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교회 신앙유산 순례 - 브라질 아파레시다 성모 성지
질곡의 역사와 함께한 브라질의 국모, 아파레시다 성모
‘삼바’, ‘축구’, ‘커피’, ‘아마존’…. 유학을 떠나기 전 내가 브라질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미지들이다. 그러나 정작 브라질을 여행하며 가장 많이 보게 된 모습은 도시 곳곳에 자리 잡은 오래된 성당과 다양한 이름의 크고 작은 성인상들이었다. 인구의 74%가 가톨릭 신자로 세계 최대의 가톨릭 국가라는 사실만 떠올린다면 지극히 당연한 풍경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사실 브라질에선 주일마다 미사에 빠짐없이 참석하거나 정기적으로 고해성사를 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대부분 세례나 결혼, 축제 등을 통해 교회와 느슨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가 이른바 ‘냉담자’로 분류하는 신자들의 수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브라질 사람들은 스스로 전세계 어느 나라 천주교 신자들보다 신앙심이 깊고 돈독하다고 자부한다. 이러한 자부심은 아마도 그들 고유의 사목 풍토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방대한 영토의 수많은 신자들을 소수의 신부들만으로 사목할 수 없었던 브라질 교회는 일찍이 평신도들이 주축이 된 돌봄의 사목을 펼쳐왔다. 이 때문에 신과의 중재와 보호의 역할을 담당하는 성인들의 존재는 영적인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평범한 신자들에게 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치열한 삶의 동반자, 그리스도교
‘하늘의 축복을 받은 땅’, ‘신이 선택한 땅’이라 불릴 만큼 천혜의 자연조건을 지닌 브라질은 1500년 포르투갈인들이 처음 발을 디딘 식민지 시대부터 현대까지 5세기에 이르는 세월 동안 외부의 끊임없는 침략과 수탈을 견뎌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와 같은 질곡의 역사의 중심에서 브라질 민중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것은 바로 다름 아닌 침략자의 종교였다. 그리스도교의 성인들은 때론 브라질 민중의 쓰라린 상처와 고단한 아픔을 어루만져 주는 손길로, 때론 인생의 허허로움에 몸살을 앓는 어느 누군가의 마음속 빈 곳간을 채워주는 존재로, 항상 그들의 곁에서 그들과 함께 해왔다. 이를테면 브라질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와 그 성인들의 존재는 단순한 성경적인 믿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관습적인 믿음이자 삶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의 신앙은 다양한 문화적 관습과 민속신앙이 어우러져 각양각색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브라질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의 성인들이 외부의 위험에서 자신과 가족을 보호하고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성 요한과 성 베드로는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성 안토니오는 남편을 찾는 여인들을 도와주며, 고통의 성모는 아기를 낳는 여인들을 보호한다고 믿는다.
또한 이렇게 성인들에게 도움을 청해 실제로 그 청이 이루어지면 기도, 기부, 초 봉헌, 성지순례 등 다양한 방법으로 감사를 드린다. 그 가운데 성지순례는 대개 종교축제에 맞춰 떠나는데, 전국적으로 가장 큰 축제가 바로 브라질의 수호성인 아파레시다[발현] 성모를 기리는 10월 12일 대축일이다.
아파레시다 성모(Nossa Senhora da Concei o Aparecida)는 1717년 10월 12일 브라질 남동부 파라이바 강에서 고기를 잡던 세 명의 어부, 도밍구스 가르시아, 필리피 페드로주, 주앙 알비스에 의해 발견됐다. 유달리 고기가 잡히지 않던 어느 날, 이들이 던진 그물에 검은 피부의 성모 마리아 조각상 파편들이 걸렸고, 이후 어획량이 엄청났다고 한다. 세 어부는 이 모든 것이 자신들이 건져올린 성모상 덕분에 생긴 기적이라 믿고 집 안에 소박한 기도실을 꾸며 이 성모상을 소중히 모시고는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아 첫 묵주기도를 드리게 된다. 이후 이는 현재의 아파레시다 시(市)에 해당하는 이 마을의 전통이 되었고, 이러한 전통은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아파레시다의 첫 번째 순례지는 아파레시다 성모가 어부들에게 처음으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곳인 이타과수 항구에서 시작된다.
