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역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면 한줄기 산맥이 병풍처럼 둘러 쳐진 곳이 보인다.
바로 계룡산 줄기가 동남으로 뻗어서 양촌면 쯤해서 동으로 틀어 전북 완주군과 층남 금산군 경계를 이루는 대둔산으로 이어진다.. 이곳이 옛 신라와 백제가 최후의 전투를 벌인 지역이다.
이 산줄기 앞으로는 넒고 넓은 평야 지대가 나타난다. 이른바 호남평야의 시작은 바로 이 연산에서부터이다.
그런데 이곳은 신라, 백제만의 격전지가 아니다. 훗날 후백제와 고려 왕건과의 최후 결투를 벌린 곳도 바로 여기다.,
평행이론을 따른 것인가, 아니면 역사의 데쟈뷰인가.
그 생생한 흔적이 개태사요 천호산이며 은진미륵이다.
하늘이 도와주었다는 뜻의 천호산(天護山) 줄기를 다시 한번 본다.
그 곳에는 '누르기재(黃嶺')라는 사비백제의 관문 역할을 하는 고개가 있고,
천호산 줄기 앞으로는 연산천이 흐르고, 왼쪽으로는 황산성이 백제군사령부처럼 자리하고 있다.
부질없는 청둥오리떼들은 오늘도 살기에 바쁘다.
개태사역 지금은 폐역처럼 되어 버린 곳이지만, 한때는 고려의 도읍지로 생각했을 만큼 역사적 의미를 갖는 곳에
개태사(開泰寺)라는 절이 있다. 옛날 고려 태조 왕건이 927년 후백제의 견훤과의 마지막 결투에서 승리한 곳.
견훤의 아들 신검이 와서 항복함으로써 고려 건국의 대업은 완결 짓는다.
하늘이 돕고, 태평성대, 국태민안(國泰民安)의 천하를 건국한 곳이라는 의미의 개태사.
옛절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다시 지은 절이 지금 남아있다.
다만 몇 점의 유물들만이 옛 영화를 말해 주고 있다.
고려 시대때 사용했던 개태사 철확 무쇠솥이 유물로 남아서 옛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아래 사진은 1909년에 찍은 사진이란다.
직경이 2m가 넘는 대형 쇠밥솥, 얼마나 많은 식구를 먹여 살렸는가를 웅변하는 쇠솥이다.
절의 규모가 얼마나 컸었나 하는 가를 짐작하게 한다.
고려가 얼마나 이곳을 중시하고 신성시 했을까?
개태사라는 절이름도, 천호산이라는 산 이름도, 거기에 태조 왕건의 어진까지 모신 절, 팔관회면 왕이 친히 참석했을 곳이니.
1천년이 지나서까지 개태사역을 세울 정도였겠는가? 1911년에 연산역이 세워졌다는데.
밥솥인지 목욕탕 가마인지, 어린 학생들과 비교가 된다. 직경이 무려 289cm나 된다.
개태사지의 또다른 유물, 몟 토성인 마성의 중심부에 자리한 것이라는 설도 있는데.
이곳에서 신검이 마지막 항복을 했다는 곳에다 세웠단다.
대구 팔공산은 갓바위로 유명한 돌부처가 있는 곳이지만, 또 그곳에는 또한 동화사라는 절도 있다.
오동나무 동(桐)자의 이름을 가진 곳, 근처에서 천년도 더 전에 역사적인 대 전투가 벌어진다.
이른바 공산전투(公山), 또는 동수(桐藪) 대전이 벌어진다. 927년(태조 10년)의 싸움이다.
신라의 경애왕이 후백제군의 공격을 받자 고려 왕건에게 긴급 구원을 요청하고 이에 응해서 급히 달려온 왕건의 구원군은 동화사 근처에서 돌아가던 후백제군과 조우하여 전투를 벌린다. 그러나 막강한 후백제 견훤군대에게 대패하고,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신숭겸장군의 왕건 변장으로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하고 추풍령 쪽으로 해서 도망간 적이 있다. 신라 왕은 비참하게 죽어서 슬플 애(哀)가 들어가는 왕의 칭호인 경애왕이 되고 마지막 왕 경순왕이 그의 뒤를 잇지만 결국 고려에게 양도하고 만다..
훗날 자신을 대신해서 죽은 신숭겸과 다른 장군(김락)을 기리는 사당을 짓고 지금도 전해져 오고 있다.
뼈아픈 수모를 당하고나서 절치부심 그로부터 9년 후 멋진 복수전이 펼쳐진 곳이, 바로 이 개태사 부근이다
황산벌 전투의 데쟈뷰 :
이 부근은 공교롭게도 660년에 있었던 신라와 백제 계백 장군의 황산벌전투가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역사의 데쟈뷰인가..
왕건은 토성인 마성에서 신검의 항복을 받고 전란이 끝나자. 개국 대업으로 이곳 전승지에 ..개태사를 세운다.(936년 태조 19년), 천호산(天護山) : 하늘의 도움을 받았다는 뜻의 천호산도 이름짓고.
백성 위무와 민심 달래기 차원에서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미륵사상과 궁예의 미륵불생각을 본떠서 새세상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광종대에 은진미륵불 세운다. (광종 1006년 완성)
태조는 왕비가 무려 29명이나 되었고. 당시 왕권이 취약했던 시대라 그는 각 지방 호족들과 혼인관계를 정략적으로 맺는다.
지금의 충청 전라도 지방은 국력(경제력, 인력)이 막강하니 함부로 할 수도 없었고, 얼마나 애를 들였을까..
동양 최대의 은진미륵불도 세우고,,,,
저항운동,,,,백제 부흥운동,,, 임진왜란시 의병활동,
최근(1894년)의 동학운동,, 심지어 광주 민주화 운동까지 연결시키려는 사람도 있지만.
옛날로 돌아가 생각해본다.
역사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거울(鑒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논산 은진에 있는 관촉사 미륵불 속칭 은진미륵불 모습이다.
( 2024.12.25. 카페지기 자부리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