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26년 10월 4일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 후 열 아홉째 주일)
정주ㆍ정진ㆍ순명
출20:1~4, 7~9, 12~20; 빌3:4하~14; 마21:33~46
우리에게 자유는 그냥 공짜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에 자주 찾아오시는 노숙인 한 분이 있습니다. 어떨 때는 자주, 어떨 때는 오랜만에 찾아 오지요. 얼마 전에도 찾아 왔길래 정해진 작은 돈을 드리고, 꼭 믹스커피를 타달라고 해서, 커피도 타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밥을 달라고 하는 겁니다. 주중에 교회에 밥이 없잖아요. 밥을 굶었냐고 하니까 점심 식사를 못했다는 겁니다. 밥도 굶고 돌아다니는 게 딱해서, “그렇게 돌아다니지 말고 내가 알고 있는 노숙인 기관이 있으니, 그곳을 알아봐 줄까요?” 했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이 노숙인들을 돌보는 일을 하는 분이 계셔서, 전에도 그 기관에 들어가라고 했는데, 바로 싫다고 해서 더 이상 권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싫다는 겁니다. 그래서 “왜 노숙인 기관에는 들어가지 않으려 하냐”고 물었더니, 거기 가면 자유가 없다는 겁니다. 정한 시간에 일어나야 하고, 정한 때에 밥 먹고, 또 이것저것 하라는 것이 많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어디에 매여서는 못산다는 겁니다. 아주 자유로운 영혼이예요, 이분이. 그리고 정신이 아주 말짱해요.
그래서 제가, “아저씨, 세상 사람들 거의 남의 눈칫밥 먹어가며 살아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사는 사람은 없어요. 한 달 생활비 벌기 위해 직장에 매이고, 정말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고, 윗사람 눈치 보아가며 일해요. 이렇게 떠돌며 남 신세지며 사느니 기관에 들어가서 생활하세요.” 했습니다. 그랬더니, 기분이 상했는지, 갑자기 “지금 시대가 스테그플레션 시대입니다. 스테그플레이션 시대라구요”라고 몇 번 소리치며 가셨습니다.
저는 지금 이 노숙인을 비난하자고 이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자유로워진다는 것이 뭘까? 자유는 어떻게 얻게 될까? 자유라는 것이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인가? 이 이야기를 든 것은 이런 질문들이 올라와서입니다.
우리 교회 역사를 보면 중세 초기부터(5세기) 수도원 제도라는 것이 있었지요. 수도원이라는 것이 지금은 가톨릭의 전유물이 되었지만, 사실 16세기 교회가 나누어지기 전까지 수도원 제도는 중세시대 유럽 교회(사회)들의 특징 중에 하나였습니다. 사실은 수도원 제도는 지난번에 말씀드린, 자유를 찾아 사막으로 들어갔던 사람들, 사막의 교부, 교모들이 그 효시를 이룹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점점 그 수가 불어나서 함께 모여 수도하는 수도공동체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중세 수도원에는 4종류의 수도승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회수도승, 즉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수도승입니다. 둘째는 독수도승, 혼자 수도하는 은수자를 말하지요. 그리고 세 번째는, “사라바이타”라고 해서 삭발을 하고 수도승처럼 살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속이고 겉모양으로 속마음을 숨기는 자들이었습니다. 소위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의복으로 자신을 수도승인체 하지만, 사실 정진이나 수련에는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네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중요한데, 수도승이라고하면서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하고 목적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남들에게 신세를 지며 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베네딕토는 이런 사람들을 “기로바구스”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우리식으로 하면 “땡중”이지요. 그런데 중세에는 이런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는 거예요. 어디 정착하지 못하고 걸식을 하면서 이리 저리 떠돌아다니면서 이 수도원 저 수도원을 옮겨 사는 거예요.
