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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려(1911-1995)
장기려에 대해 사람들은 이렇게 부릅니다.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있는 성자, 바보 의사, 작은 예수. 장기려는 일상속에 구현된 순종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신앙인 한 사람의 탄생이 사회 전체를 얼마나 풍성하게 하는지를 보여준 사람입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앞에서의 삶을 신실하게 살았습니다. 그의 묘비에 있는 말처럼, 그는 “주님만을 섬기다 간 사람”입니다.
장기려는 1911년 8월 14일에 아버지 장운섭과 어머니 최윤경의 둘째 아들로 평북 용천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친이 설립한 의성학교를 5년간 다닌 뒤 송도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8년에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합니다. 그가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은 의사 얼굴 한 번 못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그 다짐을 평생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다짐하기는 쉬우나 그 다짐에 걸맞게 평생을 살아가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그러나 장기려는 평생에 걸쳐 자신의 다짐을 신실하게 지켜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다짐에 철저했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의 실수를 거울삼아, 평생 다시는 행하지 않겠다고 두 가지를 다짐했다고 합니다. 하나는 남의 물건을 탐내지 않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다짐도 평생 지켜냈습니다. 다짐과 약속을 쉽게 망각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그가 보여준 철저한 실천의 삶은 말의 무게와 약속의 신성함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는 경성의전 재학시절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현실에 충실해서 현실에서 자기의 본분을 다하여야 하는 것인데 현실경시, 현실도피의 나의 생활은 나의 신앙이 건전하지 못했음을 증명한다고 본다.”이때부터 장기려는 일요일과 교회에서만 힘을 발휘하는 신앙을 뛰어넘어 현실에서 열매맺는 신앙을 추구한 듯 합니다.
장기려는 1932년 4월 9일 새문안교회에서 김봉숙과 결혼합니다. 1940년 9월에는 일본 나고야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순수한 신앙과 함께 자신의 연구분야에서도 출중한 실력을 겸비한 것입니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그는 평양에 있는 기홀병원에 원장으로 취임합니다. 1942년에는 ‘성서조선사건’으로 인해 12일간 평양 경찰서에서 구류를 당합니다. 그는 성서조선을 구독하면서 야나이하라의 “기독교 이상주의”에 영향을 받아 “만일 누가 나에게 삶의 목적을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기독교 이상주의로 살고 싶다고 대답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글에서 주기철 목사나 손양원 목사를 가리켜 “이들은 현실에 의하여 이상을 삭감하려는 타협적 태도를 버리고, 이상에서 현실을 내려다보고 현실을 비판하고 규정하는 태도를 취했다”고 하였습니다. 장기려 스스로도 현실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기독교 이상주의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또한 ‘성서로 본 일본’을 쓴 후지이 다케시의 사상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후지이 다케시는 “이 악한 세상에서는 진실한 인간의 생애는 패배하지 않을 도리가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은 진실한 생애뿐이므로 이 세상에서의 패배자야말로 영원한 승리자”라 하였습니다. 일제말기 장기려는 자신이 다니던 교회가 동방요배를 하고 예배를 드리자, 해방 이전까지 집에서 가정예배를 드립니다. 그는 신사에도 참배하지 않았습니다. 해방후에는 일제에 의해 강제폐쇄되었다가 해방후 다시 문을 연 산정현교회에 출석하였으며 1948년에 장로장립을 받습니다. 1947년에는 김일성대학에 교수가 되었고, 지식인에게 주어지는 최고상인 모범일꾼상을 수상하였으며 1948년에는 북한과학원으로부터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도 받았습니다. 