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31일 오전 10시, 춘천지방법원 제102호 법정, 51년 만에 납북귀환어부 32명의 재심공판이 열렸지만 안타깝게도 재판은 10분 만에 끝나버렸다. 동해안 납북귀환어부 피해자모임 대표이자 피해당사자인 김춘삼씨의 2023년 3월 31일 하루를 정리해 봤다.
#1. 2023년 3월 31일 새벽 6시
속초에 살고 있는 김춘삼씨는 평소보다 더 일찍 일어나 춘천으로 향했다. 51년 동안 학수고대했던 재심 공판기일이 바로 오전 10시 춘천지방법원 102호 법정에서 있었기 때문이다. 2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였지만 혹여나 늦을까봐 일찍 서둘렀다.
김춘삼씨 등 32명의 피고인들은 1972년 9월 7일 귀환한 납북어부들이다. 그들은 동해안에서 조업 중 북한 쾌속정에 피랍돼 약 1년 동안 억류됐다가 풀려났다. 해경과 해군의 구조 실패로 납북됐지만, 검찰은 납북어부들을 고의 월북으로 몰아 반공법위반, 국가보안법위반의 혐의를 씌웠다(아래 <동아일보> 기사 참조). 법원도 최후의 보루가 되지 못한 채 검찰구형대로 징역형을 선고했다. 1956년생인 김춘삼씨가 만 15세 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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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기사 1968년 12월 24일자 동아일보 7면 기사(출처 : 네이버라이브러리), 1968년 대검공안부는 검찰에 납북어부들을 엄벌에 처하도록 강력히 지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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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23년 3월 31일 오전 9시 30분
김춘삼씨가 탑승했던 제2승해호 어부 6명, 승운호 어부 20명, 제6해부호 어부 6명, 총 32명의 피고인 및 가족들은 법원에 속속 도착했다. 올해 93세로 생존자 중 최고령인 김영택씨도 딸의 부축을 받고 법원에 도착해 게시판에 붙어 있는 '오늘의 공판 안내'에서 자신의 이름을 확인했다. 혹시나 이름이 빠졌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말이다.
김춘삼씨는 2021년 12월 결성된 동해안납북귀환어부 피해자모임 대표로 가장 먼저 재심을 청구했고, 이날도 가장 먼저 법정에 서야 했기에 떨리는 마음으로 일찍 법정에 들어가 방청석에 앉아 재판 시작을 기다렸다. 납북 귀환했던 1972년 만 15세 소년이었던 김춘삼씨는 이제 70세 고희를 앞둔 백발의 노인이 돼 다시 법정에 서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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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춘삼 2023년 3월 31일 춘천지방법원 제102호 법정, 김춘삼씨는 가장 먼저 법정에 들어와 방청석에 앉아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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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023년 3월 31일 오전 10시
32명의 피고인과 가족들로 가득 찬 재판정, 오전 10시가 되니 정적이 흘렀다.
"재판장님 들어오십니다. 방청석에 앉은 모든 분들은 일어서 주십시오."
법정경위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등장한 재판장(형사1부 심형근 부장판사)은 가장 먼저 김춘삼씨의 이름을 호명했고, 김춘삼씨는 51년 만에 법정에 섰다. 떨리는 마음으로 법정에 선 김춘삼씨는 자신에게 씌어진 '간첩'이라는 주홍글씨가 이날 재판으로 지워질 것을 기대했다.
이미 지난해 11월 7일, 춘천지방법원 형사 1부 재판부(재판장 김청미)는 김춘삼씨를 비롯한 32명의 피고인들이 1972년 9월 7일부터 같은 달 21일까지 14일 동안 불법으로 구금돼 조사를 받은 사실을 확인해 재심개시결정을 내렸다. 또한 김춘삼씨와 같은 달(15일) 귀환한 무진호, 삼청호 소속 어부들이 올해 1월 춘천지방법원 강릉지원에서 열린 재심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확정되기도 했다.
김춘삼씨의 이름, 생년월일, 주소 등 피고인 인정신문 절차를 마친 재판장은 이 사건 재심개시결정까지의 과정을 설명한 후 권태환 공판검사에게 검찰의 입장을 물었다. 재판에 참석한 모든 이들은 공판검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귀 기울였다. 그러나 공판검사 입에서 나온 말은 김춘삼씨 등 모든 이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검찰의 입장이 아직 정리되지 않아 연기를 요청합니다."
