. 12·12사태 때 그는 육군본부 편에 섰지만 인맥으로 볼 때는 오히려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박희도(朴熙道), 최세창(崔世昌), 장기오(張基梧)씨 등 합수본부측 인물들과 더 가까왔다.
특전사령관을 5년간 지내면서 한국의 공수단을 세계적인 규모로 키운 鄭장군은 全, 盧, 朴, 崔, 張씨등을 모두 여단장으로 직접 데리고 있었던 [공수단 인맥의 대부]였다. 12월12일 그 날밤에도 그는 합수본부 측으로부터 합류하라는 권고를 받았으나 {내가 왜 거기(경복궁 내 경비단)에 가요?}라면서 거절했었다. 5·16때도 {육군참모총장 이외의 명령은 들을 수 없다}면서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았다가 육사 9기 동기생 간부들과 함께 주체세력에게 붙들려가 두들겨 맞았다. 그는 12월12일 밤에도 {나는 적법한 명령계통이 있는 곳에 선다}는 소신대로 육군본부 측에 충성하다가 집무실로 쳐들어온 부하들로부터 총을 맞아 부상당했었다.
그의 비서실장 김오랑(金五郞)소령은 그 자리에서 사살되었었다. 1980년 봄에 강제 전역 당한 그는 전두환(全斗煥)정권 측으로부터 몇 번 모종의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하고 은둔생활을 해 왔었다.
{하루 세끼 밥 먹고 하늘을 쳐다보다가 땅이 있으니 걷고, 그리고는 잠자고…. 제가 걷기를 무척 좋아해요. 울화가 치밀 때는 술병을 들고 구파발 서오릉 주변을 왼 종일 혼자서 터벅터벅 걷다가 아무데서나 쓰러져 자곤 했어요. 그러다가 서울 북쪽의 검문소 앞을 지날 때는 노태우씨가 저곳을 어떻게 통과했을까 하는 생각이 나고… 저는 군대에 있을 때부터 공언을 하고 다녔읍니다. 나는 군복을 벗는 그 순간이 인생 퇴직의 날이다. 나는 절대로 다른 직업을 갖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 퇴직시기가 너무 빨리 와서 적응하기가 힘들었읍니다}
침묵을 지키던 그가 딱 한번 소신을 밝힌 적이 있었다. 지난 대통령선거기간 중 12·12사태가 쟁점이 되자 김진기(金晉基) 전 육군 헌병감과 함께 기자회견을 자청했었던 것이다. 그 무렵에도 그는 취재기자들에게 {진상은 역사를 위해서 제대로 밝혀져야 하지만 12·12주모자들이 군의 요직에 남아 있으니 될 수 있는 대로 현역을 자극하지 않아야 민주화에도 보탬이 된다. 언론에서 그들을 거명하면 부하통솔이 제대로 되겠는가}라고 간곡한 당부를 하곤 했었다.
이러한 鄭씨의 군과 정치에 대한 생각은 아주 명쾌했다. {군은 상관의 적법한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것을 존재이유로 삼고 있는 집단입니다. 죽으러 가라고 명령하면 가야 합니다. 내가 왜 12·12사태 때 그런 태도를 취했는가. 인간관계로 봐서야 전장군 쪽과 가깝지만 엄연히 육군본부의 지휘체계가 살아 있었지 않았읍니까. 명령에 복종하는 군대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민주화와 민군 관계 재정립의 기초입니다.
군인은 명령에 거의 무조건 따르도록 끊임없이 훈련받고 있는, 사고방식이 아주 단순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복잡해진 사회를 끌고 갈 수가 없어요. 나도 아내로부터는, 당신은 가정도 군대식으로 다스린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는데 직업군인은 옷을 벗고 정치를 해도 절대로 그 버릇을 버릴 수가 없읍니다. 군대는 상관이 하고 싶은대로 하게 돼 있는 사회에요. 그런 사고방식을 정치와 경제에 적용해보세요}
장교의 소외감이 반발하면…}
정승화(鄭昇和)씨도 {군이 정치를 맡아서는 안 되는 가장 큰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 장교들이 명령과 법을 혼동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고 했다. [아무리 뜻이 좋아도 법 절차가 허용하지 않는 것은 할 수 없다]는 법치국가의 행동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장교들이 많다는 것이다. 명령이 법의 테두리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잘 잊어버리기 때문에 군인이 정권을 잡으면 불가피하게 법은 권력의 도구로 전락해 버린다는 지적이었다. 5공화국에서 법이 왜곡된 과정의 근본 요인도 그러한 군인심리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한 예비역 장성은 {미군들은 불합리한 규정이 있을 경우, 일단 그 규정에 따르면서 개정작업을 벌이는데, 우리 장교들은 개정하기도 전에 아예 규정을 무시해버려 사문화시켜 버리더라}고 했다.
올해부터 폐지된 유신사무관제도를 창안한 것은 1975∼77년 사이 육사교장을 지냈던 정승화(鄭昇和)씨였다. 그는 육사교장시절에 육사에 지원하는 고등학생들의 질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위기감을 느꼈다고 한다. 성적도 문제였지만 출신가정도 농민, 도시빈민층이 많았다. 자칫하면 소외계층 출신의 집단이 되어 기성 사회를 반항적인 시각으로 볼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鄭씨는 전국의 일류고등학교 교장들을 몇 차례 육군사관학교로 초대했다. 학교를 보여주고는 {우수한 학생들을 보내달라}고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육사 지원생들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승진에서 탈락한 장교들의 사회진출 길을 터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유신사무관제도를 朴대통령에게 건의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鄭씨는 {지금도 유신사무관제도는 필요한 제도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군사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거부감이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좋게 볼 수 없게 만들었다. 운영 면에서도 일부 유신사무관을 특별 대우함으로써 기존관료들의 반발을 샀다}고 분석했다.
鄭씨는 {남북 분단 상황에 있는 우리 사회가 군대를 계속해서 매도하기만 하면 장교들의 소외감과 반발심은 더욱 커질 것이다. 요즈음처럼 자유로운 사회에서 자유를 박탈당한 장교들만큼 고생스런 직업이 어디 있느냐}고 했다.
진보적인 성격의 군부}
정(鄭)씨는 지난 대통령선거 기간 중 민주당 후보 김영삼(金泳三)씨에게 {군을 공격할 때는 일부 정치장교들만 표적으로 삼아야지 대다수의 순수한 군인들까지 몰아치면 안 된다}고 여러 번 충고했었다고 한다. 정승화(鄭昇和)씨는 바람직한 민군 관계를 위해서는 앞으로 군 출신들이 야당에도 많이 들어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야 야당을 보는 군의 시각도 좋아질 것이며, 야당도 군을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란 견해다.
{야당은 군을 정권의 시녀라고 욕만 퍼붓고, 여당은 권력의 도구로 보면 군이 설자리가 없게 된다. 야당인 들은 군이 여당의 군대로 인식되는 사태를 막아야 할 의무가 있다. 야당은 군 출신들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데 이제는 그가 어디에 속했던가로 평가를 할 시대가 아니다}고 鄭씨는 강조했다.
