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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씨의 개인전
이 문 열
1 누구 좀 말러 줄 사람 없소
오늘 아침 우리 김 씨가 사표를 냈습니다. 아시다시피 내 작업실은 무슨 복잡한 임금 정산이나 퇴직금 문제가 논의될 직장이 아니고, 사표를 냈다지만 무슨 삼엄한 양식이 있는 문서가 제출된 것도 아닙니다. 전에 없이 말쑥한 외출복 차림으로 늦어서야 작업실을 찾아온 김 씨가 한마디 불쑥 던졌을 뿐입니다.
“내일부터는 못 나오겠구먼유 따로 조수 하나 구해 봐유”
기습과도 같은 그 말에 나는 우선 낭패한 기분부터 들었습니다. 개인전을 한 달 앞두고 있어 그 어느 때보다 김 씨의 도움이 요긴한 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이 개인전은 3년 만에 여는 것이어서 진작부터 화단의 관심을 모았고, 그 개막을 알리는 현수막은 벌써 인사동 골목 여기저기서 지나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 낭패스러움은 이내 궁금함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럭저럭 10년이 넘게 몸담아 왔던 일터를 김 씨가 하루아침에 그만두는 이유도 그러했지만, 그보다 더 알 수 없는 것은 그가 말한 조수라는 낯선 직책이었습니다. 이따금 후배 작가나 대학 제자들을 불러 몇 달씩 일을 거들게 할 때가 있어도 내가 그들을 조수라고 부르거나 말한 적은 없습니다. 하물며 잡역부로 써 온 김 씨이겠습니까. 그런데도 그가 스스로 조수를 자처하고 나서는 게 까닭 모르게 심상찮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니, 김 씨. 무슨 일이오? 전시회 한 달 앞두고 그러잖아도 정신 없는데 갑자기……. 그리고 이 전시회 이거, 얼마나 중요한지는 김 씨도 잘 알잖아요?”
나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런데 김 씨의 대답이 또 뜻밖이었습니다. 나는 그가 다른 데서 무슨 엉뚱한 일을 벌였거나, 나름의 임금 인상 투쟁으로 그만두려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지도 이저는 지 일 좀 해야잖것슈? 10년이나 한 우물을 팠으니 기든 아니든 작품으루다 물어볼 때도 됐다고 봐유”
목소리를 차악 내리깔고 정색을 하는 게 지금까지 내가 보아 온 김 씨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아니, 김 씨 일이라니요? 작품으로 묻다니요?”
“내년이면 지두 환갑이유, 깎고 후벼 파고 가는 일이라면 돌, 나무 안 가리고 할 만큼 했고, 석고 본 뜨고 주물 뽑는 일도 이만하면 작가 선생들 시늉은 낼 수 있고오…… 이저 개인전 한 번쯤은 열 때도 되지 않았슈?”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은 그 순간의 나였습니다. 평소 같으면 배를 잡고 웃었거나 어이없어 한숨부터 쉬고 볼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왠지 그저 하염없고, 좀 있다가는 쓸쓸한 기분까지 들었습니다. 그런 김 씨나 이제 그가 결행하려는 일에 대해서가 아니라, 우리네 삶 전체를 멀거니 바라보고 서 있다가 퍼뜩 느낀 듯한.
“작업실도 다 꾸며졌슈 돌도 쓸 만한 눔으로다 삼일석재에서 한 차 오게 돼 있네유. 시내 나가 석고 몇 포 사고 작업 도구 구색이나 갖추면 바로 작품 시작할 거유”
김 씨는 한참이나 말문이 막혀 있는 내게 무슨 선고처럼 그렇게 말해 놓고 마을버스 정류장 쪽으로 내려가 버렸숩니다.
아, 그 작업실, 그러고 보니 그 작업실도 알 만합니다. 보름 전인가 김 씨는 한우(韓牛) 키우다 망해 버린 마을 사람에게서 이제는 쓰지 않는 축사(畜舍) 한 동을 헐값으로 빌렸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까지는 틈만 나면 그곳으로 가 뚝딱거렸는데, 그게 바로 작업실을 꾸미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름이 가까우니 넓고 시원한 거처를 마련하는가, 싶으면서도 내가 바빠 한번 들여다보지도 못한 사이에 말입니다.
일이 이쯤 되었으니, 이제 김 씨가 조각가로 나서는 걸 막을 길은 없어 보입니다. 또 저도 가까운 데 동업자 하나 느는 거 뭐, 꼭 그리 거북하고 못마땅하게 여겨야 할 일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누군가 김 씨를 말려야 한다는 느낌은 떨쳐 버릴 수가 없네요. 누구 우리 김 씨 말려 줄 사람 없어요. 이 동네는 사람도 안 삽니까.
2 내 그럴 줄 알았지
황 선생님네 작업실에서 상근(常勤) 잡역부로 일하던 김 씨가 조각가로 나섰다고 동네가 온통 술렁거린다. 선생님도 한숨 반 실소 반으로 내게 그 일을 알려 주었고, 동네 사람들도 엉뚱하거나 터무니없는 일로 여겨 피식거리는 사람이 많다. 솔직히 말하면 나에게도 녹색 베레모에 궐련 파이프까지 비뚜름하게 문 김 씨가 천막 천으로 사방을 둘러막은 헌 우사(牛舍)에서 자신의 작품을 한답시고 돌을 쪼아 대고 있는 모습이 약간은 낯설었다.
하지만 조각하는 데 무슨 면허증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또 면허증 없이 끌이나 정을 들었다고 벌금을 물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굳이 따지면 국전(國展)이니 무슨 미술대전(美術大展)이니 하여 공인 제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저것 거친 내가 보기에는 그것도 조각가와 안 조각가, 또는 못 조각가를 나누는 데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거기다가 실습도 습작이라면 그 점에서는 김 씨만 한 이력을 가진 신예도 드물 것이다. 내가 한 후배로서 황 선생님의 작업실에서 처음 일을 거들어 본 게 6년 전인데, 그때 이미 김 씨는 단순한 잡역부가 아니었다. 황 선생님의 작업 전반에 걸쳐 한몫을 거드는 훌륭한 조수였고, 특히 돌을 다루는 솜씨는 일품이었다. 그해 황 선생님의 개인전에 나온 돌로 된 작품 중에는 선생님이 한나절 진흙으로 빚은 주먹만 한 모형만 가지고 김 씨가 집채 같은 원석(原石)에서 생짜로 뽑아낸 것도 있다.
