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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금강불교 원문보기 글쓴이: 황금마삭
1. 책문은 임금 앞에서 보는 마지막 논술 시험이었다!~
두 개의 참대오리를 푸른색으로 감싸고
종이로 만든 형형색색의 무궁화꽃을 장식한 어사화.
이 어사화는 과거에서 급제한 사람만 꽂을 수 있었다.
조선 선비들의 최고의 영예를 상징하는 어사화.
그러나 이 어사화를 걸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마지막 관문이 있었다.
그것은 임금 앞에서 치루는 마지막 시험, 책문(策問)이었다.
임금이 냈던 질문에 장문의 답안을 내야 하는 책문.
책문은 조선 과거의 마지막 관문, 논술 시험이었다.
"조선 선비의 가장 큰 꿈은 바로 이 어사화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과거 급제를 뜻하는 것이지요.
과거 급제!
이거야 말로 조선 선비들의 최고 꿈이자 영예였습니다.
그런데 혹시 글솜씨만 뛰어나면 과거 급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시와 문장에만 뛰어나면 과거 급제쯤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는 않습니까?
조선의 과거, 만만한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특히 과거 급제를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최종 관문이 있었습니다.
바로 책문이라는 것이었는데요,
이 책문은 임금님 앞에서 직접 작성해야 하는 논술 답안지였습니다.
그래서 가장 어렵고 가장 힘든 시험이었는데요,
오늘은 조선 과거의 마지막 관문, 논술 답안인 책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우리 나라 고서들을 모아놓은 장서각.
이곳 장서각에는 과거와 관련된 고문서, 고서들도 적지 않다.
<과거 합격증, 백패(소과 합격증), 홍패(대과 합격증)>
"이게 바로 합격증인데,
앞에 것은 백패라 해서 소과 합격증이고
뒤에 것은 홍패라 해서 대과 합격증입니다.
동일한 사람의 것으로 '제일인급제출신(第一人及第出身)'자의 것입니다.
문과 갑과에 1인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장원입니다."
- 김학수 전문위원, 한국학중앙연구원.
과거 합격자에게 내렸던 교지.
교지에는 '과거지보(科擧之寶)'라는 도장이 선명하다.
"바로 이것이 방목(榜目, 문과 급제 명부)인데,
대체로 앞에는 왜 과거를 시행하게 되었는지,
또 그 당시에 시험 문제는 어떤 것이었는지,
그 이외 나머지 사항들은 동일합니다."
방목에는 과거 급제자들의 명단이 실려 있다.
급제자들에게 지급되었던 호패.
호패의 재질이 달라질 뿐아니라,
호패에도 급제자라는 사실을 새겨놓았다.
빼곡하게 흘려쓴 과거 예상 문제집인 초집(抄集).
공부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것은 생원시에 합격한 답안지입니다."
- 정수환 전문위원, 한국학중앙연구원
과거 답안지는 시권(試券)이라 하는데, 그 당시 매긴 점수가 그대로 남아 있다.
'차하'는 12등급 중 가장 낮은 점수였다.
과거 답안지에는 '사주단자'라 하여
본인의 이름과 본관, 부친과 조부, 외조부의 인적 사항을 적었다.
그리고 이 사주단자는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시험이 끝나면 시험 작성한 부분과 사주단자 적힌 부분을
공정한 채점을 위해서 이렇게 분리를 시킵니다.
대개 직선으로 긋지 않습니다.
사선으로 그어가지고요,
여기에 세로 굵게 흘려쓴 부분은 소위 말하면 시험 번호가 되겠지요.
서로 일치하는지 확인합니다."
- 정수환 전문위원, 한국학중앙연구원
다른 경우 사주단자를 철저히 봉인하여 채점자들이 답안지의 임자를 모르게 했다.
부정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수많은 답안지들 가운데 유난히 눈길을 끄는 게 있다.
장문의 답안지였다.
답안지의 길이만도 무려 12미터.
앞면 뿐만 아니라 뒷면까지 빼곡하게 채워진 답안.
바로 논술 답안이었다.
임금이 현안에 대해 출제한 문제를 '책문(策問)'이라 했다.
이에 대해 응시생들은 자신의 견해를 대책이라는 논술 답안으로 작성했는데, 그 답안지가 바로 이것이다.
"그 방식은 초시나 복시를 거쳐서
최종 시험을 치루는 유생들에게 거의 마지막 단계에서 책문을 주로 내고
거기에 응시자들이 답을 하는 것입니다.
책문의 주 내용은 그 당시 정치적인 상황에서 가장 시급한 현안을 묻고
거기에 응시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포부나 경륜을 적는 그런 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 김태완 박사,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의 선비들은 과거 급제를 인생의 목표로 삼았다.
과거를 통한 출사, 그것은 개인의 영광이자 조선이라는 국가 입장에서는 문민 통치를 확립하는 길이었다.
그래서 수많은 지식인들이 과거에 매달렸고 과거 급제를 최후의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조선 시대 과거 급제, 그것의 의미는 적지 않았다.
