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번쩍!눈앞이 캄캄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그 다음 15분여 동안 일어난 일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휴대전화상 친구에게 아홉 통화나 했는데 기억나는 건 고작 세통화 뿐이었다. 운동장엘 가다가 계단을 헛디뎌 그대로 꼬끄라진 것이었다. 양 팔꿈치도 다쳐 피가 났지만 머리가 너무 아프고 아가 주먹만 한 혹이 불룩 올라오니 무서웠다 이렇게 죽는 구나! 한 순간에
죽을 수도 있구나 싶었다. 친구의 편의를 봐 주느라 낯선 운동장을 찾은 게 화근이었다.
베개가 닿는 곳에 난 혹은 잘 줄어들지가 않았다. 머리가 깨지는 듯 아프니 옆 병상의 작은 소리도 민감해졌다. 일로 다른 환자를 돌보는 나 더러 의사는 당장 입원을 하라고 했다. 입원절차가 간단하지 않았다. 뭔 사진을 많이도 찍어댔다. 체혈검사,소변검사,심전도 검사, 검사 검사 하는데 반나절이 휙 지나갔다. 다친 팔꿈치 상처도 만만치 않아 정형외과까지 들려야 하니
어지럽고,속은 메스꺼우며 다리조차 후덜거렸다 유일하게 달려와 줄 보호자는 비행기를 타고 와야 하는 육지남자 남편이었다. 딸은 일 중이기도 하지만 늘 지치고 아픈 에미 모습만 보였기에 알리고 싶지 않았다. 남편은 폰을 진동으로 해 놓고 제 때 받지 않았다. 그의 친구에게 전화해서 빨리 수소문 해 달라니 마주 앉아 호기좋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평정심을 잃지 않고 머리를 다쳤다는데 처연스레 대답하는 그가 야속했다.
나는 간병사다. 함께 운동하고 일상을 즐기던 친구들이 손주를 보러가고,성지순례를 자주 가며 농사 하기, 늙어 운전이 서툰 남편 기사역 하기로 가버려 어느 날부터 외토리가 되었다. 다시 운동지기가 생겼는데 부부교사에 한 분 남편은 교수출신이며 자기는 또 고교선생님으로 정년을 맞이해서 나누는 이야기 마다 전국 맛집 기행이며 돈 쓴이야기 말고는 거의 화제가 없자
자랑할 게 티끌도 없는 나는 시들해졌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두해전 딸아이가 여기 제주도에서 사고로 장기입원 해 있을때 간병인을 쓰다가 내가 간병을 했던 기억이 떠 올랐다. 그 때도 세상사는 재미라고는 없던터라 무기력 했었다. 간병사들은 자기들끼리 환한 얼굴로 뭔가 생기가 있었다. 노인들을 케어해서 기가 빠진 상태가 아니고 일을 즐기는 걸 보았다.
간호조무사 자격증이 있는 나는 스산한 11월의 바람이 부는 날 전화를 넣었다. 저장된 번호로 물으니 당장 오란다. 영양제를 맞고 날라와서 보니 코로나가 기승을 부려 간병인이 절대적으로 모자라는 시절이었다. 이도저도 재 보지도 않고 날라오다가 가족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싶어 공항에서 비행기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가족톡방에 올렸더니 난리가 났다. 늘 눈코뜰새 없이 바쁘다던 아들이 전화기 너머로 잔뜩 화를 내며 나무란다. 이 바이러스시대에 병원에서 일하던 사람도 그만두기 십상인데 지 에미는 화통을 지고 불구덩이에 들어간다는 거다. 우리가 가져다 쓴 꽤 큰 지돈은 이미 포기했으니 집으로 돌아 가란다. 그게 있잖아 하고 있는데 딸이 또 성화다. 지 집을 팔면 딱 큰 거 한장 현금으로 손에 쥐어 줄테니 간병일만은 하지 말란다. 지에미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다. 남편도 펄쩍 뛰다가 내가 강력하게 나가니 포기를 했었다. 뭐 일이 누구는 하고 하지말라고 정해진 게 있나 싶었다.
몹시 무기력한 어느 날 대학시절 존경하는 교수님이 내어 주신 과제가 생각났다.