황 선생님의 지난번 개인전에는 더했다. 그해 선생님은 서울의 대형 빌딩에 의무적으로 세우게 되어 있는 조각을 세 개나 맡아서 몹시 바빴다. 하지만 그런 돈 되는 주문을 계속 받기 위해서도 작가로서의 성가를 올려 줄 개인전은 더욱 필요해, 무리를 하다 보니 김 씨가 바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김 씨는 주물 작업도 돌에 못지않게 숙달돼, 청계천 은행 빌딩 앞에 선 청동 비천상(飛天像) 같은 것은 진흙 조소부터 마지막 색채 처리까지 거의 김 씨의 손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그 작품에 관한 한 황 선생님이 한 일은 거친 스케치 한 장 그린 것과 조소 작업 때의 몇 가지 구두 지시, 그리고 멋진 서명이 고작이었다. 더 있다면 작품을 차에 싣기 직전에 한 샌드 페이퍼질 잠깐 정도일까 그렇지만 내게까지 김 씨가 한 조각가로 보인 일은 이 봄 동네 뒷산 조각 공원에서 개최된 국제 심포지엄 때에 있었다. 스물이 넘는 참가국 수만으로도 벌써 휘황한 국제성을 확보한 그 심포지엄에서 황 선생님은 주최 측이면서 동시에 한국 대표 작가로 참가했다. 그런데 그 심포지엄은 콩쿠르 형식을 취하고 있어 모든 참가 작가는 보름의 행사 기간 동안 한 점씩 작품을 내기로 되어 있었다.
행사 관리와 함께 작품도 출품해야 하는 황 선생님으로서는 또 바쁠 수밖에 없었다. 재료를 돌로 선택한 선생님은 야산 중턱에 줄지어 선 참가 작가들의 천막 작업상에 거친 스케치 한 장 걸어 놓고 김 씨부터 투입했다. 전처럼 석수(石手)로서 돌 작업의 단순노동 부분을 대신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말할 것도 없이 처음 하루 이틀은 황 선생님도 참가 작가로서 모자람이 없었다. 주최 측 요원으로 부득이한 경우를 빼고는 하루 종일 김 씨와 함께 돌을 썰고 깨고 깎았다. 하지만 명색 국제 대회인데다 아무래도 질보다는 양과 겉모양에 치우친 행사가 되다 보니 그 관리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서른 명 가까운 참가 작가와 그 배가 넘는 보조 인력의 숙식을 돌보고, 행사장과 숙소 사이 1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아침저녁 이동시키며, 여가 시간 동안에는 또 인근의 관광 명소로 안내하는 일만 해도 몇 사람의 임원으로는 벅찼다. 거기다가 대회를 연례행사로 존속시키기 위해 자치단체와 지방 언론에 홍보하는 일이며, 이런저런 무시 못 할 방문자의 접대 같은 일들이 늘어나면서 황 선생님의 제작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사흘째부터는 오후가 되어야 겨우 작업장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고, 그나마도 하루가 다르게 시간이 반감되더니 일주일 뒤부터는 짬짬이 둘러 김 씨의 작업 현황을 점검이나 하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그런 황 선생님에 비해 김 씨는 나날이 작가 비슷하게 되어 갔다. 갈수록 다른 잡무나 단순 보조 업무가 줄어드는 대신 본격적인 작품 조성(造成)에 다가들게 된 까닭이었다. 무슨 유니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명찰이 있어도 작업 중에 달고 다니는 사람이 없어 겉모양도 다른 작가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머리와 눈썹이며 골 깊은 주름에 하얗게 돌가루를 덮어쓴 채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김 씨를 보면 영락없이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원로 작가였다.
외국어라고는 지게 곁에 두고 A 자도 못 알아보는 김 씨였지만 옆 작업장에서 일하는 외국 작가들과의 교류에서도 전혀 막힘이 없었다. 세상 어느 나라 말에도 없는 어휘 몇 개와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을 하는데, 그 교류가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곁에서 보기에도 신통했다. 김 씨는 그걸로 스물한 개 나라에서 온 스물여섯 명의 작가들에게 자신의 희로애락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전기 드릴, 그라인더, 소형 착암기 같은 한국산 전기 제품들의 사용법까지 일러 주었다.
그들 외국 작가 중에 옥산느라는 이름의 불가리아 여류 작가가 있었다. 김 씨와 마주 보는 천막 작업장에서 역시 돌을 소재로 작품을 만들고 있던 이로, 공산 정권 시절에 이미 인민 작가 칭호를 얻었고 서유럽에서도 여러 번 개인전을 연 적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조각가로서는 꽤 알려진 편이었으나, 솔직히 말해, 여자로서는 그리 볼 것이 없었다. 우선 쉰을 넘은 나이도 그랬지만 오랫동안 쇠와 돌로 무겁고 큰 작품만 다루어 온 터라 남성적으로 굳어진 몸매는 더욱 그랬다. 그녀에게서 굳이 여성성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나이 든 슬라브계(系) 여자가 흔히 그러하듯 풍만하게 남아 있는 젖가슴과 엉덩이 정도일까.
그런데 김 씨의 교류는 갈수록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 김 씨는 일하는 틈틈이 그녀의 작업장 쪽을 살피고 그녀에게 무슨 어려움이나 불편이 없는가를 살폈다. 그리고 그녀가 조금이라도 그런 기색을 보이면 부르기 전에 달려가 해결해 주었다. 어떤 날은 아예 한 나절을 떼어 함께 그녀의 작품에 매달리기도 했다.
김 씨의 그런 별난 호의는 당연히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특히 주최 측의 임원들은 김 씨가 자기보다 머리통 하나만큼은 더 크고 덩치도 배가 넘는 그녀에게서 외국에서 온 손님을 넘어, 한 여성을 느끼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며 돌아서서 낄낄댔다.