"출세라는 개념이 문반 관료가 되어야 출세할 수 있어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건 공개 경쟁이예요. 합격하고 안 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아무리 양반 자제라도, 한 형제라도, 한 사람은 합격하고 다른 사람은 못 했으면 모든 게 현격하게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이게 개인의 운명을 말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가문의 장래를 결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 이성무 박사,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관료로 나가기 위한 마지막 시험이 이곳 춘당대(春塘臺)에서 치뤄졌다.
임금 앞에서 치루는 전시(殿試)가 그것이었다.
바로 이곳에서 수많은 시험을 치루고 올라온
최후의 서른 세 명이 등수를 매기기 위한 마지막 시험을 치룬 것이다.
전시 과목은 약 열가지.
부(賦)는 미사여구를 활용하여 현란한 문장을 짓는 능력을 가름하는 것이요,
표(表)는 제갈량의 출사표처럼 임금에게 자신의 의견을 건의할 때 쓰는 형식이었다.
책문(策問)은 임금의 질문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서술하는 논술 시험이었다.
< 정치 현안에 대해 젊은 지식인들의 의견을 듣는 임금이 내는 책문 >
실제 시험에서는 책문이 가장 많이 출제되었다.
임금은 현안 문제에 대해 젊은 지식인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책문을 가장 많이 출제했던 것이다.
응시생들에게는 가장 까다롭고 힘든 시험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임금이 직접 출제한 책문은 어떤 형식의 시험이었을까?
책문은 우선 그 문제의 길이가 매우 길었다.
그 처음은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로 시작되었다.
그런 다음 현안을 제시하고 응시생들을 격려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대들은 학업을 닦은 지 여러 해 될 터이다.
그리하여 조정에 맞아들여 지금까지 쌓은 깊은 지식을 묻는 것이다.
남김없이 모두 말하며 어진 신하의 말을 들으려는 짐의 기대에 부응하라!"
이러한 임금의 질문에 대해 응시생들 역시 일정한 형식에 따라 답안을 작성했다.
그 첫문장 역시 매우 공손하게 시작되었다.
'신대(臣對)'
"삼가 신은 대답하옵니다.
아직 공부방에서 벗어나지 못한 천박한 학문을 가지고 어찌 그것을 제대로 알겠습니까?
그러나 임금께서 비록 나무꾼의 말이라도 채택하시니, 어찌 감히 마음을 다하여 대답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조선 시대의 책문과 요즘의 논술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논술은 기본적으로 학생이 대학에 들어가서
'대학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지식의 정도를 측정하는 시험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주어지면 '그 문제를 논리적으로 진술할 수 있는가' 하는 기술을 보는 것이구요.
그런데 책문은 과거를 보고 나면 바로 정치로 뛰어드는 과정이기 때문에
책문에서 진술된 내용들은 응시생이 가진 정치 포부나
'앞으로 정치가가 되면 어떤 식으로 정치를 담당하겠다,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래서 기본적으로 시험에 응시하는 자세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이성무 박사,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조선의 선비들은 출사를 위해 숱한 시험을 치루어야 했다.
공개 경쟁을 통해 엄격한 선발 과정을 거쳐야 했던 조선의 선비들.
그들 앞에는 책문이라는 마지막 논술 시험이 있었던 것이다.
2. 책문의 제목과 답안엔 어떤 것이 있었을까?
"조선 시대의 논술, 왕이 내는 문제를 '책문'이라고 하고,
응시생들이 내는 답을 '대책'이라고 했는데요,
문제나 답이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이것은 선조 1년에 치뤄진 책문에 대한 박광전이란 분의 대책인데요,
문제는 정벌이냐, 화친이냐 즉, 왜적을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인가를 묻고 있는 것에 답안인데요,
답안의 길이가 엄청납니다.
그 글자수만도 삼천 오백 두 자였습니다.
천자문의 세 권 반 분량이 한 답안이었던 셈입니다.
보통 논술 시험은 진시,
그러니까 아침 8시 무렵 시작하여 해질녘까지 시행되었다고 합니다.
하루 종일 논술 시험을 치뤘던 것인데요,
한 자리에서 이렇게 긴 장문의 답안을 작성해야 했던 것입니다.
숱한 시험을 거쳐 마지막으로 남은 서른 세 명의 인재 중의 인재들이었지만
이처럼 장문의 답안을 제한된 시간내에 쓰기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선 과거의 마지막 관문 논술의 제목과 답안엔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요?"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논술 답안과 관련,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이곳에는 광해군때에 문신, 임숙영이 남긴 <소암집(疎菴集)>이란 문집이 있다.
소암집에는 그가 광해군 3년에 과거에서 내놓은 대책, 즉 논술 답안이 남아 있다.
광해군이 낸 문제는 "지금 가장 시급한 나랏일이 무엇인가?"란 것이었다.
갓 즉위한 광해군은 당시 가장 시급한 나랏일을 책문, 즉 논술 문제로 제시했던 것이다.