이념적으로는 대립관계에 있었던 당국도 장기려의 실력과 정직함, 그 성실함을 인정한 것입니다. 장기려는 그의 주장으로서가 아니라 삶을 통해 사람들의 신뢰를 받았습니다. 장기려는 공산치하에서 수술을 할 때에도 항상 기도를 했습니다. 김일성대학 수업시간에도 자신이 크리스쳔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고, 공산당에 입당할 것을 명령하는 부학장에게 그럴수 없노라고 단호하게 맞서기도 했습니다. 공산치하에서 장기려라는 한 사람의 크리스쳔이 어떤 존재로 비취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장기려는 1987년에 막사이사이상 수상자들을 대상으로 한 세계일주를 하게 됩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안기부가 장기려를 불러 북한이 납치하고자 하는 주요인물의 명단을 보여주었는데 장기려가 그 명단에 있었습니다. 김일성 주석이 자신의 머리 뒤에 있는 혹과 관련하여 측근들에게 “장기려가 있으면 수술을 맡길 텐데”라고 한마디 한 이후에 북한의 납치리스트에 오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장기수였던 이인모 선생이 북송될 때 김일성 주석이 장기려 선생도 함께 보내야 한다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50년 가까운 세월속에서도 김일성 주석이 장기려 박사를 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장기려는 한국전쟁 기간중 이산가족이 됩니다. 둘째 아들과 함께 월남한 장기려는 북에 있는 아내를 그리워하며 남한에서 평생을 홀로 지냈습니다. 정부에서 특별히 장기려 박사에게 아내와 가족을 만날 수 있는 이산가족 상봉 기회를 주었을 때 그는 “이산가족이 나 하나뿐이 아닌데 가족을 두고 온 사람들이 얼마나 가고 싶겠소. 그 사람들도 다 보내준다면 나도 갈 생각이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거절하겠소”라고 하며 특별호의를 거부했습니다. 또 다른 기회가 주어졌을때는 “나는 매일같이 영적으로 아내와 교통하고 있는 사람이오. 육신으로 며칠 만나고 오는 것이 내 나이에 무슨 득이 있겠소. 내가 평양에 간다면 그곳에서 내 생명이 다할 때까지 함께 살 수 있든지, 아니면 내가 아내를 데리고 남한에서 살 수 있다면 평양에 가겠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사양하겠소”라고 하면서 거부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월남이후 다시는 만나지 못한 아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내가 절대의 사랑으로 순종했기 때문에 나도 아내에게 죽도록 충성하는 사랑을 주려고 결심했다.”그 약속 그대로, 그는 매일 아내와 영적으로 교통하며 사랑의 신실함을 지켜냈습니다.
장기려는 월남 이후 1951년에 부산에서 복음의원을 열었습니다. 처음에는 무료병원으로 시작하였다가 감당할 수 없는 재정적자로 인해 4년째부터는 1인당 100환씩의 치료비를 받았습니다. 그는 복음의원 초창기부터 “환자의 가슴에 청진기를 댈 적마다 오진 않게 해 주시기를 기도”했다고 합니다. 복음병원 운영에서 주목할 점은, 그가 직원들의 월급을 가족수에 따라 차등지급했다는 사실입니다. 가족들 모두를 직원의 수로 포함하여 1/N의 월급을 지급한 것입니다. 그 결과 식구수가 같은 원장과 운전기사가 같은 월급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의사라는 직업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소명이라 여기며 맡기신 사명에 충실했습니다.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 대한민국 사회에서 의사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기꺼이 유보 내지 포기했습니다. 예수를 따르기 위해 자기부인을 한 것입니다. 부산 사람들은 복음병원에 갈 때마다 장박사에게 간다고 할 정도로 그의 헌신적 섬김과 실력은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는 의사가 환자를 자기와 동일화시켜 진단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며 병의 70%는 환자의 몸에서 생기는 기전으로 자연치유되기에 의사가 환자를 진실로 친철하게 대하기만 해도 유명한 의사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는 바쁜 병원생활속에서도 매월 하루는 무의촌 진료를 다녀왔습니다. 의사를 찾아오는 환자만 돌본 것이 아니라 찾아올 수 없는 환자를 친히 찾아가서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준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고신교단이 복음병원을 장악하기 위해 병원 운영에 무능하다는 이유로 장기려 원장을 내쫓았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정년을 70세에서 65세로 낮추는 무리수까지 동원했습니다. 그리하여 장기려는 1976년 6월 25일 원장직에서 은퇴하게 됩니다.