그들이 주고받은 것이 진정한 이해인지 철저한 오해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옥산느도 그런 김 씨를 스스럼없이 받아 주었다. 필요할 때마다 불러 머슴처럼 부려 먹기는 해도, 일이 끝난 뒤에는 둘만의 교류를 연장시켜 김 씨에 대한 그녀의 남다른 정감을 드러냈다. 이를테면, 저녁 식사 후 호텔로 돌아가는 동료들에게서 떨어져 나온 그녀가 마을 공판장 같은 데서 김 씨와 늦도록 맥주를 마시다가 따로 택시를 불러 호텔로 돌아가는 게 그랬다. 특히 행사 기간 뒷부분 일주일은 거의 저녁마다 그렇게 보냈던 것 같다. 나도 한번 그런 그들의 술자리에 끼어 본 적이 있는데, 그 묘한 분위기가 영 잊히지 않는다. 자리에 앉자마자 어느 나라 말에도 없는 외마디 소리로 건배를 대신하며 쉴 새 없이 맥주를 들어켜다가 눈짓 한 번 찡긋하며 킥킥 웃고 어깨 한 번 툭 치고 허허거리는 식으로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잘도 죽여 냈다. 그날따라 먼저 곯아떨어진 김 씨가 그녀의 부축을 받으며 숙소로 돌아가는 모습은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가 따로 없었다.
그렇지만 잔치는 파하고 봄은 다하기 마련, 마침내 심포지엄은 끝나고 작품 시상식 날이 왔다. 공식적인 자리가 되자 성장(盛裝)을 한 옥산느는 외국에서 초대받아 온 작가로서 단상에 오르고, 김 씨는 여전히 꾀죄죄한 작업복으로 행사 뒤치다꺼리를 하는 잡역부로 돌아갔다. 황 선생님은 애석 하게도 본상(本像)에서는 제외되었지만, 주최 측으로 애쓴 점을 인정받아 무슨 특별상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 시상식이 끝나기 무섭게 공식 석상에서 내려온 옥산느가 마침 행사용 팻말을 뽑고 있던 김 씨에게 다가가 황 선생님이 들고 있는 상패를 가리키며 속삭였다.
“댓츠 유어스. 리얼리, 댓츠 유어스.”
이미 말했듯, 영어라고는 알파벳도 모르는 김 씨지만 나는 그가 그러는 옥산느의 말을 알아들었다고 확신한다. 그녀를 마주한 그의 주름진 얼굴에 희미하긴 해도 분명 감출 수 없는 자부(自負) 같은 게 떠올랐다.
다음 날 옥산느가 떠날 때의 광경도 내게는 인상 깊다. 버스에 오르려던 옥산느가 저만치 떨어져서 눈으로 전송하고 있는 김 씨에게 우르르 다가가더니 어린애처럼 번쩍 안아 들고 그 메마른 볼에 입을 쭉 맞추었다. 그런 다음 다시 김 씨를 땅에 내려놓고는 무어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함께 솥뚜껑 같은 손으로 어깨를 툭 쳤다. 사람들은 김 씨가 그 충격으로 비틀거리는 것에만 웃었지, 불그레하게 달아오르던 그 눈가까지 알아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중에 옥산느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무엇이었는지를 김 씨에게 물어본 것도 나뿐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모국어인 불가리아어쯤으로 추측은 해도, 뜻은 영 짐작이 가지 않아 물어본 것인데, 그때 공판장에 앉아 낮부터 소주를 훌쩍이던 그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나보고 정말로 솜씨 좋은 작가라는구먼.”
3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거 모르면 입 닥치고 국으로 가만히들 있어요. 김 씨 그렇게 된 속내 이 장생이 마을에서는 나만큼 아는 년도 없을 거라. 거 다 흑룡강 색시 때문이라구요. 다들 알지? 작년 여기 고속도로 확장 공사 할 때 내가 맡아 하던 함바에서 몇 달 일하다 간 그 중국 색시. 잠은 우리 아랫방에서 자구 쉬는 날은 밥도 우리 집에서 한 술씩 뜨지 않았어요.
얼굴이 반반한 데다 거 뭐야, 위장 결혼인가 뭔가 해 왔다가 이제는 이혼하고 혼자라는 말에 이 동네 남정네들 모두 침깨나 흘렸지, 왜. 꼴에 남자라고 그때 제일 열 올린 게 바로 김 씨였다구요. 참말로 공도 많이 들이고 애도 많이 썼지. 그러다가 그 모진 꼴 봤으니 상처는 또 오죽 컸겠어. 바로 그거라구요. 그래서 이상해진 거야. 그때도 걸핏하면 눈 척 내려 감고 조각가 선생 흉내 내며, 예술하며 사는 게 어쩌고저쩌고, 씨월거렸다니까.
그 나이에, 그 모양에, 그 형편에 그렇게 젊은 여자를 넘보았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구? 모르는 소리 마셔. 그래도 김 씨 여자 보는 눈 얼마나 높다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죽은 김 씨 마누라 젊을 때 모습 내가 아는데, 얼마나 훤칠했는지 알어? 팔자가 사나워 일찍 남편 잡아먹고 고생하다 이 마을에 들어올 때는 이미 그 모양 났지만. 어린 새끼 주렁주렁 달고 살길이 없어 김 씨 같은 것도 의지라고 같이 사는 바람에 같이 천덕꾸러기가 되고 말았지만……. 그런
데 그 흑룡강 색시가 바로 죽은 김 씨 마누라를 꼭 빼닮았다구요.
흑룡강 색시는 또 왜 김 씨 같은 사람하고 어울렸냐구? 못된 것. 뻔하지. 김 씨 모아 둔 돈 보구야. 것도 자식이라구 이리저리 훌쳐가 빈털터리 같지만 김 씨 아직 모아 쥐고 있는 거 제법 되는 모양이더라구요. 조각가 선생이 구석구석 쥐어박기는 해도 김 씨 월급 하나는 많잖아요. 모르긴 하지만 오비맥주에서 운전하는 재동이 아버지나 현대전자 수위 서는 언덕 집 바깥양반보다는 더 쎄게 받을걸. 그걸 하마 10년 가까이 모았으니, 자식 같지 않은 자식들이 사업 자금입네, 사고 무마 비용입네, 하고 뜯어 가도 몇 천은 아직 쥐고 있을 거라.