광해군 역시 형식에 따라 매우 겸손한 어투로 문제를 출제하고 있다.
"어리석고 사리 판단도 못 하는 내가 나라의 대업을 이어받기는 했으나
난 지혜도 모자라고 현명하지도 않다."
그러면서 광해군은 또 토지, 세금, 호패법에 대한 방안을 물었다.
"공납품을 토산물 대신 쌀로 바꾸는 것이 어떤가?
토지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 어지러워진 호적을 정리할 방법은 없는가?"
그리고 역시 겸허한 말투로 응시생들을 격려하면서 문제을 마무리했다.
"그대들은 모두 뛰어난 인재들이다.
필시 뜻을 품고 있었을 터니 저마다 자기 생각을 말해보라!
내가 직접 살펴보겠다!"
광해군이 이런 문제를 낸 것은 당시 시대적 배경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직후 즉위한 광해군.
민심은 피폐해지고 나라의 근본은 흔들리고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현안을 광해군은 묻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임숙영의 답변은 뜻밖이었다.
모든 병폐가 광해군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신하의 정직한 말 때문에 화를 입게 하는 일이 없게 하신다면 참으로 국가의 복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임금의 잘못이 국가의 병이라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자기 수양에 깊이 뜻을 두시되, 자만을 심각하게 경계하십시요.
삼가 죽음을 무릎쓰고 대답합니다."
"나라가 이렇게 된 것은 모두가 광해군 자신의 책임이다라면서 광해군을 몰아부치면서,
임숙영이 말하는 가장 큰 문제점은 광해군이 말하는 그런 것들이 아니고,
궁중의 기강과 법도가 해이해진 문제라거나,
언로가 닫혀 있는 문제라거나,
국력이 쇠퇴해졌다는 이런 문제를 주장을 하면서,
자기 자신의 답변을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광해군이 문제를 냈는데,
이 시험 보는 사람이 '문제가 틀렸다' 하면서
자기 스스로 문제를 교정을 하고 답변을 하는 것입니다."
- 이덕일 박사,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문제에 대한 답변 대신 자신을 직접 비판하자, 광해군은 격분했다.
광해군은 합격자의 명단에서 임숙영의 이름을 삭제하도록 했다.
이른바 '삭과 파동'이었다.
"전하!~임숙영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전하!~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서인이던 임숙영의 답변에는
당시 북인 중심의 정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의도와는 상관없이 신하들은 임숙영의 복권을 요구했고
넉달후 광해군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덕형과 이항복이 임숙영을 삭과시킨 일이 잘못임을 말하고 환수를 청하니, 왕이 이에 따랐다."
- 광해군 3년
대신과 신하들의 상소로 임숙영은 급제자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앞으로는 질문과 상관없는 답변을 할 때는 과거에 선발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이처럼 전시의 파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던 책문.
그렇다면 책문의 질문과 답안엔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중종은 술의 폐해에 대해 논하라는 요즘도 입에 오르내릴 수 있는 논술 문제를 냈다.
"술의 폐해는 오래 되었다.
술에 폐해가 시작된 것은 어느 시대부터인가?
술에 빠져 일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술에 중독되어 품위를 망치는 사람도 있다.
이를 구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답으로 급제자 김구는 '술은 법보다는 마음으로 금지해야 한다'고 했다.
"술은 폐해도 크지만 쓰임새도 큽니다.
따라서 없앨 수도 없고, 쓰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참으로 위에 있는 사람이 올바른 마음으로 모범을 보인다면
아래 있는 사람도 마음을 바로 하여 습관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 자암집
광해군 8년의 이야기는 얼핏 낭만적으로 보인다.
"섣달 그믐밤의 쓸쓸함, 그 까닭은 무엇인가?", 이것이 논술 문제였다.
"가면 반드시 돌아오니 해이고, 밝으면 어두워지는 게 밤이로다.
그런데 섣달 그믐밤에 꼭 밤을 지새는 까닭은 무엇인가?
어렸을 때는 새해를 기뻐하지만,
점차 나이를 먹으면 모두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백주 이명한의 답은 매우 심오하고 철학적이었다.
"인생은 부싯돌의 불처럼 짧습니다.
백년 후의 세월에는 살아 있을 수 없으니, 손가락을 꼽으며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세월은 머물러 주지 않지만
터득한 학문을 힘써 실천하다 보면
늙는 것도 모르는 채 죽음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시간은 어차피 흘러가는 것이고
그 시간은 나를 위해 머물러 주는 게 아니니까,
흘러가는 시간에 순응해서 얼마나 자기 삶을 충실하게 사느냐,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늙음이 다가오고,
또 죽음에 이르더라도,
그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자 이런 내용입니다."
- 김태완 박사, 국사편찬위원회
그런데 이명한의 이러한 답은 단순한 심경의 표현이 아니었다.
그의 논술 답안에는 수많은 인용구가 나온다.
