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의 비극
같은 한국인들끼리인데도 서로 말이 안 통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정치권에서 여당과 야당은 거의 불통 관계이다. 서로 말이 안 통하는 것이다.
어디 정치권만 그럴까? 같은 종교 안에서도 서로 말이 안 통하는 경우가 많다. 또 77기 동기들끼리는 안 그럴까? 같은 예수를 믿는데도 서로 말이 안 통한다. 어떤 문제를 갖고 있음이 틀림없다.
가정에서도 말이 안 통하는 경우가 있다. 안 통하면 서로 다투게 되고, 안 통하고 안 통하면 결국 이혼하게 된다. 왜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서로 말이 안 통할까? 창11:1을 보자.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언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사파(שָׂפָה)다. “입술”이라는 뜻이다. 원래 인류는 한 입술(發音)만 갖고 있었다.
“말”이라고 번역된 다바르(דָבָר)는 “약속”이란 뜻도 있다. 따라서 요1:1에 나오는 “말씀(λόγος 로고스)”은 약속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곧 “태초에 (하나님의) 약속이 계시니라”
원래 인류는 한 약속과 한 입술을 가지고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선동자”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여러분! 탑을 쌓아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합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온 지면에서 흩어짐을 면하게 합시다”
탑을 쌓는 것과 자신들이 지면에 흩어지는 것과는 서로 아무 상관도 없다. 혹 누가 그들을 흩어지게 하겠다고 협박한 일이라도 있었던가? 전혀 그런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외친 자는 어떤 자였나? “선동자”였음이 틀림없다. 선동자는 서로 상관이 없을 것을 연결시켜 선동한다. 그 목적은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데 있다. 즉 선동자의 마음속에는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교만”이 숨어 있다.
하나님이 그 마음을 읽으신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언어를 혼잡하게 하는 징계를 내리셨다(창11:7). 언어의 혼란은 불통과 갈등을 불러왔고 결국 탑 쌓기는 중단되고 말았다(창11:8).
불통은 “교만”의 결과물이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선동자”가 나타나면 인간 사회는 항상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일어난다.
p.s.
아기가 알아들을 수 없는 옹알이를 할지라도 아기와 엄마 사이에는 소통이 잘 된다. 그랬던 아기가 성장하여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소통의 문제와 함께 엄마와 갈등을 빚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