하기야 김 씨도 영 숙맥은 아니지. 처음에는 차악차악 달라붙는 흑룡강 색시를 의심하는 눈치도 없잖았어. 그런데 그 여우 같은 게 어쨌는지 아세요. 몰색없이 껄떡거리는 것들하고 실컷 헤헤닥거려 놓고도 김 씨만 얼씬거리면 또 요조숙녀라. 그러고는 나이가 드셔도 독신이니, 누깔 시펴런 계집 눈치 보아 가며 지분거리는 젊은 것들 열하고 안 바꾼다나. 지도 낼모레가 마흔이라 함께 늙어 갈 듬직한 혼처 자리 찾아보는 중이라나.
그러니 김 씨 후끈 달 수밖에. 그때 한창 정신 못 차리고 나대는 꼬락서니 봤으면. 일 마치면 아예 우리 집에 와 살았지. 함바 쉬는 날은 낮에도 암캐 따라온 수캐맨키로 우리 집에 와서 밍기작거리다가 황 선생님 호령에 끌려간 것도 여러 번이라니까. 그래 가주고 설랑은 그 여우 같은 것이 이래도 웅 저래도 오냐야. 정말루 쓸개고 간이고 흑룡강 색시가 빼 달랬다면 모두 뻬 줬을 거야. 술 밥 간에 먹고 싶다는 것이면 오밤중도 마다 않고 나가 사 왔고, 쉬는 날은 또 시내에 모시고 나가 여왕님은 저리 가라야. 끼니마다 으리으리한 가든에 노래방 극장 돌아치다가 택시 터억 불러 장생이 마을로 돌아가는 거라. 화장품이다 옷가지다 한 아름 사 안겨…… 어디 그뿐이야. 돌아와서는 또 고스톱인데, 이건 처음부터 잃어 주기로 작정하고 치는 고스톱이라니깐.
그 틈에 끼어 이것저것 얻어걸리는 재미도 쏠쏠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외로운 사람들끼리 짝을 맞추는가 싶어 나도 기꺼이 다리를 놓아 주었지. 두 사람 나이나 꼬락서니가 너무 층지기는 했지만서두……. 그런데 이게 웬일이야. 김 씨가 엉뚱하게 열아홉 순정이더만. 점잖은 말만 골라 하고 손목 한번 못 잡는 거라. 보다 못해 내가 나서서 빨리 작수성례(酌水成禮)라도 하고 합방하기를 권하기까지 했지. 그러자 고 여우 같은 게 샐샐 웃으며 말하더라구 정(情)만으로 사는 거냐고. 아파트라도 한 채는 장만해야 새로 시작해 보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니냐고.
그때 김 씨에게 아파트 살 돈이 있었으면 당장 사다 바쳤을 거야. 하지만 가진 게 그렇게는 안 되었던가 봐. 아무리 시외에 있는 소형 아파트라도 오천은 쥐어야 하지 않아? 그래서 헛돈만 쏟아봇다가 그 꼴을 만난 거라구요. 보았지들, 그 범 같은 흑룡강 색시 신랑 위장 결혼 같은 거는 애초에 한 적도 없고, 흑룡강에서부터 부부가 함께 와 돈벌이를 하고 있었던 거야. 남편은 다른 공사장에서 노가다로 일했는데, 그 공사가 끝났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 온 지 3년이 차고 돈도 모을 만큼 모아 마누라 데리러 온 거라구요. 그사이 서울 다녀옵네, 친구 만나러 가네, 하던 것도 모두 그 남편 만나러 다닌 거구.
하지만 그건 못들 봤지. 신랑이란 작자가 보란 듯 우리 아랫방을 차지하고 누가 오랜만에 만난 젊은 내외 아니랄까봐 밤새 동네가 요란스럽도록 상방(上房)을 차린 다음 날 위채 내 방에서 있었던 일 말예요. 닭 쫓던 개 꼴이 난 김 씨가 새벽같이 날 찾아왔는데, 밤새 무얼 했는지 10년은 더 늙어 버린 얼굴이더만. 두 눈만 번들거리는 게 마주 쳐다보기 섬뜩하더라니까. 거기다가 목소리까지 차악 깔며 아랫방 색시 좀 불러 달라는데 마다할 재간이 없대. 하지만 불러 주면서도 무슨 일 나는 게 아닌가 싶어 가슴이 조마조마하고 콩팥이 다 떨릴 지경이더라구요.
그런데 그 흑룡강 색시, 참 대단하더만. 그런 김 씨를 보고서두 눈도 깜빡 않는 거라. 보기에도 오싹할 정도로 찬 기운이 도는 얼굴에 날 선 목소리로 아침부터 무슨 일이냐구 묻대. 뜻밖은 김 씨였어. 나는 주머니에서 칼이라두 뻬 드는 줄 알았는데 겨우 수건 한 장 꺼내 줄줄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면서 아이들 투정하듯 웅얼거리는 거야. 어찌 이럴 수 있느냐구, 사람을 속여도 어찌 이리 모질게 속이느냐구.
색시는 그 두 마디도 다 들으려 하지 않더라구요. 발딱 일어나며 야멸차게 쏘아붙이는 거야. 자기가 속이기는 뮐 속였냐구 사람이 살다 보면 조금씩은 감추는 것도 있기 마련이 아니냐구. 그러고는 되레 몰아대는 거야. 그럼 거기는 정말로 예술가냐고, 기껏해야 조각가 밑에서 막일이나 하고 법 빌어먹는 늙은 홀아비 아니냐구……. 말올 마친 색시가 쾅 소리 나게 문을 닫고 나가 버리자 엉거주춤 따라 일어서던 김 씨가 풀썩 주저앉는데 꼭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더만. 그러더니 한참이나 훌쩍거리다가 축 처진 어깨로 내 방을 나가는 게 가다가 쓰러져 영영 못 일어날 사람 같았어. 그리고 다음은 알지들. 밤마다 시내 나가 술 퍼마시다가 밤늦어서야 택시 대절해 들어오던 김 씨. 아마 한 달은 그랬지. 바로 그거라구요. 김 씨는 하마 그때 맛이 간 거라.
