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愛支緣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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緣起의 기본형은 無明에서 시작하여 老死(추가로 愁悲苦憂腦)로 끝나는 이른바 12支緣起입니다.
이후 無明緣起라고 칭합니다.
또한 識-名色 互緣이 나타나는 緣起가 있습니다. 이른바 齊識緣起 혹은 10支緣起입니다.
이 緣起는 無明緣起에서 無明과 行 支分은 나타나지 않고
老死의 緣을 역으로 추적하면서 육입-명색-識까지 따라가다가 識의 緣이 行지분으로 연결되지 않고
또 다시 名色으로 연결되어 名色-식-名色-육입---노사로 따라 내려가는 연기입니다.
[무명-행이 생략되었지만] <식-名色-육입---노사>의 흐름은 無明緣起의 흐름과 동일한 흐름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名色 緣 識의 의미가 파악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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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15(Mahānidānasuttaṃ)에서
"아난다여, 만일 알음알이가 정신 · 물질에 확립됨을 얻지 못하였는데도
미래에 태어남과 늙음 · 죽음과 괴로움의 일어남이 생긴다고 천명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알음알이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정신 · 물질이다.
Viññāṇañca hi, ānanda, nāmarūpe patiṭṭhaṃ na labhissatha,
api nu kho āyatiṃ jātijarāmaraṇaṃ dukkhasamudayasambhavo
[jātijarāmaraṇadukkhasamudayasambhavo (sī. syā. pī.)] paññāyethā’’ti? ‘‘No hetaṃ,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viññāṇassa yadidaṃ nāmarūpaṃ.
아난다여, 의식이 명색에 확립되지 않는다면,
그렇더라도 미래에 태어나고 늙고 죽는 괴로움의 발생과 생성이 시설될 수 있겠는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참으로 의식의 그 원인, 그 인연, 그 발생, 그 조건은 바로 명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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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識住(viññāṇañ patiṭṭhaṃ)하는 자리를 名色이라고 하면서
이 名色에 識住하는 것을 名色 緣 識이라고 간략하게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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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또 다시 識住하는 자리인 名色에 대한 추적이 필요합니다.
이 名色의 緣은 당연히 識입니다. 그러면 끝없는 순환(互緣)만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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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접근이 필요합니다.
경에서 緣起 혹은 緣而生이라는 표현이 나타나는 경문을 찾으면
하나의 경문이 나타납니다.
그 경문은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라는 유명한 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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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28(Mahāhatthipadopamasuttaṃ)
"안으로 마노가 손상되지 않았고
밖에서 법들이 마노의 영역에 들어오고
그곳으로 전향하는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에 상응하는 알음알이가 일어납니다."
Yato ca kho, āvuso,
ajjhattiko ceva mano aparibhinno hoti,
bāhirā ca dhammā āpāthaṃ āgacchanti,
tajjo ca samannāhāro hoti,
evaṃ tajjassa viññāṇabhāgassa pātubhāvo hoti.
벗들이여, 안으로 정신능력이 완전하고
밖에서 사실이 정신영역에 들어오고,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면,
그것에 일치하는 의식이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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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도반들이여, 이렇게 생긴 것 가운데서 물질은 취착의 [대상인] 물질의 무더기[色取蘊]에 속합니다.
이렇게 생긴 것 가운데서 느낌은 취착의 [대상인] 느낌의 무더기[受取蘊]에 속합니다.
이렇게 생긴 것 가운데서 인식은 취착의 [대상인] 인식의 무더기[想取蘊]에 속합니다.
이렇게 생긴 것 가운데서 심리현상들은 취착의 [대상인] 심리현상들의 무더기[行取蘊]에 속합니다.
이렇게 생긴 것 가운데서 알음알이는 취착의 [대상인] 알음알이의 무더기[識取蘊]에 속합니다.