기자가 지난 84년에 11대 국회의원들 중 군복무 대상자였던 1백85명을 대상으로 군복무 여부를 알아보았더니 약 27%인 50명이 군대에 가지 않은 사람들로 나타났었다. 신체상의 결함 등이 군에 가지 않은 이유로 나왔지만 상당수는 고의적인 병역기피자라는 인상을 받았다.
병역기피나 탈세는 선진국에선 공직에 취임할 수 없는 절대적 조건이 되고 있음에 비추어볼 때 한국에서는 [사회에서 존경받는 높은 자리(noblesse)에는 그 만한 의무(oblige)가 따른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정신이 아직 겉돌고 있고 군사정권에 대한 국민의 반감으로 해서 더욱 그렇게 되고 있는 것이다. 국방 문제에 밝은 민정당의 한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유럽에선 귀족출신, 일본에선 무사계급출신이 장교집단이 되었고 미국에선 상원의원의 추천을 받은 상류층자제가 웨스트 포인트에 들어가고 있다. 한 사회의 지배층이 장교집단의 출신 배경이 되고 있고 따라서 생리적으로 체제 옹호적이다. 우리 나라의 장교집단은 중 하층 출신들로서 체제 옹호적이라기 보다는 권력 지향적이고 때로는 사회주의적인 면까지 보여 준다}
민군(民軍)개선이 최상의 전략강화}
정규육사 출신으로서 대령으로 전역한 뒤 이 정권의 핵심에서 일하고 있는 한 고위참모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학문적인 기준으로 보면 군대란 조직은 보수적이고 우익적이다. 그러나 개발도상국의 군대는 오히려 왼편에 더 가까울 수도 있다. 한국의 군 장교집단을 획일적으로 보수적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다. 안보 면에서는 보수적이지만 사회, 경제 부문에 대해서는 매우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5·16 뒤와 1980년에 군부엘리트들이 취한 사회개혁 조치는 그들의 진보적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장교집단의 진보성은 이론적인, 또는 철학적인 뒷받침이 없는 다분히 낭만적인 저차원의 개혁주의란 비판도 있다. 자칫하면 국가 사회주의적인 극우로 흐를 위험이 있고, 자본주의의 질서에 편입되어 그 개혁주의가 시들어버릴 수도 있다는 얘기다. 1980년에 등장한 군부가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진보적 명분을 내걸었으나 사회개혁에 실패하고만 것도 이념의 빈곤과 함께 기업·관료 등 한국의 자본주의 체제가 군에 의해서 변혁되기에는 너무나 덩치가 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풀이도 있다.
신대진(申大鎭)씨(52)는 육사15기로 졸업할 때 대표화랑으로 뽑혔고, 장성진급도 동기생 가운데서 가장 먼저 하는 등 엘리트 코스를 걸어왔다. 그는 지난 3월에 1군 부 사령관직을 끝으로 육군소장에서 전역하였다. 같이 진급한 동기생들은 중장으로 승진했는데 申씨가 진급에서 밀려나고 주로 한직에서 근무하게 된 것에 대해서, 그가 정승화(鄭昇和)씨의 처남이라는 점과 관련시켜 설명하는 이들도 많다. 그는 경북 안동에서 중학교를 다녔고 대천 고등학교 출신이다.
5공화국을 움직인 정치군인들과 다른 길을 걸어온 申씨도 군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앞에 등장한 현역장성들과 거의 같은 주장을 폈다. 그는 {군대는 국민이란 물에서 노는 물고기다}고 비유하면서 {사기를 먹고사는 군대는 국민이 알아주지 않으면 흥이 나지 않는 법이다}고 했다. 申씨는 {군과 국민을 자꾸만 구별하려는 생각도 문제다. 지금처럼 대중매체가 발달한 상황에서는 군인과 국민의 의식차이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고도 했다.
그는 민군 관계의 밀접함이 전력과 직결된다는 것을 한 공식으로써 설명하기도 했다. 즉, 전쟁수행능력(F)=경제력(M)×동원속도(a)인데 동원속도는 민, 관, 군의 협조체제가 얼마나 자발적이냐에 달려 있고, 이는 곧 민군 사이의 신뢰관계에 의하여 좌우된다는 것이었다. 申씨는 {민군 관계를 개선하는 것 이상의 효율적인 국방력 강화는 없다}고 말했다.
申씨는 또 군내부적으로는 장교와 장교, 장교와 사병 사이의 인간관계가 돈독하게 되어야 전력이 강화된다고 했다. 장교단 내부의 사조직을 추방하고, 구타금지 등을 통한 민주적인 부대운영이 이런 전력 강화에 보탬이 된다는 주장이었다. {군대는 어떤 경우에도 조직을 유지할 수 있어야 힘을 쓸 수 있는 집단입니다. 그 조직력은 인간관계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인간관계도 명령과 같은 공식적인 것이 아닌, 인간적 접촉에 의한 정의 교류에서 우러난 것이라야 위기에 처해서 힘을 발휘할 수 있어요. 강군은 기합이 아니라 조직적인 훈련을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군사정권의 최대 피해자는 군인}
신대진(申大鎭)씨는 {이번 군 부재자 투표가 공정하게 이루어진 것은 정치로부터 초연해야겠다는 우리 군의 상식을 반영한 것으로서 하나의 전환점을 만들었다}고 높게 평가했다. 33년만에 군복을 벗은 그도 장교의 처우에 대해서는 할말이 많았다.
{일선만 돌아다닌다고 자녀 교육에 등한하다가 보니 그 흔한 피아노 교습도 시킬 수가 없었어요, 서울의 친척집에 아이를 데려 갔는데 친척집 아이가 피아노를 자랑스럽게 치고 내 아이는 그 옆에서 멍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찡합디다} 그는 또 {나는 약 9년간 장군 계급장을 달고 있었는데 가족과 함께 있었던 기간은 아홉 달도 되지 않을 것이다. 부대에 있으면 장성 신분으로해서 다방출입도 삼가야 하고 수도승생활을 해야 한다}고 했다.
申씨는 또 {친구간 술을 산다고 해도 팁 3만원 줄 돈이 아까 와서 여자가 있는 술집에는 갈 수가 없었다. 집사람을 불러내 불고기를 사주는 것이 팁보다 싸게 먹히더라}고 우스개를 했다. 기자가 만난 많은 현역장교들은 [군이 사회로부터 모멸 당하고 있다}는 표현을 했다. 심지어 한 예비역 대령은 {군이 탄압 받고 있다}는 말까지 했다.
많은 국민들은 군이 우리 사회에서 특혜를 누리며, 자신들은 그런 군의 탄압을 받아왔다고 생각하는데 많은 장교들은 군이 여론의 탄압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극단적인 인식의 차이는 서로에 대한 이해 부족과 정통성이 약한 군사정권의 존재 때문이었다. 한 예비역 장성은 {군사 정권의 가장 큰 피해자는 군인들이었다}고 주장했다. {일부 정치장교들이 군복을 벗은 뒤 정계, 재계, 국영기업체로 진출하여 마치 군 전체가 특혜를 보는 것 같은 오해를 주었다. 그러나 저들은 자신들의 특혜를 보장하기 위해 군 전체의 이익을 희생시켰다. 예컨대 예비역 장성들의 모임인 성우회(星友會)를 해산시키는가 하면 동기생 모임도 갖지 못하게 하는 등 선배들을 탄압했다.