하지만 그편 말 듣고 보니 약간 그렇긴 하네. 사랑에 실패 봤다구 모두 거, 뭐야 예술가가 된다면 세상에 예술가 사태 안 나겠어요. 그렇다면 그럼, 뭘까. 무엇이 우리 김 씨를 저렇게 돌게 만들었을까.
4 가야금 줄은 가을바람에도 운다
내 어린 연인 영숙이 아버님에게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다. 내가 연인 얘기를 하면서 굳이 어리다는 말을 앞세운 것은 그녀의 나이가 나보다 열두 살 아래라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재작년 갓 여상(女商)을 졸업하고 우리 회사에 들어올 때의 인상에다 과장이란 내 직급과 경리 보조라는 그녀의 직급 사이에 가로놓인 거리감이 언제나 그런 수사(修辭)를 그녀 앞에 붙이게 한다. 지금으로 봐서는 설령 우리가 결혼을 해 함께 늙어 간다 해도 그녀는 내게 늘 어리게만 느껴질 것 같다.
내 영숙이가 아버님 일로 속상해하는 것은 전에도 몇 번 본 적이 있다. 모두 그녀의 의붓오빠들 때문이었다. 듣기로 영숙이네 가계는 좀 복잡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위로 이복(異腹) 오빠 둘과 의붓오빠 둘에 이복 자매가 더 있는데, 바로 그 두 의붓오빠가 말썽인 듯했다. 하나는 되지도 않는 사업 차리기를 좋아해서, 그리고 하나는 자주 사고를 쳐서, 번갈아 시골에 사는 아버지를 털어간다고 했다.
영숙이에게 의붓오빠라면 그 아버님과는 전혀 피가 섞이지 않은 남의 자식들이 된다. 그런데 그런 자식들의 뒤를 번갈아 봐주다니 무던히도 속이 좋은 노인네가 아닌가 싶었다. 오히려 어머니를 통해 피를 나눈 영숙이가 그 오빠들을 봐준다고 속상해하는 게 내게는 매정한 여자 같아 보였다.
낮에 점심을 함께하면서 또 그 의붓오빠들 때문이라면 몇 마디 다둑여라도 주려고 넌지시 물어보았는데 영숙이는 대답도 않고 고개만 저었다. 그리고 밥만 폭폭 떠먹는 게 영 대답해 줄 뜻이 없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아버님 단독으로 일을 냈고, 그 내막은 내게 말해 주기 민망한 데가 있는 것 같았다.
영숙이 말로 아버님은 이천 근처 시골 마을에서 홀로 농사를 짓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얼마 전 만나 본 뒤의 느낌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이제 한 스무 날 지났나. 회사 일을 끝내고 영숙이와 함께 나오는데 웬 꾀죄죄한 늙은이가 수위와 무슨 얘기를 나누다가 영숙이를 보고 반색을 했다. 그런데 영숙이의 반응이 이상했다.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게 된 어린애처럼 굳어 있다가 체념한 듯 고개를 까닥하고는 내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
“아버님이 오셨네요. 과장님 먼저 가세요.”
하지만 영숙이가 누구인가. 인생 초장에 호된 맛을 보고 여자라면 야차(夜叉) 보듯 해 온 내게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온, 어리지만 귀하디귀한 연인이 아닌가.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물방울같이 투명하고 여린 내 님 아닌가. 그리되면 영숙이의 아버지는 내게 또 누구인가. 저야 나를 맘씨 좋은 직장 상사쯤으로 여기건 말건 내게는 장차의 장인어른이 아닌가.
그날 나는 틈 있을 때마다 나를 할끔거리는 영숙이의 눈길을 못 본 체하며 그들 부녀를 가까운 암소 갈빗집으로 모셔다 젊은 후배들 말로 한 턱 거하게 냈다. 그런데 곁들인 소주 탓일까. 못내 거북해하던 영숙이 아버님이 차츰 말문을 열었다. 아마도 딸에게 근황을 얘기하는 것 같은데 만나는 사람이라는 게 황 선생이요, 서 교수요, 김 박사에 박 기자였다.
가까이서 살피니 하는 일도 영숙이가 말한 것과는 달라 보였다. 손이 거칠고 육체노동에 단련된 몸 같기는 하지만 들판에서 흙을 주무르는 농사꾼은 분명히 아니었다. 주름지고 검은 얼굴이긴 해도 햇볕에 그을은 것은 아니었으며, 머리에는 모자를 쓴 흔적도 없었다. 되도록 아버지를 내게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듯한 영숙이의 눈치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틀림없이 그가 하는 일을 물어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영숙이의 눈총에 쫓기듯 그 암소 갈빗집에서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택시라도 찹아 드리려고 이면(裏面) 골목을 빠져나오는데 영숙이 아버님이 한군데서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일, 이, 삼 층을 은행으로 쓰고 있는 큰 빌딩 입구의 청동 조각상 앞이었다.
“내 작품이 여기 있었구나.”
그 말에 평소에는 지나쳐 보던 그 청동상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약간 추상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피리 부는 선녀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상이었다. 그때 영숙이가 흰자위만 하얀 눈으로 제 아버지를 흘기며 쏘아붙였다.
“엉뚱한 소리 말아요. 저게 어째서 아빠 작품이야?”
“맞아, 네댓 해 전 가을에 내가 만든 거라니께. 어디 있는가 했더니…….”
그렇게 대답한 영숙이 아버님은 반가운 듯 그 조각상을 두 손으로 쓸어 보았다. 영숙이가 못 참겠다는 듯 한곳을 가리키며 빈정거리듯 말했다.
