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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산진에서 삼지연으로 출발하기 직전 일본군 국경수비대와의 기념촬영. 국경수비대는 학생들을 보호한다며 양정산악부와 동행했다. |
1943년 7월 24일, 청진에서 혜산진으로 가는 도중 차창 밖으로 동해의 떠오르는 태양을 보았다. 기차는 가파른 길을 오르기 위해 앞쪽에 증기기관차를 두 량이나 달고 검은 연기를 내뿜었다.
지난 해 양정중학교 산악부는 차일봉, 북수백산, 운수백산 등 소위 함경북도 3대 고봉군을 원정 갔었다. 이때 차일봉 정상에서 만난 백령회(한국산악회 전신)의 이재엽씨로부터 개마고원 북쪽의 백두산군 답사를 제안 받았다. 전시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백두산군 원정 준비는 많은 제한과 어려움이 따랐다. 다행히 산악부 안필수 선배와 일본인 교련 교사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아 순조롭게 추진되었다.
기차는 10시경 혜산진에 도착했다. 여타 도시와는 사뭇 다른 이국적인 국경 분위기가 우리를 맞았다. 우선 본대는 대원 2명만 남기고 여관으로 전원 이동했다. 여관에 이르는 도중 무장한 군인들과 전투용으로 지어진 듯한 낯선 구조의 가옥들이 늘어서 있어 긴장감이 감돌았다. 만주와의 국경지대를 이루는 압록강에는 뗏목과 중국인들의 움직임이 눈에 보였다.
이번 양정산악부 등행에 총지휘를 맡은 나는 각 대원들에게 할 일을 분담했다. 대원 중 일부는 훈련을 받았지만 그렇지 못한 대원들이 있어 편차가 컸다. 그래서 나는 간부들에게 좀더 구체적으로 지시를 했으며 특히 총무, 회계, 진행교섭, 수송, 준비정리, 의료 등의 분담은 조직적으로 진행시켰다.
혜산진에서 신무성까지 공동장비와 식량 운송은 중국인 인부 4명과 당나귀 4필을 이용하였다. 본대에 앞서 물품 수송대, 통역, 당나귀와 중국인 인부들을 먼저 출발시켰다. 전시다 보니 학생들을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감시를 맡은 국경경비대원들은 본대와 함께 행동하기로 했다. 혜산진을 떠나던 날, 본대는 아세틸렌 화물자동차을 이용해 이동하려 하였으나 얼마 가지 못해 차가 고장나 도보로 가야만 했다. 가는 도중 먼저 출발한 중국인 인부들, 당나귀대들과 합류했다.
20관을 거뜬히 지는 ‘쿨리’
‘쿨리’라 부르는 중국인 인부들은 체격도 좋고 순진할 뿐더러 놀랄 정도로 짐을 많이 지었다. 보통 20관(75kg)을 거뜬히 지었다. 인부에 따라 25관을 지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는 초과 금액을 지불해야 한다. 일본 군인인 경비대원은 휴대 무전기로 우리 양정대를 보호한다 하며 휴식 때마다 본부로 보고를 했다.
삼림지대를 운행하며 만나는 침엽수는 직경이 보통 양팔이 닿지 않는 둘레이며 나무 높이는 약 20미터로 숲 속은 대낮인데도 캄캄했다. 이번 양정산악부의 산행은 민족의 영봉 백두산의 등산이 목적이지만 각자 한 건씩의 대상을 찾아 연구 조사키로 하였다. 대원마다 곤충채집, 식물채집, 광물채집, 풍토, 지세, 지형, 역사 등을 조사 대상으로 삼았다.
7월 27일 본대는 포태리를 거쳐 삼지연에 도착해 곧 야영에 들어갔다.
중국인 인부들은 모닥불을 피우기 위해 전나무를 베었다. 한아름 둘레의 전나무는 노련한 중국인 인부들의 20여 번의 도끼질에 그대로 넘어갔다.
중국인은 주식을 피조로 하기에 가끔 쌀을 주어도 쌀은 먹지 않고 보관한다.
밥을 주면 잘 먹는다. 왜냐고 물으니까 쌀은 귀해서 자기 집에 가져간다고 한다. 그리고 야영하라고 천막 준비를 하면 그 속에서 잠을 안자고 모닥불을 피우고 8∼10미터 주위에서 그대로 누워 잠을 잔다. 우리도 추워서 불을 쪼이려고 천막 속에서 나오기도 했지만 별 장비 없이 자연상태에 불편해 하지 않는 중국인들이 신기해 보였다. 동행한 정 선생은 저 정도가 되어야 중국의 팔로군이 될 수 있다고 귀띔해 준다. 과연 중국인 인부들은 건장하고 힘이 좋지만 그리 대식가는 아니다. 잘 훈련이 되어서인지 저항생활 때문인지 말이 없고 힘은 많이 썼다.
