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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민(주일낮)
삶의 자리에서(마9:9-13) 대민성결교회 이석민 목사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게획하신 구원 사역을 위해 필요한 인물들을 적절한 때 부르십니다. 온 우주 만물을 다 창조하시고 지금도 그 모든 것을 운행하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가장 적절한 인물을 선택하시어 가장 적절한 장소에 보내시고, 가장 적절한 기간 동안 일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3년이라는 짧은 기간 이었지만 그 짧은 기간에 날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사셨습니다.
자신이 직접 복음을 전파하셨을 뿐 아니라 12사도와 70제자들을 훈련시키셔서 그들로 하여금 전도하게 하셨고,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자신이 친히 복음을 전파하셨을 뿐 아니라 제자들을 훈련시켜 복음을 전파하게 하신 것은 복음전도를 자신의 가장 큰 사명으로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이 일군을 선발하는 일이었습니다.
본문의 주인공인 마태는 세관에 앉아 세금을 거두는 관리로서 자기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레위는 마태복음을 기록한 사도 마태입니다. 그가 세관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사도기 되었습니다(마 9:9-13).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일에 충실한 사람을 불러 일꾼을 삼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호렙산 부근에서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고 있던 모세를 부르셨고(출 3:1-10), 또 들에서 아버지 이새의 양을 치던 다윗을 불러 선지자[대언자]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게 하셨습니다(삼상 16:11-13).
일꾼이 되는 것은 사람에게 있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꾼을 일으키시며 원하는 자들을 부르십니다.
요한복음 15장16절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고린도전서 4장 12절에 “맡은 자의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충성’(πιστός, 피스토스)이란 ‘믿을 수 있는 것’을 뜻합니다. 충성은 신앙입니다.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충성으로서 그 신앙을 나타내야만 합니다. 충성은 꾸준히 하는 것입니다. 작은 일에도 하는 것입니다. 어려울 때에는 더욱 더 잘 합니다. 변함없이 끝까지 합니다. 죽음 앞에서도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부름을 받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 때에 발생할 손익에 대해 계산하지 않고 따라나섰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의 바른 자세입니다.
마태처럼 삶의 자리에서 충성을 다하므로 충성스런 일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세관에 앉은 것을 보셨습니다.(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예수님은 레위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레위가 개심하고 이제는 아주 정직한 관리로서 직책에 충성한다는 소문과,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동료 유대인들에게 빈축을 받고 상종하지 못할 더러운 사람으로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리인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마태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감당하는 자리에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만일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지 않았더라면 부름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싫어했던 세리였지만 마태는 그 일에 충실하였습니다.
그런데 마태가 거주하던 가버나움 근교의 이곳은 교통의 요충지로 다메섹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큰 도로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애굽으로 통행하던 대로가 서로 만나는 교차로 근처에 위치하여 정치, 경제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몫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Donald W. Burdick).
특히 이곳은 헤롯 빌립의 관할지인 데가볼리로부터 오는 여행자들이 안디바 관할 지역에 처음으로 들어서는 곳, 즉 가버나움을 통해서 갈릴리와 유대 지역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곳이었습니다.
한편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문자적으로 '세를 징수하는 곳에 있었다'는 뜻으로 그의 신분이 세리였음을 단정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한편 유대인의 자료에 의하면 이 세리는 두 계층의 세무 관리로 구별된다고 합니다. 즉 수입세와 인두세를 걷어들이는 관리와 교량이나 운하나 국도에서 통과세를 걷어들이는 관리인데, 후자가 더 증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 세금 부과를 임의로 정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는 아마도 다메섹에서 가버나움을 거쳐 지중해 해변 쪽으로 가는 노상에 위치한 통행료를 징수하던 곳에서 일하였던 듯합니다. 실로 그는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철저한 경멸과 증오를 받는 죄인의 그룹에 속했던 자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호크마 주석 마가복음2장14절]
당시 지방 사람들은 세리를 아주 나쁘게 인식했습니다. 지배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자국민의 고혈을 짜서 착복을 하는 매국노로 보았습니다.
그런데다가 당시 유대교의 기득권 세력인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율법 해석과 자신들이 세운 전통적 규례를 따르지 않는 세리들을 죄인으로 정죄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 의식적으로 부정한 자로 규정한 나병환자를 공동체에서 격리시켰듯이, 세리들도 부정한 자로 규정하여 모든 종교적 혜택을 박탈시켰습니다. 세리들이 회당에 들어가는 것도 금지시켰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금지 시켰고 성전에서 헌금을 하는 것도 금지 시켰습니다. 그들이 드린 헌금은 하나님 앞에 더러운 돈이라 하여 받지 않은 것입니다.
사실 마태에게 그 날은 그에게 다른 날과 다를 게 하나도 없는, 그렇고 그런 하루였습니다. 아침을 먹었습니다. 아마 어젯밤에 술 한 잔 했으면 조금 피곤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아침에 가족과 인사를 나누고 세관으로 출근했을 것입니다. 차를 마시며 동료들과 함께 그날 처리해야 할 업무를 의논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주 평범한 어떤 날에 그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렇게 역사는 우연한 방식으로 사소한 일상을 우주론적 사건으로 만듭니다.