Yaṃ tathābhūtassa rūpaṃ taṃ rūpupādānakkhandhe saṅgahaṃ gacchati,
yā tathābhūtassa vedanā sā vedanupādānakkhandhe saṅgahaṃ gacchati,
yā tathābhūtassa saññā sā saññupādānakkhandhe saṅgahaṃ gacchati,
ye tathābhūtassa saṅkhārā te saṅkhārupādānakkhandhe saṅgahaṃ gacchanti,
yaṃ tathābhūtassa viññāṇaṃ taṃ viññāṇupādānakkhandhe saṅgahaṃ gacchati.
이와 같은 상태에서 물질이라는 것은 물질의 집착다발에 포섭되고,
이와 같은 상태에서 느낌이라는 것은 느낌의 집착다발에 포섭되고,
이와 같은 상태에서 지각이라는 것은 지각의 집착다발에 포섭되고,
이와 같은 상태에서 형성이라는 것은 형성의 집착다발에 포섭되고,
이와 같은 상태에서 의식이라는 것은 의식의 집착다발에 포섭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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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와 같이 꿰뚫어 압니다.
이렇게 해서 취착의 [대상인]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들의 모임, 적집, 더미가 만들어집니다.
So evaṃ pajānāti –
‘evañhi kira imesaṃ pañcannaṃ upādānakkhandhānaṃ saṅgaho sannipāto samavāyo hoti.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참으로 이러한 것들은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에 포섭되고, 집합되고, 결합된다.’라고 이와 같이 잘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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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반들이여, 참으로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연기(緣起)을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라고,
취착의 [대상인] 이 다섯 가지 무더기들은 조건 따라 생긴[緣起] 것입니다.
Vuttaṃ kho panetaṃ bhagavatā –
‘‘yo paṭiccasamuppādaṃ passati so dhammaṃ passati;
yo dhammaṃ passati so paṭiccasamuppādaṃ passatī ’’ti.
Paṭiccasamuppannā kho panime yadidaṃ pañcupādānakkhandhā.
그런데 세존께서는 ‘연기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고, 진리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라고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은 연기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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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착의 [대상인] 이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들에
욕심내고 집착하고 친밀하고 탐착하는 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입니다.
Yo imesu pañcasu upādānakkhandhesu
chando ālayo anunayo ajjhosānaṃ so dukkhasamudayo.
이러한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에
욕망하고 집착하고 경향을 갖고 탐착하는 것은 괴로움의 발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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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착의 [대상인] 이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들에 대한
탐욕과 욕망을 제어하고 탐욕과 욕망을 제거하는 것이 괴로움의 소멸입니다.
Yo imesu pañcasu upādānakkhandhesu
chandarāgavinayo chandarāgappahānaṃ so dukkhanirodho’ti.
이러한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에서
욕망과 탐욕을 제거하고 욕망과 탐욕을 버리는 것이 괴로움의 소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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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경문을 인용한 이유는
5蘊-取(pañcannaṃ upādānakkhandhānaṃ)가 일어나는 과정을 緣起라고 하며
이러한 5蘊-取를 緣而生法(緣起에 의해서 생겨난 法)이라고 합니다.
즉 緣起를 설명하는 경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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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경문에서는 내입처(안이비설신)意와 외입처(색성향미촉)法 사이에서
일정한 조건이 갖추어지면 5蘊이 생겨난다고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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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내입처-외입처에서 5蘊이 생겨나는 과정을 추적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막상 이 과정은 여러 경에서 자세하고 다양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즉 6내입-6외입-6識身-6觸身-6受身- 그리고 -6想身-6思身-6愛身-6界-5蘊의 흐름입니다.
이하 59法이라고 칭하겠습니다. 이른바 66法입니다.
또 다른 형태의 66法이 있습니다.
6내입-6외입-6識身-6觸身-6受身- 그리고 -6想身-6思身-6愛身-6尋-6伺
이하 60法이라고 칭하겠습니다.
마지막 6界-5蘊과 6尋-6伺의 차이입니다.
또한 59法과 60法이 모두 나오는 경문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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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60法이 나오는 경문 D22(Mahāsatipaṭṭhānasuttaṃ)에서
이 60法을 갈애가 일어나거나 머무는 곳이며 이 愛가 苦의 集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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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인가?
