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의 명암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Lev Nikolaevich Tolstoy (1829~1910)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동반자를 만나다
1854년,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Lev Nikolaevich Tolstoy, 1829~1910)는 크림전쟁이 한창이던 루마니아에 있었다. 삶을 좀먹는 욕망에서 탈출하려는 극단적 결심으로 택한 입대가 그를 전쟁의 한복판으로 내몬 것이다. 전쟁은 톨스토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르포기사를 잡지에 연재하면서 전쟁의 보다 깊은 속내를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기록하기 위해 전투현장을 누비는 동안 자주 죽음의 그림자와 만났다. 그런 가운데 그는 신비주의에 빠져들게 된다.
1855년 3월 5일 자 일기엔 적나라한 당시의 심정이 담겨있다.
나는 위대한 이념을 발견했다. 이는 교리가 아닌 양심에 따라 행동하고 인간을 화합시키는 새로운 종교이다.
이 이념의 실현에 내 전 생애를 바쳐야겠다.
사람마다 양심대로 살고 화합해 세상을 만들려면 교육만 한 것이 없다는 확신을 하게 되고, 그 일에 생애를 걸겠다는 다짐도 그 무렵 하게 된다.
군대를 제대한 톨스토이는 영지로 돌아와 자신의 다짐을 현실화시킨다. 학교를 세우고 직접 농노의 자녀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학비를 받지 않는 이 학교는 공책과 교과서는 물론 숙제도 없었다. 온종일 숲 속으로 나가 자연을 배웠다. 수업시간엔 문학과 역사, 인간의 삶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그의 가르침은 배움에 목마른 아이들에게 단비 같았다.
톨스토이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직접 자연 속으로 뛰어들었다. 농노들의 몫이었던 농사에도 직접 참여한 것이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고된 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쟁기질하는 남자 - 경작지의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일리야 에피모비치 레핀(Ilya Efimovich Repin), 1887년, 판지에 유채, 27.8×40.3cm, 트레차코프 국립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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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베르스(Sophia Andreevna Behrs, 1844~1919)를 만나게 된다. 서른네 살 톨스토이의 눈에 열여섯 살 앳된 소녀가 사랑의 대상으로 다가온 것이다. 자기 삶의 딱 절반을 산 풋풋한 소녀를 향한 톨스토이의 구애는 절실했다. 결국 그들은 사랑에 빠졌고, 6개월간 미친 듯이 사랑했다.
1862년 봄에 시작된 그들의 사랑은 6개월 만에 결혼으로 이어진다. 결혼일정은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결혼 전날 톨스토이가 내민 일기장으로 인해 위기를 맞는다.
지나온 내 34년의 발자취요. 당신에게 아무것도 숨기고 싶지 않소.
그가 내민 일기장 속에는 젊은 시절의 고민과 성장통, 그동안 만난 사람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중에는 소피야를 충격에 빠뜨릴만한 이야기들이 다수 등장했다. 특히 수많은 여성과 맺은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묘사는 적나라해서 어린 신부가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깊은 고민에 빠져 결혼 자체를 망설이던 소피야는 결혼 후에도 서로의 일기를 공개하는 조건으로 그간의 일들을 모두 눈감아 주기로 한다.
이후 소피야는 톨스토이에게 더없이 좋은 아내가 된다. 15년 동안 13명의 자녀를 낳을 만큼 금슬이 좋았고, 작가의 아내로도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았다. 거의 매해 아이를 낳으면서도 묵묵히 톨스토이 곁을 지켰다.
소피야와 딸 알렉산드라 톨스타야
니콜라이 게(Nikolai Nikolaevich Ge), 1886년, 캔버스에 유채, 남러시아 툴라의 야스나야 폴랴나 톨스토이 박물관 소장
결혼 2년 차에 접어들던 1864년, 드디어 대하소설 《전쟁과 평화》의 집필이 시작되었다. 서른여섯 살에 시작된 집필은 마흔한 살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다섯 해를 보내는 동안 소피야는 톨스토이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독자의 입장에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까다로운 성격을 일일이 받아주면서 그의 원고를 읽는 첫 독자가 되기를 자청한 것도 그녀였다.
