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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닫힌 문들아 열릴지어다./마가복음 7:31-37
(설교자: 마경훈 목사 비전교회)
자폐증을 아시지요? 자기를 닫고 사는 것을 자폐증이라고 합니다. 자폐증이 있는 사람은 자기의 세계에 갇혀 사는 사람입니다. 자폐증은 현저한 증상이 있습니다. 거의 다른 사람들과 눈 맞춤을 하지 않습니다. 말을 걸어도 반응이 없습니다. 얼굴에 감정표현이 없습니다. 자기가 관심을 갖는 일 외에는 다른 세계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자폐증 환자의 인생의 피폐함은 말로다 할 수 없습니다. 자기만 피폐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 자폐증을 앓는 사람이 있으면 가족들 모두가 피폐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정신적인 자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자폐증이 심한 시대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마음을 닫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적으로 피폐해지고 있는데도 하나님에게는 관심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닫힌 것은 불행입니다. 오늘날 북한의 가장 큰 문제는 세상에 대해서 닫혀있다는 것입니다. 북한도 개방하면 살길이 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도울 것이고, 세계가 도울 것입니다. 통일이 되면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어려울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지하자원이 7천조나 되니까 박근혜 대통령의 말처럼 통일은 대박이 될 것입니다. 북한도 개방만하면 살길이 있는데 북한 정권 때문에 개방이 안 됩니다.
북한이 폐쇄되어 있는 것은 경제적으로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영적인 것입니다. 어느 교수님이 북한에 갔습니다. 남녀 학생이 껌딱지처럼 붙어서 자기 뒤를 따라다니더랍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들과 밤을 지세며 이야기 할 시간이 있었습니다. 교수님이 물었습니다. “성경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어요?”, “못 들어 봤는데요.”, “한 번 소개해 볼까요?”, “해 보세요.” 그래서 교수님이 “성경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책이고, 세계각국어로 번역되었고, 세상에서 으뜸가는 베스트셀러인데 거기에 보면 예수란 분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고 사람들의 마음이 달라지고 환경도 달라집니다. 예수를 믿으세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북녘 땅 이천오백만 우리 동포가 아직도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북한이 경제적으로 살고 또 영적으로 살려면 먼저 닫힌 문을 열어야 합니다.
왜 김대중 대통령께서 햇볕정책을 쓰셨습니까? 결과야 어떻든 일단은 그들의 닫혀진 마음을 열어보고자 함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의도는 좋았지만 부정적인 결과가 나오고 말았습니다.
통일은 영적전쟁입니다. 그들의 배후에서 마귀가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북한 전국에는 3만 8천개의 김일성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그 뒤에서 마귀가 경배를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북한을 열기 위해서 우리들의 기도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북한을 열어주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에는 개인적으로 닫힌 인생을 살고 있는 불쌍한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귀먹고 말 더듬는 자였습니다. 그는 귀가 닫혔고 입이 닫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안타깝게 생각한 사람들이 그를 주님에게로 데리고 와서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주님은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서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습니다. 그리고 “에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베다’는 애기를 받으라는 말이 아니라 아람어로 ‘열리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있고 난 후에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풀려 말이 분명해졌습니다. 이 일로 사람들은 주님을 널리 전파하였고 듣는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닫힌 귀가 열리기를 축원합니다. 상대가 말하는 소리만 듣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기를 바랍니다.
미국 동부의 한 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며 설교 사역도 하는 토니 캄폴로(Tony Campolo)라는 교수님이 계십니다. 이분이 한번은 하와이로 휴가 여행을 떠났습니다.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는 한 밤중이었는데 잠도 오지 않고 배가 고파서 밤 2시경에 해변 가에 있는 한 엉성한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지저분한 식당이었습니다. 간단한 음식과 커피를 주문하고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갑자기 식당 문이 열리더니 한 눈에 보아도 거리의 여인들처럼 보이는 7-8명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들은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그중에 한 여인이 갑자기 “야, 내일이 내 생일이다. 벌써 서른아홉 살이나 먹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당장 다른 여인들이 구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네 생일 축하라도 해주고 생일 노래라도 부르고 케이크라도 사달란 말이냐. 네 신세에 무슨 생일 타령이냐” 그러자 이 여인은 갑자기 안색이 변하더니 “내가 언제 너희들 보고 생일 파티 해달라고 그랬냐. 내일이 내 생일이란 소리도 못하냐. 너희들 왜 나를 무시하는거냐”고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엔 욕설이 오가고 싸움판이 벌어졌습니다.
