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아미타불...()()()..
아래에 무량님이 올려주신 광성사 해산스님이야기에...
해산스님의 다른 일화를 검색해서 올립니다....
도인들의 이야기에는 신심이 납니다...()...고맙습니다...
해산海山 스님 이야기
스님의 속명俗名은 경출庚出이고 법명法名은 수진守眞이며 당호堂號가 해산海山입니다. 1910년 9월 16일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신촌리 구촌마을에서 아버지 오산정씨烏山鄭氏 관영觀永과 어머니 안동권씨安東權氏의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정씨문중鄭氏門中의 종손宗孫이셨기 때문에, 경출 소년은 다음 세대世代의 종손 자질資質을 갖추기 위해 유학儒學에 정통正統한 선생님을 사랑방에 모셔두고, 어린 시절부터 한문漢文과 유서儒書를 깊이 있게 배웠습니다. 그래서 불문佛門에 귀의하기 앞서 유가경전儒家經典의 묘리妙理를 궁구窮究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가세家勢가 걷잡을 수 없이 기울어져, 고향을 떠나 밀양密陽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생계生計를 위해 대서소代書所에서 대필업代筆業을 했으며, 경출 소년은 참기름집 일을 거들면서 가계를 도왔습니다.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배달차 인근의 절을 자주 드나들게 되었으며, 불문佛門에 귀의할 뜻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특히 표충사表忠寺 내원암內院庵을 처음 방문했을 때, “여기가 바로 내가 살 곳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1926년 우리 나이로 열일곱 살이 되던 해, 처음에는 청도淸道 운문사雲門寺 사리암邪離庵으로 입산入山을 했다가, 표충사 내원암으로 옮겨와 박담월朴潭月 화상和尙문하門下로 출가出家하게 되었습니다.
은사恩師 담월 스님은 사내寺內에서 뿐만 아니라, 절 아래 마을 사람들에게도 ‘참스님’, ‘큰스님’으로 추앙받는 분이었습니다. 마을사람들이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하고 부황浮黃이 들어서 하나둘 쓰러져가던 그런 시절. 마을에 해산解産할 날이 가까워 오는 집이 있으면, 담월 스님이 어떻게 아셨는지 아무도 모르게 밤중에 쌀과 미역을 넉넉하게 그 집 마당에 두고 가십니다.
배고픔을 이겨보려고 나물 뜯으러 산에 올라가면, 큰 가마솥에 밥을 가득히 하고 큰 솥에 국을 넘칠 만큼 끓여 놓고서, 절 입구에서 기다리다가 끌고가서 배불리 먹였습니다.
그리고 담월 스님에게는 ‘잘못된 일’이란 것이 없습니다. 항상 ‘그 참, 잘~된 일이네!’라는 말을 입에 달고 계십니다. 누가 다쳤다고 해도, 집에 불이 났다고 해도, 심지어 누가 죽었다고 해도, ‘잘된 일’입니다.
한번은 범둔마을에 사는 서씨徐氏보살이 찾아와 “스님께서 기도해 주신 덕분으로 얻었던 손자놈이, 홍역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저희들의 불찰로 그런 일이 생기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라고 못내 슬픈 속내를 감추지 못하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스님 대답이 “그 참, 잘~된 일이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그 보살님을 내원암에서 볼 수가 없었습니다.
담월 스님은 해방되기 몇 해 전에 입적入寂하셨습니다. 밤중에 다비했던 장소에서 자동차 불빛처럼 밝게 방광을 했다고 합니다.해산 스님은 출가한 지 두 해가 넘은, 1928년 10월에 표충사에서 해담海曇 스님을 계사戒師로 사미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1934년 늦가을, 아궁이에 불을 지피다가 삼매三昧에 들어 바지에 불이 붙은 것도 모르고 있다가 깨어나서, 공부의 힘을 느끼고 가행加行정진精進을 결심하였습니다.