악필이었던 톨스토이의 원고는 소피야에 의해 정리되었다. 알아볼 수 없는 원고를 손보고 무려 58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엄청난 분량을 일곱 번이나 필사하는 고통스러운 작업도 그녀의 몫이었다. 톨스토이에게 소피야는 진정한 작가의 아내였으며 특별한 여성이었다.
《전쟁과 평화》는 출간되자마자 《일리아드》를 능가하는 유럽 문학의 최대 걸작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러시아 원정에 나선 나폴레옹에 맞서 싸우는 러시아인들의 저항을 4부작으로 나눠 소개하고 있는 책 속에는 실제 인물과 가공의 인물들이 서로 교묘하게 뒤섞여있다.
책은 애욕으로 가득한 안드레이 공작, 순진한 공상가 피에르, 생명력 넘치고 사랑스러운 나타샤를 중심으로 3대에 걸친 세 가문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특히 달빛 창가에서 몽상에 빠진 나타샤의 모습은 톨스토이가 추구하는 진선미의 출발점인 동시에 종착점이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통해 “어떤 힘이 역사를 움직이는가?”라는 무거운 주제에 답을 구하고 있다. 그는 소설을 통해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영웅이 아니라 민중이라고 정의한다. 《일리아드》가 영웅의 대서사시라면 《전쟁과 평화》는 민중의 이야기였다. 소설 속에서 영웅은 명성뿐인 공허한 꼭두각시로 묘사되고 있다. 나폴레옹 역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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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가 노벨상 수상 거절을 기쁘게 생각한 이유.
사실 톨스토이는 노벨평화상에 4번 노벨문학상에 무려 16번이나 후보로 오를 정도로 유명했다는 기록이다.
일설에 톨스토이가 노벨상을 못 받은 이유로 농민 계몽, 빈민 구제, 사형제 폐지, 반전 활동 등이 그의 작품에 녹아있어 소련 당국과 문학계로부터 도외시 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톨스토이의 대표 장편소설 3편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노벨 문학상 수여 행사가 1901년에 처음 시작된 것은 다 아는 일이다. 당시 제1회 수상 작가는 ‘톨스토이’일 것이라는 데에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당연히 후보에 올라 있었고, 이미 필생의 대작이랄 수 있는 많은 작품으로 ‘대문호’로 칭송 받고 있는 터였을 뿐만 아니라, 일생의 문학적 긴 여정을 거의 마쳐가는 시점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수상자에서 밀려 났다. 다음해 1902년, 그 다음 해 1903년,,,,,톨스토이의 노벨상 수상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드디어 그가 아내 ‘소피아’와의 불화에 시달리다 못해 조용히 살 피난처를 찾아 나섰다가 가출 열흘 뒤, 작은 시골 역 ‘아스타포보’ 대합실에서 생을 마감한 1910년에도 그의 노벨상 수상 소식은 없었다. 결국 톨스토이는 서거 100주년이 되는 오늘까지도 노벨 문학상과는 인연을 갖지 못한 세계적인 문호로 남아있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연유가 있었을 터이나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당시 러시아의 정치 사회 현상이 매우 불안정했었다는 데에서 찾아야 될 것 같다. 러시아 ‘로마노프’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 치세 환경은 잇달아 일어나는 농노 반란과 맑스주의 좌파의 혁명적 사회 변혁 운동이 노벨상 주최측의 정서와는 너무 달랐는지도 모른다. 여기에 노벨상 창시자인 ‘노벨’은 가장 이상주의적(idealistic)인 작품에 문학상을 수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년의 톨스토이가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교회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운동을 폈기 때문에 당시 심사위원단은 그를 ‘유물론자’로 판단했었다는 후문이 있었다. 비록 노벨 문학상과는 인연이 없었지만, 톨스토이는 러시아 최고의 작가일 뿐만 아니라 자타가 인정하는 ‘세계적인 문호’라는 찬사가 늘 따라다닌다.
