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일지 /이길섭
―시력 0.3의 황홀한 세상
열여섯 살 나던 봄에도 교실 제일 앞자리에 앉았지만 칠판 글씨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취학한 이후 계속 그랬지만 어느 날 혹시나 하며 은행동 안경점에 갔다
“교정시력은 0.2 그대로야.” 안경점 사장님이 말했다. 잠시 졸보기 렌즈를 만지작거리던 사장님이 머뭇거리는 나를 향해 “안과 처방과 맞지는 않지만 이것 한번 해보자.” “뭐예요?” “돋보기인데 잠깐만 기다려 봐.”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앞의 세상이 갑자기 환해졌다. 6차선 길 건너 간판들의 글씨가 보였다. 꿈같이, 교실 맨 앞자리에서 칠판 글씨가 보였다. 이렇게 해서 내 인생에서 시력 0.3의 신나는 세상이 열렸다. 지방대 출신 소년 교수, 그 전설의 모멘트가 마련되었다. 시력표에서 한 줄 더 보이는 황홀한 세상은 세월이 더해지며 0.5의 세상으로 점점 밝아져 갔다. 마흔다섯 살 0.2의 세상으로 되돌아갈 때까지…….
한국의 내로라하는 안과 명의들의 졸보기 처방을 시골 안경점에서 뒤집었다. 의사들 말대로 개가 웃을 일이었다. 그 이후로는 안과에서도 돋보기를 처방해 주었다.
그립고 아름다웠던 30년간 0.3의 세월, 그것은 신이 나에게 내려준 특별한 축복의 시간이었다. 정상 안을 가진 사람이 이 세상에 갑자기 온다면, 같은 공간에서 생지옥을 경험하게 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