이 광경을 한 동안 지켜보던 캄폴로 교수는 한 여인의 “내일이 내 생일인데”라는 단순한 말에 그냥 ‘축하 한다’고 한마디 받아 넘기면 될 상황이 무엇 때문에 싸움판으로 번져갔는가를 잠시 생각해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론은 명백해 졌습니다. 이 여인들의 내면에 존재하는 상처들이 이들로 하여금 단순한 ‘생일 축하’ 한마디도 불가능하게 그들의 마음을 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닫힌 마음은 그렇게 비극적인 것입니다.
식당 주인의 만류로 한 바탕의 거리의 여인들의 소란이 끝나고 이들이 자리를 뜬 후, 캄폴로 교수는 식당 주인에게 이 여인들이 자주 식당에 오느냐고 물었습니다. “매일 이 시각에 오지요. 단골이긴 하지만 골치 아픈 손님들이지요” 그러자 캄폴로 교수는 식당주인에게 “제가 실은 아이디어 하나가 생각났는데 내일 밤 생일을 맞은 그 여인의 생일잔치를 여기서 준비하면 안될까요?”라고 제안을 하자 식당 주인 부인이 “아까 그 여자이름은 아그네스이고 마음은 아주 착한데 불쌍한 여자입니다”라고 말을 하며 너무 좋은 아이디어라고 동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새벽 3시 반에 이 엉성한 식당에서 아그네스의 생일잔치가 열렸습니다. 식당 주인은 미리 거리의 여인 몇에게 소식을 알렸고 그래서 문자 그대로 인근 모든 거리 여인들이 식당을 빼곡하게 채운 가운데 아그네스가 입장하자 “Happy Birthday!”라고 노래를 부르며 환영하자 이 아그네스라는 여인은 식당 입구에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서버렸습니다. 캄폴로 교수는 지금까지 한 사람이 그런 표정으로 놀란 모습을 처음 보았다고 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아그네스, 생일 축하합니다.” 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그 식당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눈은 흥건하게 젖어들고 있었고 아그네스는 엉엉 울고 있었습니다.
이제 케이크를 짜르라고 재촉하자 아그네스는 “부탁이 있는데 이 케이크를 내가 집에 가지고 가서 얼마동안 간직하면 안될까요?”라고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동의하자 그녀는 케이크를 집에 갖다 놓고 곧 돌아오겠다고 하더니 무슨 거룩한 성물인양 케이크를 가지고 식당을 나섰습니다. 그녀가 식당을 나서는 모습을 사람들은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식당은 갑자기 깊은 침묵 속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이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던 순간 캄폴로 교수는 다시 일어서서 “제가 아그네스의 행복과 여러분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고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그날 밤 가장 교회 같지 않은 곳에서 가장 경건한 감동의 기도가 나누어 졌고 사람들은 눈은 퉁퉁 부어올랐습니다. 캄폴로 교수는 그날 거기서 상하고 닫힌 마음들이 활짝 열리는 치유의 기적을 보았고 그 엉성한 식당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나중에 캄폴로 교수는 한권의 책을 쓰게 됩니다. 책의 제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파티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은혜와 사람들의 마음의 소리를 듣는 귀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를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계 3:22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요한계시록 2-3장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일곱 번이나 이 말씀을 반복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왜 주님께서는 그런 말씀을 일곱 번이나 반복하셨을까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고 사는 교인들이 많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사는 것입니다. 요 5:25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생명을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설교를 들어야 하며, 성령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원망하고 불평하지 말고 그 일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에는 답이 있습니다.