이러한 그의 위상은 무엇보다도 그의 3대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 그리고「부활」의 문학예술적 가치에서 평가되었을 것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
「전쟁과 평화」는 이야기가 너무 방대하여, 사실 요약하기도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등장 인물이 많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주인공’을 지적하기도 어렵게 짜여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무대는 19세기 초엽 ‘나폴레옹’의 프랑스와 러시아간의 세 번에 걸친 전쟁 상황이다. 1805년, 1807년, 그리고 1812년에 일어난 전쟁이 그것인데 소설은 그 전쟁 자체보다는 당시의 러시아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일종의 사회소설적 성격이 강하다. 등장인물이 정확히 509명으로 알려진 이 작품은 등장인물이 많은 만큼 다원적인 이야기 구조이기 때문에 주인공은 인물 개인이라기보다는 나폴레옹 군대에 대항하여 조국 방위에 일치단결한 러시아의 국민과 군대라고 할 수 있다. 황제로부터 일개 졸병에 이르기까지 많은 등장인물과 다양하게 전개되는 장면의 변화, 웅대하고 장엄하기까지 한 장면들의 그 규모만 보더라도 이 소설의 독보적인 가치가 드러난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여러 갈래로 전개되는 스토리의 결말은 독자에게 따뜻한 위안과 깊은 여운을 남긴다. 마지막 세 번 째 전쟁에서 부상을 당한 ‘안드레이’를 먼저 떠나보낸 연인 ‘나타샤’는 아내와 사별한 안드레이의 친구 ‘피에르’와 결혼하고 안드레이의 여동생은 올캐가 될 뻔한 나타샤의 오라버니와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엔딩에 독자는 아무런 저항감 없이 아름다운 정경으로 이끌려 간다. 이 「전쟁과 평화」의 주제를 적시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우답일 수 있지만, 굳이 말한다면 “역사를 만드는 일이 황제나 영웅 등 사회의 특정한 엘리트들이 아니라 인민 전체의 힘”이라는 톨스토이의 작가적 ‘민본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는 19세기 러시아 상류 사회의 부정한 모습을 ‘안나’라는 상류 계층의 한 부인을 통하여 그린 소설이다. 톨스토이 본인의 후기에 의하면 원래 이 소설은 상류 계층의 타락한 모습을, 한 고관의 부인이 저지르는 불륜을 통해 비판하고자 했으나 집필 과정에서 주인공 안나의 진정한 사랑과 행복을 추구하는 당시로서는 허용되기 어려운 ‘우아한 품격’의 아름다운 ‘자유 여성’으로 바꾸어 그렸다고 고백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 소설은 당시 사회적 규범을 뛰어 넘은 ‘행복 추구’의 자유와 농노제도 철폐 후의 지주와 귀족 계층의 나아갈 방향을 함께 제시한 작품이다.
‘안나’는 페테르부르크의 고관 귀족 ‘카레닌’의 아내였다. 어려운 처지가 된 오빠‘오브론스키'와 올캐 언니 돌리를 도와주려고 모스크바에 왔다가 청년 장교 ’브론스키‘와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국 그의 아이까지 갖게 된다. 이 청년 장교 브론스키는 이미 안나의 올캐 언니 ’돌리‘의 동생 ’키티‘의 결혼 상대였다. 브론스키에게 마음을 빼앗긴 키티는 또다른 귀족 청년 ’레빈‘의 청혼도 거절한 상태였다. 그러나 브론스키는 유부녀인 안나에게 사랑의 포로가 됨으로써 키티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준다. 브론스키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게 된 키티는 청혼을 거절했던 레빈과 다시 만나 그의 성실한 인품을 존경하며 다시 가까워져 주위의 축복 속에 결혼한다.
