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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 6:1-8)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하나님께서 하늘 지성소를 열고 이사야에게 당신의 보좌를 보여 주셨습니다. 지성소를 바라본 이사야, 지성소를 경험한 이사야는 평생토록 변하지 않는 믿음과 충성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여하신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그 혼돈과 절망의 시대에 하나님을 위하여 굳게 선 믿음의 장부가 되었습니다. 지성소를 경험한 그는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유다뿐 아니라 온 이방에까지 담대히 선포하였고, 그들의 죄를 두려움 없이 꾸짖었습니다. 이사야는 그 시대에 참으로 하나님이 필요로 하셨던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재림성도들을 향하여 같은 기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시대를 위한 이사야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늘 지성소를 열어 보여 주셨습니다. 하늘 성소를 통하여 재림신앙의 본질을 깨닫고, 그 곳에 믿음의 닻을 내린 사람이 진정한 재림성도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하늘 지성소를 열어 보이셨습니다. 한 왕이 죽고, 새로운 왕이 즉위하는 시기는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스럽고 불안한 시기입니다. 음모가 난무하고 권력을 위한 암투가 밤낮으로 계속되는 시기입니다. 모두가 불안하고 초조한 가운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사람을 찾아다니는 시기입니다. 말 그대로 혼란의 시기이며 불확실성의 시기입니다. 그 혼란과 불안의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하늘 지성소를 열어 보이셨습니다. 그 까닭은 이사야가 이 세상의 어떤 사람, 어떤 권력자에게도 그의 시선을 두지 않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의 눈을 당신의 보좌, 하늘 지성소로 붙들어 매기 원하셨습니다. 세상의 부귀에도, 영화나 권력에도 관심을 두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어떤 인간도 의지하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이사야의 눈에 하늘 지성소를 열어 보이시고, 그를 당신의 기별을 선포할 사명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바로 “웃시야 왕의 죽던 해”입니다. 아니 그보다 더욱 혼란하고 무질서하고 혼돈스러운 시대입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은 어떤 절대적인 원칙이나 기준도 부정하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모든 가치관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고, 내게 당장의 이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면 양심도 도덕도 윤리도 아무 의미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불투명합니다. 죄의 밤은 더욱 깊어가고 있으며,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의 잔을 거의 채우고 있습니다. 바로 “웃시야 왕의 죽던 해”와 같은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사야에게 열어 보이셨던 하늘 지성소를 우리의 눈에도 펼쳐 보여 주십니다. 지성소에 계시는 주님을 찬양합시다. 우리의 시선이 당신께로 향하도록 하늘 지성소를 깨닫게 해 주신 주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세상이 아무리 암담하고 절망적이라 하더라도 우리에게 하늘 지성소에서 우리를 위해 속죄하시는 주님이 계심을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합시다. 그리고 우리 주님이 그 곳에서 나오시는 시간까지 오직 하늘 지성소에 우리의 시선을 붙잡아 매도록 합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에 하늘 지성소를 열어 보여 주시는 까닭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열어 보여주신 지성소에서 일곱 가지 특별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의 경험이 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재림성도의 경험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이사야와 우리는 지성소를 경험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의 경험을 통해 오늘 우리가 무엇을 경험해야 할지 살펴봅시다.
첫째, 이사야는 하늘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깨달았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섬기는 스랍들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 아름다운 찬양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성소는 우리와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닫고, 그분의 영광을 경험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지성소는 우리가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고 그분의 거룩함을 나누어 받는 곳입니다. 지성소를 바라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매료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결코 하나님의 완전한 영광을 썩어질 인간의 부귀영화와 바꾸지 않습니다. 지성소를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동참하기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구별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사야는 지성소를 경험한 후에 그렇게 살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이사야처럼 지성소를 경험했다면, 이사야가 살았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성소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그 거룩하심만을 추구하는 재림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이사야는 하늘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5절 하단을 보십시오. 이사야는 “왕을 뵈었음이로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지성소는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거기가 아니면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직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한 분이시지만 죄인은 지성소에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성소에 우리 주님의 피가 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속죄함을 받지만, 피 없는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죄인에게는 성소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마다 지성소로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누려야 합니다.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가 하나님과 나누는 깊은 교제의 기쁨을 체험해야 합니다. 날마다 우리는 하늘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삶이 진정한 재림성도의 삶입니다.
셋째, 이사야는 하늘 지성소에서 자신의 죄와 허물을 깨달았습니다.
