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미자나 따렵니다
장수의 요체이며, 안락한 삶의 지름길이며, 현대인의 필수 불가결한 건강 유지의 비결처럼 들리는 말이 건강검진이 아닌가 합니다. 일견 맞는 말이기도 한 듯 보이지만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말인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병원에 가 의사를 만나고 약을 처방해 옵니다. 이십여 년 전쯤부터 앓는 당뇨를 치료-관리하기 위해서입니다. 의사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짐작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맥박을 재고, 몸무게를 달아보고, 청진기를 가슴과 등에 대 그만이 알고 있는 의학지식에 빗대 특이한 변화가 있는지를 조사합니다. 당화혈색소 검사를 위해 석 달에 한 번 피를 뽑습니다. 가끔 초음파를 통해 갑상선 검사와 신장 등 장기를 점검하기도 합니다. 그것을 토대로 내복약과 인슐린 주사의 용량을 조절합니다.
이번 달에도 병원에 갔습니다. 그는 병력 카드를 들여다보고는 건강검진을 받은 지 이 년이 넘었으니 다시 받아보라고 합니다. 그의 권유가 아니더라도 건강보험관리공단에서 문서로 혹은 알림 문자로 건강검진 대상자임을 알려주고 검진 가능한 병원과 검사항목까지 지정해 줍니다. 그리고 안내문 어디쯤엔가 검진을 받지 않는 경우 발병했을 때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덧붙여 둡니다. 협박 같기도 하지만 그렇게 해서 건강을 지키라는 간곡한 권유임이 틀림없습니다. 이런 당국(?)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작년부터 더는 건강검진을 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의사에게 더는 건강검진을 받지 않을 것이니 건강검진을 요구하지 말라고 말해 두었습니다. 의사는 어떻게 그런 엉뚱한 생각을 했느냐는 듯 놀란 표정으로 그러면 안 된다고 나무라듯 말합니다. 의학적 소견과 삶의 철학이 맞서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말할 것도 없이 의사로서 제가 할 일을 하려는 것뿐이겠지만 그것이 꼭 옳은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도 얼추 육십 후반의 나이에 이른 것으로 보이는 데 의사가 아닌 늙어가는 한 인간으로서 삶에 관한 소견은 어떠한지 궁금합니다.
그는 만약에 암과 같은 몹쓸 병이라도 발병해 치료할 시기를 놓치면 그때는 어찌할 것이냐고 묻습니다. 그렇다면 고마운 일이라는 나의 대답에 할 말을 잊습니다. 자질구레한 병이라면 언제건 병원에 들러 간단한 처치로 불편함을 제거해 버리면 그만입니다. 문제는 발병하면 잘 치료도 안 되고 치료를 위해 당사자는 물론 식구들 모두 애를 써야 하는 병입니다. 의사는 그런 병의 사전 차단과 조기 치료를 희망한 것인데 그 생각이 나와는 다른 것입니다.
