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약 좀 주세요.”
미국에서 보이는 것들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꾸 슬픈 마음을 자아낸다.
마약, 총기사고, 살인, 두 쌍 가운데 한 쌍 이혼,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비만,
최고로 잘 산다는 나라가 왜 이럴까.
지구가 자꾸 어딘가로 곤두박질치고 있는 기분이다.
이러다가 추락을 하던지 침몰을 하는 게 아닐까 하고 우울해 진다.
그런데 또 다른 미국의 한 단면이 있다.
이런 나라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갈구하는
사람들을 보는 기쁨은 크다. 명상센터,
혹은 사찰이나 대학 강당에서 하는
불교 법문과 명상반에 백인불자들이 가득하다.
물질과 자본이 홍수같이 풍요로운 세계에서
저들이 저렇게 영적 음식을 먹고 있구나.
삶의 고통을 저렇게 이겨 나가고 있구나.
마음의 상처를 저렇게 치료하고 있구나 하며
자꾸 내 몸 안의 따스한 기운을 모아 그들에게 보내게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삶에 위로를 삼는
눈 파란 백인 불자들을 볼 때 마다 뿌듯한 마음 금할 길 없다.
작년 가을, 이곳 캘리포니아의 백인 사찰에서 있었던 일이다.
참선을 마치고 난 후 토론 시간에 불교의 사회참여를 놓고
참가자들 사이에 열띤 공방이 오고 갔다.
시작은 자선 바자에서 나온 수입금을
어디다 쓰느냐를 놓고 의견이 갈라졌다.
한 쪽에선 사찰 보수에 쓰자고 하고
다른 한 쪽에선 파키스탄 지진 구호금으로 보내자는 것이다.
결국은 사찰 보수에 쓰는 쪽으로 기울었다.
미국 불교도 어느 나라의 불교와 마찬가지로
사회참여에 비교적 약한 편이다.
토론을 마칠 즈음 한국에서의 불교 사회참여는
어떠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난 그만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한국 불교의 사회참여에 대해 아는 것도 없지만
설사 있다 해도 그것은 기독교인들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되게 매우 빈약함을 알기 때문이다.
난 주어진 질문에 대한 답으로 돌아가
“상구보리 하화중생”으로 답을 풀었다.
사회참여는 중생구제인데 한국 불교 수행자에겐
하화중생보다 상구보리가 우선인 점을 설명했다.
그런데 이어서 나온 질문에
그렇다면 상구보리를 하는 동안은 아무것도 안 하느냐.
즉 밥값을 하는 스님이 몇이나 되는냐,
자신의 수행 말고 남을 위해 하는 것이 뭐가 있느냐고 묻는다.
이것은 항상 결과를 놓고 한 만큼의 몫만을 가져가는
미국적인 자본주의 체제에서 나올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가끔 포교 현장에서 하화중생의 일선에 나선 스님도 보고
대사찰의 법회에서도 만나기도 한다.
그런데 불쑥 내 머리 속에는 평생 선방 다니며
상구보리만 하다가 인생을 마치는 수행자가 대부분이라는 생각에
이 질문에도 또 답을 하지 못했다.
미국에서 더욱 절실히 느끼고 있지만 불교의 포교는 시급하다.
한 개인의 의견을 내자면 포교사의 숫자가
선교사의 숫자를 못 따라가는 현실이지만
불교의 사회참여는 포교가 그 시작이라고 본다.
사회참여에서 물질을 나누는 것도 좋지만
우선은 포교의 차원에서 나누는
법보시가 더 큰 가치가 있음을 갈수록 깊이 느낀다.
그리고 부처님의 제자들인 스님들이야말로
불교에서 최전선에 있는 포교사들이라 생각한다.
이 말을 하는 이유가 있다.
미국에서도 많은 백인 불자들이 책을 통해서나
스님을 만난 계기로 불자가 된다.
얼마 전 캘리포니아 병원에서 말기 폐암으로 죽어가는
미국인 불자의 말이 계속 나의 뇌를 때리고 있다.
“불교를 일찍이 알았으면 사는 동안
내 고통을 좀 줄일 수 있었는데 너무 늦게 스님을 만났어요.