예비역 장교들의 사회진출에 꼭 필요한 유신사무관 제도도 대통령 선거를 위해 희생시키지 않았나. 무엇보다도 국민의 사랑을 받던 군을 미움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한줌 밖에 안되는 정치장교 집단이 아니었던가} 노태우(盧泰愚)정권이 출범한 뒤에도 장성 출신 인사들이 국영기업체 사장에 계속해서 임명 돼었다. 민정당 국회의원후보로 나선 한국도로공사사장 정동호(鄭東鎬/육사 13기·전 육군참모차장·중장 예편)씨의 후임으로는 육사 13기로서 중장 예편자인 윤태균(尹泰均)씨가 임명되었다.
석탄공사 총재에는 육사 12기로서 보안사령관을 지낸 안필준(安弼濬/육군대장 예편·청소년 연맹 총재)씨가 임명되었다. 그는 하나회 출신이기도 하다. 최근 한국방송광고공사 사장으로 임명된 남웅종(南雄鍾)씨는 특임 6기 출신으로서 12·12사태 때 보안사 참모장이었다. 南씨의 사장 임명에 대해서는 예비역 장교들 사이에서도 비판적인 의견이 더러 나오고 있다. 盧泰愚대통령과 경북고 동창생이라는 인연을 언급하는 이들도 많았다.
장관들의 3분의 1이 군 출신
김광웅(金光雄)교수(서울대 행정대학원)는 [지난 20년 동안 한국의 통치엘리트는 두 가지 특징을 보여주었다. 하나는 군부 엘리트의 영향력이 강화된 것, 다른 하나는 경상도 출신의 엘리트가 지배적인 위치에 서게 된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한국 민군 관료 엘리트의 이데올로기와 정치]). 군사정권 치하이던 제 6∼12대 국회에서 군 출신 의원 수는 전체의 15·8%였다. 상임위원장의 41·8%가 군 출신 의원이었다. 요직일수록 군 출신이 많았다는 얘기다. 특히 국방위원장의 전부, 내무위원장의 75%가 군 출신이었다. 지난 64년∼86년 사이의 장관들 4백65명 가운데 33·3%인 1백55명이 군 출신이었다. 같은 기간의 차관들 4백3명 가운데 18·1%인 73명이 군 출신이었다. 같은 기간의 중앙정부 청장들 2백54명 가운데 39%인 99명이 군 출신이었다.
이 기간의 장·차관 및 청장들의 지역배경을 본다. 장관들의 31·3%, 차관들의 35·6, 청장들의 39·4%가 경상도 출신이었다. 전라도 출신은 장관들의 13·1, 차관들의 9·2, 청장들의 13·3%였다. 전국 인구중 경상도 출신이 약35%, 전라도 출신이 약 25%인 것과 비교해 보면 관료엘리트 가운데 경상도 출신은 인구비례보다 약간 높게, 전라도 출신은 훨씬 낮게 나타나고 있다.
연세대 안용식(安龍植)교수가 지난해에 26개 정부투자기관의 임원 1백6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것에 따르면 군인출신은 21%로서 공무원(28·1%), 교수(22·2%)에 이어 세 번째였다. 그러나 이사장 25명중 9명, 사장 26명 중 10명, 감사 26명 중 12명이 군 출신들로서 수뇌부에선 군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한 대학교수는 {사회가 전문화되고 있는데 군 출신이 기업체를 경영하는 것은 교수가 사단장이 되는 것만큼 무리가 많은 인사다}고 말했다.
영관급 전역자 실직률 43%
이런 통계만 보면 군 전체가 특권계급, 특혜 계층화한 것 같지만 또 다른 통계도 있다. 현 국방장관 오자복(吳滋福)씨가 지난 82년에 쓴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논문 [육군 장교 경력관리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육군장교들의 직업의식 조사에서 11%가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 44%가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본다]고 대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직업의 만족도에 있어서도 33%만이 뚜렷하게 [만족하고 있다]는 대답을 했을 뿐이었다.
吳씨가 이 논문에서 공개한 대령 이하의 전역한 직업 군인 출신들의 실업률(1980년 현재)을 보면 대령 전역자 35·2%, 중령 43·4%, 소령 40·4% 등 평균 43·4%였다. 영관급 전역자는 거의가 40∼50대 초반인데, 자녀들에 대한 교육비가 한창 많이 들어갈 때이므로 생계가 어려운 경우도 많다고 한다.
육사 15기의 경우 장교 예편자들 중 약20%가 무직, 10%는 생계 곤란자로 파악되고 있다. 吳씨의 논문에 실린 1975년 현재 예비역 장성들의 취업상황은 5백98명 중 정계가 8·7%, 외교관 2·3%, 관계 4·2%, 국영기업체 7·4%, 일반기업체 33·3%, 교육계 4%, 금융 및 사회단체 7%, 자유업 8·7%, 해외 1·5%, 무직 22·3 %였다. 정부는 그 동안 장성 전역자들의 취업과 생계대책에 주로 신경을 써 국민들에게는 군인들에 대한 처우가 전체적으로 좋아진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많다.
제5공화국에 들어와서는 군인공제회가 미 취업 장성들에게 월 수십만 원씩의 생계 보조비를 주고 있어 너무 장성중심의 대책이라는 비판도 있다. 현역 군인들이 [모멸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처우상의 문제라기보다는 국민과 사회의 시각에 대한 [섭섭함]이었다. 야당과 언론은 [일부 정치장교 집단]이란 단서를 달아가면서 순수한 대부분의 장교들을 비난의 대상에서 빼놓으려고 애쓰고 있지만, 이런 차별화 노력은 별 무효과인 듯했다.
우선 정치 장교와 순수장교가 확연하게 구별되지 않는 것이었다. 육군참모총장 박희도(朴熙道) 대장의 경우, 야당과 언론의 시작은 그가 12·12 사태 때 제1공수 여단을 지휘, 행주대교를 넘어 육본과 국방부를 점령했고, 김대중(金大中)씨에 대한 비토발언을 한 점들을 들어 정치 장교로 구분하고 있지만 많은 현역장교들은 월남전과 미루나무사건 때의 영웅적 행동과 꾸밈없고 직선적인 성격을 들어 [가장 순수한 군인, 그래서 정치 장교로 오해받는 인물]로 평가하고 있었다.
많은 현역장교들은 일부 정치장교들에 대한 비난까지도 군 전체에 대한 것으로 단순화하여 보는 듯하였다. 특히 지난 대통령 선거와 총선에서 있었던 자극적인 군대 비판에 대해서는 자극적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한 현역대장은 정치인들과 기자가 있는 사석에서, 어느 야당 후보가 유세장에 군화를 들고 나와 군을 모욕했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서슴없이 {소리 안 나는 총이 있다면 당장 쏴 죽여버리고 싶더라}고 얘기했다.