그 옛날 고구려인들이 건장하고 힘 좋고 먹기도 잘했다는데 이들도 고구려인의 계통인지 모르겠다.
중국인이 관리하는 당나귀 또한 이상하게도 짐이 가벼우면 가지 않고 뒤돌아보며 짐을 더 실어주면 움직인다.
잘 훈련이 되어있다. 이 지대의 당나귀는 주로 짐을 지고 사는 동물이지만 중국인들은 애완동물처럼 다룬다.
삼지연의 아침은 이색적이다. 이번 등행에 함께 한 엄익환 군의 권유로 아침 호수를 둘러보았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광경은 사진촬영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아 보였다. 인국환 군은 양정 깃발을 천막에 매달아 놓고 삼지연 천막촌의 주인이라도 된 듯 여유만만하다.
삼지연은 대동소이한 크기의 호수 세 개가 모여있다. 자연환경만을 보았을 때 최고의 피서지란 생각이 들었다.
장차 피서지로 각광을 받아 관광명소로 이용할 때가 올 거란 예상도 해본다.
◇ 양정산악부 부원들이 백두산 천지 호반에 막영을 하며 주변 생태와 지질을 조사하고 있다. |
천지 기슭에 목조로 지어진 종덕사
7월 28일 양정대원 일동은 새벽 5시에 기상, 출발 준비에 바쁘다. 평탄한 삼림지대를 또 간다. 편안한 행진이다. 무두봉 지대로 들어서자 차차 구릉지형으로 변해간다. 대원들의 카라반은 장사대열(長蛇隊列)로 길게 이어졌다. 신무성을 지나 무두봉에 닿았다.
무두봉의 침엽수는 강한 바람 때문에 위로 성장을 못하고 바람의 반대 방향으로만 자라 삼각형 모양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크게 자라지 못해 그저 사람 키만 하다. 그것도 뜸뜸이 산재하여 성장하고 있었다. 일기는 대륙성기후라 따갑다. 땀과 피로, 짐의 삼박자가 운행을 괴롭힌다.
동행하는 선생님들도 피로에 지쳐서인지 거동이 불안했다. 그러나 자기 짐은 자기가 지고 가는 원칙에 교사도 예외일 수는 없다.
무두봉 삼림을 벗어나니 고원지대로 진입한다. 고원지대는 화산암 지질의 토양이다. 바람이 없는 고요한 날씨다.
시기적으로 보아 우기인데 왠지 비가 오지 않는다. 매년 하기 등행은 꼭 우기에 하게 된다. 허나 이번 백두산 등행에는 비가 없다. 이상하다. 대신 건조하니까 하루살이 같은 곤충이 수없이 군집해서 행진하는 우리들을 괴롭힌다. 태양은 따갑고 날아오는 파리 비슷한 날벌레를 쫓으랴 바쁘다.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안면방충망의 준비를 권하고 싶다.
무거운 짐과 날파리, 그리고 뜨거운 태양과 싸우면서 대연지봉의 돌출봉을 향하여 밋밋한 구배(句配·오르막)를 서서히 올라간다. 도중에 정계비가 서있던 자리가 있다. 작년(1942년)까지만 해도 입석비가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후일 일본에서 반산달웅(飯山達雄)씨를 만났는데, 일제가 1943년경에 매립했다는 말을 듣고 자기는 그것을 찾으려고 동북쪽 약 3킬로미터 지점까지 탐색했다고 한다.
대·소연지봉을 통과하여 남북 포태산을 조망하면서 맥없이 전진 또 전진한다. 시야가 트이고 광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뒤쳐지는 대원에 맞추어 운행을 하다보니 마치 초원에서 양떼를 몰듯이 간다. 대원을 통솔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달래면서 30분 행진에 5분 휴식, 휴식 시간엔 사탕 한 개씩을 분배하면서 목적지까지 이끌었다. 지루한 행진을 하는데 앞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천지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발 한발 오르니 눈 아래에 천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치 청색 잉크를 큰그릇에 부어놓은 듯한 모양이다.
이제까지 신무성에서 무두봉, 그리고 연지봉까지 힘들고 지루한 행진의 피로가 일순간에 날아가 버린다. 정신없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너도나도 사진촬영에 바쁘다.
장군봉에 올라 우리 민족의 신화적인 전설로서 고래부터 앙망하던 백두산 천지를 눈앞에 보니 감개무량하다. 병풍 같은 준봉에 둘러싸인 화산의 분화구가 호수로 변한 곳, 신비스럽게 전개된 호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환상이 현실로 눈앞에 펼쳐지니 한없이 보고만 있어도 싫지 않은 황홀한 경관이다.