어떤 부부가 아이가 없어서 하나님께 아이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정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것도 무려 16년 동안이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16년 만에 기도의 응답을 받아서 아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게도 기도하며 기다리던 아이를 낳고 보니까 불구였습니다. 정상적인 아이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 부부는 너무나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이 부부는 아이를 낳아 놓고는 별의별 생각을 다 해보았습니다. ‘우리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 하면서도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고, 어떻게 생각하면 서운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기도응답이라고 여겼는데 내 생각과 다른 결과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살다가 이런 경우를 당할 때가 많습니다. 믿음으로 살았는데, 기도하면서 일했는데 내가 원하는 방향과 다른 곳으로 가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당황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아니 종종 있는 것이 아니라 자주 그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목사인 저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아니면 설교를 통해서 그것도 아니면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산다고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이런 상황이 되면 고민하게 됩니다. 여기에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 같긴 한데, ‘과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거기에 대한 응답을 듣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뜻을 감추시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들을 귀가 막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적인 귀머거리로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알려주심에도 그것을 듣지 못하고 답답하게 고민하며 살아갑니다.
이 부부도 근심하면서 “하나님, 이게 웬일입니까? 16년 동안 기도해서 얻은 아이인데 왜 불구여야 합니까?” 그렇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음속에 감동이 왔습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음성이었습니다. 감동된 마음속에 깊이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내가 이 불구아를 누구에게 맡겨야 사랑을 쏟아가며 키워줄 수 있을까 하고 16년 동안이나 찾다가 너희 부부에게 맡겼노라. 너희 부부처럼 기도하고 준비한 사람들이라면 이 아이에게 온갖 사랑과 정성을 쏟아 키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란다.”하는 음성이었습니다. 이 부부는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서야 일순간에 의심과 불평이 사라지고 자신들에게 이 아이를 주신 것에 감사하며 아이를 키웠다고 합니다.
헬렌켈러 여사는 삼중고를 앓은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벙어리요, 소경이요, 귀머거리였습니다. 헬렌켈러는 “만일 삼일동안만 볼 수 있다면 그 열린 눈으로 높은 하늘을 쳐다보고, 아래 피어있는 빨간 꽃을 보리라 그리고는 열린 눈으로 아! 파랗구나 아! 아름답구나”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열린 귀로 들으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 자기를 사랑하시는 예수의 음성을 듣고 싶다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열리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입도 열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의 입을 열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까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신 4:7입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찬양의 입을 열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찬양을 받으시려고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사 43:21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은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크게 찬송해야 합니다. 시 145:3입니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우리는 측량할 수 없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독일의 어느 조그만 교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찬양대원들이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찬양대원들이 찬양 연습을 하다가 잠간 쉬고 있었습니다. 어린아이가 와서 지휘자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저도 찬양대에 넣어 주세요.” 지휘자는 어이가 없어서 타이르며 말했습니다. “얘야! 찬양대는 어른만 하는 것이란다. 어린아이는 받아 드릴 수 없어. 커서 어른이 되면 오거라.” 그러나 어린아이가 말했습니다. “지휘자님! 주님이 저를 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왔어요.”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왔다는 말에 지휘자는 감동이 되어서 찬양대에서 찬양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꼬마 하나가 어린들 틈에 섞여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찬양의 입이 열리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전도의 입을 열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들에게 임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전도하고 선교하라고 임하셨습니다. 행 1:8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상명령’이 있습니다. 전도의 명령입니다. 마 28:18-20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지상명령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축복의 입을 열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축복의 입이 열려야 하는 이유는 인생은 말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잠 12:14을 보겠습니다. “사람은 입의 열매로 말미암아 복록에 족하며 그 손이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 여기서 ‘복록’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토브’라는 말인데 뜻은 ‘좋은 것’입니다. 좋은 것을 누리며 살려면 말을 잘해야 합니다. 말이 씨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말에 열매를 주시는 분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은 주님을 만나서 귀가 열리고 입이 열렸습니다. 주님을 만나면 열리고 풀리는 역사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귀도 열어주시고 입도 열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막힌 문제도 사업도 직장도 가정도 열리고 풀리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에게는 열고 닫는 권세가 있으십니다. 우리 주님은 닫힌 문을 열어주시는 분입니다. 주님이 여시면 닫을 사람이 없습니다. 또 우리 주님은 열린 문을 닫으시는 분입니다. 우리 주님이 닫으시면 열 사람이 없습니다. 계 3:7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이제 설교 후반부는 주님께서 닫힌 귀를 열어주시고, 맺힌 입을 풀어주신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 주님은 어떤 분인지 나누겠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개인적으로 만나주시는 분입니다.