브라질을 닮은 성모
아파레시다 시는 상파울루에서 동쪽으로 168㎞ 떨어진 작은 도시로, 흔히 ‘신(新) 대성전’이라 부르는‘아파레시다 성모 대성전’이 있는 곳이다. 1955년 11월 11일에 착공되어 1980년 7월 4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때 축복식을 올린 신 대성전은 아파레시다 성모를 위해 지어진 세 번째 성당이다. 성모상에 기도를 드린 사람들의 청이 이루어졌다는 소문과 함께, 수많은 이들의 기도에 응답이라도 하듯 아무런 이유 없이 성모상 앞 촛불이 꺼졌다 다시 홀로 켜지는 기이한 현상들이 자주 목격되면서 아파레시다 성모를 찾는 신도들의 수는 더욱 늘어만 갔다.
그러자 1741년 아파레시다 시 중심의 코케이루스 언덕 꼭대기에 성당을 하나 더 지었고, 1844년에 현재의 ‘바실리카 구(舊) 성당’에 해당하는 두 번째 성당을 지었다. 이후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현재의 아파레시다 성모 대성전이 준공되면서, 작은 시골 마을 아파레시다는 해마다 약 700만 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찾는 브라질 최대의 성지가 되었다.
입구에서 제단까지 직통할 수 있는 공간질서와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회당부를 갖춘 전형적인 중세 성당 양식의 아파레시다 성모 대성전은 총 7만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전체적으로 40m 높이의 등변십자가 모양을 띠고 있다. 대성전 중앙은 돔 형태의 천정으로 되어있으며, 그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탑은 100m에 이른다.
대성전 내부로 들어가면, 다이아몬드와 루비로 장식된 금관과 브라질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화려한 문양의 자수가 새겨진 푸른색 망토를 걸친 아파레시다 성모님을 만날 수 있다. 이 왕관과 망토는 1888년 11월 6일 브라질의 마지막 공주인 이자벨 공주가 하사한 것으로, 당시 이는 같은 해 5월 ‘황금법’을 제정하여 브라질 노예해방을 선포한 그녀의 하사품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상징하는 바가 매우 컸다.
실제로 16세기 초 최초로 노예무역이 시작된 이래 가톨릭교회의 탄압과 강압적인 개종권유로 종교적 자유마저 잃어버린 노예 신분의 흑인들에게 검은 피부의 성모상의 존재는 정신적인 지주이자 수호신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와 관련한 한 일화에 따르면, 1850년 중반경 자카리아스라는 이름의 한 흑인 노예가 굵은 쇠사슬에 손발이 묶여 노예상인에게 끌려가던 중 아파레시다 성모 성지 앞을 지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기도를 드리고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상인에게 청했고, 그가 성모상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를 드리자 놀랍게도 그의 손발을 옥죄고 있던 쇠사슬이 저절로 끊어져 바닥에 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종교 도상학자들에 따르면, 증거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증명할 방법은 없지만 40cm 길이의 점토로 만들어진 전형적인 16세기 종교미술 양식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관습대로 본래 성모상은 화려한 색으로 채색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어부들이 발견했을 당시엔 이미 오랜 세월 동안 물 속 깊이 가라앉아 있었던 탓에 그 채색이 모두 벗겨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또한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성모상 앞을 환히 밝혀온 촛불의 그을음으로 현재와 같이 까무잡잡한 피부색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 기원이야 어찌 되었든, 한없이 너그러울 것만 같은 미소를 머금은 채 지난 5세기에 걸친 지난한 역사와 온갖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브라질 사람들의 굳센 희망과 의지를 담고 있는 검은 피부의 아파레시다 성모상의 모습이 삶에 대한 애착과 믿음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돌이켜보게 해준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아마도 그러한 이유에서 해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아파레시다 성모 성지를 찾는다는 생각이 든다. 궁극적으로 삶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자신이 지고 가는 ‘십자가의 무게’를 깨닫고 사랑하며 희망을 잃지 않고자….
* 임소라 안젤라 - 한국외국어대학교 포르투갈어과 학부를 졸업하고, 2000-2005년 브라질 히우그란지두술 연방 대학교에서 석·박사과정을 밟았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포르투갈어과 강사로 있다.
[경향잡지, 2009년 3월호, 임소라 안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