수도원 규칙을 세운 베네딕토는, 그래서 수도승의 수도서원을 정할 때 정주를 제일 앞에 둡니다. 그 다음 정진, 순명을 두지요. 이 “정주”가 가장 중요한데, 도피하지 말고 떠돌지 말고 한 장소에 머물라는 것이지요. 바로 “기로바구스”들을 향해서 하는 말이지요. 그리고 “정진”, 변화에 마음을 열라는 겁니다. 누구보다도 “사라바이타”의 사람들이 해당되겠지요. “순명”은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주보 테오리아에, 한 수사가 스케티스 사막(이집트 사막)으로 모세라는 사부를 찾아 와서는, 자신이 행할 중요한 말씀을 해주십사 청합니다. 그러자 사부는 말합니다. “가서 자세의 움막에 앉아 있게. 그럼 그 움막이 자네에게 모든 것을 말해줄 것일세.” 움막에 앉아 있게. 움막이 자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알려 줄 걸세! 정주의 핵심을 찌르는 말입니다. 이 말은, 요즘도 통하는지 모르겠는데, 전에는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가 엉덩이로 하는 거다, 하는 말이 있었지요. 결국, 머리 싸움이 아니라 엉덩이 싸움이라는 거지요.
여러분, 우리는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광야에 도착하여 십계명을 받는 장면에 이르렀습니다. 이 시내 광야에서 머물렀던 일은 출애굽기19장부터 레위기를 거쳐 민수기10:10까지 이어지는데, 구약에서는 이 부분을 “시내산 전승단락”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이 율법서,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가 본디 한 권의 책이라고 했지요)를 보면, 가장 중심부, 가운데 토막이 바로 이 “시내산 전승 단락” 즉 시내산에서 있었던 일이지요. 그런데 시내산 전승 단락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우리가 여간해서 읽기 힘든, 여러 가지 법규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출애굽기의 후반부는 성막법이 나오고 레위기 전부는 그 성막에서 제사하는 제사법이 차지하고 있지요)
여러분, 제가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곧바로 가나안 땅으로 인도받지 않지요. 그들은 광야를 떠도는데, 처음 2년간 시내광야에 머뭅니다. 그리고는 거기서 토라 즉 율법을 받지요. 토라는 <야라>라는 어원에서 왔는데, “(손가락으로) 가리키다, 가르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토라의 의미는 “법”이라는 의미보다는 “길을 가리킴, 가르침”이라는 뜻이 있지요. 사실, 이 율법 속에는 이스라엘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담겨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산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 땅에 이르는 자유의 여정에는, 시내산에 머물러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을 받는 일이 아주 중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히브리 노예들을 시내산에 모아놓고, “내 백성, 나의 보물”이라고 말씀하신 후에, 십계명과 또 다른 계명들을 주시면서, 오합지졸인 노예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될 계명을 주십니다. 다시 말하면, 계명을 통해 거칠고 볼품없는 노예들을 품위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들로 자라길 바라십니다.
그래서 40년의 광야생활은, 이 주신 계명을 자신들의 삶의 깊이로 만드는, 계명을 내면화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계명을) 지킨다”(<샤마르> “지켜보다”, “붙잡는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거친 노예에서 거룩한 백성으로 훈련되어야 했습니다. 마치 떠돌던 거지 아이가 궁정의 분위기와 훈련을 통해 품위 있는 왕자로 세워가는 동화 이야기처럼, 훈련되지 않은 거친 노예들이 “나의 백성, 나의 보물”에 알맞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져 가는 일이 광야생활의 중요한 알갱이였습니다.
우리의 성장의 삶은, 밖에서 주어진 계명을 속박과 족쇄로 경험하지 않고, 그것을 내면화하여 그것을 자신의 성장의 동인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자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아무런 계명도 없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내면화하여 자기중심의 작은 동기를 더 큰 하나님 중심의 동기로 바꾼다는 의미였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원하는 욕구를 다 채운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공동체의 욕구와 통합하고 조화시킨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계명을 내면화한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하나 꼼꼼하게 계명을 준수하는데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내가 이런 계명들을 다 지킨 사람이야 라는 자기 만족감으로 또 자기중심의 동기가 작동합니다) 먼저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계속해서 깨달아 가는 과정을 포함합니다. 이것이, 샤마르, 지킨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오늘 십계명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보십시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십계명에서 이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십계명은 곧바로 1계명부터 나와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것을 지켜라 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이스라엘은 누구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전제합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종살이를 하던 노예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노예들을 “이끌어 내서” 지금 이 자리로 데리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사랑의 계약이 맺어졌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고, 그분과 사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인격적 관계는 우리를 참된 자유라는 자리로 성장시키려는 목적 외에는 없습니다.