33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주님은 그를 따로 만나셔서 그의 막힌 귀를 열어주셨고 맺힌 혀를 풀어주셨습니다.
신앙생활은 주님 앞에 홀로서야 합니다. 주님과 우리는 개인적인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홀로 선 단독자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주님과 일대일로 만나야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때문에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주님이 완성하신 구원, 주님이 만들어놓으신 천국, 주님 때문에 가능하게 된 하나님과의 부자관계, 주님이 약속하신 복 등 우리는 주님 때문에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누리려면 주님과 개인적인 만남이 유지 되어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는 공동체로 함께 예배합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함께 예배 하는 이 공동체 안에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개인적으로 주님과 만나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의 만지심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지만 구원을 확신할 수 없고,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생활을 모르는 분들이 있습니다. 주님과 개인적인 만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하나님을 잘 섬겼던 분들이 신앙이 떨어지고 교회와 멀어지고 세상과 가까워지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주님과 개인적인 접촉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는 더 예배드리기를 힘쓰고, 개인적인 기도생활에 집중하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시간은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기 때문에 예배에 힘을 써야 합니다.
저는 지난 주중에 우리 지역에 계시는 목사님에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문정동에서 목회를 하시다가 목회가 어려워서 마천동으로 이사를 하게 되셨습니다. 그런데 마천동에 와서도 목회가 되지 않으니까 교회를 정리하려고 하셨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교인들이 좀 있어서 교회 문을 닫을 수가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새벽기도는 전도사님에게 맡기고, 수요예배는 드리지 않고 등산을 다녔습니다. 등산을 얼마나 많이 다니셨는지 무릎 수술까지 하셨습니다. 목사님의 유일한 기도제목은 교인들이 교회를 빨리 떠나서 교회 문을 속히 닫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사님 한 분이 교회 등록을 했는데 그 집사님이 예배를 잘 나오더랍니다. 그 집사님이 하루는 목사님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왜 수요예배를 드리지 않으세요? 저는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담임목사님께 ‘컵을 들 수 있는 힘만 있다면 예배에 참석하라’고 배웠습니다. 저는 목사님이 수요예배를 드리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수요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새벽기도를 하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집사님을 지도해주셨던 목사님은 참 훌륭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컵을 들 수 있는 힘만 있다면 예배에 참석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주님을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연인은 단 둘만의 만남을 원합니다. 여러 사람과 함께 있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단 둘이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시간을 원합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따로 만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2. 주님은 우리의 아픔을 아시는 분입니다.
본문 3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보시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습니다. 여기서 탄식은 그냥 단순한 동정의 탄식 정도가 아니라. ‘깊은 탄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고통을 자신의 온 마음으로 함께 느끼고 계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슬퍼할 때 함께 슬퍼하시고 우리가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사람은 남의 일을 내 일처럼 생각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나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데 남들은 너무나 무정하게 반응합니다. 심지어 가족들도 무정할 때가 많습니다.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람은 그런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사람을 보지 말고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아픔을 보시고 깊이 탄식하시는 분입니다.
찬송가 96장은 우리를 체휼하시는 주님을 잘 표현한 찬송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 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 예수님은 누구신가/ 약한 자의 강함과/ 눈먼 자의 빛이시며/ 병든 자의 고침과/ 죽은 자의 부활되고/ 우리 생명 되시네...”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시라는 고백이 담긴 내용입니다. 그 중에 오늘 주제와 관련된 내용이 1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주님은 우리의 위로자이십니다.