이러한 가운데 마태는 자존심이 상해야 옳습니다. 마태가 청년의 나이에 세관에 앉아 있어야 했던데 는 다음 두 가지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식민 통치하에서 먹고살기 위해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세관에 취직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극히 현실주의요, 실리주의 인생관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공 지상주의입니다. 비난, 손가락질, 도덕(윤리)적 일탈 등에 눈을 감아 버리고 오로지 성공하기만 하면 결국 그 성공을 인정받고 상류층 사회로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확고한 판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눈 딱 감고 그는 레위지파 임에도 불구하고 세리가 되었으며, 지금 세관 앞에 책상을 내다 놓고 뻔뻔스러운 얼굴 그대로 앉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두고, 그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불러주셨다고 하는 것은 해석학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과연 마태가 “내가 열심히 내 할 일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를 불러 주셨다”고 주장하기 위해 이 글을 기록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리는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비난을 받던 사람입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앞잡이라 취급받았고, 사회경제적으로는 도둑놈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은 그 자체가 죄악시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마태복음이 기록되고 읽힐 무렵, 누구도 마태가 자기의 일을 충실히 하니까 예수님께서 그를 주목하고 불러주셨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불러주셨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세관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내가 술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돈을 벌려고 담배를 팔고 가짜 양주를 팔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나를 불러주셨다”라는 식으로 이해를 해야 맞습니다.
이런 점에서 마태는 먹고살기 위해 세상과 타협하며 죄인의 삶을 살았던 나를 예수님께서 불러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자리로 찾아오십니다.
비록 대우 받지 못하고 멸시천대 받은 마태 세리에게 찾아가셨던 그 발걸음으로 오늘 나의 삶의 자리에 찾아오십니다.
그 결과로 인해서 우리는 구원의 자리, 믿음의 자리에서 새로운 인생의 의미를 찾으면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도 된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사회를 발전시키고 더욱 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러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서는 우리가 처해 있는 삶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책임을 다함으로 우리의 사명을 잘 수행하는 것입니다.
2.죄인들과 함께 잡수셨습니다.10-11)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
본문10절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에 마태가 예수님과 친구들을 초청해서 잔치를 벌이는 장면입니다. 세리 생활을 마감하는 마태의 송별회 같기도 합니다.
예수님 일행은 레위의 집에 초청받아 들어가 앉아 잡수셨을 때,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았습니다. 그것은 그들 중에 예수님을 좇는 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라는 말은 전통본문에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로 되어 있습니다.
서기관들은 보통 바리새인들 중에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그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그들은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먹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가 의인이라면 왜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가?” 그들은 이것을 죄인들과의 교제라고 잘못 생각하였습니다.
당시 보통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집에 가지도 않고 함께 식사 나누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세리를 이방인처럼 취급했던 당시 분위로 보아서 예수님의 하시는 행동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너희 선생은 그 정도밖에 안 되느냐는 것입니다.
부정한 죄인과 함께 먹는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묻는 것은 율법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예수님을 정죄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랑의 실천보다, 율법의 기준을 더 중요시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생명보다, 명분을 더 중요시 했던 사람들입니다.
사실 이들 바리새인들은 잔치에 초대 받은 것도 아니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찾아온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지키시는가? 아닌가? 말과 행동을 지키기 위하여 온 자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생각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라면 죄인들과는 자리를 함께 하지 않은 것이라고 믿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율법을 더럽히는 것으로 여겨 제자들에게 비난을 한 것입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이들은 끝까지 지켜보며 결점을 찾은 것입니다. 먼저는 선생과 제자들과 사이를 이간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말한 것은 예수님께 직접적으로 말할 만큼 용기가 없었던 것인데, 그것은 에수님께서 행하신 중풍병자를 고치신 권능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마음으로 판단하는 것까지 들으시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으신 죄사함과 중풍병자를 고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직접 주님께 말하지 못하고 제자들에게 말한 것입니다.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이 말은 너희 선생 예수는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는 이상 “결코 의인이 될 수 없다, 즉 메시아가 아니다”는 뜻의 말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식사 교제를 하신 것은 그들의 망가진 삶을 고쳐주시려는 긍휼의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일방적인 긍휼을 입은 사람들이 누리게 될 풍성함이 가시화 된 것이 예수님과의 식탁 교제였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식탁 교제는 “너와 나는 동등하다”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식탁교제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왜 히브리인들이 이방인들과 밥도 같이 안 먹었을까요? 너희들과 우리들은 확연히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너희는 개와 같은 존재기 때문에 감히 우리와 함께 식사할 수 없다” 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식탁 교제는 단지 음식을 먹는 차원이 아닙니다. 경계를 허물고 서로를 받아들이고 연대와 통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식구(食口), 즉 한솥밥 먹는 가족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의 관점에서도 이들은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인 형제와 자매입니다. 마태의 잔치를 넓은 들판에 수만 명이 모여서 하면 ‘오병이어’가 되고, 그것을 다시 온 세상 모든 그리스도인이 세상 끝날까지 하는 것이 ‘성찬예식’입니다.
