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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흐르는 세월도
눈 감은 가야 역사
글,편집: 묵은지
오늘날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수많은 사건과 상황이 후대에 의해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재평가 되면서 시대의 흐름과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그 가치와 인식이 수시로 변화되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 어떤 것 보다 더 정확한 사료해석을 필요로 하며 이렇게 밝혀진 역사의 진실은 미래를 살아가는 후대의 사람들에게 여러 분야의 좌표로서 또는 미래를 향한 진로 설정에 까지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우리의 역사는 불행하게도 상당부분이 단절된 것도 모자라 권력자나 주도자의 의도에 따라 편향적이고도 왜곡된 부분이 생겨나 진실이 담긴 객관성이 부족하여 진정한 역사의 사실을 알기에는 부족함을 많이 느끼게 됩니다. 이런 현상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한반도의 고대사에 관심을 두고 연구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어려움과 아쉬움을 주고 있습니다.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고자하는 마음으로 틈바구니라도 열어보려하지만 그런 틈새 조차 어렵게 느끼는 너무도 빈약한 역사의 현실이 원망스러울 뿐입니다. 특히 한반도 고대사의 문제는 그들의 역사를 추측하고 뒷받침해 주는 스스로의 사료가 전무한데 가장 오래된 연구사료로 남겨진 것이 고작해봐야 고려시대에 쓰여진 신라, 고구려, 백제 등 삼국시대를 다룬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불과합니다.
그나마 있었다는 신라 진흥왕 때부터의 기록인 '국사'나 고구려 역사서로 연대와 저자가 확실치 않은(소수림왕 때 편찬된 것으로 추정) '유기'와 고구려의 태학자 이문진에 의해 이를 요약한 '신집', 그리고 확실하진 않으나 백제의 근초고왕 때 저술되었다는 '서기'와 그밖의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 등의 이 모든 사료들이 지금은 안타깝게도 모두 사라져버린 사서입니다. 그래도 그러한 역사서는 비록 사라졌지만 스스로 기록이라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당시 무려 600년이나 이어진 가야의 역사는 그나마 흔적조차 찾기가 어려우니 그들의 무지한 역사의식을 탓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가야와 관련한 역사서라고는 고려 문종 때 저술된 '가락국기'가 있었다고는 하나 현재 전하는 것은 삼국유사에 인용된 가락국 멸망시기에 일개 가야 유민에 의해 저술되었다는 '개황력(혹은 개황록)'이라는 내용이 약간 기록된 정도일 뿐입니다. 아무튼 이런 자신의 역사에 무심했던 가야는 최초의 나라로서 등장을 전래된 설화나 유물의 출토를 바탕으로 알 수 있는데 추측해 보자면 한반도 남쪽지방인 '변한'지역을 안팍으로 경상북도 일부와 경상남도 지역, 그리고 남해안 일대에 퍼져있던 12개의 나라들에서 발전하여 이중 일부의 나라들이 모여 첫 '전기가야연맹체'를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야는 서기 42년 부터 400년까지의 금관가야(가락국)를 중심으로 연합한 전기가야와 이후 고구려의 공격으로 전기가야연맹이 와해되고 비교적 온전했던 고령지역의 '대가야(반파국)'를 중심으로 연맹이 성립된 후기가야로 나뉘어 볼 수 있는데 대가야 역시 562년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앞서 묵은지가 썼던 김유신과 천관녀에 관한 글 역시 이런 가야와 신라의 운명적인 역사적 배경을 두고 썼었는데 하여튼 가야는 삼국 가운데에서도 유난히 신라와의 분쟁이 많았습니다. 가야는 신라에 의해 멸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야의 왕족은 신라에서 진골의 대접을 받았고 우리나라 3대 악성중에 한사람인 대가야의 우륵은 가야금을 전파하여 거문고, 비파와 함께 신라 궁중음악의 3대 현악기로 정하게 한 것이나 가야출신의 장수들이 신라 통일에 앞장서며 큰 공을 세운 것은 그들의 오랜 뿌리깊은 적대관계로 볼 때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단일 씨족 중 가장 많은 인구수의 성씨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김해 김씨'는 그 시조가 바로 금관가야로 알려진 가락국의 '김수로왕'입니다. 이렇게 가야에 관하여 전해 내려온 건국설화에 의하면 변한의 '구야국'에는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오천간', '신귀간', '신천간' 등 이렇게 9간의 촌장이 수백, 수천에서 많게는 수만에 이르는 백성들을 각각 다스리고 있었는데 어느날 촌장과 백성들이 지금의 김해에 있는 '구지봉'에 모여 '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자 하늘에서 금합에 담긴 황금알 6개가 내려왔는데 그중 제일먼저 부화하여 태어난 아기가 김수로왕으로 금관가야(가락국)의 왕이 되었고 나머지 알에서 태어난 아기들도 주변의 다른 가야의 왕으로 각각 삼았으며 후에 이들이 다시 연합하여 전기가야연맹체를 구성하였다는 설화입니다.