장군봉에서의 하산은 이제까지의 지루한 등행과는 반대로 암석 사이로 하산한다. 즉 천지는 분화구가 전부 호수로 변하고 그 주위를 여러 준봉이 둘러쌓았는데 병풍같이 깎아 내린 경사도가 50∼80도에 이른다. 천지 물가의 평탄한 곳에는 천막을 설치할 수가 있었다.
드디어 최종 목적지인 천지 호반에 도착했다. 두 분의 선생은 물론 학생들도 상당히 지쳤다. 이곳에 오기 위하여 그처럼 많은 시간을 들여가면서 자료를 수집해 오지 않았던가. 계획을 중단할까 주저도 했지만 결국 고생 끝에 공부도 많이 했고 경험도 많이 쌓았다.
호수 둘레를 반 바퀴 도니 목조로 지어진 종덕사(宗德寺)가 보였다. 종덕사는 1930년 8월에 이곳을 오른 안재홍, 황욱 등의 <백두산 등척기>에 따르면 3중 8각전으로 당시에도 사람이 없는 빈 절이었다. 한때 태극교도(太極敎徒)들이 이곳에 와서 사원을 창건하고 수도하던 곳이었는데 마적 때문에 폐사되었다고 한다.
◇ 백두산 최고봉 장군봉에 올라 천지를 한눈에 내려다보며 감격에 휩싸인 양정산악부 대원들. |
벌목사무소에서 여독 풀어
백두산의 자연적인 조건은 우리나라에서 제1급지로 생각한다.
허나 일반 사람은 형편상 백두산 등반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다. 일반인들은 비적 출현, 사상적 감시 등으로 인해 특별한 계획 없이는 갈 수 없는 곳인 줄 알고 있었다.
시국 때문에 서울 근교나 설악산만 가더라도 가는 도중 검문을 했고 사찰마다 형사를 배치해 감시를 했다. 사실 일제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해서 비적 출현, 국경 경비 운운하며 우리 국민들의 독립운동을 통제하며 까다롭게 행동을 제한했다.
천지 호반에서 추억의 기념 파티를 열기로 하여 선생님께 허가를 청하니 “출발 후 이제까지 다들 노력하고 수고했다. 앞으로도 무사히 귀환하라”며 이를 허가했다. 다섯 개의 천막에서 밤늦게까지 떠드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천지 호반엔 화장실이 없어 불편을 겪었다. 또한 이곳은 잡석(현무암)이 많고 약간의 잡초가 우리 야영장 부근에 간혹 눈에 띄는 정도다. 혼자 있다면 무서울 정도로 적막하다.
천지에는 생물체가 없다고 판명이 났으나 그래도 혹시나 하고 고무배를 타고 호수 중앙까지 가서 학술조사, 채집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루 종일 수심측정을 하고 생물체는 찾아보았으나 발견 못하고 주변 토질에 혹시 비충(毘蟲)이라도 있을까 찾는데 그것도 별 수확이 없다고 들었다.
우리가 수질을 살펴보니 온천 부근은 알칼리성이었고 약간의 유황도 발견했다. 우리를 이를 가지고 귀경해서 정밀검사를 하기로 했다.
7월 31일 천지를 뒤로한 채 우리 일행은 귀경길에 올랐다. 무두봉, 신무성, 원지무봉을 경유 농사동으로 향한다. 이 행로 역시 지루한 길이다. 삼지연, 신무성 등 물이 있는 곳에서도 목욕을 하지 못하고 세면에 만족했다. 당번, 각자의 임무, 피로 등으로 여유가 없었다.
5일간의 행군 끝에 사람이 살고 있는 목재 벌목사무소에 도착했다. 사무소를 겸한 숙소에 숙박을 청했다. 벌목사무소 관리인은 16명의 갑작스런 손님에 좀 당황한 모양이나 우리를 우대해 주었다. 벌목사무소에서의 목욕은 참으로 상쾌했다. 매일같이 땀으로 범벅된 행군으로 악취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앉으면 졸 정도로 피곤해서 신무성에서는 물을 보고도 닦지를 못했다.
벌목사무소 관리인은 정 선생님에게 서울 유학 경비를 물어보는 등 우리 일행을 극진히 대접해 주었다. 감자국밥, 감자김치에 닭 다섯 마리가 식탁에 올라왔다. 막걸리 기운에 상하 없이 마음을 터놓고, 노래까지 절로 나온다.
반나절 가량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서 만복의 우대를 받은 후 목재를 적재한 화물차 위에 앉아서 무산으로 향했다.
기분이 상쾌하고 생기가 돈다. 대원들은 흔들리는 차 위에서 노래를 합창했다. 무산에서 고무산으로는 예정대로 행군을 했다. 고무산에서 우리는 서울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는 청진, 원산, 철원을 거쳐서 드디어 서울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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