Katamañ ca bhikkhave dukkha-samudayaṃ ariya-saccaṃ?
26. [세존]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란 어떠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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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갈애이니,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횐희와 탐욕이 함께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다.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갈애(無有愛)가 그것이다.
Yāyaṃ taṇhā ponobhavikā nandi-rāga-sahagatā tatra tatrābhinandinī,
seyyathīdaṃ kāma-taṇhā bhava-taṇhā vibhava-taṇhā.
그것은 바로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향락과 탐욕을 수반하며 여기저기에서 환희하는 갈애 곧,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갈애는 어디서 일어나 어디에 안주하는가?
세상에서 사랑스러운 것, 즐거운 것이 있다면, 갈애는 그곳에서 일어나 그곳에서 안착한다.
‘‘Sā kho panesā, bhikkhave, taṇhā kattha uppajjamānā uppajjati, kattha nivisamānā nivisati?
Yaṃ loke piyarūpaṃ sātarūpaṃ, etthesā taṇhā uppajjamānā uppajjati, ettha nivisamānā nivisati.
다시 비구들이여, 이런 갈애는 어디서 일어나서 어디서 자리 잡는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 있으면 거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서 거기서 자리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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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ñca loke piyarūpaṃ sātarūpaṃ?
그러면 세상에서 어떤 것이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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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1) 시각은 ~ 6) 정신은 세상에서 사랑스러운 것, 즐거운 것이므로,
갈애는 그곳에서 일어나 그곳에서 안착한다.
Cakkhu … mano loke piyarūpaṃ sātarūpaṃ,
etthesā taṇhā uppajjamānā uppajjati, ettha nivisamānā nivisati.
눈은 ~ 마노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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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1) 형상은 ~ 6) 사실은 세상에서 사랑스러운 것, 즐거운 것이므로,
‘‘Rūpā loke… dhammā loke piyarūpaṃ sātarūpaṃ,
형상은… (마노의 대상인) 법(法)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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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1) 시각의식은 ~ 6) 정신의식은 세상에서 사랑스러운 것, 즐거운 것이므로,
‘‘Cakkhuviññāṇaṃ loke… manoviññāṇaṃ loke piyarūpaṃ sātarūpaṃ,
눈의 알음알이는… 마노의 알음알이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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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1) 시각접촉은 ~ 6) 정신접촉은 세상에서 사랑스러운 것, 즐거운 것이므로,
‘‘Cakkhusamphasso loke… manosamphasso loke piyarūpaṃ sātarūpaṃ,
눈의 감각접촉(觸)은… 마노의 감각접촉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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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1) 시각접촉에서 생겨난 느낌은 ~ 6) 정신접촉에서 생겨난 느낌은 세상에서 사랑스러운 것, 즐거운 것이므로,
‘‘Cakkhusamphassajā vedanā loke… manosamphassajā vedanā loke piyarūpaṃ sātarūpaṃ,
눈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마노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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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1) 형상에 대한 지각은 ~ 6) 사실에 대한 지각은 세상에서 사랑스러운 것, 즐거운 것이므로,
‘‘Rūpasaññā loke… dhammasaññā loke piyarūpaṃ sātarūpaṃ,
[*이후 根과 境의 자리를 바꾸어 번역되어 있다. 즉 色의 인식- 눈의 인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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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 1) 형상에 대한 의도는 ~6) 사실에 대한 의도는 세상에서 사랑스러운 것, 즐거운 것이므로,
갈애는 그곳에서 일어나 그곳에서 안착한다.
‘‘Rūpasañcetanā loke… dhammasañcetanā loke piyarūpaṃ sātarūpa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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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I. 1) 형상에 대한 갈애는 ~ 6) 사실에 대한 갈애는 세상에서 사랑스러운 것, 즐거운 것이므로,
갈애는 그곳에서 일어나 그곳에서 안착한다.