검찰의 연기요청으로 51년 만에 열린 재심법정은 10분 만에 그대로 종결됐다. 원활한 재판 진행이 어렵다고 생각한 재판부는 김춘삼씨 이외 31명 피고인들의 재판을 모두 연기했고, 다음 기일인 5월 12일(금) 오후 2시까지는 반드시 입장을 정리해 오라고 공판검사에게 거듭 촉구했다.
#4. 2023년 3월 31일 오전 10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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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회견 2023년 3월 31일 오전10시 20분, 춘천지방검찰청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이 개최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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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년 만에 열린 재심법정이 이렇게 10분 만에 종결되자 피해자와 가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검찰청 앞으로 몰려갔고, 가져 온 현수막을 펼쳐 일렬로 섰다. 취재차 온 기자들이 모여들자 예정에도 없던 긴급 기자회견이 오전 10시 20분 춘천지방검찰청 앞에서 시작됐다. 김춘삼씨 등 피해자들은 기자들 앞에서 울분을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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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보도 2023년 3월 31일 KBS 9시 뉴스(김춘삼씨의 인터뷰가 담긴 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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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관계자는 이날 재판연기요청에 대해 '사건이 복잡해 검토할 시간이 필요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검찰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미 지난해 11월 7일 재심개시결정 이후 4개월이라는 상당한 시간이 흘렀고, 이 사건 공판기일도 2개월 전인 올해 2월 3일 검찰에 통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준비가 되지 않아 연기를 요청할 거라면 50여 명의 피해자와 가족들이 헛걸음하지 않도록 미리 기일연기신청을 할 수도 있었다.
더욱 피해자들이 검찰의 태도에 분노한 건 1972년 당시 검찰이 함께 기소했던 무진호, 삼창호 탑승 어부들의 재심재판에서 검찰(강릉지청)이 지난해 12월 무죄구형을 했기 때문이다. 똑같은 사안임에도 강릉지청과 다른 태도를 보인 춘천지방검찰청의 태도에 피해자들은 모멸감을 느꼈다고 한다.
#5. 2023년 3월 31일 저녁 6시 30분
허탈한 마음을 뒤로한 채 김춘삼씨는 다시 속초로 돌아왔다. 서글프고 속상한 마음이 복받쳐 올랐지만 그래도 피해자모임 대표로서 마음을 추스르고 단톡방에 메시지를 올렸다. 51년 전 인정이 없고 모질었던 검찰이 이날도 한결같이 납북어부들에게 잔인했지만, 김춘삼씨는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 서로 위로하면서 조금만 더 인내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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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춘삼씨가 동해안납북귀환어부 피해자모임 단톡방에 올린 메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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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석 검찰총장은 지난해 10월 대검찰청 국정감사에서 '서해공무원 피격사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이야기했다.
"이대준씨가 월북이라면 국가보안법 탈출죄, 간첩죄에 해당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단정적으로 하는 것은 유족들이나 우리 국민에게 굉장히 큰 상처가 될 수 있다."
국가보안법 탈출죄와 간첩죄 적용에 신중한 입장을 피력했던 '서해공무원 피격사건'과 달리 검찰은 51년 전 김춘삼씨 등 납북귀환어부를 월북어부로 단정짓고 법정으로 내몰았다. 이렇게 억울하게 처벌받은 납북귀환어부는 최소 982명으로 추정된다(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해 2월, 982명의 납북귀환어부에 대한 직권조사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51년 후 다시 열린 재심법정, 그 지긋지긋한 간첩이라는 주홍글씨를 벗어 던질 기대를 가지고 참석한 김춘삼씨 등 32명의 피해자와 그 유족들에게 검찰은 또 한 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서해공무원 피격사건'과 달라도 너무 다른 검찰의 태도는 과연 달라질 수 있을까? 51년이 지나도 한결같은 검찰의 잔인함은 중단될 수 있을까? 2023년 5월 12일(금) 오후 2시 춘천지방법원 102호 법정에서 우리는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최정규 기자(변호사)는 공익법률지원센터 파이팅챈스의 구성원으로 납북귀환어부 피해자들의 변론을 맡아 진행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