할아버지 한 분이 암 진단을 받습니다. 그런데 암 진단을 받은 그 날부터 이 할아버지가 성격이 갑자기 난폭해 지셨어요. 식구들과 주변 사람들에게도 욕을 퍼 붓고, 아무도 만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간호사와 의사들에게도 포악하게 대했습니다. 가족들은 어떻게 도와야 하느냐를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병실에 친구들을 들여보냈습니다만 친구들도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소리를 내서 쫓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또 사람과 절친하게 지냈던 은사들을 보내 보았지만, 그것도 소용이 없었어요. 목사님을 보냈더니 목사님도 욕만 먹고 쫓겨났습니다. 상담 전문가를 들여보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그 동네에서 이 할아버지가 가끔 만나던 동네 어린이 꼬마가 하나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에 왔어요. 식구들이 반 호기심으로 그럼 네가 들어가서 할아버지 만나 봐라 들여보냈어요. 그런데 이, 삼십 분 어린 소년이 할아버지를 만나고 나왔는데, 이 할아버지가 변한 거예요. 태도가 갑자기 누구러지고 부드러워지고 사람들도 만나시고 얘기도 하시고 변했어요. 하도 이상해서 그 어린 소년을 붙들고 사람들이 물어 보았습니다. “너, 할아버지하고 무슨 얘기를 했니?”, “아무 얘기 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할아버지하고 그 이 삼십 분이나 같이 있었는데 그때 너는 도대체 뭘했니?”, 소년이 대답합니다. “저요, 할아버지하고 같이 울었어요.” 이 할아버지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면서 함께 우는 순간, 더불어 껴안고 울던 그 눈물 속에서 이 할아버지의 아픔 과 질병이 치유된 것입니다.
탈무드에 보면“"이웃들과 더불어 고통을 함께 느낄 수가 있을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이웃의 고통을 치료하는 도구로 쓰임을 받을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능력으로만 치유하신 것이 아닙니다. 상대의 고통을 함께 느끼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아픔을 아시는 분입니다.
3. 주님은 우리를 만져주시는 분입니다.
본문 33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이 사람을 따로 데리고 가셔서 그의 손가락을 넣고 침을 뱉어서 그의 혀에 손가락을 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친히 만져 주신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스킨십에 목말라 하는 고독한 영혼들입니다. 누가 이런 영혼들을 만져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은 아무도 만지기를 기피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먼저 손을 내미셨던 분이십니다.
주님이 터치하는 사람마다 치유가 일어낫습니다. 주님이 나변환자를 만지시니 나병이 치유 되었습니다. 주님이 시각장애인의 눈을 만지시니 눈이 치유 되었습니다. 며칠 전 미국에서 어느 청년이 게이바에 총을 난사해서 49명이 사망하고 53명이 다쳤습니다. 그가 주님을 만났더라면 그가 주님의 만지심을 경험했더라면 그는 그렇게 불행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1960년대 미국의 청년들은 허무주의에 빠져들었습니다. 많은 미국 청년들이 생의 의욕을 잃고 머리를 기르고 히피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마약의 환각에 빠져서 거리를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미국의 지도자들이 미국은 이제 미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 가운데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소위 ‘예수 운동’ 혹은 ‘예수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갑자기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을 체험하며 찬송을 부르면서 교회와 하나님의 품으로 무리를 지어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 났는냐?고 묻자 그들은 그들에게 일어난 변화를 한 노래로 대답했습니다. 그때 탄생한 유명한 가스펠이 있었습니다. ‘He touched me...’로 시작하는 찬송입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그가 나를 만지셨네/ 오 내 영혼에 넘쳐나는 이 기쁨/ 무엇인가가 일어났다네/ 난 그걸 아네/ 그가 나를 만지셨고/ 나를 온전케 하시었다네”
저는 기도합니다. 주님이 저를 만져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여러분을 만져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이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과 사업과 사역을 만져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이 이 나라를 만져주시고 미국을 만져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나를 만져주시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만지시면 여러분의 닫힌 인생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에바다의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