‘‘Rūpataṇhā loke… dhammataṇhā loke piyarūpaṃ sātarūpa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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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X. 1) 형상에 대한 사유는 ~ 6) 사실에 대한 사유는 세상에서 사랑스러운 것, 즐거운 것이므로,
‘‘Rūpavitakko loke… dhammavitakko loke piyarūpaṃ sātarūpa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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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 1) 형상에 대한 숙고는 ~ 6) 사실에 대한 숙고는 세상에서 사랑스러운 것, 즐거운 것이므로,
‘‘Rūpavicāro loke… saddavicāro loke… gandhavicāro loke… rasavicāro loke… phoṭṭhabbavicāro loke…
dhammavicāro loke piyarūpaṃ sātarūpaṃ,
etthesā taṇhā uppajjamānā uppajjati, ettha nivisamānā nivis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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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승들이여, 이것을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라고 부른다.”
Idaṃ vuccati, bhikkhave, dukkhasamudayaṃ ariyasaccaṃ.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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苦集聖諦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본 경이고 다른 하나는 無明緣起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경문이 있는 것으로 짐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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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꼿티따] “벗이여, 어떻게 미래에 다시 태어나 윤회합니까?”
[싸리뿟따] “벗이여, 뭇삶들은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여
여기 저기 환락을 즐기며 이와 같이 미래에 다시 태어나 윤회합니다.”
‘‘Kathaṃ panāvuso, āyatiṃ punabbhavābhinibbatti hotī’’ti?
‘‘Avijjānīvaraṇānaṃ kho, āvuso, sattānaṃ taṇhāsaṃyojanānaṃ tatratatrābhinandanā –
evaṃ āyatiṃ punabbhavābhinibbatti hotī’’ti.
16. "도반이시여, 어떻게 미래에 다시 태어남이 있습니까?"
"도반이시여, 중생들이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속박되어
여기저기서 즐기기 때문에 이와 같이 미래에 다시 태어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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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경에서는 미래의 再-有(bhava)의 원인을 무명-갈애 두 가지를 지목합니다.
지금 현재 '여기저기서 즐김 때문에' 미래의 有(bhava)가 생겨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有(bhava)는 緣起에서 愛-取-有(bhava)-生의 흐름에 나오는 支分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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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지금까지의 흐름에서만 보면 내입-외입---에서 5蘊(갈愛가 일어나거나 머무는 곳)
그리고 이러한 66흐름, 줄여서 5蘊이라고 한다면 5蘊을 取하면 有(bhava)로 연기된다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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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 取(upādāna)가 어떤 의미인지 찾아 보겠습니다.
기본적인 정의는 경에 나타나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고
먼저 이 取자리에 들어 갈 수 있는 단어, 법수들은 4食, 結縛, 무명촉수-愛-行의 行 등으로
논지의 흐름에 맞는 부분만 의견을 드리면
取는 '나를 만들고, 내 것을 만드는' <거머 쥠> 邪見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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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 혹은 結縛이 동일한 구문상에서 나오는 경문들이 있습니다.
또한 名色 대신에 識이 나오는 동일한 구문도 있습니다.
즉 結縛 되어질[取 되어질] 법들에서 달콤함을 보면서 머무는 자에게 名色[識]이 현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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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들이여, 족쇄에 묶이게 될 법들에서 달콤함을 보면서 머무는 자에게 정신∙물질이 출현한다.
‘‘saṃyojaniyesu, bhikkhave, dhammesu assādānupassino viharato nāmarūpassa avakkanti hoti.
[세존] ""수행승들이여, 결박의 대상이 되는 현상에서 즐거움을 보는 자에게는 명색이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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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의 흐름을 정리하면
1. 6내외입처에서 66법들, 줄여서 5온이 緣起.
2. 이 66법들은 갈애가 일어나는 자리. 또한 취/결박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법.