예기의 <삼년문>에서 인용하기도 했으며,
후한서의 역사서 <예의지>와 두보의 시까지 인용하고 있다.
이는 신변 잡기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매우 치밀하고 설득력 있게 답안을 작성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외에도 조선 시대 논술인 책문엔 다양한 문제가 출제되었다.
외교관의 자질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주도면밀하게 유지하기 위해 어떤 사람을 사신으로 선발해야 하는가"
- 중종
"교육이 위기를 맞고 있으니 현실적인 해결책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 등,
오늘날의 현안과도 맞닿은 문제들이 출제되었다.
"근래에 와서 학교(성균관과 향교)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이를 개선할 방책은 무엇인가?"
- 명종
조선 선비들의 논술 시험이었던 책문.
그것은 단순한 시험 답안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책문이라고 하는 시험 제도는
단순하게 인재를 선발하려고 하는 과거 제도로써 있었던 것이 아니고,
당시에 가장 어려운 문제를 당시의 최고 지성인들에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법을 얻어냄으로써
국가 운영을 효율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이끌어가려고 했던
당시 우리 조상들의 국가 운영의 중요한 방식이었다고 판단됩니다.
이러한 제도를 통해서 조선 시대에는 단순하게 관료들만이 국가를 운영했던 것이 아니라
재야에 있던 수많은 선비들이 자신이 세상을 다스리는 뜻을 이런 대책문에 담아냄으로써
조선 시대를 보다 합리적이고 발전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힘을 보였다고 생각이 됩니다."
- 심승구 교수, 한국체육대학교 교양학부
3. 조선의 선비들은 과거를 위해 어떤 공부를 얼마나 했을까?~
"조선 과거의 마지막 논술 관문이었던 책문, 그 문제들이 매우 다양하고 재밌는 것도 있군요.
그러나 살펴보았듯이 그 답은 매우 심오하고 구체적이었습니다.
논술 답안을 하나 보실까요?
이것은 명종때 김효원이라는 분이 내놓은 논술 답안인데요
답안에는 요즘 논문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인용 문구들이 나옵니다.
이 부분 '여득기정애영이물희(如得其情哀?이물희)',
사정을 알고 안타까워는 하되 기뻐하지 마라는 뜻입니다.
바로 논어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그 옆 구절은 맹자의 나오는 구절을 인용했구요,
아랫 구절은 '문리밀찰(文理密察)', 문리가 상세하고 분명하다는 뜻인데 중용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이렇게 사서 뿐아니라 시경에서 인용한 구절,
서경과 주례에서 인용한 구절도 보입니다.
이처럼 사서삼경은 기본이고,
이외에도 삼국지, 사기, 송사 등 다양한 역사서에서 인용하여 자신의 의견을 펼치고 있습니다.
김효원의 답안에는 약 이른 문구의 인용 문구가 등장하는데요,
이처럼 조선의 논술 답안에는 단순히 자신이 아는 문구를 단순히 암기해서 작성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주장에 설득력을 더하기 위해 자유자재로 응용하고 인용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서삼경만 제대로 공부하는데도 십 년 정도 걸렸다고 하는데요,
그 이외 각종 역사서, 시나 문장 등 문학 작품을 공부하여
이처럼 논술 답안을 작성하려면 엄청난 공부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조선의 선비들은 과거 준비를 위해
어떤 공부를, 얼마나 하여, 이런 논술 시험을 치룰 수 있었을까요?"
- 박노원 아나운서
"예. 조선의 선비들 정말 대단했군요.
그들은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서 어떻게 얼마나 공부를 했을까요?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 지금도 옛방식 그대로 공부하는 특별한 곳을 제가 찾아봤습니다.
아직 동이 채 트지 않는 어둠, 낭낭한 글소리가 새벽을 깨우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이곳, 김제에 자리잡고 있는 학성강당인데요.
이 학성강당에서 학생들은 대체 무엇을 공부하는 걸까요?
김제 학성강당.
이곳은 대학생을 비롯한 일반인들이 모여 한학을 공부하는 곳이다.
이들 대부분은 한학과 연관있는 사람들이다."
박나운 아나운서 - "지금 무슨 책을 보고 있습니까?"
송효준(우석대 한의학과) - "예 지금 <대학>이라는 책을 보고 있는데요,
대학은 사서 중에서 가장 첫번째 책이예요.
저는 대학생이어서 <대학>부터 공부하게 되었는데요,
중학생이나 고등학생들은 <수학>부터 배우게 됩니다."
박나운 - "여기 온 지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송효준 - "두어달 되었습니다."
박나운 - "대학생이 왜 이 학성강당에서 공부하고 있는 거죠?"
송효준 - "예. 저는 한의학과에 재학 중인데요,
처음에는 한문을 접하려고 왔다가 선현들과 책의 내용에 매료되어 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옛방식 그대로 공부하는 이들은 철저한 규칙에 의해 생활한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나 밤 10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 거의 모든 시간을 공부에 몰두한다.
교과 과정은 조선 시대 것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학습은 개인별 수준 학습.