여기서 촌장들의 이름 뒤에 붙은 '간(干)'은 유목민족인 몽고인들의 군주인 '칸'의 발음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라는 조심스런 견해도 있는데 단일민족을 주장하는 우리의 역사관에 배치되는 것으로 더는 묵은지도 토를 달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신라에서도 높은 관직명으로 '이벌간'이나 '각간' 등의 명칭을 쓰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가야는 12개가 넘는 나라로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한 탓에 국력을 모으기조차 힘든 상황이었고 역사의 기록에도 소홀하여 순전히 신빙성이 별로없는 설화에 의존한 역사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가야라는 말은 '가라'에서 온 말로 산천의 마을이란 뜻에서 차츰 나라의 이름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는데 가야라는 말은 대략 3세기 이후에 사용된 말이고 다른 말로는 가량, 가락, 구야, 임나 등의 명칭으로도 불려지고 있었습니다.
본래 설화의 속성상 어떤 대상을 신격화하고 추켜세우는 일에 매우 과대함이 포함되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기에 설화는 사실을 논하는데는 신뢰도가 떨어지거나 약화되는 단점이 있습니다. 일례로 김수로왕이나 다른 가야의 왕이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알에서 탄생되었다느니 김수로왕의 재위기간이 무려 158년이나 되고 인도에서 맞아들인 그의 부인인 '허황옥' 역시 157년을 살았다고 전해졌는데 이는 그당시 상황을 보더라도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역사의 사실이 아닌 설화의 내용일 뿐입니다.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에 뿌리를 둔 금관가야(가락국)는 왕조가 무려 500년을 이어오고 고령에 정착한 대가야는 거의 600년을 이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역사 기록에는 너무 소홀했고 다른 그밖의 가야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런 가야를 멸망시킨 신라의 왕이나 세력가들도 합병이후 가야 역사를 보존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나마 신라의 왕 가운데 가야의 혈통이 절반정도 섞인 후손이며 신라의 왕으로 삼국통일을 마무리한 '문무왕'이 김수로왕의 제사를 지내라는 명을 내리는 덕분에 가야의 존재감을 겨우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가야 초기시절이긴 하지만 한때는 신라도 자신들이 해결하지 못한 골치아픈 문제를 가야의 김수로왕에게 부탁하여 해결하는 등 가야도 막강한 힘을 발휘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당시의 가야는 군사적으로나 일상 생활에 쓰임새로 매우 귀했던 철이 생산되어 주변국들에게 철을 이용한 각종 철제 물건들을 무역으로 거래하면서 주변국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군사력도 풍부한 철로 만든 갑옷과 무기로 무장시킨 철기군을 갖춰 그 위세가 제법 위풍당당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잘나가던 가야가 어찌해서 단일화를 한번도 이루지 못했을까요? 주로 남해안을 따라 주변 여러 곳에서 부족국가 형태로 풍요로움을 누리면서 발전한 가야는 가야산 자락에서 전라도 진안, 장수, 임실, 남원 등 까지 600년이 가깝게 유지되었는데 그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 단일국가를 한번도 이뤄보지 못하고 흥망성쇠의 기복 속에 나라로써 그 명을 다하고 말았다는 것이 묵은지로서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일찌기 고대의 한반도에는 고조선이 멸망하고 순차적으로 나라들이 세워졌는데 박혁거세에 의해 신라가 건국(B.C 57년)되고 주몽의 고구려(B.C 37년)와 온조의 백제(B.C 18년)가 건국 되었으며 가야 역시도 그 후 김수로에 의해 가락국이 건국(A.D 42년) 되었는데 가야는 특이하게도 여러 곳에 부족국가 형태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가야는 가락국의 김수로왕을 중심으로 결집을 했는데 인접한 가야가 급속하게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하던 신라는 빈번하게 영토를 침범하여 가야를 괴롭혔습니다. 가야를 호시탐탐 노리던 '탈해 이사금'은 김수로왕과 회심의 일전을 벌였는데 그만 지혜로운 김수로왕에게 패하고 도주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가락국의 김수로왕은 이 승리를 계기로 세력을 더욱 확장시키면서 나머지 변한국에 분산하고있는 가야를 결집하여 가야의 맹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특히 가락국은 많은 양의 철이 생산되는 덕에 제철공업의 발달과 함께 해상무역을 기반으로 나라의 발전과 번영을 구가하던 시기였으며 이들이 생산한 철은 일본과 중국에도 수출이 되었고 한동안 가락국은 다량의 철 생산에 힘입어 주변국들과의 철제 시장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부와 번영을 구가하던 가야에게 커다란 시련이 닥치기 시작을 하였는데 399년에 발발한 신라와의 전투에서 가야의 철기군은 백제군, 일본군과 동맹하여 맹위를 떨치며 신라군을 몰아부쳤고 패망직전까지 몰리던 신라의 '내물 마립간'은 고구려의 광개토왕에게 구원을 요청, 광개토왕은 군사 5만을 보내 서라벌을 점령하고있던 가야군과 일본군을 몰아내고 내친김에 고구려군은 가야까지 쳐들어가 패전으로 큰 타격을 입은 전기가야연맹을 와해시키고 말았습니다. 