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라벨 (Maurice Ravel, 1875년 3월 7일∼1937년 12월 28일)은 프랑스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음악원 선배인 클로드 드뷔시와 함께 20세기 초 인상주의 사조의 대표적인 작곡가이다. 관현악곡인 볼레로로 유명하며, 무소르그스키가 작곡한 피아노곡인 전람회의 그림의 관현악 편곡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오케스트레이션은 다채로운 음색과 악기의 사용으로 유명하다.
그는 프랑스 바스크 지방의 Ciboure에서 바스크계의 어머니와 스위스인인 아버지로부터 태어났다. 열 네살이 되자 그의 아버지는 그의 음악적 재능을 키워 주기를 원하여 라벨을 파리 음악원으로 보냈다. 피아노와 작곡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재학 중 발표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현악 4중주곡 바장조>에서 새로운 경향을 보여 눈길을 끌었다. 거기에서 그는 ‘아파치’라는 작곡가 학생들의 모임에 가입했는데, 이는 술을 마시고 여성들에게 집적대는 모임으로 유명했다.
파리 음악원에서 라벨은 가브리엘 포레에게 음악을 배웠다. 음악원에 있는 동안 로마대상을 받으려고 했지만 받지 못하였는데 그가 충분한 재능이 있었음에도 대상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그는 음악원을 떠났다. 라벨은 클로드 드뷔시에게 영향을 주었고, 재즈와 아시아의 음악, 그리고 유럽 전역의 민요와 스페인 음악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라벨은 종교를 가지지 않았으며 무신론자로 보인다. 그는 바그너의 음악처럼 공공연히 종교적인 색채를 부여한 음악을 싫어했으며, 대신 고대 야화에서 음악적 영감을 얻는 편이었다.
1932년에 심한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 그의 건강은 악화되었다. 1937년에 건강을 회복하기 위한 수술을 받았지만 실패하여 사망했다.
이고리 스트라빈스키는 라벨의 복잡하고 정교한 음악에 빗대어 그를 “스위스 시계 장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라벨은 결혼을 하지 않았고 양성애자였기 때문에 오랜 관계를 맺은 남자가 있었다. 또한 파리의 사창가를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그는 불타오르는 애국심에 군대에 지원했지만 몸이 약했기 때문에 프랑스 부상병을 옮겨주는 운전사 생활을 하였다.
라벨은 인상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 중 하나이지만, 그의 음악은 환상적인 묘사만을 강조하는 드뷔시와는 달리 프랑스 고전주의의 틀을 지키며 근대적인 감각을 발전시킨 것으로, 정교하고 치밀하다는 평을 듣는다.
1937년에 모리스 라벨이 죽자, 그의 형제 에두아르가 그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그는 Montfort-l'Amaury의 집을 박물관으로 바꾸었다. 1954년에, 에두아르는 교통사고을 당하고, 잔느 타베른이란 간호사가 그를 간병했고 그녀의 남편, 알렉산더가 에두아르의 기사가 되었다. 1956년에 에두아르의 아내가 세상을 뜨고 타베른 부부는 Saint-Jean-de-Luz에 있는 에두아르의 집에 살게 된다. 라벨의 동생 에두아르는 파리시에 80%의 저작권을 양도하기로 결심했지만, 마음을 바꿔 잔느를그의 유증 수혜자로 결정했다. 1960년, 에두아르가 죽고 모리스의 조카들이 유산 착복을 이유로 타베른 부부에게 소송을 걸었지만 실패한다. 1964년, 잔느가 세상을 뜨면서 그녀의 남편 알렉산더가 볼레로의 저작권료, 3억 6천만 프랑을 상속받게된다. 이렇게 SACEM의 법률 이사이었던 쟝 자크 르모안이 사직한 후 변호사가 된 후 등장하게 되었다. 그는 알렉산더와 결탁하고 그의 법률 고문이 되었다. 그들은 출판사에게 매우 유리한 계약서를 개정하기 위해 모리스 라벨의 작품 계약권자인 듀랑 출판의 사장, 르네 도망쥬를 고소했다. 르네 도망쥬는 당시 80세 이었기 때문에 합의로 해결하고 결국 작품의 모든 저작권과 작품 계약서를 쟝 자크 르모안에게 양도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1971년에 ARIMA (국제 저작권 관리 매니지먼트)를 지브롤터에 설립했고, 저작권 계약(앵글로색슨의 법률이지 프랑스 법률에는 존재하지 않음)을 근거로, 알렉산더는 그가 가지고 있던 저작권의 절반 이상을 ARIMA에게 양도했다. 알렉산더의 두 번째 부인의 딸, 에블린 펜 드 카스텔에 따르면, ARIMA는 모리스 라벨 작품에 대해 모든 저작권의 독점 피양도인이고 그 연간 소득은 40년 전부터 2백만 유로일 것이라고 한다.
지휘 : 발레리 게르기예프(Valery Abisalovich Gergiev, 1953년∼ )
러시아의 지휘자.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을 맡았다가 2013년부터 뮌헨 필하모닉 상임지휘자로 부임했다. 또한 마린스키 극장,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백야 축제의 예술 감독을 맡고 있다. 젊은 시절 사이먼 래틀, 정명훈과 더불어 일본잡지 '음악의 벗'에 세계를 이끌어갈 젊은 유망주 지휘자 3인에 꼽혔다. 보통은 손으로 지휘를 하지만 이쑤시개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이쑤시개를 지휘봉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손이 심심할 때 이쑤시개를 들고 지휘한다는 말도 있다.)
1953년 5월 2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 블라디캅카스에서 자랐다. 1972년부터 1977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공부했다.
1978년 키로프 오페라(현 마린스키 오페라)에서 유리 테미르카노프 밑에서 부지휘자로 활동했다. 그곳에서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전쟁과 평화'로 지휘자로서 데뷔했다.
1981년부터 영국에서 데뷔하던 1985년까지 아르메니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지냈고, 1991년에는 뮌헨에서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단과 함께 모데스트 무소륵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를 지휘했다. 그의 첫 서유럽 오페라 극단 지휘였다. 같은 해에 미국에서의 첫 공연을 가졌는데,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단과 함께 '전쟁과 평화'를 지휘했다. 또한 많은 수의 음악 축제에도 참여했는데, 그 중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백야 축제가 있다.
1988년에는 마린스키의 상임지휘자 겸 음악감독의 자리에 올랐고, 객원 지휘자로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첫 공연을 가졌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두번째 공연은 2004년에 있었는데,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교향곡을 지휘했다. 2005년에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열다섯번째 수석 지휘자로 지명되어 2007년에 3년간의 임기를 시작했다.
2015년에 뮌헨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에 올랐으며, 2016년 5월에는 ISIS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을 기리는 'Praying for Palmyra'라는 공연에 참가했다.
Maurice Ravel Bolero London Symphony Orchestra Valery Gergiev
첫댓글 [라벨 작곡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Pavane For A Dead Princess)]
- 연주 : Arturo Sandoval & Chris Botti (Fusion Jazz)-
https://youtu.be/_QYTmE_reC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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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반느 16세기 르네상스시대 유럽에서 유행한 완만한 2박자 계통에 춤곡이라고 나옵니다. 척 맨지온이 후르겔로 Feel so Good 연주하던 모습이 생각이 납니다. 잔잔한 재즈곡 감사히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