하루 공부할 양을 자신이 정한다.
그날 공부한 것은 그날 다 익히는 것이 원칙이다.
따라서 하루에 약 40분, 스승 앞에 나가 개별 지도를 받는다.
김조영씨는 이곳 학성강당에서 십여 년간 숙식을 하며 공부해왔다.
조선 시대처럼 사서삼경까지 기본 과정은 모두 끝냈지만 그의 공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박나운 - "만약 한 권의 책을 공부를 할 때, 어느 정도해야 이 책 한 권을 뗐다고 할 수 있을까요?"
김조영(학성강당 접장) - "옛날 어른들 책 한 권을 뗐다 하면, 책 한 권을 다 외웠다고 하시거든요.
선생님을 모셔놓고 뒤돌아서 '배강'이라고 해서 책 한 권을 다 외웠다고 하시는데요,
요즘 책을 뗐다 하면 음 읽고, 풀이 할 수 있고, 쓸 수 있는 그 정도지요."
박나운 - "그럼 십 년 동안 여러가지 공부를 하셨는데,
그 정도면 옛날 같으면 과거에 응시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김조영 - "예전 과거를 봤던 분들은 이것보다 훨씬 많은 책들을 봤던 것 같구요,
제가 지금 과거를 본다고 한다면 시험이라 장담은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조선의 선비들이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봤던 책의 양을 한 번 쌓아봤는데요, 엄청난 양입니다.
이 정도 익히고 시험보러 가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실은 이 정도는 아주 기본이었다고 합니다.
조선 선비들이 익혀야 하는 책은 사서오경과 함께 각종 역사서, 문학서까지 매우 광범위합니다.
유교 경전의 경우 그 글자수만도 45만여 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최종 시험까지 보려면 요즘 말로 동시 통역까지 가능해야 합니다.
말로써 뿐만 아니라 글로써 우리가 한국말로 대화를 나누면
즉석에서 한문으로 옮겨야 과거에 합격할 수 있는데
한 예를 사관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사관들은 과거에 갓 급제한 젊은 선비들이 많이 맡게 되는데,
임금과 신하들이 우리말로 대화를 하면 사관들은 즉석에서 다 한문으로 옮기는 것이고
그것이 지금 실록으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시 과거에 합격하려면 사서삼경 같은 것은 아주 기초적으로 떼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또 이 과거 시험에 상당히 많은 역사 사료들이 들어갑니다,
사기라든가 자치통감 같은 역사서들을 둘둘 꽤고 있어야 하고,
또 그 꿰고 있는 사실들을 한문으로 유연하게 쓸 수 있는 그 정도의 실력이 있을 때,
최종 과거 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 이덕일 박사
청선고.
이런 과정을 거쳐야 했기에 과거 급제는 쉽지 않았다.
조선 500년을 통틀어
20대에 과거 급제, 정승 반열에 오른 사람은 열여덟 명에 지나지 않는다.
"통계에 의하면 39~40세입니다.
40세에 합격을 하려고 하면 이미 경쟁이 치열하고 시험을 여러번 봐야 하고
실력이 비등비등하기 때문에 아주 어렸을 때부터 조기 교육을 했지요.
대개 다섯살이 되면 집안에서 천자문이나 기초적인 교육 과정을 시작하고
거기서 배운 다음에 조금 나아지면 좀더 등급이 높은 선생에게 배우고
더 나아지면 아주 높은 선생에게 가고 그렇게 해서 거의 삼십 오년 정도 공부한 사람이 합격률이 많은거죠."
- 이성구 박사
파평윤씨 노성종학당.
이렇게 치열한 과거였기 때문에 급제를 위한 가문의 관심도 높았다.
이곳은 파평윤씨 문중에서 가문의 젊은이들에게 과거 공부를 시키던 곳이었다.
많게는 이십여 명의 젊은이들을 모아 장학금을 주며 공부를 시켰다.
"이것은 본초 학당의 학칙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산소를 향해 예를 갖추고,
걸음은 아주 무겁게 걷고,
손은 아주 공손하게 하고..."
- 윤여인, 파평윤씨 노종파 종친회 운영위원
이곳 역시 엄격한 규율과 정해진 과정에 따라 공부했다.
이렇게 해서 배출된 과거 급제자는 모두 마흔 두 명.
이들은 한달에 한 번 자체 모의고사를 쳐서 그 성적을 매겼다.
이름과 과목 아래 통(通), 략(略), 조(租), 불(不) 등의 성적이 보인다.
"규정을 하시기를, 배운 것을 외우기를 백 번, 눈으로 외우기를 삼십 번, 반드시 하라고 하셨죠.
배운 것을 백 번 외우려면 아마 잠잘 시간이 없었을 겁니다."
- 윤여인, 파평윤씨 노종파 종친회 운영위원
조선 선비들의 마지막 목표인 과거 급제.
그것을 위해 그들은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공부를 다 마친다고 해서 급제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4. 과거의 절차는 어떻게 될까?
