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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배우였던 송광호가 이름을 알리게 된 유명한 영화 ‘넘버3’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송광호는 조직폭력배로 열연하며 특유의 말더듬이 연기로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 영화에서 가장 유명했던 말더듬이 연기는 “배..배..배신 배... 배... 배반이야”라는 대사였습니다. ‘배신자, 배반자를 복수하겠다’는 의지를 특유의 말더듬으로 표현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배신’과 ‘배반’은 둘 다 ‘믿음을 저버리는 행위’ 의미하는 말이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배신’은 ‘믿음이나 의리를 저버림’이라는 뜻의 단어이고 ‘배반’은 ‘믿음과 의리에서 돌아선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크게 차이 나지 않아 동일한 의미로 쓰이지만 ‘배신’은 믿음이나 의리를 저버리는 행위로 주로 개인적인 관계에서 쓰이는 말이고 ‘배반’은 배신과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지만 어떤 조직과 어떤 모임에서의 결별, 돌아섬을 뜻하는 의미라고 합니다. ‘배신’ 은 연인이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우는 것, 친구가 비밀을 털어놓는 것, 동료가 팀 프로젝트를 방해하는 것 등으로 ‘배반’은 주로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혼란과 분열을 일으키는 행위를 뜻한다고 합니다. 군인이 조국을 배신하는 것, 정치인이 선거 공약을 어기는 것, 기업이 고객을 속일 때는 ‘배신’이라는 단어보다 ‘배반’이 더 적합하다고 합니다. “그는 내가 가장 믿었던 친구였는데 결국 나를 배신했다”라고 쓰고 배반의 경우는 “그의 행동은 국가에 대한 배반 행위다”라고 쓰는 것이 그 좋은 예입니다.
오늘 본문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배신의 순간’을 기록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혀갈 때, 그리고 예수님께서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심문을 받을 때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의 행동은 인간적인 시각에서 볼 때 어떻게 그렇게 배신할 수 있을까? 어떻게 배반자의 삶을 선택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전율을 일으키는 배신, 배반의 장면을 선사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살펴 보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 어떤 유혹이 예수님을 배신하고 배반자의 삶을 살아가게 만들게 되는 지를 발견하고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을 지키며 주님만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지를 깨닫고 참 올바른 신앙으로 주님만 믿고 의지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을 배신하며 배반자가 되도록 만드는 유혹, 첫째는 세상 권력과 명예에 대한 욕심입니다.
마태복음 26장 47절입니다.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님께서 자신이 잡히실 것을 말씀하실 때 바로 그 순간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를 잡으려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그들이 가진 기득권, 그들이 가진 권력에 예수님이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장로들, 그리고 그들이 보낸 군사들은 자기 권력과 권위를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이들은 종교지도자들이라 말하면서 오히려 종교를 내세워 세상 권력에 대한 집착이 컸던 사람입니다. 한 사람의 생명도 자신의 기득권, 자신의 권력에 방해된다면 어떻게든 없애버리려는 악한 사람들입니다. ‘탐심’은 다른 사람의 소유에 대한 욕심을 의미합니다. 헬라어로는 ‘더 움켜쥔다’는 뜻입니다. 프랭클린은 “배부른 것이 모든 악의 어머니”라고 말했습니다. 이 땅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를 내세우며 자신의 가진 힘을 지키려고 합니다. 결국 이들은 세상적 욕심 때문에 말씀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13장 22절입니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알듯이 예수님께서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한 사람들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열매 맺는 사람들을 비유로 말씀하신 성경 본문 중 한 부분입니다. ‘씨앗이 돌밭에 떨어진 것’, ‘씨앗이 가시떨기 밭에 떨어진 것’, ‘씨앗이 좋은 밭에 떨어진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씨앗이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말은 사람들이 말씀을 받았음에도 세상의 유혹으로 인해 말씀의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말씀의 열매를 맺지 못했던 이유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혔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그리고 그들에게 속한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염려와 재물에 대한 집착과 유혹에 빠져있으면 말씀을 들어도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옛날 어떤 사람이 세상에 매인 끈을 끊으려고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수도자의 길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수도원에 들어가면서 나중을 위해 조금의 재산을 남겨 비밀장소에 숨겨두었습니다. 그 사람이 스승을 찾았을 때 그 스승은 그의 내면을 간파하고 “그대가 진정 수도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지금 마을로 내려가 고기를 조금 사서 그대 벗은 몸에 달아매고 다시 이 곳으로 오게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는 스승의 지시대로 자기 몸에 고기를 달고 산길을 되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몸에 달린 고기에서 피냄새가 주위로 퍼졌고 냄새를 맡은 들개와 새들이 그에게 덤벼들었습니다. 그는 들개들과 새들에게 대항하며 도망쳤으나 그것들은 끝까지 따라붙었습니다. 아무리 대항하며 도망쳐도 소용없었습니다. 들개들과 새들의 계속되는 공격에 그는 많은 상처를 입었고 사력을 다해 도망치느라 힘이 빠졌습니다. 그제야 그는 들개와 새들이 자신에게 덤비는 이유가 자신 몸에 붙어있는 고기인 것을 깨닫고 그 고기를 던져 버렸습니다. 그러자 더 이상 짐승들은 이 사람에게 달려들지 않았고 자신 몸을 지키며 편안히 쉴 수 있었습니다. 그가 스승에게 돌아와 상처투성이가 된 몸을 보였고 스승은 “세상을 버렸다고 말하면서 조금이나마 남겨놓은 세상의 염려, 세상에서 살아갈 자기 돈에 집착하는 자에게는 마귀가 이처럼 공격한다네. 모든 것을 완전히 벗어버린 진정한 빈 몸이 되게”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겠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권력, 세상의 돈, 세상의 지식등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신앙의 걸림돌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 15절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돈, 권력, 명예, 가족, 지식, 건강...