[현역은 증언 못한다]
어느 국영기업체의 임원으로 일한 적이 있었던 한 예비역 대령은 지난 12대 국회에서 한 야당의원이 군 출신 인사들의 국영기업체 진출에 대해서 심하게 비판하자 개인적으로 그 의원을 찾아가 이런 식으로 항의했었다고 털어놓았다. {의원님, 우리 군이 어떤 심리인지 아십니까. 아까 하시던 식으로 계속해서 군을 모욕 주고, 사회불안을 선동하시는 것을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혼란이 오면 계엄령이 펴질 것이고 맨 먼저 군인들에게 붙들려 가실 분이 의원님이 될 것입니다. 군인이 어디 종자가 다릅니까. 그렇게 하시면 야당이 집권 못합니다} 광주 사태에서의 군의 책임 문제에 대해서 맡은 장교들은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느냐}고 반발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장교들은 공수부대의 과잉 진압은 인정하면서도 {군대는 경찰과 다르다. 진압이란 임무를 부여받은 이상 그것을 달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만 어떤 방법으로 목표를 달성하느냐가 문제가 되는데 그것은 부차적인 것이다. 공수부대의 경우, 전쟁이 나면 적의 후방에 침투, 난폭하게 전투를 벌이도록 끊임없이 훈련을 받고 있는 특수부대인데, 이런 부대를 시위진압에 투입한 것은 잘못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무장한 민간인을 군인이 그냥 버려 둘 수는 없는 일 아닌가}하고 적극적으로 군의 진압행위를 옹호하는 장교들이 거의 전부였다. 한 장교는 {이 문제를 자꾸 거론하면 전체 장교집단의 정치권에 대한 반발심만 거세어질 뿐이다. 민주화를 의해서는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고 말했다.
한 고위장성은 {만약 국회에서 진상조사를 한다면서 광주사태 진압과 관련된 현역 군인을 소환한다면 내 자리를 걸고서라도 이를 저지하겠다. 그렇게 한다면 누가 진압 명령을 따르겠는가}라고 말했다. 한 예비역 장교는 {광주사태가 여태까지도 숙제로 남아 있는 것은 5공화국 정부의 선전활동 미숙 때문이었다. 잘못한 것은 인정하고 방어할 것은 방어했어야 했다. 즉, 초기의 과잉진압에 대해서는 사과하고, 시민이 무장한 뒤의 진압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행동이었음을 소신 있게 설명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박희도(朴熙道) 육군참모총장은 광주사태 당시 일선 사단장이었다. 그는 사석에서 {우리 사단장들은 광주사태가 대전까지 번져 올라오면 김일성이 오판하여 남침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남북으로 양공 당하기 전에 우리가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나올 정도로 긴박했었다}고 말했다.
광주사태 잘못 인식 장교 많아
정호용(鄭鎬溶) 전 국방장관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여러 번 불만을 말한 적이 있었다. {왜 내가 말하는 광주사태는 쓰지 않는가. 쓰면 언론이 욕을 먹기 때문인가. 그때는 지휘계통 선상에 있지도 않은 나와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 노(盧)대통령을 왜 자꾸 물고 늘어지는가} 국방부장관 앞으로는 [왜 적극적으로 군을 변론해 주지 않느냐]는 내용의 편지가 장교들로부터 많이 와 있다고 한다.
야당이 광주사태의 진상조사를 요구하면 군이 긴장할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야당에서는 지휘책임자에 대한 처벌까지는 아직 요구하고 있지 않으나 군에서는 진상조사 과정에서 지휘관들이 거명 되거나 조사를 받는 등 군의 명령체계가 도전 받을 가능성에 대해서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군에서는 광주사태의 진압에 관계했던 장병들로부터 수기를 받아 놓았다고 한다. 한 고위 장성은 {그 수기를 읽어보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더군}이라고 했다.
이 장성은 당시 계엄사령관 이희성씨가 민화위(民和委)에 서면으로 낸 증언에서 과잉진압을 일부 인정한 것을 들어 못마땅해하기도 하였다. 광주사태에 투입되었던 3개 공수여단의 세 여단장 중 신우식(申佑湜/육사 14기·소장 예편)씨, 최웅(崔雄/육사 12기·중장 예편)씨는 전역했고, 최세창(崔世昌/육사 13기)씨는 현역군인 중 최선임자로서 합참의장이다. 1980년 5월27일에 광주로 진입, 마무리 진압작전을 벌였던 당시 20사단장 박준병(朴俊炳)씨는 새로 민정당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전남 지역 계엄 분소장이었던 소준열(蘇俊烈)씨는 최근 재향군인회의 새 회장으로 뽑혔다.
제 5, 6공화국의 핵심에는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정호용(鄭鎬溶/광주사태 당시 특전사령관), 최세창(崔世昌), 박희도(朴熙道), 장기오(張基梧/전 총무처 장관)씨 등 공수단 인맥이 많이 있다. 광주사태에 대한 조사는 공수단을 건드리게 될 것이고 全-盧정권의 본질에 대한 상징적인 공}이 된다는 점에서 정국의 앞날과 민군 관계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다. 기자가 만난 많은 현역장교들의 광주사태 인식은 사실관계부터가 잘못된 부분이 많았다. 과잉진압이 먼저 있었고, 일종의 자위 수단으로서 광주시민이 무장을 했는데, 일부 장교들은 시민들이 무장을 먼저 했기 때문에 그런 식의 과잉 진압이 불가피했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장교들은 시위진압에 특수 부대를 투입한 것이 잘못이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공수부대의 입장에서 볼 때 충분한 시위진압 장비를 갖지 못한 상태에서 엄청난 인파가 몰려왔으므로 오히려 이쪽에서 공포에 질려 [겁을 주기 위한] 잔혹한 위력시위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장교들도 많았다.
육군 수뇌부의 성격
12·12 사태에 대한 장교들의 시각은 광주사태에 대한 것처럼 획일적이지 않은 듯했다. 모두가 {앞으로는 절대로 없어야 할 사건이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정승화(鄭昇和) 당시 총장이 10·26 사건과 관련하여 의심을 받았고 남자답게 용퇴를 하지 않았던 것은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냐}는 논리로써 변호하려는 장교들이 많았다. 이런 논리는 장교들의 심리상태를 엿보게 하는 좋은 자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심이 가더라도 대통령의 재가를 받는 등 적법절차를 거쳐서 총장을 연행해야 한다]는 문민우위의 정신과 법치국가의 기본 질서에 대한 존중의 마음은 별로 없고 [나쁜 사람이니까 무리를 해도 다 용서받을 수 있다]는 일차원적인 단순사고 방식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뒤의 수사·재판과정에서 鄭昇和씨에 대한 김재규(金載圭)와의 공모의 혹은 근거가 없다는 것이 드러나 결과적으로는 대부분의 장교들이 그때 갖고 있었던 정보가 왜곡돼 있었음이 밝혀졌었다.
군 정보기관이 핵심정보를 독점하고 이를 활용할 때 군 조직의 특수성으로 해서 장교집단을 잠시나마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해주는 현상이었다. 정승화(鄭昇和)씨에 대한 정의감의 발로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보편적 가치관이 아니라 파당적 가치관에 불과했었다.