초시 - 복시 - 전시, 아홉번 시험 쳤다!!~~
"예. 그럼 조선의 선비들이 과거를 치루기 위한 시험 절차는 어떠했고,
경쟁률은 어느 정도였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이들이 제일 먼저 치루는 시험은 생원과 진사를 뽑는 소과,
그 중에서도 1차 시험이 소과 초시였는데요 전국에서 700명을 선발했습니다.
서울을 포함하여 전국에서 뽑은 인원이 고작 700명,
대충 계산해도 각 군에서 2~3등 안에 들어야 겨우 초시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초시부터 경쟁률이 치열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윤초시, 박초시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집니다만
초시에 합격하는 것만도 보통일이 아니었습니다.
경쟁률을 뚫고 초시에 합격한 사람들,
이 초시 합격은 이제 시작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각 지방에서 초시에 합격한 인재들은 복시를 치루기 위해서 서울로, 서울로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조선 시대 대표적인 과거길이었던 문경새재.
수많은 영남의 과거 지망생들이 이 고개를 넘었다.
문경새재의 '문경'도 경사스런 소식을 듣는다는
'문희경소'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생원과 진사 초시에 합격한 선비들은 서울로 모여들었다.
함남 지방에서는 약 한달, 삼남 지방에서는 보름 남짓 걸리는 여행이었다.
이들은 전국에서 선발된 생원, 진사 초시 합격자들이었다.
과거의 첫 관문은 생원과 진사를 뽑는 시험.
생원은 유교 경전을 시험 보고,
진사는 시와 문장 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일컬었다.
한양에서 치루는 소과 복시에는 생원 50명, 진사 50명 등 모두 100명을 선발했다.
7 : 1의 합격률이었다.
이 시험에 합격해야 비로소 생원, 진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소과 합격은 시작에 불과했다.
소과에 합격한 100명의 선비들은
성균관에 입학, 유생이 되었다.
이들은 예외없이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다.
그리고 정해진 수업 일수을 채워야 했다.
그들이 채워야 하는 수업 일수는 원점 300점.
"성균관 유생들의 도기(到記)는 원점을 얻기 위해 하기 되는데
아침과 저녁을 먹게 되면 원점 한점을 얻게 됩니다.
그 원점은 모두 300점이 모이면 대과에 응시할 자격을 얻게 됩니다."
- 유성열, 성균관 의례부장
서울의 남산골.
조선의 과거는 이곳 남산골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성균관을 졸업한 과거 지망생들은 이곳 남산골로 모여들었다.
대과인 문과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소과에 합격한 생원, 진사들이 비교적 외곽 지역인 이곳 남산으로 모여든 것이다.
"과거때만 되면 서울의 쌀값이 오른다거나 숙박비가 올라서
일일히 과거를 준비하는데 애로점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또 과거를 준비하려면
최소한 한달에서 육개월을 서울에 머물러야 하는 당시 유생들로서는
그렇게 번번히 과거 시험이 있을 때마다 서울로 올라오기보다는
차라리 과거 시험이 있을 때를 항상 알아서 미리 서울에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주로 선비들이 서울에서 거주한 지역은
양반 관료들이 꺼리는 오늘날 남산 아래 주로 거주하게 됩니다."
- 심승구 교수
'남산골 샌님'이라는 말도 '남산골 생원님'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이들 뿐만 아니라 각 지방에서도 대과인 문과를 지망하는 선비들이 많았다.
세월이 흐를수록 재수, 삼수를 보려는 대과 지망생들이 늘어갔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문과 시험은 변화를 보인다.
성균관 유생들과
지방에서 혼자 공부하던 유학들이 모두 응시하기 시작한다.
이 시험에서 모두 240명을 선발했다.
조선 시대 정기 시험인 식년시는
3년에 한번씩 쥐, 토끼, 말, 닭띠해에 치뤄졌다.
"조선 시대 식년 문과는 크게 3단계로 시험 절차가 있게 됩니다.
먼저 지방과 서울에서 시험 보는 초시라는 절차,
그리고 초시에 합격한 자들을 서울에 불러모아 뽑는 복시라는 절차,
그리고 이 복시에서 합격한 자들을 국왕 앞에 불러모아 놓고 등수를 매기는 전시라는 절차,
이 세가지 절차가 있었습니다.
이 세가지 절차에는 나름대로 세분화된 절차가 또 있게 됩니다.
우선 초시에는 초장, 중장, 종장이라고 하는 절차가 있었구요,
복시에도 초장, 중장, 종장이라고 하는 똑같은 절차가 있게 됩니다."
- 심승구 교수
문과복시는
문과초시에 선발된 240명 중 33명을 선발,
임금 앞에서 전시를 치뤄 등수를 매겼다.
조선 선비들은 과거 합격을 위해 적어도 아홉번의 시험을 치뤄야 했다.
율곡은 조선 과거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조선 최고의 학자로 평가받는 율곡은 책문만도 열세편을 남겼다.
그를 일컬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부른다.