“차암 내…… 허풍을 칠 데가 따루 있지. 여기 이렇게 황 선생님 사인이 있는데두요?”
내 어린 연인은 무언가 내가 알지 못하는 이유로 몹시 심사가 뒤틀려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영감은 조금도 움츠러드는 기색이 없었다.
“내 사인도 있어. 오른편 소매 아래 보면 가새표 두 개가 있을 거여. 석고 뜨기 전 진흙에 새겨 넣었지……. 이거 정말로 진흙 반죽부터 주물 손질까지 전부 다 내가 만든 거라니께.”
그러자 영숙이가 갑자기 빽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입에서는 처음 들어 보는 경기도 사투리였다.
“아부지 갈 거, 안 갈 거? 저기 택시 왔으니까 어여 가!”
나로서는 도통 원인을 짐작할 수 없는 부녀간의 불화였지만 그래서 또 끼어들 수도 없었다. 마침 근처에 선 택시에 내몰듯 아버지를 태워 보낸 영숙이는 그래도 무엇이 속상했는지 제가 앞서 나를 이끌고 근처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백 시시를 석 잔이나 꼴깍거리고 눈물까지 짤끔거렸는데, 그 아버지에 대해서 말한 것은 한마디뿐이었다.
“못난 영감쟁이, 의사 아들은 뒀다 뭣해, 남의 집 막일이나 하면서, 모아 둔 것까지 다 털리고……. 빙충맞게시리…….”
거기까지 들어도 영숙이네 집안 자세한 속내를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그때까지는 내 장차의 장인 영감이 영 몹쓸 짓을 하고 다니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제 영숙이가 저렇게 상심하는 걸 보니 꼭 그렇게만 볼 수도 없을 것 같다. 장인어른이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일까.
5 예술가는 태어날 뿐, 오직 태어날 뿐
이상할 거 하나도 웂어. 내 하마 그 사람 이 마을에 들어설 때 알아봤다니께. 왜 그랬는지 똑 부러지게 말할 수는 웂지만, 처억 오는 감이 거 뭐시냐, 예술가 그래, 예술가더라구.
그러니까 그게 언제여. 맞아, 김 씨네 장생이 마을 들고 며칠 안 돼 12·12 터졌으니 79년도가 틀림웂어. 이삿짐보다는 사람이 더 많이 탄 봉고 차에서 김 씨네 다섯 식구 내릴 때부터 이건 우리하고 다른 사람들이구나, 싶더라구.
식구라는 게 도무지 한집에 사는 사람들같이 어울리는 구석이 전혀 웂는 거여. 우선 그들 내외부터 보면 안으로는 키가 훤칠한데 바깥은 난쟁이 똥자루 겨우 면한 반 동가리여. 또 안으로는 반듯한 이목구비에 병색이 돌 만큼 흰데, 밖은 지금이나 그때나 바짝 구워놓은 살색에 반짝거리는 눈만 빼면 철저하게 민주주의적으로 노는 얼굴이여. 나이도 그려. 원판이 고와도 아낙은 이미 할망구 티가 나는데 김 씨는 찌들어도 마흔을 넘기지 못했어. 게다가 씨 도둑질은 못 한다구 껑충한 사내아이 둘도 한눈에 벌써 그 씨는 아니더라구. 외탁한 것도 아니고 김 씨를 닮지도 않았으면 이게 뭔 일이여. 김 씨 마누라 등에 업힌 갓난쟁이는 딸이라기보다는 손녀 같구.
김 씨가 워치케 우리 장생이 마을에 자리 잡게 되었냐구? 십수 년 한 골짝에 살며 그거 아직도 몰러. 저 뒤 석산(石山) 때문이여. 파먹다 말고 허가 취소돼 시퍼런 물감으로 처발라 둔 석산 말여. 산 쥔이 석재만 파낸 게 아니라 상석이나 계단 석재 같은 거 현장에서 바로 다듬어 팔아먹기도 했는데, 김 씨는 거기 석수(石手)로 온 거라구. 그때도 하마 돌 다루는 솜씨 하나는 기찼지. 석수 중에 망부석(望夫石) 깎을 줄 아는 것은 그 사람 하나뿐이었다니께. 그 망부석 대충 깎아 오래된 물건처럼 약품 처리한 뒤 왜놈들한테 정원석(庭園石) 으로 비싸게 팔아먹던 시절 일이여.
김 씨네 집안 복잡한 내막 드러난 건 짐 풀고 며칠 안 돼서였지. 성중이 알지, 거 왜 김 씨 큰아들. 그때 중학을 다녔는데 명찰을 보니 장성중이여. 장성중이, 그게 워치케 된 일이냐구 난리 피울 것도 웂이 김 씨가 말해 주는데, 둘째 성현이까지 제 아이가 아니라고 하더구먼. 그때도 돌산 따라 떠도는 석수란 게 뭐 그리 대단한 일 자리도 아니어서 우리는 당연히 홀아비로 늙어 가던 김 씨가 아들 둘 딸린 과수댁과 아무렇게나 짝을 맞춘 줄 알았지.
그런데 말여, 그게 아녀. 나도 우연히 알게 되었지만서두 김 씨 그 사람 보통 사람이 아녔다구 원래는 말여, 구제(舊制) 중학까지 나오고 서울서도 내로라하던 회사에서 펜대 굴리던 사람이었다는 거여. 음전한 색시 맞아 알토란 같은 아들까지 둘 놓고 살았다는구먼. 그런데 뭐시 잘못됐는지 그 직장에 그 색시, 그 자식 다 팽개치고 집을 나선 거여. 노름을 하다 회사 돈에 손을 댔다는 말도 있고, 술집 아가씨 반해서 살림 차렸다가 그리됐다구두 하는데, 내가 믿고 싶은 건 김 씨가 제 입으로 말한 거여.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출근하고, 저녁에 돌아와 밥 먹고 자며 다람쥐 쳇바퀴 돌듯 처자식 건사로 한 10년 보낸 뒤였다는구먼. 어느 일요일 한가로운 날 팔짱을 베고 누워 있다 보니 문득 사는 게 이런 게 아닌데, 싶더라는 거여. 그래서 슬며시 일어나 산보 나오드키 집을 나온 뒤로. 두 번 다시 집 쪽은 돌아보지 않았다는 거여. 이 장생이 마을에 나타날 때는 하마 집 나온 지 8년 됐다던가. 석수 일은 그 뒤 이러저리 떠돌다가 손에 익히게 된 밥벌이 기술이구 한평생 살다 보면 누구든 조금씩은 비틀거리기도 하고 헤매기도 하지만 김 씨같이 그러기 어디 쉬운 일이여. 다 그게 우리네처럼 살지 못하게 지어진 팔자라고. 부처님 같은 출가야 아니지만, 그냥 한번 헛디딘 구덩이에 폭삭 주저앉아 평생을 뭉기작거리는 우리와는 달라도 한참 다르게 태어난 사람이라구.