장기려의 의료사역에서 가장 주목받는 것이 1968년에 시작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입니다. 그는 가난한 이웃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목자없는 양같이 유리방황하던 군중들을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처럼, 장기려는 병마의 고통속에서도 가난으로 인해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주목하였고, 그들을 돕기 위해 고민하던 중,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국가보다 먼저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돕고자 한 그 마음을 주목하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청십자(Blue Cross)는 1929년 미국 대공황 당시 실업자들을 위해 시행되었던 민간의료조합인데 이것을 보고 조합이름을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라 정했습니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한국 의료보험제도의 마중물이 됩니다. 청십자의 구호는 ‘건강할 때 이웃 돕고, 병났을 때 도움 받자’입니다. 적은 돈이라도 모으고 협력하면 가난과 질병을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의 제시, 이것이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기려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든 돈을 섬기든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맘몬의 지배로부터 탈출하여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그는 평생을 의사로 살았지만 자신의 소유로 된 집도 없었고, 병원 옥상에 있는 옥탑방에서 여생을 보냈으며, 죽었을 때 그의 총 재산은 통장의 천만 원 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어떤 것도 자신의 것은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것을 잠시 빌려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잠시 빌려 쓰는 자로서 자신을 위해 지나치게 부유하게 사는 삶을 경계한 것입니다. 그는 무소유의 삶을 이상으로 여겼으며 간디를 닮고자 했습니다. 그의 말입니다. “나도 늙어서 가진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은 다소의 기쁨이기는 하나 죽었을 때 물레밖에 안 남겼다는 간디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가진 것이 너무 많다.”이런 장기려였기에, 그는 한국교회의 자본주의화에 대해 통탄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맘몬을 섬기고, 자본주의 원리로 운영되는 교회를 보고 크게 실망합니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돈을 가지고 큰일을 하겠다는 것을 가장 큰 문제로 보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이 세상의 권세와 지위와 명예와 사업의 번영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주장할 때, 그것이 맘몬과 타협한 결과로 얻게 된 열매는 아닌지를 반성하라고 했습니다.
장기려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에 관한 책을 발간하자는 여러 제안에 대해 단호하게 반대했습니다. 자신이 필요이상으로 높여지는 것을 경계한 것입니다. 그의 제자들이 찾아와 그의 동상을 만들고자 한다며 사진촬영을 하려고 할 때에는 “내 동상을 만드는 그 놈은 벼락을 맞아 죽어라”고 호통을 칠 정도로 자신이 주목받는 것을 삼간 사람입니다. 평생을 무소유와 무권력과 무명예로 살아온 그는 자신의 죽음 이후에도 자신이 높아지는 것을 철저히 금했습니다. 장기려에게는 세가지 행동원칙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의 동기 없이는 언동을 삼가야 합니다’ 둘째는,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다 하여야 합니다’ 셋째는, ‘잘못된 것은 나의 책임이라고 믿고 해결하도록 해야 합니다’ 입니다. 이 행동원칙에 근거하여 그는 박정희의 3선 개헌을 반대하는 서명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약속을 지키는 것에 철저했습니다. 그는 전두환 대통령이 식사제의를 했을 때에도 선약이 있다는 이유로 식사제의를 거절했습니다. 음식을 남기지 않는 것과, 받은 편지에 대해 즉각 답장을 보내는 것, 꼼꼼하게 일기를 쓰는 모습속에서 장기려의 생활태도와 사람들에 대한 자세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람의 외형을 둘러싸고 있는 권력, 신분, 돈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주목하여 그를 존귀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거지와도 겸상을 하였고, 입고 나갔던 겉옷을 거지에게 벗어주기도 했습니다. 돈이 없어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자들이나 행려병자들을 식구처럼 돌보며 자신이 치료비를 대신 내어줄 수 있었던 것도, 외모를 보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을 주목한 결과입니다.
장기려가 청빈과 겸손, 이웃사랑의 삶을 살 수 있었던 토대에는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있습니다. 그는 46세에 부산모임을 조직하여 신앙안에서의 공동체적 관계를 형성하였고, 이 모임에 월 1회는 함석헌을 초청하여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는 부산모임의 사명 중 하나를 함석헌이 예수의 제자라는 것을 전하는 일이라고 할 정도로 함석헌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누구를 통해 말씀하시는가에 대해 민감하였는데 함석헌의 음성을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함석헌의 시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의 바로 그 한사람이 장기려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장기려는 함석헌 평생의 동역자요 재정후원자로 그의 사역을 도왔습니다.