아홉번의 장원급제,
즉 아홉번의 과거에서 모두 1등을 했다는 것이다.
명정전.
여덟번의 시험에 합격하고
마지막으로 국왕 앞에서 시험을 치뤄야 했던 조선의 선비들.
따라서 그들은 과거 준비에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었다.
이 자리에 서기까지 그들은 모두 철저하게 준비하고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 했던 것이다.
조선 선비들은 이렇게 엄격한 공개 시험 절차를 통해 모두 관리가 되었고
이렇게 조선 500년 문민 통치의 근간이 되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 관문이 바로 논술 시험인 책문이었던 것이다.
5. 책문은 조선 선비들의 정치 철학이자 현실 대안이었다!~
"조선 시대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치뤄야 했던 시험 제도의 절차를 도표로 정리해봤는데요,
우선 소과에 초시(생원 350명, 진사 350명), 복시(생원 50명, 진사 50명)에 합격해야
겨우 생원, 진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후 대과에 초시(초장, 중장, 종장), 복시(초장, 중장, 종장),
여섯번의 시험에 모두 통과해야 마지막 서른 세명에 뽑힐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덟번의 시험에 합격하고
마지막 전시, 아홉번째 시험인 논술 시험을 국왕 앞에서 치뤘던 것입니다.
그러니 조선 시대 정통 코스를 밟아 관리가 된다는 것은
낙타와 바늘 구멍에 비유될 수 있는 것이죠.
조선 시대 과거 급제자의 평균 연령은 삼십대 후반이라고 합니다.
약 35여 년을 공부해야 과거 급제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조선 500년 동안 과거 급제자가 약 만 오천여 명인데요,
그 중에서 가장 극적으로 급제한 사람이 있습니다.
고종때 정순교라는 분인데요,
다섯살부터 공부하여 80여 년을 공부하여 85세에 과거 합격을 했습니다.
<왼쪽 : 매죽헌 성삼문, 오른쪽 보한재 신숙주>
우리가 잘 아는 성삼문과 신숙주,
이 두사람은 세종때 같은 논술 시험을 봤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두사람의 인생은 극명하게 나눠집니다.
성삼문은 세조 수양대군의 즉위에 반대하여 단종 복위를 꽤하다가 사육신이 되었고
신숙주는 세조가 된 수양대군을 도와 많은 업적을 남깁니다.
성삼문과 신숙주.
두사람의 논술 답안을 통해 조선 시대 책문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충북 청원군의 묵정영당(墨井影堂).
이곳에는 조선 초기 대표적인 학자 한사람이 모셔져 있다.
보한재 신숙주.
그는 세종때 벼슬을 시작하여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까지
모두 여섯 임금을 모시며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동국정운(東國正韻)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오기도 했으며
뛰어난 학식과 문재를 바탕으로 조선의 기틀을 다지는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또 한사람.
매죽헌 성삼문 역시 세종때 벼슬길에 나섰다.
그러나 세조에 항거,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목숨을 잃었다.
사육신 중 한사람인 성삼문은 충절의 상징이 되었다.
세종 29년 1447년, 성삼문과 신숙주는 나란히 논술 과거 시험을 치뤘다.
그리고 두사람은 동시에 합격한다.
성삼문은 을과 1등, 신숙주는 을과 2등을 한다.
당시 그들이 작성한 논술 답안이 그들의 문집에 남아 있다.
보한재집(保閑齋集, 신숙주 문집)
성근보집(成謹甫集, 성삼문 문집)
세종이 출제한 문제는 '법의 폐단을 고치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왕권과 사병 문제 등을 거론했다.
"법이 제정되면 그에 따라 폐단도 생기는데 이를 불식시킬 방법은 무엇인가?
이미 혁파한 사병과 정방의 필요성을 제기하기도 하고
의정부와 승정원의 역할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다.
이를 해결할 대책을 말해보라."
조선 초기 나라의 기틀을 다져나가던 세종의 고민이었다.
이에 대한 성삼문과 신숙주의 답안은 달랐다.
특히 왕권에 대한 견해는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신숙주는 대신을 믿고 맡겨야 한다면서,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주장한다.
"대신을 믿고 권한을 맡기는 것은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공통된 의리라고 생각합니다." - 신숙주
이에 대해 성삼문은 왕권은 왕의 고유한 권한이라면서 왕권 강화를 주장하고 있다.
"정권은 군주의 큰 권한이기 때문에 하루라도 남에게 빌려줄 수 없습니다." - 성삼문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성삼문은 왕권 불가침의 견해로
왕권은 하늘에서 주어진 것이라는 기본 사상을 깔고
왕권을 하나의 독립적인 권한으로 주장하는 반면,
신숙주 같은 경우는 왕권과 신권의 분리가 모호한 그런 부분이 있었습니다."
- 이덕일 박사
신숙주는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내각인 의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면서 왕의 비서실인 승정원의 견제를 주장한다.