육본의 적법한 명령을 따르다가 부하의 총격을 받은 정병주(鄭柄宙) 당시 특전사령관과 사살된 그의 비서실장 유족에 대해서는 고통만 주었던 12·12 주체 세력은 鄭씨를 연행하다가 총격을 받은 우경윤(禹慶允)씨에게는 갖은 특혜를 줌으로써 정치장교 집단이 말하는 정의감의 정체를 엿보게 했던 것이다.
광주사태 이상으로 군이 민감하게 반응할 부분은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에 대한 비리조사일 것이다. 수도권의 핵심지휘관이 기자에게 밝혔듯이 군의 지휘부에선 이것만은 막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런 압력이 노태우(盧泰愚)대통령에게도 계속해서 전달되고 있을 것이다. 지금 육군을 이끌고 있는 3성 장군 이상의 지휘부는 盧대통령보다는 全 전 대통령과 더 인간적으로 밀접했던 이들이다.
12·12 사태 때 함께 운명을 걸었던 사람, 全장군이 직속 부하로 오랫동안 데리고 다녔던 사람, 하나회 출신, 동향출신 등등 2중, 3중으로 얽히고 설킨 인간관계를 갖고 있다. 공과 사의 구별보다는 1차 적인 인간관계를 더 중요시하는 이들 인맥의 성향으로 볼 때 全斗煥씨에 대한 조사는 [인간적인 의리로서도 있어선 안될 일]이란 시각이 굳어 있는 듯했다.
특히 광주사태 및 전두환(全斗煥)씨의 비리에 대한 진상조사 요구를 평민당 김대중(金大中)총재가 주도할 때 군의 반응은 더욱 예민해질 것이다. 총선 이후에 金大中씨의 태도가 눈에 뜨이게 온건해졌지만 군 수뇌부의 시각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듯했다. 군처럼 일사불란한 명령계통이 유지되는 조직에서는 사령탑의 성향이 그 조직의 행태에 거의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육군의 수뇌부를 이루고 있는 수십 명의 준장·대장 중 20명을 표본 삼아 그 성향을 분석해 본다. 이들 중 한 명만 갑종간부후보 출신이며 나머지는 모두 정규 육사출신이다. 이들 중 5명은 12·12사태 때 全斗煥 합수본부장 편에 서서 병력을 동원했던 장교들이다. 20명중 2명만이 하나회 인맥이 아니다. 출신고 교별로는 경북 고 또는 경북 중 출신이 여섯 명으로 가장 많고, 부산고가 2명, 서울고가 3명 등등이다.
경상도 출신이 10명, 충청도 출신이 6명, 서울 출신이 3명, 전북출신이 1명이다. 육본의 한 대령은 군 인맥에 대해서 이렇게 주장했다. [장교들 사이에서 인맥은 대체로 세 갈래로 형성된다. 하나는 고교동창관계다. 지금 장성급에서 특히 동문이 많은 학교는 경북고, 부산고, 경남고, 대전고, 서울고, 진주고, 김천고, 마산고, 광주고, 원주고, 강릉고, 춘천고, 성남고교 등이다.
두번째로는 동기생 인맥, 세번째로는 같이 근무했던 인맥이다. 경상도 출신 장성이 많은 것은 인구가 워낙 많은데다가 입학생이 특히 많았기 때문이지 지역차별 때문은 아니다. 하나회 인맥에 대해서 과장된 이야기가 더 많은 것 같더라} 육군 장교단은 정규 육사, ROTC, 제3사관학교, 갑종간부후보생, 학사장교 출신 등으로 구성돼 있다.
숫적으로는 ROTC 출신들이 가장 많으나 장성급 이상에서는 정규 육사출신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 사실상 군부를 이끌어가고 있다. 육사 19기와 같은 해에 임관된 ROTC 제1기에서는 최근에 처음으로 사단장이 배출되었다. 미국에서처럼 앞으로 한국 육군에서도 정규 육사 출신이 아닌 참모총장도 배출되어야 할 것이라고 申大鎭씨는 말했다. {장교 임관은 각기 다른 루트로 되더라도 육군대학을 거치면서 한 덩어리의 조직으로 통합되어 육군대학을 졸업한 장교들부터는 출신을 더 이상 따지지 않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10년 피상 지속될 정치성
오늘날 군부의 수뇌부는 군의 정치화에 관여한 인물들이 많아 민주화나 군정 종식론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는 조건들을 갖추고 있다. 다음 육군참모총장으로 거론되고 있는 14기 李모 대장도 하나회의 핵심 멤버였다. 그 다음 육군참모총장은 16∼18기에서 배출될 것으로 보이는 데 이 그룹에서도 하나회 출신이나 12·12사태와 관계 있는 장성들이 선두를 달리고 있다. 적어도 앞으로 10년 정도는 한국 육군이 정치성이 강한 이들 그룹에 의하여 지휘될 것이며 군의 정치개입 습관은 갑자기 죽지 않고 서서히 사라지는 길을 걸어갈 공산이 높다.
군 수뇌부는 {군대가 정치담당 세력의 역할을 할 때는 지났다. 국군의 권위를 회복하는 길은 정치로부터 군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는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고 한다. 군에서는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에게 {5공화국 때 떨어진 군의 위신을 6공화국에서 되찾아 달라』고 주문했다는 얘기도 있다. 기자가 따로따로 만난 민정당의 군 관계 전문가와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양 김씨 중에 한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면 정권의 인계인수는 정말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군부는 문민통치의 그늘 아래에 들어오기는 커녕 독립해서 따로 놀았을지 모른다. 군을 잘 아는 하나회 출신의 대통령이 나왔다는 것이 군의 정치적 중립이나 민군 관계 개선을 위해서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과도기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6공화국 치하에서 군이 대통령의 지휘를 받으면서 점진적으로 민주화해 가야 할 것이 아닌가.
다행히도 노태우(盧泰愚), 정호용(鄭鎬溶), 김복동(金復東), 오자복(吳滋福)씨 등 군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분들이 군의 역할에 대해서 같은 인식을 하고 있어 앞으로 약간의 진통은 있겠지만, 국군은 정치무대로부터 점점 멀어져 갈 것임에 틀림없다}
오자복(吳滋福) 장관의 논문
현 국방장관인 吳滋福씨는 1982년에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육군장교 경력관리에 관한 연구]란 논문으로 행정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吳씨는 현역으로 있으면서 행정고시 합격자도 떨어진다는 어려운 대학원시험에 실력으로 합격하여 이 논문을 썼었다. 이 논문에서 吳滋福씨는 [윤리적 측면에서 본 군의 특질]을 이렇게 지적했다.
첫째, 투쟁의 인식. 군은 인간이나 자연계에서 충돌과 투쟁은 언제나 있을 수 있는 보편적 형태로 본다.
둘째, 폭력의 인정. 군은 인간의 성악설을 더 인식하여 폭력을 인간의 생리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것으로 본다. 설득보다는 힘의 사용을 더 인정한다.
세째, 집단존중과 국가중심.
네째, 현실주의. 군은 모든 행동을 경험과 역사에 의존하여 행함으로써 보수성과 현실성을 가지며, 융통성과 직관 또는 감성적 면은 적다.