다시 5절 상단을 보십시오.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탄식합니다. 이사야는 지성소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무가치함을, 한없는 연약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지성소는 죄인이 참으로 자신의 죄를 깨닫는 곳입니다. 거기가 아니면 인간이 자기의 죄를 확실하고도 분명히 깨달을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율법이 있고, 그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기 위해 예수께서 흘리신 피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데 담대한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까닭은 그들이 지성소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성소 밖에서 늘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에 스스로 의롭다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성소에는 다른 사람이 없습니다. 그곳에는 온전히 거룩하신 우리 주님만 계십니다. 그분의 그 순결한 옷을 바라볼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전적 무가치함과 죄인 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 우리의 본질을 깨달아야 합니다. 얼마나 흉악한 죄인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지성소에서 자신의 죄를 인하여 애통하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곳 지성소에 우리의 죄를 위하여 흘려진 예수님의 보혈이 속죄소에 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지성소에서 죄를 인하여 탄식하는 사람은 속죄의 소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속죄의 약속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늘 지성소에서 철저히 죄를 깨닫고 그곳에서 중보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힘입어 속죄의 축복을 누리는 사람이 진정한 재림성도입니다.
넷째, 이사야는 하늘 지성소에서 정결함을 입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천사는 말했습니다.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지성소는 용서와 속죄의 선언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 지성소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지성소에 들어가는 백성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보다 먼저 들어가셨습니다(히 6:20). 그러므로 우리도 “담력을 얻”(히 10:19)어 지성소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네 죄가 도말 되었다”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성소는 죄인이 죄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며, 대제사장 예수님은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고 방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죄를 가슴 속에 숨겨두고 고민하고 좌절할 필요도 없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사람도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지성소에 담대히 나가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 맡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시 68:19)이십니다. 우리를 정결케 하시는 그분이 지성소에 계십니다. 날마다, 매 순간마다 대제사장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어 정결하게 되는 사람이 참된 재림신자입니다.
다섯째, 이사야는 하늘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하늘 지성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곳입니다. 우리도 하늘 지성소에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귀담아 듣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시대를 위해 지성소의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기별이 세천사의기별입니다. 재림교회는 지성소에서 선포된 세천사의기별에 순종한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이며, 이 기별을 세상 끝까지 전하도록 부름 받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성소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하늘 지성소에 계신 대제사장 예수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별에 귀를 기울이면 언제나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지성소 밖에서 교훈을 찾는다면 반드시 사단의 기만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늘 지성소에서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단이 어떤 소음으로 방해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만을 따라가는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충성스런 재림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여섯째, 이사야는 하늘 지성소에서 자신의 사명을 깨달았습니다.
8절 하단을 보십시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사야는 하늘 지성소에서 비로소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살아야 할 것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필요로 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자신을 찾고 계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에게 무엇을 원하고 계신지를 알게 되었고, 그의 인생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인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절망하고 방황하다가 속절없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허무주의와 염세주의가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면 그 인생이 바뀝니다. 목적이 있고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인생으로 바뀝니다. 사명을 위해서 사는 인생으로 변화됩니다. 이것이 바로 지성소 신앙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서 살아가는 재림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은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보낼 사람을 찾고 계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지성소를 열어 보이신 것은 이사야 한사람만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를 통하여 절망하고 낙담하는 모든 당신의 백성들이 하늘 지성소에 그들의 믿음을 향하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백성들에게 하늘 지성소의 기별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사야는 그 기별, 지성소에서 받은 기별을 목숨을 걸고 전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사명자, 기별자로 살았습니다.
우리에게도 같은 사명이 주어졌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늘 지성소에 계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기별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늘 지성소를 열어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 위대한 속죄와 구속의 기별을 증거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성소의 기별을 깨달은 재림성도의 삶입니다.
일곱째, 이사야는 하늘 지성소에서 자신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8절 하단을 다시 보십시오.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사업에, 그 귀한 사명에 완전히 바쳤습니다. 지성소의 기별에 바쳤으며, 지성소에 계신 예수님께 바쳤습니다. 이것이 지성소에 들어간 사람의 참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요구에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지성소를 경험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이사야처럼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주님 앞에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그분 앞에 산 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지성소를 경험한, 지성소에 들어간 재림 성도의 진정한 모습이요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기별을 위하여 살며, 주님을 위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우리의 재물을, 우리의 시간을 가장 가치 있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제 지성소에 계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보내십니다. 우리는 가야합니다. 지성소에서 깨달은 기별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지성소에서 깨달은 그분에 대한 복음을 가지고 아직 절망가운데 살고 있는, 인생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로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 담대한 용사들이 됩시다. 우리의 믿음의 닻이 우리의 사랑하는 주님, 그분의 가슴에 단단히 박혀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어떤 시험에도, 어떤 유혹에도 승리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교회에서 우리의 일터에서 우리의 소망이신 예수님, 희생 제물이시며, 중보자이시며, 심판장이신 예수님, 마침내 여러분과 저를 데리러 속히 이 땅에 오실 그분을 증거하며 살아갑시다. “웃시야 왕의 죽던 해”와 같은 이 시대를 이사야처럼 승리하며 살아갑시다.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재림 성도로 살아갑시다.
다시 오시는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
박 상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