평생을 예수의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한 장기려에게 크고 거대하고 화려한 것을 추구하는 교회는 통탄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는 대형교회나 대형집회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는 1974년에 “이 형식과 타산 효용에 치중하고 위선과 허식을 용납하는 불진실의 기독교는 생명이 없는 까닭이다. 기독교는 새 혁명을 요구하고 있다”라고 글을 썼습니다. 신앙의 본질에 충실한 공동체, 일상의 삶에서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는 이들이 모인 신앙공동체를 그는 그리워했습니다. 그런 그가 새로운 신앙공동체로 만난 곳이 ‘종들의 모임’이라는 소종파공동체입니다. 종들의 모임이라는 이름은 장기려가 편의상 지은 것입니다. 그는 1984년부터 이 모임에 참여하였고, 1987년을 끝으로 산정현교회를 떠나 이 모임에만 집중했습니다. 장기려가 평생을 함께한 제도권교회를 떠나 소종파공동체를 찾아갔다는 것은 기성교회에게는 충격이었고, 교회사적으로도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만약 장기려가 끝까지 기성교회안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는 한국교회안에서 끊임없이 모범적 신앙인으로 회자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기려가 제도권교회를 떠나 소종파공동체로 간 것으로 인해, 그는 한국교회안에서 언급해서는 안될 금기 인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의 전향을 언급하는 것이 한국교회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손봉호 장로는 장기려의 새로운 신앙의 걸음에 대해 “한국교회 내에 예수 이름 빙자해서 자기 욕망 추구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나는 그런 점에서 장기려 박사가 제도 교회에 대해 환멸을 느낀 것에 대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신앙의 순수성과 진실됨을 상실한 한국교회, 예수를 따르자는 말은 넘쳐나지만 실제의 삶속에서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의지도 결단도 보이지 않는 한국교회, 구제와 봉사는 많이 하지만 자신이 누리는 삶이 침해받지 않는 범위안에서만 순종을 행하는 한국교회, 하나님을 믿는다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물신과 탐욕의 노예가 되어버린 한국교회를 보면서 탄식하였고 노년에 새로운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예수의 길을 따르고자 하였던 그가 인생에 마지막에 선택한 것이 한국교회를 떠나 소종파공동체로 옮긴 것이라는 사실은 오늘 한국교회의 현 주소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거울같이 느껴져 참으로 서글프게 다가옵니다.
장기려는 한국교회의 개혁필요성을 누구보다 절감한 사람입니다. 그는 한국교회가 외적인 성장에만 치중하면서 거대한 교회건물을 건축하는 것을 신앙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영향을 받은 맘몬주의, 즉 물신숭배의 증거로 보았습니다. 물신에 지배받는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지배받는 교회로 전환되기를 그는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개혁은 개인의 삶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겸손한 삶을 통해 높아진 한국교회의 문제가 지적되고, 청빈한 삶을 통해 부유해진 한국교회가 변화되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는 믿음을 지식이나 이론이 아닌 실천이자 현실에 대한 태도로 보았습니다. 미국에서 행한 설교에서 “예수님의 구원을 믿기만 하고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지 않는다면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고 하실까 두렵다”고 할 정도로 그는 오직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인생의 의미를 “인격적 존재자이며 하나님의 형상과 상징으로서,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히 되는 일이며, 또한 하나님나라의 국민이 되어, 하나님나라를 실현하는 일”이라고 보았습니다.
장기려는 “성공적 삶이란 첫째로 하나님의 사명을 자각하고, 어떠한 경우에서도 그 결심을 변치 않고, 실천 매진하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그의 글처럼 그는 성공적 삶을 산 인물입니다. 이만열 장로는 장기려에 대해 “세상에 이름이 드러나기를 원치 않으셨고 오직 하나님께만 인정받기를 원하셨던 분, 이 민족의 분단의 상처를 가장 진지하게 지고 가신 분, 젊었을 때부터 그는 의료를 통해 예수를 닮아 가려고 노력하였다.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일시적인 고통을 참아야 한다는 것이 그분의 지론이었다”고 했습니다. 장기려는 1995년 12월 25일 새벽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 땅에서의 사명을 마무리했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이 한 문장이 쓰여 있습니다. “주님만을 섬기다 간 사람.”이것은 그의 소천 두 달 전에 자신의 묘비에 써 달라고 아들에게 건넨 유언이었습니다.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이 아니라 주님만을 섬기다 간 사람, 그의 삶은 그래서 더욱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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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청빈과 겸손, 이웃사랑의 삶을 살 수 있었던 토대에는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있었다고 하네요..
평생을 예수의 사람으로 살다가신 분..
우리는, 그리고 한국교회는 그분의 삶을 기억해야 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