거기다가 여기서 우리와 함께 산 20년도 이제 와서 돌아보면 뭔가 남달라. 잔병치레에 성깔만 남은 늙은 마누라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두 아들 얼마나 정성 들여 거뒀어. 조각가 선생님네 들어 가기 전에는 마을의 궂고 험한 잡일은 다 김 씨 몫이었지. 그러면서도 안 먹고 안 입고 두 의붓자식 고둥학교까지 시켰잖여. 어디 그뿐이여. 다 자란 뒤에도 사업 차립네, 사고 쳤네, 번갈아 손 벌려도 아무 말 않고 적금 털어 애비 노릇했어. 명목이라도 그것들과 부자(父子)가 되게 한 여편네는 벌써 죽고 웂는데……. 마을 아낙들은 그런 김 씨가 속없다 흉보지만, 생각들 해 봐 그게 어디 쉬운 일이여. 그걸 봐두 뭔가 우리와는 다르게 태어난 사람이라구.
나만 아는 김 씨 얘기 하나 더 할까. 재작년 추석 전날이여. 다니러 오는 딸년과 사위 맞으려고 읍내 버스 정류소에 갔더니 김 씨 그 사람이 웬일로 양복 빼입고 선물 꾸러미를 낀 채 대합실을 서성거리드먼. 늦어도 너무 늦었지만 이제라도 옛집 찾아가는가 싶데. 김 씨 큰아들이 벌써 의사가 되어 젊어 영문도 모르고 혼자 된 어머니 모시고 잘산다는 소문, 들어 보았지들. 그 마누라 그 자식 찾아가는 낯없는 길이라 김 씨를 못 본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일이 잘 돼 이 마을 천덕꾸러기 면하고 그 집으루 돌아가 편히 늙어 가게 되길 바랐지.
그런데 아녀. 그날 밤 늦게 김 씨가 낮에 본 선물 꾸러미 그대로 낀 채 술에 함박 취해 날 찾아왔더라구. 쫓겨났나 했는데 그게 아녔어. 아는 사람에게 받은 주소대로 신림동 어딘가 있는 아들 집을 찾아가긴 갔지만 덩실한 집 대문께에 서니 하마 마음이 약해지더라는구먼. 그래서 쭈볏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자동차 소리가 나 근처 전봇대 뒤로 숨었다는 거여. 그리고 가만히 엿보니 한 팔자 좋은 마나님이 며느리 손자 부축받으며 차에서 내리는데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도 틀림옰이 본마누라라. 백화점이라두 다녀오는지, 저마다 봉지봉지 사 들고 활짝 웃고 떠드는 모습들이 너무너무 행복해 보이면서, 문득 자신이 잘못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거여. 그래서 다시 뒤도 안 돌아보고 길을 되짚어 돌아와 버렸다며 꺼이꺼이 우는데 나꺼정 공연히 심란해지더라니께.
그걸 두고 혹 청승맞다거나 주변머리 없다고 흉들 볼지 모르지만, 실은 그게 김 씨여. 날 때부터 우리하고는 뭔가 조금 다르게 태어난. 그런데 그 김 씨가 이제 예술 한다니 나는 되레 아, 그거였나, 싶은디. 증말 하나도 이상할 거 웂어. 이상하다면 그런 김 씨를 진작부터 알아보지 못한 우리들이지.
6 어둠도 별이다
나는 오늘 별난 전시회를 보고 왔다. 용케 남은 신문 신춘문예 미술 평론 부문에 입상하여 평단(詳壇) 말석에 자리한 지는 아직 3년밖에 안 되지만 그동안 이 나라에서 열린 조각 개인전은 거의 빠뜨리지 않고 보아 온 나다. 그러나 오늘 본 개인전만큼 기이한 감동으로 다가온 전시회는 없었다. 아마도 앞으로도 그리 흔치는 않을 것이다.
오늘 아침 내가 황영철 선생의 작업실을 찾을 때만 해도 이 별난 전시회를 보게 되리라는 예감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황 선생은 벌써 10여 년째 경기도 이천에 있는 작은 산골 마을에 묻혀 살며 생명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빚어내고 있는 중진 조각가다. 근래 몇 년 작품이 뜸하다가 지난달에 천지 화랑에서 연 개인전이 호평을 받아 다시 평단의 주의를 끌었다. 내가 황 선생님을 찾게 된 것은 어떤 계간 미술잠지의 청탁을 받고서였다. “이 작가를 다시 본다.”
가 내가 써야 할 어정쩡한 탐방 기사의 제목이었는데, 일주일에 두어 시간 보따리 장사로 강의를 나가는 일 외에 백수나 다름없는 나로서는 마다할 수 없는 일거리였다.
황 선생의 작업실이 있는 장생이 마을은 3번 국도를 벗어나고도 새마을 포장길을 삼십 분은 더 달려야 하는 청성산 기슭에 있었다. 그런데 그 후미진 산골 마을 입구에서 난데없는 현수막 하나가 내 눈길을 끌었다.
“김창경 조각 전시회.”