한편, 안나는 남편이 자기의 불륜 사태를 눈치 채게 되고 안나는 모든 것을 남편에게 털어 놓는다. 이에 여러 가지 주위 여건 때문에 남편은 안나의 모든 지난 일을 용서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안나와 브론스키는 사랑의 정열을 억누를 수가 없어 유럽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와 브론스키의 영지로 들어가 시골 생활을 시작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브론스키는 점점 안나에 대한 사랑이 식어간다. 이런 과정에서 브론스키 집안에서는 브론스키의 혼담이 진행되고, 이것을 알게 된 안나는 살아갈 희망을 잃고 철도에 투신자살하고 만다. 다른 한편으로 레빈과 키티의 결혼 생활은 여전히 행복했다. 농업개혁이 순조롭지 않아 레빈도 고통스런 방황의 시기가 있긴 했지만 둘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남을 기쁘게 하는 아름다움을 함께 하기로 결심했다. 스토리의 대강만을 거칠게 요약했지만 원작의 ‘이야기’ 전개는 실로 방대하고 장황하다. 사족을 달자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레빈’은 톨스토이의 분신으로서 자전소설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부활」은 1899년, 말년에 이른 톨스토이의 회심에 찬 대작이다. ‘예술적인 성서’라고 불리어지는 이 소설은 어떤 소녀를 유혹하여 욕보인 ‘네플류도프’라는 한 사내가 배심원이 되어 출두한 법정에서 자기가 범한 그 소녀와 만나게 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양심의 눈을 뜨게 된다는, 어찌 보면 단순한 소재 같지만 정치 사회적인 광범위한 사회상을 담아 분석하고 당시 제정 러시아의 재판, 교회, 그리고 일반 행정 분야의 여러 모순을 고발한 작품이다. 네플류도프는 배심원으로 법정에 출두하여 여죄수로 재판정에 선 ‘마슬로바’가 일찍이 자기가 범한 소녀 ‘카츄샤’임을 발견하고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 한다. 카츄샤가 무고한 죄로 시베리아로 유형되자 자기도 카츄샤를 따라 시베리아로 간다. 그러나 카츄샤는 네플류도프의 도움으로 특사를 받게 되나 그의 청혼까지 끝내 거절하고 시베리아로 떠나고 이후 그녀는 수인(囚人) 의 대열에서 알게 된 정치범 ‘시몬손’이라는 청년과 함께 계속 여행하기로 결심하고, 네플류도프는 성서 속에서 새로운 삶의 방향을 찾게 된다는 이야기가 주요 스토리다. 네플류도프의 동행을 거절한 카츄샤의 심중에서 네플류도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여운이 잔잔한 감동과 함께 아름다운 기억으로 오래도록 남는다.
고전(古典)은 무엇보다도, 시공을 초월하여 독자에게 변치 않는 가치와 기억을 전해 주는 데 그 생명이 있다.
‘톨스토이’ 소설들은 이러한 명작의 ‘고전’으로 오래오래 우리들 앞에 놓여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 춘 섭(전남대 명예교수/국문학)
노벨문학상의 명암
경남매일2023.04.02
노벨상은 스웨덴 발명가 알프레드 노벨이 1895년 매년 인류를 위해 크게 헌신한 사람에게 주라는 유언에 따라 수여하는 국제적인 상이다. 물리, 화학, 생리ㆍ의학, 문학, 평화, 경제 등 6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룬 사람에게 주는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상이다.
1901년 처음 시상 때는 5개 부문이었으나, 1968년 경제학상이 추가되어 6개 부문으로 시상하고 있다.
스웨덴 한림원은 매년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노벨상 수상자 후보를 사전에 노미네이트 한 후 단수 또는 복수의 수상자를 발표한다.
노벨상은 설립 이후 노벨재단이 주관하고 있으나 부문별 수상자 선정기관은 다르다. 물리학상과 화학상은 스웨덴 왕립과학원, 생리학ㆍ의학상은 카롤린스카 의과대학교 노벨총회, 문학상은 스웨덴 아카데미, 평화상은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경제학상은 스웨덴 중앙은행이 심사하여 선정한다.
그런데 노벨평화상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시상하고, 나머지 상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시상한다. 평화상이 노르웨이에서 시상하는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웃인 두 나라가 경쟁과 협조를 유지해온 미묘한 관계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다.