마태복음이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사회적으로 배척받고, 모두가 꺼리는 죄인, 세리까지도 친히 받아주시고 소통하시고 교제하시며, 결코 그들이 구원에서 배제되지 않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판한 것은 유대교의 규례에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는 곧 죄인’으로 규정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규정은 율법을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수라도 사랑할 것을 명하셨습니다(출 23:5). 또 원수라도 주리거든 먹이라고 하셨습니다(잠 25:21-22).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 일은 보다 적극적으로 율법을 지킨 것이지 율법의 정신에 어긋나는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을 지키시고 그것을 완성시키려고 오신 분이 율법을 어기시겠습니까?
그럼에도 유대교인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율법을 해석하여 사람을 정죄하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사랑의 법까지도 판단하고 정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삶의 자리에서 함께 잡수심으로 죄인 된 모두를 사랑하심을 표현하셨습니다.
3.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셨습니다.(12-13)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오늘날 교회를 오래 다닌 성도조차도 쉽게 잊어버리는 매우 중요한 기독교의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 유대인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의인이 되기 위해 엄청난 종교적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눅18:11,12).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아도 의인, 선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타당하고, 죽더라도 착하고 선한 이를 위해 죽는 일이 타당해 보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합니다(롬5:8).
사람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스런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모든 사람은 모두 죄인입니다. 자주 절망하는 죄인이 있는가하면 자주 교만해지는 죄인이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게 죄를 짓는 죄인이 있는가하면, 속으로 은밀하게 죄 짓는 죄인이 있습니다. 거룩하게 살지 못하는 죄인이 있는가하면, 거룩하지 못한 자들을 판단하는 죄인이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도토리 키 재기일 뿐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영접을 받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휼 없이 바르게 신앙생활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가리켜 죄인이라고 생각해서 예수님을 찾아온 자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드문 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자기를 죄인이라고 말하기를 싫어합니다.
죄인이라고 고백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을 미화하고 보호함으로 남에게 죄인으로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죄를 몹시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죄 자체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죄인으로 지적 받기를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면 교회 안에서도 죄를 말하면 싫어합니다. 죄를 말하지 않는 교회, 죄를 말하지 않는 설교자를 찾아 다닙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느낀 사람은 자신을 개혁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죄인이라는 말 자체를 싫어하니까 죄인 된 자신을 바꾸는 변화를 거부합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도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변화가 없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언제나 그와 같은 두 그룹의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였습니다. 이 같은 현상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을 통해 교양이나 얻으려는 사람들. 영적인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 십자가 밑에서 눈물을 흘려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 나의 것이 모두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은 지금도 죄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본문에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는 말씀은 당시 흔히 통용되던 속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도록 이러한 속담을 인용하여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대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정확하고 명쾌한 답변을 하셨습니다. 병든 자만이 의원의 도움이 필요하므로 의원이 있어야 할 자리는 병자들 곁이란 것입니다.
의사는 병든자가 있을 때 필요합니다.
만약 이 세상에 병든 자가 없다면 의사는 필요치 않습니다. 훌륭한 의사일수록 중환자를 고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모두 의인이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 된 종 이었다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며 우리를 살펴주시기만 하시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훌륭한 의사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죄인이라도 구원하십니다. 여기서 죄란 살인, 간음 육신적인 죄 뿐만 아닌 마음에 있는 미움, 시기, 질투, 정욕 등 모두를 말합니다. “누군가를 한 번이라도 미워 해본적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마음에 음욕을 품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 누구나 죄인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죄인의 모습으로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의인’은 참 의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의인인체 하는 바리새인들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사실은 의인인체 하는 바리새인들이야말로 영적으로 보면 병들었으면서도 병든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건강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스스로 건강하지 못한 것을 알고 겸손히 영혼의 의사이신 예수님께 무릎을 꿇는 사람들은 치유와 회복의 소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에게 찾아 왔습니다. 세리와 창기처럼 버림 받은 자에게 찾아 왔습니다. 한센씨 병으로 완전히 죽음만 바라보는 소외된 자에게 찾아 왔습니다. 굶주리고 실패한 자에게 찾아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며 외롭게 살아가는 세리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왔습니다. 사랑과 용서가 필요한 죄인들을 위해서 왔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사람들은 죄라고 하는 영혼의 무서운 병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인생은 죄 가운데서 살다가 죄 가운데서 멸망합니다. 그런데 인생들에게 이 죄를 알려 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 한가지는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만이 우리의 죄를 가르쳐 주며 그 치료하시는 의원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 있었던 마태를 부르시듯 지금도 죄인들을 부르십니다. 우리는 과연 이 같은 부르심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는 생애를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보며 삶의 자리에서 죄인 된 우리를 불러 주신 예수님의 은혜에 늘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1.세관에 앉은 것을 보셨습니다.(9)
2.죄인들과 함께 잡수셨습니다.10-11)
3.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셨습니다.(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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