"정사를 전횡하는 폐단을 혁파하려면
크고 작은 일을 반드시 의정부를 거치게 하고
승정원으로 하여금 조심하고 삼가게 해야 합니다."
- 신숙주
이에 비해 성삼문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내각인 의정부를 견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우리 조선에서 크고 작은 일에 대해 모두 임금의 결재를 받게 해서
의정부가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하게 한 것은 바로 이러한 폐단을 경계하기 위한 것입니다."
- 성삼문
사병에 대한 두사람의 생각도 달랐다.
신숙주는 사병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면서 사병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태평한 세월이 오래 지속되어 군사적인 대비가 느슨해져
갑자기 군사를 쓰려고 해도 쓸 수가 없기 때문에
다시 사병을 설치하자는 요청을 하게 된 것입니다."
- 신숙주
반면 성삼문은 사병은 임금을 위협하기 때문에 혁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하가 사병을 소유하고 있으면
반드시 군주를 위협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 성삼문
"사병 문제에 대해서 성삼문은 절대 혁파해야 된다,
사병이 있다는 것은 곧 왕권을 제약하는 것이다 명쾌하게 답을 하는데 반해,
신숙주는 사병이 혁파되어야 하는지 있어야 하는지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 이덕일 박사
세종의 문제에 대해 두사람의 논술 답안은 달랐지만 두사람은 이미 절친한 관료이자 친구였다.
집현전 학자들과 더불어 한글 창제에 큰 공을 세웠고
특히 두사람은 명나라 학자 황찬을 만나기 위해 몇 차례나 함께 요동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던 중 1453년 단종1년 계유정난이 일어나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이 단종을 옹위하던 김종서, 황보인 등을 숙청한 사건이었다.
이때 성삼문과 신숙주는 모두 계유정난의 공신이 되었는데
성삼문은 자신이 계유정난의 공신이 된 것을 삭제해주기를 요청했다.
"성삼문이 정난공신의 호를 받은 것이 부당하다며 직임을 파하기를 청하다" - 단종실록
1455년 뒤이어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하자
두사람은 각기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성삼문은 세조의 즉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통탄했다.
"세조가 왕위를 이어받자 성삼문은 부덕하다 말하며 땅에 엎드려 울었다." - 육신전
반면 신숙주는 세조 즉위를 인정받기 위해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왔다.
"명나라에 왕의 즉위 사실을 알리고 승인을 받기 위해 신숙주를 주무사로 보냈다." - 세조실록
1456년 세조2년, 뒤이은 단종 복위 기도 사건.
이것으로 성삼문과 신숙주의 운명은 갈라졌다.
성삼문은 단종 복위 운동에 앞장섰다.
단종 복위 운동은 무위로 돌아갔지만
성삼문은 끝까지 세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채 죽임을 당했다.
"하늘에 해가 둘이 아니듯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있을 수 없소이다.
수양대군 나으리."
- 성삼문, 육신전
성삼문은 이미 논술 답안에서 왕권은 고유 권한, 함부로 바꿀 수 없는 것이라 밝힌 바 있다.
반면 신숙주는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주장했다.
이 견해가 두 사람의 운명을 갈랐던 것이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쫓고 즉위를 했을 때, 이때 성삼문과 신숙주는 확연히 입장이 달라집니다.
성삼문은 단종 복위 운동에 목숨을 거는 반면에 신숙주는 세조의 즉위를 도와줍니다.
이 두 사람의 입장 차이는 이미 대책문에서
성삼문은 왕권은 절대적 권한으로 인정했고,
신숙주는 왕권과 신권이 나눠진다고 답변을 하는데,
이후 두 사람의 입장 차이가 단종을 내쫓고 세조가 즉위하고 났을 때
두 사람의 정치적 행보와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이덕일 박사
과거의 마지막 논술 관문이었던 책문.
책문은 단순한 논술 답안이 아니었다.
그것은 관료의 길로 접어드는 조선 선비들의 정치 철학이자,
현실적 대안이었으며 뜨거운 출사표였던 것이다.
"세계적으로 과거 제도는 우리나라와 중국, 베트남만이 시행했던 독특한 제도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조선 시대만큼 일관성 있게 과거 제도를 시행한 유례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고 합니다.
일본이나 유럽에서는 귀족 계급이나 무사 계급의 세습으로 통치 기반을 유지했던 것입니다.
조선이 500년이나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엄격한 과거 시험을 통해 나라를 통치할 핵심이 된 덕분이라고 합니다.
조선의 과거는 문치의 틀을 유지하는 제도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관리들을 선발하는 마지막 관문이 바로 책문과 대책, 즉 조선의 논술이었습니다.
책문과 대책,
이는 나라의 물음에 대한 젊은 선비들의 강직한 논술이었습니다.
또한 단순히 과거 합격을 위한 모범 답안이었던 것이 아니라
조선 젊은이들의 정책적 대안이요 철학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대책을 실시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심지어는 목숨까지 걸었던 것입니다."
- 고두심의 역사스페셜을 보고(좋은 봄날 맞이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