이후 일부 흩어졌던 가야세력은 경상도 내륙 지방(고령)으로 피신하여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가야연맹을 결성하였는데 이 대가야도 가락국과 함께 버티기를 일삼다가 왕권을 정립하고 국력을 신장시킨 신라 법흥왕이 군사력을 강화하여 침범해 들어오자 상대적으로 국력이 쇠약해진 가야는 결국 532년 금관가야의 구형왕(구해)이 신라 진흥왕에게 스스로 항복을 하고 신라에 병합되었고 또다시 30년후 562년 후기가야를 주도했던 대가야 마저 멸망, 이를 기점으로 가야는 완전히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때에도 대가야를 멸망시킨 신라의 주력 군사를 이끌던 장수가 신라에 항복한 가락국의 구형왕 아들인 김무력 장군이었으니 이런 기막힌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날의 남해안 곳곳은 도로가 잘 닦여져 있고 간척공사 등으로 매립된 곳이 많아 지역이 고립되거나 따로 외떨어진 곳이 그다지 많지 않지만 당시의 김해나 남해안 등지는 지형적인 형편에 따라 교통이 힘들고 외떨어져 각기 여러곳에 분산되어 옹기종기 나라가 형성된 관계로 비록 남아있는 사서는 없지만 곳곳에 출토되고 있는 유물로 그나마 그당시 시대상을 추측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락국(금관가야)의 역사는 500년이지만 사실 정확히는 600년 이상으로 기간을 늘려야 하는게 옳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전 고대의 가야유물이 섬진강 서쪽에서 남해지역을 따라 곳곳에서 출토되어 가야의 부족은 이미 오래전부터 대부분 조선유민으로 예상되는 사람들이 내려와 이곳에 각기 정착해 살았고 대가야의 멸망까지를 헤아리면 실상은 600년을 훨씬 넘게 보아야됩니다.
풍부한 철과 기후가 알맞아 농·어업이 발달하여 한때는 번성기를 누리기까지 했던 가야는 외부의 세력에 의해 번번히 국력이 흔들리며 500여년을 흐른끝에 금관가야(가락국)의 항복으로 그 쇠퇴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하지만 가야는 가야연맹의 주도세력만 바뀌었을뿐, 각 가야국들은 정치적인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지역적으로 분산될 수 밖에 없는 특성이 있었다 하더라도 외부의 숫한 압력을 견뎌내기 위한 스스로의 강한 응집력이 필요로 할 때 가야는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한계점만을 노출된채 신라와 백제의 틈바구니 속에서 버티다 결국 멸망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너무 아쉽기만 합니다.
신라는 후대 사람들에게 가야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한 통일국가로서의 몫을 다하지 못했다는 원망과 비난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신라가 통일을 이룬 (사실은 신라가 차지한 고구려 땅은 대동강 지역까지 이므로 완전한 통일을 이뤘다고 하기엔 다소 미흡한 점이 있다)국가로서 이 시점을 기록한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는 통일된 신라 자신들의 기록 자체도 부실하지만 가야의 역사편찬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이런점으로 미루어보아 가야역사의 기록은 아예 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신라는 자신의 나라에 합병된 나라를 원만히 다스리려는 의미에서라도 그들의 역사에 최소한의 관심을 가졌어야 했으며 그런 차원에서 통치자는 학자들을 통해서라도 사료의 연구와 정확한 가야의 전후 역사 기록을 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막상 자신들이 해야할 중요한 부분을 소홀히 한 것으로보아 자신들이 어떻게 나라를 통치하고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를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12개가 넘는 가야의 나라들은 600년을 지나는 동안 수많은 역사의 굴곡을 거쳐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나라가 몰락한 처지라지만 자신들의 기록에 소홀한 것 또한 잘못된 일이었고 자신들이 점령한 가야를 대하는 신라의 무책임한 외면 역시 그들 가야의 수백년 역사를 깜깜한 어둠속에 몰아넣은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왕조가 밝혀진 가락국의 김수로왕의 왕조는 10대에 걸쳐 490년 역사라는 기록과 이진아시왕의 대가야 왕조가 16대에 걸친 520년의 역사라는 기록이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약간 언급된 것이 전부일뿐 나머지의 가야는 어떻게 흥망성쇠를 해왔고 어떤 왕들이 있었는지 조차도 언급이 없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마저 눈감아버린 그들의 600년 발자취는 그래도 다행스럽게 곳곳에서 출토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는 그들의 흔적이 담긴 유물들로 조금씩 조금씩 눈을 떠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