스웨덴의 화학자이자 산업가인 알프레드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큰돈을 벌었다. 그러나 이 화약이 산업발전의 목적에만 사용되지 않고 인명살상용 군사적 무기로 사용되고 있는 것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의 형 루드비히가 사망한 것을 자신이 죽은 것처럼 잘못 보도한 한 프랑스 신문의 부고를 보고, 그를 `죽음의 상인`이라고 비난한 것이 노벨상을 만든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유언에서 유산 98%를 노벨상 설립에 사용토록 기증했다.
지금까지 6개 분야 노벨상수상자 수는 1,190명으로 국적은 82개국이다. 최다수상 국가는 403명인 미국이며, 일본은 29명으로 7위에 랭크되어 있다. 한국은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민주화 공로로 수상한 노벨평화상이 유일하다. 이처럼 1,190명이 노벨상을 수상했지만 수상자의 적격여부에 대한 논란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특히 노벨평화상과 문학상에 대한 시시비비가 끊이지 않아 노벨상에 대한 권위가 예전 같지 못함을 실감한다. 70년대까지 세계문학평단에서는 `노벨 문학상은 사실상 노벨이라는 거죽을 뒤집어쓴 반정부 프로파간다의 정치 쇼`라고 격렬히 비판했다.
1958년 당시 러시아의 파스테르나크가 소련 정부와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수상을 거부하는 것을 강제로 수상시켰다. 그 외 파무크, 오에, 그라스, 카오싱 젠, 옐리네크, 알렉시예비치 등도 그런 경우였다. 국가나 정부의 정책 등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작가들이 수상하는 일이 많다는 점이었다.
노벨문학상 논란의 최고 정점은 바로 레프 톨스토이의 수상 불발이었다. 러시아의 대문호로 세계 최고의 작가였던 그는 문학상뿐만 아니라 평화상을 받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그는 실제 노벨평화상 후보에 4번, 문학상후보에 16번이나 노미네이트되었지만 수상은 불발되었다. 이는 노벨문학상 역사의 최대 오점으로 기록되었다.
이때 스웨덴, 덴마크 등 유럽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거센 항의와 서명운동까지 벌어졌다. 이에 톨스토이 본인은 `노벨상을 받지 못해서 오히려 다행입니다`라는 요지의 공개서한까지 썼어야 했다. 이에 대한 노벨위원회의 변명은 궁색하기 짝이 없다. `톨스토이의 많은 작품에 매혹을 금할 수 없지만 이 작가의 이상주의가 얼마나 건전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였다.
그를 정치적이고 사상적인 이유로 제척한 한림원의 잘못은 노벨문학상의 흑역사로 남아있다.
이런 불공정한 기준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지 못한 불멸의 작가들은 부지기수이다. 마크 트웨인, 프란츠 카프가, 조지프 콘레드, 호르헤 루이스, 버지니아 울프, 마르셀 프루스트, 블라디미르 나브코프, 니코스 카잔차키스, 제임스 조이스, 막심 고리키, 헨리크 입센, 에밀 졸라, 올러스 헉슬리, 시어도어 드라이저, 라이나 마리아 릴케, 안톤 체호프 등등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수상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런데 의외의 수상자도 있다. 2차 세계대전 영웅 윈스턴 처칠과 미국의 싱어송 라이트 밥 딜런의 수상도 생색내기라며 말이 많았다. 또한 중국이 공산당의 압제를 피해 프랑스로 망명한 카오싱 젠의 수상은 냉담하면서도 친정부적인 모옌의 수상에 대해서는 난리법석을 떨었다. 문단에서는 모옌의 수상에 대해 `중국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과 저항정신이 없는 어용작가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고 비판했다.
프랑스의 무신론적 실존주의 사상가이자 작가인 장 폴 사르트르는 문학상 수상을 거부했다. 그는 `나는 그것을 거절하고 당신은 그것에 관하여 쓸 수 있다. 어떤 인간도 살아있는 동안 신성시되길 원치 않는다`고 일갈했다.
이처럼 노벨문학상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그 명암이 교차되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