다섯째, 미래지향성. 군은 적과의 생사를 건 승패를 늘 의식하여 그것에 대한 대비에 있어서는 적극적 미래지향성을 갖는다.
吳씨는 평상시의 군장교가 갖게 되는 집단 심리적 변화로서 두 가지를 지적했다. 첫째 전시에 발휘되던 무덕(武德)도 평화시에는 보수와 직위, 생활환경 등 물질 지향적인 타산 심리로 바뀔 수 있고, 둘째로는 전시에 시민사회가 군에 대하여 보냈던 존경심이 줄어들면서 [군의 위신의 하락]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吳씨는 [군의 사회적 기능면]에 있어서 군이 ①청년들에 대한 국민화, 사회화 교육기능 ②인력양성기능 ③사회저변 층의 흡수 등 긍정적 기능을 하고 있지만 군대독단주의(Military Dogmatism)의 경직된 사고방식으로 하여 [후진국에서는 시민 사회를 지도할 사명감을 만들고 국민의 협력을 구하는 대신 강제 수단에 호소하려는 성향을 낳게 하며, 문민통제의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고 했다.
吳씨는 또 [정치체제가 민주적일수록 또 공업화될수록 사회적 경쟁에서 眉낼沮測?사람들로써 군이 충원되기 쉬운 여건이 구비되기 때문에 지배계층과의 동질성이 약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吳씨는 그 한 예로서 육사지망생들의 고교성적 분포가 떨어지고 있는 자료를 제시했다. 현재 중령, 소령으로 있는 1970년 육사 입학생들의 고교시절 평균석차는 상위 30%선에서 40, 50, 60%선 까지 떨어졌다는 것이다. 吳씨는 군 직업주의를 확립하는 방안으로 7개 요건을 제시했다. 즉 ①군 직업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높이고 ②우수한 젊은이들을 임용할 수 있는 절차가 마련되어야 하며 ③진급의 공정 ④훈련·교육의 강화 ⑤보수의 적정 ⑥승진에서 탈락된 사람들에 대한 이직방안 ⑦장기적 군장교수급 계획의 수립 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논문에서 吳씨는 장교들에 대한 국내외 대학 위탁교육이 너무 정규육사출신들에게 치중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지난 79년까지의 위탁교육자 1천71명중 7백63명이 정규육사출신). 吳씨는 장교들이 진급을 지상과제로 삼고 모든 노력을 경주하고 있음을 지적, 진급제도에 대한 개선방법을 제안하기도 했다. 吳씨가 소개한 자료에 따르면 현행진급 제도에 대해서 육군장교 들의 38·8%가 긍정, 42·5%가 중간, 38·7 %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吳씨는 일반장교는 진급에 가치지향을 두게 하고, 직능장교는 전문적 직업성 및 보수에 가치지향을 두도록 해야 하며 심사 과정에 대한 공개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전쟁의 양상이 어떻게 변하든 군사력의 핵심은 곧 사람이며, 전승의 최종적인 관건이 인적 요소에 있다]고 지적했다. 吳씨는 [우리 육군의 인사제도는 완전폐쇄 식이기 때문에 관공서나 기업체와는 달라서, 필요에 따라 관리 층을 외부로부터 채용할 수가 없으며 오로지 진급을 통해서만 관리 층 인재를 확보할 수 있어 인재육성의 필요성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인사적체는 불안 불러
吳장관이 지적했듯 장교들은 명예심을 무겁게 여기는 이들이다. 그 명예심의 구체적 표현이 계급이다. 계급이야말로 군 조직의 시작이요 끝이다. 진급관리는 군 인사와 군 운영의 고삐인 것이다. 군장교단에 인사의 주름이지면 그것이 국가적인 변혁으로 나타난다고 까지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정규육사 출신이며 예비역 대령이기도 한 한용원(韓鎔源)교수(교원대학)는 {5·16은 육사 8기생들의 인사불만, 12·12사태는 정규육사출신들의 승진의욕과 관계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육사 8기생들은 5·16 당시 대부분 중령이었는데 6∼7년간 그 계급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8기생들보다 1∼2년 앞선 육사 선배들이나 군사 영어학교 출신들은 소장, 중장까지 승진해 있었고 나이차이도 거의 없었다. 5·16거사에 8기생들이 많이 참여한 이유 중에 하나가 이런 인사불만이었다고 한다.
12·12사태 때 정승화(鄭昇和)총장을 연행하러 갔던 우경윤(禹慶允) 당시 대령(소장 예편·당시 합수본부 수사국장 겸 육본범죄 수사단장)은 바로 그 며칠 전에 장성진급에서 누락되었음을 전두환(全斗煥) 장군으로부터 귀띔을 받았었다. 이 정보를 전해주면서 全장군은 협조를 부탁했던 것이다. 禹대령이 鄭총장을 연행하러 가서 한 첫 마디가 {총장님, 진급에서 누락되었더군요. 섭섭합니다}였다. 그날 밤 최규하(崔圭夏)대통령의 경호실 간부로 있으면서 全장군 편에 서서 崔대통령을 외부와 차단했던 모 대령의 경우도 장군 승진자 심사에서 鄭총장이 직접 지적하여 탈락시켰던 사람이었다.
이 대령은 12·12사태 뒤 대장까지 승진했다. 12·12사태 때 鄭총장편에 섰던 이들은 거의 전부가 육사10기 이전의 장성들이었고 全장군 편에 섰던 이들은 전부가 정규육사 출신이었다. 12·12사태 뒤 10기 이전의 비정규육사출신 장성들이 무더기로 예편되면서 인사에 숨통이 트였고, 정규육사 출신들이 대거 진급함으로써 12·12사태에 기인한 군내의 앙금도 씻어버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한용원(韓鎔源) 교수는 {한국군에서는 10년 주기로 진급에 적체 현상이 생기는 경향이 있다. 1960년대 초에 이어 1960년대 말에도 생길 뻔했으나 월남전이 해결해주었고 70년대 말에는 12·12사태가 해결해 주었다. 이런 인사의혹이 생기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한다}고 말했다. 국방부는 유신사무관 제도의 폐지 등으로 장교들을 사회로 너무 빨리 내보낼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군 인사법을 고쳐 장교들의 정년을 3∼5년 정도씩 연장할 계획이다. 현재 군에서는 계급정년, 근속정년, 연령정년 등 세 가지 정년제를 적용하고 있다. 이 세 가지 중 먼저 오는 것에 걸리면 전역하게 돼 있다.
대령의 경우 계급정년이 9년, 근속정년이 27년, 연령정년이 50세다. 이번에 국방부는 이 세 가지 정년제를 단일화하여 대령정년을 50세에서 55세로, 중령은 47세에서 50세로 연장하는 식으로 조정할 계획이다. 이렇게 되면 진급이 늦어지고 인사적체 현상이 생길 것이라고 우려하는 측도 있다. 5·16과 12·12사태 이후 군이 계급을 논공행상의 한 방편으로 이용한데 대하여 울화통을 터뜨린 예비역 장교들도 있었다.