다른데서 찾아 헤매다 시간을 놓치고 고 통속에 살았지요.
조금이라도 일찍 스님을 만났으면 한결 사는 게 쉬웠을 텐데….
스님이 저에게 ‘부처님이 주신 고통 멈추는 약’을
많이 주었는데 그것을 다 소화하기엔 너무 늦었어요.”
그는 60세 때 한 티벳 스님을 통해 불교를 접했지만
너무 늦게 불교를 만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일찍이 불교를 만난 사람을 최고의 축복을 받은 사람으로 여긴다.
그에 의하면 스님도 불자도 복이 지독하게 많은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은 복을 나눠야 한다. 나누지 않는 건 종교가 아니다.
복을 나누는 것이 곧 복을 짓는 것이고
스님으로서 복을 짓는 것은 아마도 중생구제일 게다.
스님들의 중생구제는 사회참여라는 말과 동일 시 되어도 좋을 것이고
또 법문으로 얼마든지 우리를 구제할 수 있다.
그런데 스님들이 상구보리에만 매진하는 탓일까.
불교를 모르는 사람의 입에서 스님들이 차갑다는 인상을 받고
선문답은 알아듣기 어렵고 중생구제나 자비행과
너무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한다.
무척 흥미 있는 이야기를 하나 들었다.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는 아니더라도
사회참여에 있어 불교계를 꼬집는 말이다.
몇몇 종교인들이 모인 자리였다.
어떤 사람이 달려 와 저 밖에 아픈 사람이 있으니 도와 달라고 소리쳤다.
그 가운데 제일 먼저 뛰어나간 사람이 개신교 선교사였다.
약과 붕대를 들고 뛰어 나갔다. 너도 나도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스님은 여전히 앉은 채 이런 말을 하더란다.
“그 사람이 아픈 건 다 자기 업이야.
전생에 지은 업 때문에 지금 아픈 것이니 나도 어쩔 수 없지.
좀 아프다가 나을 테니 내버려 둬도 돼.”
스님들의 사회참여는 중생구제이고 구제는 포교이고
포교는 법보시이고 법보시는 우리에게 약이 된다고 믿는다.
업은 업으로 친다 해도 당장 나 아플 때 약 주는 사람이 최고이다.
육신이 아픈 건 그렇다 치고
마음이 아플 때도 약을 좀 먹어야 하는 게 아닌가.
밖으로 상처가 난 사람보다 마음에 상처 난 사람이 더 많다.
마음에서 피가 날 때 난 스님들에게 약 좀 달라고 하고 싶다.
난 스님들의 하화중생이 커질수록
우리 중생의 고통은 그만큼 줄여 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부처님이 의사였다면 스님들은 약사가 되어 주셔야 한다.
의사였던 부처님의 제자들은 약사가 되어 약을 짓고
그 약을 나눠 줘야 한다.
약이라면 가벼운 통증을 낫게 하는 것부터 별별 것이 다 있겠지만
스님에게 들은 작은 지혜의 말 한 마디로
마음의 피를 멈추기도 하고, 스님에게 들은 법문이
평생 동안 마음에 간직되어
아픔에 진통제 역할도 되어 주기도 할 것 아닌가.
이런 점에서 하화중생의 중생구제는 포교이고
우리를 낫게 하는 약은 법보시이다.
약 지어 나누는 스님들이야 말로
진정으로 하화중생하는 부처님의 제자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상구보리는 일생동안, 한 평생을 바쳐야만 하는 것일까.
위로 깨달음을 구하는데 긴 세월이 걸린다면
하화를 원하는 중생은 기다릴 수 없다.
같이 아프고 같이 낫기도 하며 상구의 과정에서 같이 가자고
손을 잡아주시는 스님들이 더 계셨으면…….
다 함께 자타일시성불도 하여 보리의 열매를 맛볼 수 있었으면 …..
난 어제도 이 말을 했지만 오늘도 내일도 이 말을 하고 싶다.
“스님 약 좀 주세요.”
출처 : 관세음보살가피력
출처 : 염화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