3. 결박/취 되면 이른바 5蘊-取. 이러한 취/결박되어질 법, 즉 66들을 달콤한 것으로
지금 현재 수관하며 사는 자에게 (지금) 名色이 현현한다. 혹은 미래에 再-有가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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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입에서 66들 줄여서 5蘊 연기 - 갈애가 일어나는 곳 -取/결박되어질 법 - 그리고 有-名色
5蘊-取에서 名色으로 [**5蘊 名色이라는 표현이 적용되는 시점**],
소위 미래의 死-生간의 再有(生有)와 대비되는
현재 生-死간의 有, 즉 變成(業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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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되돌아 갑니다.
이렇게 갈愛가 일어나는 곳인 66법<取의 대상이 되는 법>들이 有=名色화 됩니다.
이렇게 名色화 된 名色에 識住합니다. 名色-緣-識.
즉 66들이 名色화 될 食(밥)재료 입니다.
取된 것이 食(밥)이고, 그 食(밥)이 變成된 名色에 識이 거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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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제기되었던
<識住(viññāṇañ patiṭṭhaṃ)하는 자리를 名色이라고 하면서
이 名色에 識住하는 것을 名色 緣 識이라고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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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 돌아 온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러한 과정이 愛支緣起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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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無色은 빠진 < (색계와 욕계의) 色-緣起가 愛支緣起> 즉 10支연기이며,
여기에 無色이 포함된 <=名에 의한 名-緣起, 無明緣起>가 12支연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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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관계를 보여주는 경문이 S12:19(Bālapaṇḍitasuttaṃ)
“비구들이여,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여서 어리석은 자의 이 몸은 이와 같이 생겨난다.
‘‘avijjānīvaraṇassa, bhikkhave, bālassa taṇhāya sampayuttassa evamayaṃ kāyo samudāgato.
"수행승들이여,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인 [24] 어리석은 자에게는 이 현세의 몸이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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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이 몸과 밖의 정신∙물질이 생겨난다.
Iti ayañceva kāyo bahiddhā ca nāmarūpaṃ,
<이처럼 (識을 지닌) 이 身과 外로 名色이 있다>...에서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을 감안하면
이 身은 名身(心行)임을 알 수 있고
여기에서 身行(4大의 色身)이 추가되면 그것이 名色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6處들은' 色身중에서 慾(까마)과 결합된 거친 몸을 나타냅니다.
즉 짧은 문장내에서 無色界-色界-慾界로의 緣起가 모두 포함된 경문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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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thetaṃ dvayaṃ, dvayaṃ paṭicca phasso saḷevāyatanāni [saḷāyatanāni (ka.)],
["여기에서 그 쌍이 있으며, 쌍을 연하여 촉이, 이렇게 하여eva(="쌍을 연하여?") 육입들sal-ayatani이 있다"]
yehi phuṭṭho bālo sukhadukkhaṃ paṭisaṃvedayati etesaṃ vā aññatarena’’.
愚者든지 賢者든지 그것들이나 그것들 중 어느 하나에 접촉됨으로써 樂과 苦를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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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017년 본카페에 주구장창 했던 그 말이 그말이고, 그 경문이 그 경문입니다.
올 한해동안 공부했던 내용을 년말을 맞아서 맞고 틀리고를 떠나
스스로 정리한다는 차원에서 본 문을 올렸습니다.
본문의 내용중 거의 대부분은 본 카페에서 배운 내용입니다.
<즉 선행되는 연구는 전혀 없습니다. 국내 논문은 물론 외국은 더 더욱^^>
아위자님께 감사인사 드립니다. 나무님께도 감사.
모든 도반님들께도 고마운 인사를 올립니다.
가차없는 비판을 요청합니다. _()_
처음 시작은 색계 4선에서 初禪에 나오는 尋伺가 무엇에 대한 尋伺이며
어떻게 尋伺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추적하다가....