'아이는 장애가 있으며 양부모도 조금씩 아파 몹시 가난한 가정이 재기 할 수 있는 방안을 기술하시요'라는 과제였다. 우리팀은 얼기설기 말도 안되는 답을 써서 제출했는데 교수님이 총괄평에서 그 어머니는 결혼전에 어려운 형편임에도 근면,성실하여 동생들 뒷바라지를 훌륭히 하고 부모님 병수발도 잘 해서 가정의 평화를 가져 온 여성이라 이 집도 훌룡히 지켜 나갈 것이다. 남편과 사이가 좋으니 아무리 어려움이 닥쳐도 가족끼리 단합만 잘되면 그 가정은 재기가 된다였다. 나의 이십대를 돌아 보았다. 비전산 시대에 은행에 근무하면서 퇴근하면 신암동 평화시장에 들러 생선등을 사서 반찬 만들고 냉장고도 없었는데 고등학생 남동생 도시락 두개씩 준비했다. 새벽에 일어나 밥 하고 공무원이었던 오빠 수발에 그때만 해도 지대가 높은 곳에는 물이 잘 안나와서 주인이 통마다 다 받고 나면 우리 작은 독을 채웠었다 새벽녘에 잠들 때가 숱했다. 그렇게도 살았던 내가 못 할일이 있을리가 없었다.
이를 악물고 돈 전부를 관리하는 남편께는 말을 못했다. 친구에게 백만원을 보내라 해서 제주로 날라왔다.가족에게는 일이 생각보다 재미있고 할 만하다고 매일 같이 자신감 넘치는 메세지를 보냈지만 새벽마다 눈물을 훔쳤다. 주변에 간병일을 하는 이가 전무해서 물어 볼 수도 없고 트레이닝도 안 시키고 바로 환자를 돌보라니 그 부담감은 이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잠깐 실버타운에서 간호조무사를 했고, 주간보호센터에서 사회복지사를 한 게 노인복지 경력의 전부인 내게 연로한 노인의 간병을 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팀장이라는 자는 뭔 사연인지 누구에게 말 걸기도 못하게 했다. 흉이 많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함인지 아무튼 히안한 분위기 속에서 긴장의 연속이었다. 토박이 제주 어르신들이 육지년인 나를 좋하할리가 없기에 더 열심히 정성을 다했다. 간병 실력이 달리는 나는 섬유근육통을 앓던 시절에 받아 본 전신 맛사지 경험을 되살려 발 맛사시 얼굴 맛자지 귀 만지기 등으로 일단 환자의 마음을 풀어 드렸다.
처음 돌봐드린 할머니가 퇴원 하실 때,끌어안고 우시면서 태어나서 최고의 호강을 했다고 하실 때 함께 울었다. 설움이 북받쳐 눈이 붉어 지도록 울었다. 초보간병사를 위한 친절은 인색했다. 이제 아홉달이 지나니 백프로 자신감이 있지는 않지만 일이 두렵지는 않다. 통장잔고도 늘어나니 에너지원이 된다. 절대로 안하겠다던 간병사 파견업 대표가 되었다. 이번일을 하면서 나야말로 팔로우 체질이지 리더 체질은 아님을 스스로 확인 했건만 토박이 친구가 울며 부탁하니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런저런 사유로 소속이 없게 되었었다. 또 한 억울하게 대표자리를 뺏긴 미혼모 출신 전 대표의 사정도 딱헸다. 그녀는 훌륭한 대표였는데 경쟁사 대표의 민원으로 2년여동안 이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지난 날 어린이집 하나를 강탈당했던 경험이 있는 나는 그녀를 돕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목소리가 옥구슬 구르듯 맑은 그녀는 이미 통풍에 관절염에 어깨결림까지 온통 아픈상태였다. 육지에서는 그 흔한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여기서는 귀했다. 공무원 경력2년이상까지 하면 나는 두 가지 자격이 해당되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던가 운명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런저런 가정사로 돈을 벌어야 하는 이순이 넘어 팔순이 가까워 오는 간병사님들에게 맞는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 갖가지 병마에 시달리는 환자에게는 잘 보살펴 줄 이를 배정해야 한다. 피치못할 사정으로 간병사에게 가족을 맡겨야 하는 보호자들께는 안심하고 전업에 매진하도록 배려를 해야한다. 그야말로 사회복지를 해야 하는 것이다. 간병에 따라 환자의 호전상태가 달라짐을 수없이 보아왔다. 중증이었던 분들이 의료진의 지시대로 잘 간호해서 호전되어 퇴원을 하면 그렇게 보람이 있을 수가 없다.