은사스님께 동상암東上庵(진불암眞佛庵)에 올라가서 혼자 한 철을 보내며 공부하겠다고 여쭈니, 흔쾌히 “그래, 중은 공부를 해야지.” 하시며 양식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동상암 옆 석벽石壁의 높은 벼랑 위에는 한 사람이 앉을 만한 바위가 있는데, 졸다가 떨어져 죽더라도 공부하다가 죽는 것이니 좋은 일이라 생각하고, 그 바위에 앉아 밤낮으로 정진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른 저녁 공양을 지어 먹고 남은 밥 한 그릇을 솥안에 넣어 두고서, 설거지한 손을 옷에 문지르면서 바위로 올라가 앉았습니다. 그 때, 갑자기 회오리바람 한 자락이 일어나 억새풀숲을 밭고랑을 타듯 양 옆으로 가르며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현듯 머리 위에 무엇이 얹혀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손으로 훔쳐보니 눈이었습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골짜기 전체가 훤하게 밝은 것 같았습니다. 시장기가 돌아 공양간으로 가서 솥을 열어보니, 밥에 곰팡이가 쓸어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이었는데…….
그래서 오늘은 큰절 표충사에 내려가서 대중과 함께 공양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스님은 뒤에, “그 때가 내가 몸뚱이 머슴살이 면한 때다.”라고 하셨습니다.
“몸뚱이 머슴살이 면하니, 어떠했습니까?”라는 제자의 물음에,
“확실히 알았다.”
“확실히 알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산은 산 물은 물, 옛사람은 옛사람이요, 옛산은 옛산이라, 옛 그대로더라.”
“그대로인데, 알 게 뭐 있습니까?”
“일체만상一切萬像에 의심이 없더라.”라고 대답했습니다.)
걸망을 메고 오후 서너 시쯤에 산에서 내려와 객실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표충사에는 요사체 64동이 있었으며, 대중이 대단히 많았습니다. 그런데 언뜻언뜻, “해산이 견성한 것 같단다.”, “해산이 견성했다고 하더라.”라는 말이 귓전을 스쳐 갔습니다.
저녁 공양 후 예불을 마치고 객실에 앉아 있는데, 법문이 있음을 알리는 대종大鐘 소리가 들려서 큰 방으로 가서 앉았습니다. 그런데 젊은 수좌 둘이 위의威儀를 갖추고 와서 삼배를 하고 청법가請法歌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의외의 갑작스런 일이지만, 대중의 요구라 거절할 수 없는 것이어서, 법상에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처음으로 법상에 올라앉았는데, 머리를 반들반들하게 깎은 노스님들부터 앞자리를 메우고, 대중들이 법당 가득 앉아서 쥐죽은 듯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주장자를 내려치고 할喝을 한번하려고 했는데, 할 소리가 나오지 않아 등골에 땀이 흘러 엉덩이까지 타고 내려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때가 우리 나이로 스물다섯이며, 이 때 읊었던 상당법문上堂法門의 게송이 아래의 것입니다.
帝網羅捕無鼻獸 하늘 덮는 그물을 쳐서 코 없는 짐승을 잡고,
能將蛞角誘啼兒 능히 달팽이 뿔로 우는 아이를 달래는데,
金毛獅子半踞地 금털 사자가 웅크리고 앉았으니,
氣高萬丈凡難登 기세가 당당하여 모두가 오르기 어렵도다.
(스님은 이 때의 이야기를 하면서, “견성見性한 것은 남이 아는 것이며, 자기가 아는 것은 도道가 아니다.”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 겨울, 흰 눈이 내리는 섣달 그믐날에 정혜사를 찾아가 당대의 고승 만공滿空 스님을 친견親見하고, 눈밭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딩굴기까지 하는 치열한 법法거량 끝에 인가를 받았습니다.
그 때 만공 스님께서 해산 스님에게 써준 게송입니다.