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어떤 집착을 가지고 살아갑니까? 결국 우리가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많은 염려와 걱정, 집착과 욕망은 우리를 진정한 쉼을 빼앗고 신앙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세상 것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하나님나라는 나에게서 멀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움켜진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천국은 멀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신 예수님 말씀의 의미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집안에서 쓰는 물건이 하나 많아질 때도 우리는 그 물건 하나하나 어떻게 써야 할까? 고민하며 번뇌가 늘어납니다.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물건이 있지만 그것을 가지지 않으면 그냥 불편해도 살아갑니다. 그러다 그 물건을 가지게 될 때 물건의 유지, 관리, 보수문제와 사용방법에 대한 연구로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천국복음을 생각할 시간보다 세상의 물건을 더 잘 써보려고 고민하는 시간이 늘어납니다. 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가진 모든 기득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뭔가를 세상에서 더 누리다 보면 그 누리고 있는 것을 내려놓기 힘듭니다. 포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가진 어떤 권력이나 기득권이 예수님을 따르는데 방해된다면 기꺼이 세상 권력이나 기득권을 내려놓고 예수님만 따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을 배신하며 배반자가 되도록 만드는 유혹, 둘째는 세상 물질에 대한 욕심입니다.
마태복음 26장 48절입니다.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이 본문에서 ‘예수를 파는 자’라고 표현한 것이 ‘가룟 유다’를 의미하는 줄 우리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였지만 ‘은 삼십’이라는 돈을 받고 예수님을 대제사장에게 넘겨줄 기회를 찾고 있던 가룟유다가 이제 때가 되어 대제사장과 장로에 속한 무리들을 이끌고 나타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는 사람을 위해 자신이 예수님께 유대식의 인사인 입맞춤을 할 때 그 분이 예수님이라며 그를 잡아서 끌고 가도록 미리 전략을 짰습니다.
사랑과 존경의 표시인 인사가 배반과 폭력의 모습으로 변질되는 순간입니다. 가룟유다는 자신이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끝까지 위장했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던 상황 속에서도 그는 예수님에게 안부를 전하며 인사를 하는 척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을 존경하고 인사하는 양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 행동은 대제사장이 데려온 무리에게 누가 예수님이신지를 알려주기 위한 행위였습니다. 우리는 세상 가운데 신앙을 가진 척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인 척하지만 결국 내 물질적 욕심으로 예수님을 세상에 팔고 있는 것은 아닌 지 우리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예전에『나를 팔아 예수를 사라』라는 특강에서 장경동 목사님께서 ‘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소유한다면 그것이 인생의 성공이다’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자신을 산 사람입니다. 방금 전 말씀드린 우리가 참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나를 팔아 예수를 사야 하는데 오히려 예수를 팔고 자신을 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도 이렇게 가룟 유다처럼 나의 이득을 위해 신앙을 파는 부분은 없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과연 내가 나를 버리고 예수님을 샀는 지 예수님을 팔아 나의 이익을 취하고 있는 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여러 형태의 노예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일의 노예’가 있는가 하면 ‘돈의 노예’가 있고, ‘술의 노예’가 있는가 하면 ‘사치와 허영의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더 비참한 것은 이런 것에 노예가 되어 있으면서도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자유가 뭔지 모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수단이 오히려 우리의 주인인 양 우리가 그것에 사로잡혀 노예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과 지옥비유를 하실 때 거지가 천국에 가 있고 부자가 지옥에 가 있는 비유를 종종 들으셨던 이유를 우리는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소유한 것이 많으면 천국 가기 어렵고 우리가 내려놓고 가진 것이 없으면 천국 가기 쉬워진다는 사실에 대해 들을 귀 있는 사람은 깨닫게 되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소망합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재물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그것의 노예가 되고 재물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진다면 그것보다 더 한 저주는 없을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돈이면 다 되고 돈이 많으면 행복한 줄 압니다. 내가 불행한 이유는 재산이 없어서 그렇다고 단정해 버리고 어떻게든 돈되는 일이라면 자존심을 팔아버리고 영혼까지 내다 파는 세상입니다. 사람은 사람다워야 합니다. 살아갈 때 필요한 돈이 있어 그것을 위해 수고하고 노력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고 어쩌면 숭고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돈, 재물의 유혹에 묶여 돈 때문에 인생의 의미, 인간의 존재가치가 파괴된다면 그것은 저주입니다. 인간은 절대 재물 앞에 굽신거려서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의 가룟 유다는 ‘은 삼십’이라는 유혹에 넘어져 예수님을 팔아넘겼고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신앙과 재물이 충돌될 때 어떻게 행동하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순간과 생계의 상황이 충돌될 때 어떤 것을 내려놓으십니까? 저와 여러분은 ‘나는 절대 가룟 유다처럼 돈 때문에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아’라고 단정할 수 있습니까? ‘생계의 문제가 생겨도 나는 생계보다 예수님을 더 먼저 섬길거야’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돈과 예수님을 선택하는 순간에도 재물보다 주님을 선택하며 주님을 따를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님을 배신하며 배반자가 되도록 만드는 유혹, 셋째는 자기 목숨과 세상의 삶을 더 가치있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6장 56절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붙잡혀 가지 않도록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지키려는 듯 행동합니다. 