운명이라 여기며 앞으로 한 십년 이 일을 하려고 오늘새벽도 운동장을 걷는다. 체력이 되어야 뭐든 할 수 있으니. 아흐레동안 입원해 있으면서 환자의 입장을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 역시사지는 겪어보지 않으면 힘든 일이었다. 은행원,공무원에이어 어린이집 유치원 원장에 부모교육 강사에 별별 직업을 거쳤지만 지금 이 일이 가장 소중한 듯하다.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렸는데 늘그막에 타인의 손에 간병을 받아야 하는 어르신들이 얼마나 의지하시던지 가슴이 미어질 때가 더러 있다.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리하 다짐한다. 이제 나도 지는 해, 잘 마무리 해야겠다. 이 일을 하게 해 주신 나의 절대자에게 머리를 조아린다. 제법 갈아 앉은 혹을 만지며 체험으로 깨친 사항을 잘 새겨 더욱 일에 박차를 가하라는 채찍으로 알고 가만히 쓰다듬는다. 나는 혹부리 할망이다.
첫댓글 서귀포의 어느 피시방에서 썼습니다. 퇴고는 천천히 하겠습니다. 오피스텔에 아직 인터넷이 안됩디더, 제가 근무하는 곳도 와이파이가 안터지고....글 한 편 쓰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너무 거친 글이라 몹시 부끄럽습니다.
훌륭하신 일을 하십니다. 아니 적극적인 삶을 살고자 하시는 인생관이 만인의 귀감이 됩니다. 참 마음이 담긴 글인지라 명 문장이라 평합니다. 바람과 돌과 여자가 많다는 "삼다도 소식" 가끔씩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가 끝말 잇기에서 두번이나 제주에서 뭘하고
계시기에 아주 올라 오시지 않느냐고 다구쳐 물어
본 게 미안합니다. 서귀포 어느 PC방에서 추고도 못하고 올린 글을 보니 마음이 편하지 않
네요. 마치 잘 알든 사람이
오랫만에 만나 지난 일을
쏟아내는것 같은 얘기를
듣고난 기분이었습니다.
이제 되었고, 잘 알아 들었습니다. 그러니 시간 내시어 작품을 다듬어
훌륭한 작품으로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
또 계획하고 있는일 모두가 좋은 결실있기 바랍니다. 맨발 걷기의 투혼으로 성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네.감사드립니다.
제가 하는 일이 부끄러움에 앞서 너무 걱정들을 하실까봐 숨겼습니다. 처음 한달쯤은 힘들었습니다.이 일을 함이 알려지면 집안망신이다 싶었습니다.막상 임해보니 부끄러운 일이란 자신의 안위를 위해 교묘히 남을 이용하거나 속임수를 쓰는 일이지 땀흘리는 일은 아님을 깨첬습니다.남의 편이 왜 가만히 있지를 못하냐고 크게 나무랍디더.맞았습니다.전 고요와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팔자드센 여잡디더.생긴대로 살다가 갈랍니더. 남평 선생님 걱정끼쳐 송구합니다.이번에는 좀 잘 해보겠습니다.걱정 마셔요.
그리고
선생님의 글 잘 읽고 있습니다.인생후반전을 깔끔하게 마무리 하시는 모습 귀감이 되십니다.오래 저희곁에서 그 아름다이 사시는 이야기를 써 주시기바랍니다.감사합니다.
지금으로도 훌륭합니다.
빠른 쾌유를 빕니다.
네,회장님
늘 응원해 주셔서 머리를 조아립니다.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건강하셔요 부디. 10년쯤 후 그때는 제가 새차로 회장님 모시고 안동길안의 금정암을 가겠습니다. 우리 그때 그랬지하면서 또 송이도 굽고 표고버섯도 사서 박월수 작가집 그 너럭바위에 앉아 담소를 나눕시더.박 작가 요즘 아주아주 잘 지내고 있답디더. 회장님처럼 저처럼요.호호.
서해숙 선생님 화이팅입니다.
건강 챙기시고예.
선배님 댓글에 콧잔등이
시큰해집니다.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건강하셔요!
열정의 아이콘, 서해숙 선생님
객지에서 큰일날뻔했습니다.
속히 쾌차하세요.
힘내시고요.^^
네,선배님 늘 제편에 서 주시니 감사합니다.
잘 버티고 견뎌내겠습니다.
우리 다함께 부라봅니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