나는 팔십 중반에 든 어머니와 구십 초반에 든 아버지 두 분을 모두 암으로 잃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고 삼 년 후에 아버지가 돌아갔는데 병구완을 하며 느낀 것이 때가 되어 돌아가실 수밖에 없다는 것과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치료받을 수는 있으나 인간을 죽음으로 이끄는 길이라는 것 말고는 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생명을 지닌 것은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의사가 말했던 그런 ‘몹쓸 병’이라면 더더욱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연스레 죽으라는 의미, 죽을 수밖에는 없게 되었다는 신호, 죽음에 이르는 길에 접어들었다는 안내로써 이에 순응하는 것이야말로 삶을-죽음을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탈출은 불가합니다. 일견 탈출이 아니라 기왕에 주어진 생명이니 하루라도 더 살자고 작정한다면 그렇게 하라고 하겠지만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운명은 주어지는 것이며, 거스를 수도 없습니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를 치료하며 노심초사하던 학교 후배인 모 국립병원의 원장도 제 병을 알지 못했습니다. 나를 세 번이나 수술하고 건강을 염려해 주던 고등학교 동창인 의사 친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침마다 출근 전에 등산해 달음박질로 출근한다며 나를 걱정했던 초등학교 동창도 벌써 여러 해 전에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운명을 바꾼 까닭은 모두 암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운명을 결정짓는 병에 걸린 것입니다. 주치의가 말하는 바로 그 병입니다. 그러니 건강검진을 받아 더 살겠다고 애를 쓰는 것은 죽음의 길에 들어서서 발버둥 치는 일 말고는 별로 할 일이 없는 삶을 사는 길입니다. 그때부터의 삶은 발병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 다시 온전한 생활을 해보겠다는 ‘희망을 꿈꿔 보는 일’이 아니고는 별로 할 일이 없습니다. 아직 의학이 그런 꿈을 실현해 주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고 건강을 되찾아 주는 의약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떤 병에 있어서는 그들의 노력이 못 미치고 있음을-신과 같은 줄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목전에 이르렀을 때 인간 노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절대자(絶對者)의 부름에 응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그런 ‘옳음’에 내 마음이 기운 것입니다. 내 주치의는 망각이 일상이 되지 않았다면 더는 건강검진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며, 또다시 그런 요구가 생긴다면 염치없는 사람으로 여겨 그 병원 출입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운명을 거역하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시간은 매우 중요해 내가 하고 싶은 일-여행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음악을 듣고, 사색하는 일에 써야 합니다. 건강검진을 통해 병에 들었다는 소식을 듣는 것이나 모르고 있다가 병에 든 것을 알거나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나이는 지나가고 있습니다. 몸이 그렇게 느낀다고 전해옵니다. 이는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순응하는 것이며 나름대로 삶을 즐기고 마감하는 순서를 정해둔 것입니다. 아둔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지경에 이른 것을 보면 오래도 살았습니다. 이 또한 복이어서 크로노스(Kronos)적 삶이라면 행복하기 그지없으며 그런 삶을 유지하게 한 건강도 충분했습니다. 나머지야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엉터리 삶을 산 카이로스(Kairos)적 삶이 문제인데 다 살고 난 후 후회해 보아야 별무소득이니 그만해두겠습니다. 어찌 되었건 이제 와 삶을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요즘에는 어떻게 살 것인지보다는 어떻게 살았는지를 되돌아보는 것이 일입니다. 말하자면 희망이라면 후회나 회한이 남는 일이 없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랬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재빨리 반성해 그나마 마음에 남게 될 앙금을 덜어내고 마음을 가볍게 해두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소망입니다. 그러는 동안 앞으로 할 일이란 해도 그만이고 하지 않아도 그만인 일-그 일로 해서 후회할 일이 생길 까닭이 없는 일을 하면 그만입니다. 이미 말했듯이 독서하고, 여행도 하고, 글도 쓰고, 음악도 들으며 찾아오는 친구를 만나는 일 등이 그것입니다.
건강검진을 지속해서 받아야 옳은지 아닌지는 각자의 판단이며 나의 판단은 말한 바와 같습니다. 거꾸로 자라는 생명은 없습니다. 뭐든 태어나 세월이 가면 생로병사의 순서를 밟습니다. 생로병사는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이제야말로 그런 때에 이른 것인데 건강을 돌보는 일을 의사에게 맡긴다 해서 나아질 것이 없습니다. 정해진 순서대로 잘 가고 있습니다. 백세 시대라고 깝죽거리는 세상에 칠십을 살고서 할 말은 아닌 듯도 보이지만 그런 의도적이고 희망적인 말에 속을 나이도 아닙니다.
예년 같으면 언제쯤 건강검진 날짜를 잡을까, 하고 재보는 가을입니다. 올해는 밭에 나가 울 가에 빨갛게 익어가는 오미자나 따야겠습니다. 혹시 건강을 염려하는 누군가에게 잘 담근 오미자청을 선물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