권정달(權正達), 허삼수(許三守), 허화평(許和平), 이학봉(李鶴捧)씨 등 이른바 개혁주도 핵심들은 동기생들보다 수년이나 앞서 준장으로 승진했고, 승진하자 며칠도 안 되어 전역하였다. 이들을 [3일 장군]이라고 꼬집기도 한다. [전역하기 위한 장성 승진]은 신성해야 할 군 계급을 사용(私用)한 것이며, 군의 위계질서를 스스로 어지럽힌 처사라고 흥분한 한 예비역 장교는 {논공행상은 훈장으로써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축소되는 군부의 비중
타룩더 매니루자만이라는 방글라데시의 정치학자는 군사 쿠데타를 경험한 개발도랑국가 61개국의 군사통치 기간 랭킹을 낸 적이 있었다. 1946∼84년간을 기준으로 한 것인데, 한국은 23위였다. 즉, 36년 중 두 차례에 걸쳐 23년간(63·9%) 군사 통치를 받았다는 것이다. 1위는 1백%의 군사 통치율을 보인 대만, 2위는 89·5%인 태국, 이어서 86·8%의 니카라과와 엘살바도르, 86·4%의 알제리아, 84·2%의 이집트, 83·3%의 자이레, 81·8%의 브룬디, 81·6%의 시리아, 78·9%의 파라과이, 75%의 수단, 71·1%의 아르헨티나 등등의 차례였다. 이들 나라는 한국처럼 오랜 문민 통치의 역사를 갖지 못한 국가이다. 한국은 2천년 역사에서 몇 백년에 불과한 군사통치의 경험을 갖고 있을 뿐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를 분기점으로 해서 27년간 지속되었던 군사통치는 이제 퇴조기에 들어간 것이 확실하다. 대령 출신의 한 정치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군사정권의 잘잘못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맡겨 둡시다. 우리는 이제 왜 이 나라가 군부의 통치를 27년간 받았는지,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이었던지를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읍니다. 군부통치를 다시 받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1988년 일반회계예산 규모는 17조4천6백44억원이었다. 국방비는 전체의 32·8%인 5조7천3백30억원, 지난해의 국방비 예산보다 15·6%가 늘어났다(일반회계 예산의 전체 증가율은 8·7%). 1988년의 국방비는 88년도 추정 GNP대비 5·43%로서 87년도 예산편성시의 GNP대비 5·55%에 비해서는 0·12%포인트가 떨어졌다. 이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방비의 절대 규모는 늘어가지만 국가경제 규모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축소되고 있다는 얘기다. 군의 영향력의 원천은 물리력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물리력이 돈의 액수로 표현된다.
한국 군부의 영향력은 민간부문이 커짐에 따라 축소의 길을 밟고 있으며 이것은 문민통치의 길이기도 하다는 것이 이 정치학자의 논리였다. 군부통치가 가능했던 것도 6·25전쟁을 계기로 군부에 인력, 자금이 집중되어 다른 어떤 사회조직 보다도 양과 질에서 앞서는 거대 조직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러나 경제 개발이 진행됨에 따라 70년대부터는 기업 조직의 효율성과 규모가 군을 압도하게 되었고 군부의 국가지도력은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88년 예산에 따르면 교육비는 3조6천10억원으로서 전체 예산의 20·7%를 차지, 국방비에 이어 두 번째다. 교육비의 투자는 학생세력의 영향력을 키우는데도 일조를 했다. 한국정치를 좌우한 2대 조직인 군과 학생의 등장은 우연이 아니라 이러한 투자액수와 유관하다는 얘기다.
교육으로 지새는 장교집단
육사출신 대령급의 약 3분의 1은 석사학위 소지자라고 한다. 보통 정규 육사 한 기수의 5∼7%는 박사학위 소지자들이다. 교수를 제외한 우리 사회의 어떤 집단보다도 정규육사 출신의 교육수준은 높다. 이들은 이 점에 대해서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이동희(李東熙) 교수(경기공업개방대학)는 [정규육사출신들은 1950년대에 사회가 혼란하고 일반대학의 교육제도가 정상화되지 않았던 시기에 미국식 고등교육과 민주주의 이념을 철저히 배운 장교들이다. 비교적 직업의식이 강한 교육을 받은 군인이기 때문에 장차 군의 정치적 중립을 주장할 수 있는 집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고 평했다([한국의 정치발전과 민군 관계]).
李東熙교수는 이 논문에서 [민과 군의 관계가 복수와 도전의 승부 관계로 전락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정규육사출신들이 걷는 대령진급까지의 경과를 보면 교육과 근무와 진급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음을 알 수 있다. 4년 제 육사교육을 마치고 소위로 임관되면 4개월 과정의 초등 군사반 교육을 이수한 뒤 소대장으로 일하게 된다. 대위 때 4∼5개월 과정의 고등 군사반 교육을 받고 중대장을 역임한 뒤 소령으로 진급, 육군대학에서 1년간 또 공부를 한다. 중령으로 진급하여 대대장으로 근무하다가 국방대학원에 들어가 1년간 공부한 뒤 대령으로 진급한다. 최근엔 육군대학과 국방 대학원 과정을 2년으로 연장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대령까지 진급하는 동안 적어도 약3년간의 집중교육을 받는 것이 장교들이다.
엘리트들은 국내외 대학에 유학하는 위탁교육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훈련과 교육의 반복 및 장교 특유의 책임감은 사회에 진출한 뒤에도 박력 있는 추진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지난 대통령 선거를 승리로 이끄는 데 쌍두마차 역할을 했던 안무혁(安武赫/육사 14기) 당시 안기부장과 이춘구(李春九) 당시 민정당 선거대책본부장 두 사람 밑에서 일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일을 해내는 집념과 끈기에서는 기성 정치인들이 도저히 따를 수 없겠더라}고 했다. 그러나, 군 출신 기업인들은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난관을 돌파해가는데는 군인정신을 살려 잘 하지만 평상시의 경영에는 부적합한 것 같다고 한 예비역장교는 평했다. {군인은 명예심을 소중하게 여기도록 교육받아온 이들인데 그런 것들을 팽개쳐야 하는 로비나 영업 부문을 맡기면 심한 갈등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쿠데타도 혁명도 불가능한 나라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밑에서 청와대 핵심 참모로 근무했던 한 고위공무원은 이런 비교를 했다. {지난 대통령 선거의 결과는 구 세대적인 야당의 관리능력 대(對) 현대화된 군사문화의 승부였다. 단일화를 공약했던 두 김씨는 대권을 앞에 두고 분열했던 데 대하여 위태위태하게만 보이던 전(全)·노(盧) 두 분의 인간관계는 끝까지 지속되었고, 기가 막힌 역할 분담을 해냈다. 대통령선거 기간 중 全대통령은 盧후보를 불러 표를 모으는데 도움이 된다면 과감하게 나를 비판하라고 했었다. 선거가 끝난 뒤의 정권이양 기에도 全대통령은 측근들에게, 모든 비난은 우리가 뒤집어 써야한다. 앞으로 우리가 OB역할을 해서 새 정부를 밀어주어야 한다고 부탁했다.