5蘊과 名色간의 연결고리를 찾다가... 緣起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물이 본문이고 <숙제검사>를 한 번 받아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혹시 건너 뛴 부분이나 확대해석한 점이 있는지
혹은 부분 부분에서 잘못 이해한 것이 있는지
어떠한 내용 어떠한 부분이라도 좋으니
의견 혹은 질책을 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_()_
kāma-taṇhā(慾界에 대한 愛, 慾愛), bhava-taṇhā(존재에 대한 愛, 有愛), vibhava-taṇhā(바존재에 대한 愛, 非有愛)..... 일 때.......... 거기에서 bhava-taṇhā(존재에 대한 愛, 有愛)가 바로 <'無明'을 食(자양분)으로 생겨나는 것>인데요[=경전의 지적임!]...... 그러하기 때문에 ..... 12연기의 유전문에서는 'kāma나 vibhava'는 언급되지 않고 'bhava'[=열 번째 지분]만 언급되는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kāma'는 밖으로 識이 흩어진 것인데요 ... 그러한 원인이 愛때문이고요......'vibhava'는 탐진치 중에서 치때문이고 邪見때문에 <자살을 해결책이라고 착각한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그와 같은 taṇhā(愛)들은[=고집성제의 내용들]........
모두 '六六(法)'에서 생겨나고, '六六(法)'에 자리잡고, '六六(法)'에서 성장하는 것들이거든요.......
따라서 愛支연기란? .......... <'六六(法)'의 연기>를 지칭하는 연기가 맞구요............
문제는 <무명과 愛支연기[='六六(法)'의 연기]와의 관계>에서 '무명이 中'이라는 지적. 이하 행부터 식에 이어지면서 노사까지 .......... 모조리 '中'!
저는 그렇게 봅니다.
@아위자 그러한 '中'의 滅道가 <중도인 팔정도[=37조도품]>이라고 보거든요.
거기에서 <識도 中, 名色도 中>이라는 점이 어렵기는 하지만..........
저는 <心과 名色과의 관계>는 <心과 오온과의 관계>에서 '명색'이 中이라고 보는 것인데요..........
그러한 이유는 '오온'에 있다고 봅니다. 오온을 꺼꾸로 배열해 보면 <中인 (六)識[=識취온]의 관점>에서 보면 그대로 명색이고요...... 心의 관점에서는 <色界, 수계, 상계, 행계, 識界>거든요...... 心의 관점에서는 '다섯 종류의 界가 모두 평등한 界'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아위자 그러하기 때문에 <名色의 集이 心의 集>이 되려면....... 중간에 身[=명신과 색신]이 반듯이 개입되어 있어야만 한다고 저는 봅니다. ....... 이론적으로는 반듯이 "그렇게 되어 있어야'만 한다고 보는 것 ..........입니다.
@아위자 녜. 감사합니다. _()_
//'무명이 中'이라는 지적. 이하 행부터 식에 이어지면서 노사까지 .......... 모조리 '中'!//
즉 무명-행-식-명색-육입-<촉>-수-애-취-유-생-노사..... 모두가 中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촉>도 또한 中이여야 하는데....
<촉>은 中이 아닌 극단중의 하나이고 <촉멸>이 中이라는 말씀과 상충되는 것은 아닌지요?
@아위자 따라서 <身[=명신과 색신]의 集>=<食의 集>이므로...... 그러한 것이 <명색의 집>이러고 봅니다.
거기에서 추가로 <身[=명신과 색신]이 갖춘 六門을 통하여> 四食이 이루어지면[=특히 '물질식'] ...... 거친 자아인 <거친 身>이 쌓어서 욕계의 현현이 성립하므로[=六界를 조건으로 입태가 이루어져] ........ 욕계 중생으로써의 bhava가 완성되는데....... 그것은 <識을 bhava-taṇhā(존재에 대한 愛, 有愛)가 도와서> 되는 것.............이라는 지적.
@봄봄 '봄봄'님께서는 ........ 극단[=극단을 거뭐진 邪見]과 정견을 혼동하시는 것이라고 저는 보는데요.....
<유전문>과 <유전문에 대한 '앎(智)'>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유전문>은 무명 때문에 이어지는 연기를 말하는 것이고.............
