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안양시지에 소개된 인덕원의 유래는
이 마을은 조선시대 내시(內侍)들이 살던 곳이라고 한다.
이들은 비록 거세(去勢) 된 몸이지만 환관이라 하여 궁중을 출입하여 임금과 가까이 있는 신분으로 높은 관직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남에게 덕을 베푸는 사람이 사는 곳이란 의미로 인덕(仁德)이라 칭했다가,
공용(公用) 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기 위하여 원(院)을 설치하면서 부터 인덕원(仁德院)이라 부르고 있는데,
원은 임진왜란 전에 이미 폐하여 없어졌다.
인덕원은 조선 초기부터 이미 교통의 요충지로 알려졌는데,
이러한 사실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白衣從軍) 할 때의 일기인 [난중일기]의 기록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정유(1597) 4월초 3일 조 (계해) 맑음. 일찍 남으로 길을 떠났다.
금오랑 이사민, 서리 이수영, 나장 한언향은 먼저 수원부에 도착하였다.
나는 인덕원에서 말을 먹이면서 조용히 누워 쉬다가 저물어서 수원에 들어가 경기관찰사
수하에서 심부름하는 이름도 모르는 군사의 집에서 잤다.
신복용이 우연히 왔다가 내 행색을 보고 술을 갖추어 가지고 와서 위로하였다.
부사 유영건이 나와 보았다.
인덕원은 정조의 수원 능행로(陵幸路)로도 유명하다.
즉 정조는 정조 13년 (1789) 10월 5일 양주 배봉산에 있는 묘(영우원)을
수원 화산으로 옮기기 위해 부왕(사도세자)의 영여와 함께 과천행궁에서
경박한 후 이튿날(10월 6일) 인덕원을 지나 수원을 향했다.
그 후 정조 14년(1790) 2월 29일, 정조 15년(1791) 1월 16일등, 정조 16년(1792) 1월 24일,
정조 17년(1793) 1 월 12일, 정조 18년(1794) 1월 14일등 모두 6차에 걸쳐 인덕원을 왕래하였는데,
특히 제5차 행차 때인 1793년 1월 12일에는 인덕원을 지날때 인근에 있던
부노(父老)들을 접견하고 그 노고를 위로하기까지 하였다.
이후 정조의 인덕원 행차는 없었는데,
그 이유는 안양에 만안교를 가설한 후 행로를 시흥-안양-수원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김해 김씨가 배판한 이곳은 광복 직후까지만 해도 불과 33호에 지나지 않았으나,
수 차에 걸친 도시계획 등으로 북쪽으로는 과천시, 동쪽으로는 의왕시, 남쪽으로는 군포시,
서쪽으로는 안양시 진입에 이르는 사통팔달(四通八達)로 교통이 발달되자 급성장 하였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상서면(현 동안구청) 관내에서는 제일 부촌이었다가
광복직전부터 빈촌으로 전락된 후 1970년대부터 다시 부촌으로 부상해 관양동 관내에서는 땅 값이 제일 비싸다고 한다.
인덕원 사거리에서 수원방향으로 약 200m 지점 도로변에 현감 이태응의 송덕비가 있다.
이 비는 본래 조종내 개울둑에 있었다가 마을내로 수차 옮겨지고,
다시 1984년 도시계획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이전, 보존되고 있다.
이 비석이 인덕원에 소재한 것은 몇 가지로 해석할 수가 있다.
첫째는 현감 이태응이 인덕원지방에 선정을 베풀어 이곳 주민들이 그 은공을 잊지 않기 위해 이곳에 세웠을 경우,
두번째는 조선시대 과천현감이 주재하고 있던 현 과천시 중앙동사무소와 과천국교 사이에 있는
역대 과천현감의 선정비군과 함께 있었다가 후대에 주민에 의해 이곳으로 옮겼을 경우 등을 추론할 수가 있는데,
현재로는 어떤 연유로 이곳에 소재했는지에 대해 확인할 수 없다.
현감 이태응은 조선 고종때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지내다가
고종 3년 (1866) 12월 5일 과천 현감에 제수를 받아 그 해 12월 18일에 부임하여 13개월간 재직하다가
고종 5년(1868) 1월 29일 송화현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송덕비는 과천현감에서 물러난후 14개월만인 고종 6년(1869) 3월에 세워졌다.
인덕원마을 중앙에 있는 대동우물에서 정제(井祭)를 지내다가 한국전쟁 직후부터
인근에 주택을 지으면서 수원(水源)이 딸리자 제를 지내지 않는다.
3. 안양시에서 세운 인덕원터비에 적혀있는 내용
인덕원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에 환관들이 한양에서 내려와 살면서
주민들에게 어진 덕을 베풀었다하여 인덕이라는 말에 마침 이곳에 관리
들의 숙식처였던 원이 있어 인덕원이라 칭하게 되었다.
원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마을 원로들에 의하면 이곳 주변으로
추정하고 있다.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에는 1597년 5월 초사흘에 인덕원에서
쉬어갔다는 내용이 있고 특히 조선 제22대 정조대왕께서 부친 사도세자의
능참배시 여섯 차례에 걸쳐 인덕원 옛길을 지나갔다는 원행정례의 기록
으로 보아 이곳이 유서 깊은 역사의 현장이기에 이를 기리고 후세에
전하고자 이 표석을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