토마스 키팅은 말하지요.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로워져야 하며, 더 나아가 ‘자유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상태가 영구적으로 지속되도록 진화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그것은 영원으로부터 숨겨져 있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성경과 참된 과학은 모두 진화의 과정이 시간 속에서 드러나는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굉장히 도전적인 말까지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혹은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용어로’ 바꾸면, 하나님이 되라는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제안은 인간의 교만과 우리가 받은 놀라운 창조성의 오용으로 인해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God-made) 무아(the no-self)와 인간이 만든(self-made) 무아를 조심스럽게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무아” 는 인간이 도달할 하나님의 경지를 말합니다.
우리 인간 모두는 신에게까지 도달하라는 진화로 초대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실 인간은 모두 신에게까지 도달하려 하고 있습니다.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인간은, 도시를 만들고, 문명을 만들고, 엄청난 과학지식에 도달했고, 어찌보면 신에게까지 도달하였습니다. 유발 하라리가 <호모사피엔스>에 이어 <호모데우스>라는 책을 낸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호모데우스는 호모(인간)와 데우스(신)의 합성어로, “신이 된 인간”이라는 뜻이지요. 유발 하라리는, 인간은 이제 기아, 역병, 전쟁을 극복하고 불멸, 행복, 신성과 같은 신의 영역에 도전하며 진화할 가능성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앞으로 생명공학이나 AI와 같은 과학의 발전은 인간이 신으로 등극할 것이라고 공언합니다.
하지만, 키팅의 말로 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무아(하나님의 경지)와 인간이 만든 무아를 구별해야 한다고 합니다. 인간이 만든 무아(하나님의 경지)는 진짜 무아가 아닌 위험천만한 자리입니다. 요즘 AI에 대한 경고가 많이 울리고 있지요? 하지만 하나님이 초대하는 무아의 자리(하나님의 경지)는 한마디로 “커지는 사랑”, “자라나는 사랑”입니다. 사실, 사랑할 때 우리는 “무아”(no-self) 즉 나를 잊습니다. 사랑은 우리가 진화하도록 초대받은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이 자유와 사랑의 자리는 갑자기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주하고 정진하고 순명함으로써 주어지는 열매입니다. 정주, 정진, 순명은, 수도승들에게만 해당되는 규율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해서 먼저 시내산에 머물면서 십계명과 다른 계명들을 받으면서 시작된 훈련입니다. 떠돌지 않고 한 곳에 머무는 정주, 끊임없는 변화에 마음을 열어놓는 정진, 하나님의 뜻을 경청하기 위한 순종! 이것은 사람이 진정 사람답게 되기 위한,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바울의 표현으로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구급상자나 구명밧줄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오늘 십계명은 대부분 부정명령으로 끝납니다. “하지말라”는 것이지요. 이 십계명을 예수님은 두 마디의 긍정명령으로 요약해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하지요. “먼저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나서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사실 사랑하면, 모든 계명을 지킨 것입니다. 다시 한번 “(계명을) 지킨다”(<샤마르>는 말이 “지켜보다”, “붙잡는다”는 말에서 왔음을 기억하십시오.
오늘 사도바울이 말하는 “붙들려고 좇아간다”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몸을 내밀면서”라는 말은, 달리기를 하는 선수들이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서) “몸을 내밀면서”<에펙테이노마이>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에펙타시스”(끊임없는 성장, 진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에펙타시스”라는 말은 초대교회 교부들이 즐겨 사용했던 말이기도 합니다. 지속적인 성장을 말합니다. 닛사의 그레고리는 “에펙타시스”는 천국에서도 계속된다고 했습니다.
정주, 정진, 순명!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빵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정주, 도피하거나 떠돌지 말고 한 장소에 머물고, “정진”, 변화에 개방적이 되고, “순명”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삶! 이것이 우리 삶을 꽃피우고 열매 맺기를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