글씨를 싸구려 간판집에 맡겼는지 예술 작품 전시회보다는 국회의원 입후보를 알리는 현수막 같았다. 나는 이 산골에 누가 이런 걸……, 하면서 전시회 장소를 살펴보았다. 멋 부리느라 비딱한 글씨로 “물탕골 김 씨 화랑”이라 쓰고 뒤에는 괄호를 쳐서 “킴스 갤러리”라는 영 어 표기까지 덧붙여 놓았다.
나는 얼른 인사동에 있는 여러 화랑들의 이름을 떠올려 보았다. 아무래도 그런 이름의 화랑은 기억에 없었다. 이번에는 범위를 넓혀 강남이나 평창동 쪽을 더듬어 보았다. 그리고 더 멀리 내가 아는 서울 근교의 화랑까지 모두 떠올려 보았으나 끝내 그 비슷한 이름도 떠올릴 수 없었다.
황 선생과의 인터뷰가 끝나기 무섭게 내가 ‘물탕골 김 씨 화랑’을 물은 것은 아마도 그때 품었던 궁금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황 선생은 내 물음에 웃음부터 터뜨렸다.
“아, 그런 데가 있지요. 이 골짜기 농로를 따라 2킬로쯤 더 들어가면 나옵니다.”
“김창경 씨는요?”
“신예 조각갑니다. 말하자면 이 전시회가 데뷔전인 셈이지요.”
“서로 아시는 사입니까?”
그러자 황 선생은 다시 참을 수 없다는 듯 껄껄거렸다. 그러다가 이내 능청스러운 표정이 되어 대답했다.
“알다마다요. 여러 해 함께 작업해 왔습니다.”
하지만 황 선생도 오래 비정하지는 못했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한번 찾아보겠다고 하자 이내 연민과 진지함이 뒤얽힌 표정으로 김 씨의 신상 이력을 간단히 들려주었다. 그리고 자진해 앞장서며 그 화랑과 김 씨가 거기서 전시회를 열게 된 경위까지 일러 주었다.
“지난 석 달 나름으로는 열심히 작업해 작품을 만들었지만 누가 그런 김 씨에게 화랑을 내줍니까? 그렇다고 비싼 대관료(貸館料) 물고 화랑을 빌릴 처지도 못 되고, 몇 푼 모아 쥐고 있던 돈은 그동안 작업실 꾸민다, 공구 사들인다, 재료값이다 해서 다 날린 뒤라……. 그래서 생각다 못해 이번에는 자신의 작업실을 다시 전시장으로 바꾼 거지요.”
“누가 보러 오기는 했습니까?”
“개회식 날 김 씨가 국밥을 내며 불러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가서 봤지요. 나도 가 봤고, 또 그사이 놀러 온 친구들이나 잡지사 기자 양반들도 몇…….”
“어땠습니까?”
“가서 보세요. 내 입으로 말하기는…….”
거기서 황 선생은 다시 착잡한 표정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들은 대로 김 씨의 전시장은 물탕골이라는 그 골짜기 막장의 쓰지 않는 우사(牛舍)를 개조한 것이었다. 녹슨 철제 뼈대만 남은 그 곁 동(棟)과는 달리 천막 천으로 벽을 막고 커다란 출입문을 해 달았는데 그 위에는 현수막에서 본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김 씨 화랑’을 알리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전시장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다. 황 선생이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 작품들이 모두 나와 있네. 벌써 전시가 끝났나? 아니면 야외 전시로 바꾼 거야?”
그러고 보니 작품들이 모두 전시장 밖에 나와 있었다. 짐작대로 거의가 석조 구상(具象)이었다. 인체와 그 변형이 위주였고, 드물게 나무나 가축들도 뒤틀린 사실(寫實)로 빚어져 있었는데 알 수 없는 일은 처음부터 그 모두가 어디서 많이 본 듯하다는 느낌이 드는 점이었다. 그러다가 이내 그 모두가 바로 황 선생의 작업실과 작품집에서 본 것들이란 생각이 들며, 비로소 그가 평을 머뭇거리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창조의 개념, 특히 조형적인 상상력이나 일관된 미학 논리가 결여된 노동의 산물. ― 한마디로, 김 씨는 오래 손에 익은 기술로 황 선생의 작품들을 열심히 복제했을 뿐이었다.
그때 우리의 인기척에 불려 나온 듯 김 씨가 출입구로 나왔다. 신예란 말이 희극적으로 떠오를 만큼 찌들고 작달막한 늙은이였다.
“구경 오셨슈? 허지만 작품들은 다 안에 있는디…….”
“아니 김 씨, 그럼 딴 작품들이 더 있다는 거요? 그새 새 작품으로 바꿨어요?”
황 선생이 알 수 없다는 듯 김 씨에게 물었다. 김 씨가 아무런 표정 없이 받았다.
“바꾼 게 아니고오 ― 원래 내 것으루다가……. 암튼 예꺼정 오셨으니 들어와 봐유.”
그 말에 우리는 이끌리듯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전시장 안에는 제법 조명까지 갖춰진 데다가 작품 받침대들도 나름의 배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받침대 위에 놓인 것은 하나같이 수북한 돌 부스러기들뿐이었다.
“이게 뭐요? 무슨 작품이 이래요?”
황 선생이 어이없다는 눈길로 날 돌아보며 김 씨에게 물었다 이 늙은 신예가 벌써 얼치기 비구상(非具象)으로 넘어갔나, 싶어 나도 약간은 한심한 기분으로 김 씨의 해설을 기다렸다. 김 씨가 갑자기 애처롭게 들리는 목소리로 한숨 쉬듯 말했다.
“바깥 것들은 모두가 한입으루 선상님 작품이라고 하니 워쩌겠슈? 여기 이 부스럭 돌들은 그것들을 파내느라 생긴 것들인데, 그래도 내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지유 그거 파내느라고 흘린 내 땀하고…….”
그러고는 긴 한숨에 이어 도통한 사람처럼 보탰다.
“내가 몇 달 밤낮으로 애써 만든 저 작품들을 사람들이 자꾸 선상님 것이라고 하는 게 첨에는 정말 억울했슈. 하지만 이제는 왜 그러는지 알겠구먼유. 차차로 진짜 내 작품도 나오겠쥬.”
(2001년)
2016년 12월 6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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