示海山守眞 해산 수진 보라
海山面皮能畫骨 해산은 껍데기만 보고도 뼈대를 그려낼 수 있고,
滿空知面知其心 만공은 얼굴만 봐도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雲收雨霽月楚江 구름 개이고 비 그쳐 달이 강을 밝게 비추니,
海山本來劫外然 바다와 산(해산)은 본래 겁 밖이로구나.
그 이후 내원암에서 3년을 더 머물다가, 1937년부터는 운수납자雲水衲子가 되어, 금강산, 묘향산, 백두산, 오대산, 속리산 등지로 행각行脚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하연에서 3년 결사를 하고, 송광사에서 강사로 지내다가, 만공 회중會中에서 입승을 보기도 했습니다.
특히 만공 회중에서 입승을 볼 때, 오수午睡를 즐기시는 만공 스님을 찾아가, 죽비로 치고서 “이랴, 이놈의 소야! 이 뿔도 없는 소야!” 하면서, 만공 스님께서 내주신 등에 걸터앉아 귀를 잡아 다니고 엉덩이를 때리며 소를 타는 시늉을 했다가, 대중들의 눈에 거슬려 산문출송山門出送을 당한 일화도 있습니다.
(일타스님 증언)
1948년 만 38세 때, 통도사通度寺 보광전普光殿에서 설법을 듣다가 법상法床의 법사法師에게 질문을 했는데, 법사가 대답을 못하고 있으니, 선객禪客들이 법회를 중단시키고 스님을 법상에 앉히려고 했습니다.
스님은 극구 사양하였으나, 이후 거듭되는 대중들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서, 조실祖室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통도사 대중은 300명이 넘었으며, 조실은 강의도 하고 설법도 하는 강사 겸 조실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954년까지 6년간 조실을 맡아서 후학들을 지도했습니다.
1954년 이후로 12년 간은 거처를 부산 아미동 광성사로 옮겨 칩거 및 만행의 시간을 갖다가, 1966년 5월 지리산 정각사正覺寺 수월선원水月禪院 조실로 추대되었습니다. 이어서 1967년에는 윤월하尹月下 스님 등의 추천에 의하여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하고, 오랫동안 떠나 있었던 표충사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7년간 큰절 표충사에서 주지와 조실을 맡으시다가, 1974년 본래 머리를 깎았던 내원암에 해동제일선원海東第一禪院이라는 이름으로 선원을 개원하여 조실로 계셨습니다.
표충사는 태고 보우 스님께서 참선參禪을 제창提唱하시어 오백 명 대중을 거느리고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선풍禪風을 일으키셨던 곳이라서, 나라에서 해동제일선원海東第一禪院이란 편액을 하사했던 곳입니다.
해산 스님은 내원암에서의 6년을 마감으로, 1980년 12월 22일 (음력) 광성사에서 세수 71세, 법랍 55세로 입적入寂하셨습니다.
입적하시기 하루 전, 법상에 올라 주장자를 치시더니,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두루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가만히 계셨는데, 눈에서 굵은 눈물이 주루룩 흘러 내렸습니다. 그리고 조금 계시다 아무런 말씀 없이 법상을 내려오셨습니다.
남은 것 없이 다 주고 가시면서도, 더 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눈물로 변하여 흘러내린 것입니다.
입적하시고 호주머니에서 나온 전全재산 삼천 원이 스님의 삶을 증언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스님은 생전에,
“사리는 남기시겠습니까?”라는 제자의 질문에
“않을란다. 그걸 찾느라고 시체 태운 재를 뒤적이는 그게 할 짓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열반송涅槃頌을 부탁하는 제자에게 먹을 갈게 하시고, 붓을 들었다가 “그만두자.” 하시며 붓을 놓아 버렸습니다.
스님이 입적하신 후 다비를 하니, 신비스럽게도, 두개골 안쪽 빈 공간에서 오색영롱한 빛이 찬란하게 방광放光하고 있었습니다. 빛의 사리를 남기신 것입니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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