대제사장 하인의 귀를 칼로 내리쳐 떨어뜨린 베드로같이 무력으로 현 상황을 막아보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예수님께서는 그 행위에 대해 책망하셨고 순순히 예수님을 잡으려고 온 사람들에게 끌려가십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지키려고 대담하게 무력투쟁했던 베드로이지만 결국 오늘 본문을 보니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인간의 결심이 자신의 이성과 상식에서 납득될 때는 자기의 모든 힘을 써서 밀어 붙여 보지만 한계상황에 다다르면 그들은 예수님을 버리는 무능력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동일한 내용을 기록한 마가복음 기록을 살펴보면 ‘어떤 청년은 두르고 있던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쳤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생활상을 살펴보면 ‘삼베옷’은 시신을 염할 때나 부자들이 잠옷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베 홑이불을 입고 있었다는 말은 잠옷처럼 입는 얇은 옷을 입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살짝 걸치고 있는 얇은 옷 하나마저도 그대로 버려두고 알몸으로 도망하였으니 얼마나 다급하게 그 자리를 비했는 지 상상이 갑니다. 대체로 보통 사람들은 옷이 벗겨지면 어떻게든 몸부터 가리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옷이 벗겨져도 도망하였다는 것은 죽기 살기로 도망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청년은 인간의 수치도 포기하고 당장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나약함입니다.
‘개 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죽은 정승이 산 개만 못하다’, ‘땡감을 따 먹어도 이승이 좋다’, ‘말똥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등등… ‘아무리 천하고 고생스러워도 죽은 존재보다는 살아있는 것이 더 좋다’는 뜻의 속담들이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영어 속담 ‘Better a live coward than a dead hero’라는 문장도 있습니다. ‘죽은 영웅보다 살아있는 겁쟁이가 더 낫다’라는 뜻입니다. 어떻게든 이 땅에서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세상에서 거지같이 살고 세상에서 도덕적인 추악한 삶을 살아도 이 땅에서만 살면 좋다’라는 가치관의 속담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7, 3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우리는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받았습니다. 무릇 모든 것들에는 창조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대로 살 때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우리 장로교회의 신앙신조를 정리한 교리서 소요리문답 제 1번에는 ‘사람의 제일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사랑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으로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삶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얻고 싶으신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사야 4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43장 21절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가장 행복하게 살며 인간의 목적에 맞게 살아가는 길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며 하나님을 위해 우리를 온전히 드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사는 것이 나를 존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최고로 높이며 하나님을 위해 살아갈 때 내가 존재의 가치를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전 인격으로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 한 분만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입술로만 혹은 의무감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닌 모든 정성과 이해력과 지혜를 다해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최고가 되어야 하고 제일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심지어 나의 유익, 나의 이익보다 아니 나의 생명, 나의 목숨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드려 사랑하며 내 모든 것을 다해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의 제자들은 ‘절대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 했지만 결국 자신의 목숨 문제가 걸리게 되었을 때 결국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정말 내 목숨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며 목숨까지도 주님을 위해 드릴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 생명 드리며 주님만 따르며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는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자신들이 가진 것을 포기하지 못해서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한다고 그들은 그들이 가진 세상적 권력을 내려놓지 못해서 예수님을 죽이려는 것이라며 우리들은 그들을 몹쓸 사람이라고 비난합니다. 하지만 사실 지금 이 땅에서 예수님 믿고 예수님을 삶의 주인이라고 입술로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도 혹 내가 세상에서 가진 것 때문에 매일매일 신앙을 숨기고 예수님을 배반하며 주님을 외면하고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의 가룟 유다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해 예수님을 버리며 배신하는 저와 여러분이 아닙니까? 매일매일 순간순간 돈, 명예, 권력, 인기 같은 세상의 것들과 예수님을 가치비교하며 어떤 때는 돈, 명예, 권력을 위해 예수님을 배반하고 어떤 때는 예수님이 내게 필요한 존재인 것 같아 예수님을 택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 이 순간 저와 여러분은 “나는 절대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을 사람이야”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을 살펴보며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을 버리는 삶이 아닌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며 우리에게 예정해 주신 하나님의 계획이 말씀대로 이뤄지는 역사를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