<유전문에 대한 '앎(智)'>은 정견 때문에 생겨나는 44智, 77智 등등의 법주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며.......... 中이라는 용어는 <유전문에 대한 '앎(智)'>과 관련되어 언급되는 용어입니다. .......이미 여러차례 지적하고 밝혔는데도 불구하고......... 말하자면 '아위자'의 견해는 ........ 이미....... 누차 "밝혔습니다."!
@아위자 예를 들어 ....... <질병>과 <질병에 대한 '앎(智)'>은 다르지 않습니까?
<고>와 <고에 대한 '앎(智)'>이라는 것이 다르듯이............
그와같이 <유전문>과 <유전문에 대한 '앎(智)'>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 말자면 관련경문에서 '中'이라고 지적되는 것들은 하나 같이 '앎(智)'과 관련되는 것들이거든요........... 그래서 '아위자'는 <中道는 '앎(智)'과 관련되는 빠띠빠다(방도)>라고 ....... 혼자 속으로 정의하고 있고........... 그러한 속마음은 살짝 내 비치기도 하였는데..... '그 어떤 분'께서 댓글로 "그건 아니지 싶다."라고 지적하시기에 .......... 더 이상 언급을 하지는 않았었습니다.
@아위자 그렇지만....... 사념처 관련 경문에서 <名色의 集이 心의 集>은요......
무명 때문이고요....... 명색에 대한 지집멸도가 있으면 .. 명색은 사라집니다. 그렇게 되면 心도 사라지게 되는데요...... 그러한 것이 심해탈이면서 동시에 혜해탈이라고 저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함>!
@아위자 말하자면 <찬란하게 빛나는 '識'>이라는 것이 바로 <반야>를 지칭하는 표현이라고 봅니다.
@아위자 <식과 반야>를 엄밀하게 구분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거든요............
경전의 지적에 의하면 ....... 식은 저절로도 생겨나는 것이지만, 반야는 닦아야만 생겨난다고 하는 차이점 정도?
@봄봄 또한 // '中'의 滅道가 <중도인 팔정도[=37조도품]>//
中 = [촉멸, 현재, 비고비락, 식, 유신멸]의 멸도가 중도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유신멸]의 멸도라는 의미가?
@아위자 식 알음알이는 육내외입처( 신-촉) 두변을 세워서 가지게된 중간입니다. 숨쉬는 몸(신)과 숨결 닿음(촉)으로부터의 알음알이(사대물질)를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sampajana이고, 사대물질의 생성소멸과 정신작용 명의 생성소멸을 구족하는 바가 마음챙김 sati입니다. 반야지혜는 sampajana와 sati로부터의 중 닦음(중도의 앎)과 적정의 구족과 사성제 정견이겠죠.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숙제검사> .....어렵지요? ....... 숙제보다. 답이 더 어려워~~~~~~~~~요. ㅋㅋㅋㅋㅋㅋㅋ
그건 그렇고 <매리크리스마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아위자 녜. 감사합니다. _()_ ^^;;
@봄봄 "지금 현재 수관(육내외입처를 올바로 세워서 중간을 튼튼히)하며 사는 자에게 (지금) 名色이 현현한다" 명색 관련 논문이
없다고 하시는데, 니까야 관련 논문을 추천합니다.
박훈천․이순옥, 「원시불교에서의 중에 대한 오해」, [한국불교학]제43집, 한국불교학회, 2005), 육근과 육경을 조건으로 생겨난 일체 부터 시작하시길 권하는 내용입니다. 연휴에 앎이 충만하시길...
@mindsati 하이고~ 표현을 잘못하였습니다.
다른 분들의 논문을 참고한 것이 아니라
본 카페에서 배운 것만 가지고 의견을 드렸습니다.
이런 의미였습니다. ^^;; 표현이 부주의 했습니다.
_()_
Avijjā ca <bhava>[taṇhā] ca – ime dhammā abhiññā pahātabbā.
色-緣起가 愛支緣起, 즉 10支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