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 송이 꽃
어느 해 여름 바이칼 호를 찾았을 때, ‘정말 바이칼을 사랑하는 표정’을 지닌 그는 여행업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선비풍에 가까웠다. 버스 안에서 그는 러시아의 여가수인 알라 푸가초바가 부른 ‘백만 송이 장미’라는 노래에 대하여 장황하리만치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 내용은 미모의 유명한 여배우를 짝사랑하던 어떤 가난한 무명 화가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 백만 송이 장미를 사서 그녀가 묵고 있는 호텔 광장에 뿌려 사랑을 고백했으나 결국 그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 채 떠나보내고 말았다는 사연이 그 요지라고 했다.
꽃은 여러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다. 가난한 그 화가에게 꽃은 간절한 사랑 고백을 위한 매개체였다. 부처님께서 대중 앞에 들어 보였던 그 연꽃은 진리의 상징 언어였다. 진리와 욕망이라는 상반된 메시지의 넓은 스펙트럼 속에서 꽃이 가지는 의미는 모두에게 각각 다를 수밖에 없다.
수행자는 꽃으로 자신을 꾸며서는 안 된다는 서릿발 같은 그 계율은 역으로 또 다른 집착을 만들었다. 그래서 문수의 법문에 감동한 선녀가 꽃을 뿌리니 그 계율에 집착하는 성문승들에게 역으로 꽃들이 몸에 그대로 붙어버렸다. 이 의도하지 않은 ‘파계’에 아연실색한 율법주의자들은 온갖 신통력을 동원해 떨쳐내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그러나 그 계율에 집착하지 않는 대승보살들의 몸에 내린 꽃들은 아이러니하게 그대로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정작 꽃은 아무 생각도 분별도 없는데 오히려 당사자들의 ‘오버’하는 분별의식을 질타하고 있다. 그야말로 ‘꽃도 너를 사랑하느냐?’고 되묻고 있다. 법에 대한 집착마저 벗어난 대승보살들의 몸에는 꽃잎이 붙든지 말든지 애시당초 문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을 비운 경지는 공을 가장 잘 아는 수보리 존자가 보여주고 있다.
어느 날 존자께서 바위굴에서 좌선을 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제석천이 나타나 반야를 잘 말씀다고 찬탄하면서 꽃을 뿌렸다. 이에 존자는 반야를 설한 적이 없다고 반문하니 도리어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존자께서 말씀하신 적이 없고, 저도 또한 들은 적이 없습니다.
말한 것도 없고 들은 것도 없는 이것이 참으로 반야를 잘 말씀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정도의 안목이라면 꽃을 올릴만한 자격이 있고, 또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할 것이다.
이럴 경우 꽃도 사실 꽃이 아니요, 받아도 받은 것이 아닌 것이다.
이런 꽃이 가지는 모든 의미를 압축적으로 보여준 것은 우두법융(594-657) 선사일 것이다.
그가 우두산 유서사 북쪽에 있는 바위굴에 앉아서 정진할 때 일이다. 선사에게 새들이 온갖 꽃을 물어다 주는 상서로운 일이 종종 일어났다. 그는 이 일을 은근히 자랑스럽게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사조도신(580-651) 선사가 이 광경을 보고는 ‘꽃마저도 필요없는 경지’를 한 수 제대로 가르쳐 주기 위해 몸소 찾아갔다.
그것도 모르고 우두선사는 공부하는 체 하며 의도적으로 뒤돌아보지도 않고 태연자약하게 폼을 잡고서 앉아 있자 도신스님은 그 속마음을 모두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물었다. “여기서 무엇을 하는가?” “마음을 관합니다.” “관하는 것은 누구의 마음이며, 그 마음은 또 어떤 물건인가?”
이 한마디에 그때까지 꽃놀이패를 즐기던 그 마음도 완전히 없어졌다. 물론 이후에는 더 이상 새가 꽃을 물어다주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는 뒷날 많은 납자들에게 의심을 일으키게 하는 화두가 되었다.
“우두법융 스님이 사조도신 선사를 만나기 전에는 어째서 온갖 새가 꽃을 물어다가 바쳤습니까? 또 만난 뒤에는 왜 더 이상 꽃을 올리지 않았습니까?”
“백만 송이 장미”라는 그 노래의 휴렴도 이 질문에 대한 완전한 대답은 아니지만,
근사치의 답을 찾아낼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이 되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출처 ; 원철 스님 / 모두 함께 꽃이 되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