6월 사태 때 군이 나오지 않은 가장 큰 이유도 단임 약속에 대한 全대통령의 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역사는 중요한 줄기만 기술할 것이다. 全대통령 시대에 경제 안정이 이룩되고, 올림픽의 유치로써 남북한의 균형이 결정적으로 우리에게 유리해졌으며, 최초의 평화적 정권이양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기록될 때 비로소 그 분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기자가 이번 취재과정에서 만나본 전·현직 장성들, 군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이제 대한민국은 쿠데타도 민중혁명도 불가능한 나라가 되었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이번 총선에서 주요 정당을 업지 않은 재야 투사들이 많이 낙선하고, 허삼수(許三守)·이상재(李相宰)·허청일(許淸一)·강창희(姜昌熙)·김식(金湜)씨 등 민정당의 군 출신 개혁주도 세력이 무더기로 떨어져 {총선은 투사와 별들의 공동묘지가 되었다}는 말이 상징적으로 그런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제는 군대가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행동해도 실패할 것이며 일시적으로 집권에 성공해도 정권유지가 안 될 것이란 얘기가 지배적이었다. 이제 우리 사회는 군이 주도적 세력의 역할을 할 수 있던 시대를 지났다는 것이다. 군대도 언론, 관료, 학생, 종교, 기업 등 이 사회의 여러 세력집단 중 하나이며 그 상대적 비중은 날로 약화될 것이란 분석이었다. 그러나 군이 나서는 상황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역장성들도 {경찰력이 한계에 이르고 용공·좌경세력이 국기를 뒤흔들려고 할 때는 군이 구경만 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정권차원이 아닌 국가수호란 차원에서 군이 행동할 가능성은 있지만, 성숙돼 가는 국민과 정당의 정치의식이 그런 상황을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1980년 5월에 군이 나올 수 있었던 데 반해 1987년 6월에는 나올 수 없었던 이유는 80년 5월에는 중산층이 학생 편에 서지 않았던 데 대해 지난해 6월에는 학생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바꿔 말하면 중산층이 위기의식을 느낄 때 군부쿠데타의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뜻이다. 이런 경우에도 전군의 지지를 받는 세력이 아니면 정권장악에는 실패할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한 고위공무원은 {물리력으로 충돌하면 군대를 당할 세력이 어디 있는가. 그런 상황을 절대로 만들지 않아야 민주화가 된다}고 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지는 총선에서 민정당이 패배한 때문에 노(盧)대통령에 대한 군부의 지지가 약화될지 모른다는 기사를 실었다. 군 수뇌부가 김대중(金大中)씨의 재 부상(浮上)으로 약간 긴장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노련한 金씨의 온건선회는 그런 긴장을 해소시킬 수 있다는 기대를 낳게 하고 있다. 여권의 한 핵심참모는 {金大中씨가 盧대통령의 신임 투표에 승부를 걸려고 하면 정국이 시끄러워지고 군도 긴장할 것이다}고 내다보았다.
분단국가 군인의 보람과 슬픔
기자가 만난 대부분의 현역장교들은 {그래도 군대만큼 지역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집단도 드물 것이다}고 말했다. 서로 뒤엉켜 같이 뒹굴면서 동고 동락하는 중에 지역감정이 잊혀지고 만다는 것이다. 지역감정에 둔감한 군은 요즈음에 와선 {지역감정이 이래선 안 되는데…}하는 쪽으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고 한 대령은 말했다. 군부통치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은 군사문화의 그러한 좋은 점까지 잊게 하였다.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할 수 없게 한 경색된 분위기도 이제 풀리고 있다.
서울대학교의 한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장교들만큼 사람이 된 이들도 드물 것이다. 건강하고, 정직하고, 정의감 있고, 행동적이며 추진력이 있는, 만나서 유쾌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군인문화가 경제개발에 끼친 공헌은 굉장한 것이다} 흔히 예로 드는 것이 군의 경영·기획 제도가 행정·기업에 넘어가 현대적인 관리 기법으로 발전되었다는 사실이다. 해외로 뻗어 가는 국민적 에너지의 대 폭발을 군대경험으로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 남자들은 전쟁과 군 경험을 통해서 바닥까지 떨어지는 좌절과 모욕감을 맛보았다는 것이다.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는 맨 밑바닥에서 비로소 우러나는 용기와 희망을 한국인들은 터득하게 되었고 그 저력으로서 세계를 누비며 악착같이 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난관에 부딪칠 때마다 군대에서 겪었던 고생을 떠올리며 {에이, 군대 생활하는 셈치지}라면서 다시 용기를 얻고 돌파를 시도하는 [안되면 될 때까지]의 정신력이 한국의 발전에 큰 힘이 되었다는 풀이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군 조직의 수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젊은 날 2∼3년간의 군대생활이 한국인을 강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다. 부모와 가정의 품속을 떠난 감수성 예민한 젊은이들의 허전함을 잊게 해주는 기상나팔, 배고픔, 구타, 구보, 원산폭격, 그리고 연지편지… 이런 체험을 공유하면서 한국의 젊은이들이, 동질성을 갖게 된 것도 사실이다.
어떤 사람과 한 시간만 이야기해보면 군대 경험이 있는지, 없는지를 느낌으로 알아낼 수 있을 만큼 한국 남자들의 체질 속에는 군사문화가 배어있다. 앞으로의 문제는 민군 관계를 부마사태, 이전의 친선관계로 돌려놓으면서, 한국인과 한국 사회에 뿌리박은 군사문화를 승화시키는 일일 것이다. 민주화란 것이 군사 정권의 선의나 시혜에 의하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힘의 대결에 의하여, 즉 사회세력간의 역학 관계가 변화하는 결과로서 이루어진다는 교훈을 우리는 얻었다. 군사정권이, 민주화의 물결을 타게 된 것, 또 다른 군인정치가에 머물렀을 노태우(盧泰愚)씨가 극적으로 변신한 것, 장교들이 여론을 두려워하고 오히려 피해의식까지 갖게 된 것, 이런 일들이 모두 국민들의 강력한 권리주장으로 얻어낸 대가가 매우 비쌌던 변화이다.
군이 정치 판으로부터 퇴장하게 된 것도 그렇게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 동안 국민을 품속에 안았던 군은 이제야말로 국민의 품속에 안길 수 있게 되었다. 그만큼 국민은 커지고 군은 작아지며 착해지고 있는 것이다. 김민기(金敏基)씨가 전역하는 늙은 상사를 위해 작사·작곡했다는 [늙은 군인의 노래] 2, 3절엔 이런 대목이 있다.
아들아 내 딸들아 서러워 마라/ 너희들은 자랑스런 군인의 아들이다/ 좋은 옷 입고 프냐 맛난 것 먹고프냐/ 아서라 말아라 군인 아들 너로다/(중략)/ 내 평생 소원이 무엇이더냐/ 우리 손주 손목잡고 금강산 구경일세/ 꽃 피어 만발하고 활짝 개인 그날을/ 기다리고 기다리다 이내 청춘 다 갔네
분단국가의 군인 된 보람과 슬픔. 그런 애환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모른 척 해올 수밖에 없었던 국민들이 이제 희미해진 그 옛날의 추억을 되살려 내는 것, 거기서부터 민군 관계의 새로운 출발이 시작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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