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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아트페어에 다녀와서
I. 첫째날
따르르릉! 박회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4.11.부터 13.까지 북경에서 아트페어가 열리는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아트페어에 참가하는 선 컨템퍼러리 화랑의 이관장으로부터 초청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기회를 어찌 마다할 손가? 더군다나 박회장이 비행기 예약하면서 나는 보너스표로 가게 되니, 나는 글자 그대로 몸만 가면 되는 멋진 기회가 되었다. 박회장님! 고맙습니다.
비행기가 황해를 건너 천진에서 중국 대륙으로 들어간다. 밑을 내려다본다. 밑은 산은 없이 끝없이 평원이 펼쳐진다. 하다못해 작은 언덕조차도 없다. 비행기가 북경에 접근해서야 멀리 북경 시내 뒤로 테를 두르듯이 산들이 둘러싸고는 이 넓은 평원이 더 이상 확산되는 것을 막아서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넓다는 김제평야도 지평선상에서 구릉들이 있어 그나마 단조로운 지평선에 변화를 주고 있는데, 이곳은 숫제 아예 시멘트를 발라놓은 것처럼 밋밋하기만 하다. 중국이 땅덩어리가 넓다보니 이런 지형도 나타나는구나.
공항에 내리니 선 컨템퍼러리 화랑의 직원이 마중 나왔다. 우리가 이틀 동안 묵을 갤러리 호텔로 가는 동안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북경 시내의 모습은 빌딩들이 죽죽 올라가고 있는 것이 역사 오랜 고도(古都)의 모습보다는 현대의 메트로폴리스의 모습이다. 그런데 북경의 땅거죽은 하늘에서 본 그대로 높낮이가 전혀 없다. 차를 타고 가며 차창 밖으로 아기자기한 야산들을 볼 수 있는 서울의 풍경에 익숙한 나로서는 도대체 기복이란 전혀 없는 이 북경이라는 도시가 포근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리고 차는 왜 이리 막히는가? 북경의 교통지옥을 막기 위하여 북경 이외 지역의 차량들은 허가를 받지 않는 한 북경으로 들어올 수 없다고 하던데, 그럼에도 북경의 교통체증은 알아주어야 한단다. 그나마 악명 높은 북경의 황사를 만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겠다.
1:30경 호텔로 들어서니 눈이 돌아가는 곳마다 조각 작품과 그림들이 나에게 손짓하는 것이 내가 지금 호텔에 들어온 것인지 어느 갤러리에 들어온 것인지 헷갈리게 한다. 과연 갤러리 호텔이라고 이름 지을 만 하겠구나. 게다가 북경의 호텔에 왔음에도 한국 작가의 작품들을 볼 수 있어 더욱 반가웠다. 특히 로비의 한 벽면을 장식하는 이이남 작가의 작품은 금방 알아보겠다. 이이남은 동서양의 명화들을 미디어 아트로 재해석하기로 유명한 작가인데, 지금 벽면에서 나를 유혹하는 것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를 미디어 작품으로 만든 것이다. 작품 속에서 황금색으로 빛나는 두 연인은 태초의 혼돈의 모습에서 점차 클림트가 창조한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더니, 잠시 후 점차 경계가 일그러지면서 하나의 추상작품으로 변화한다. 박회장은 이 작품에 눈이 반짝이더니, 결국 다음날 이 작품을 구입하였다.
나에게 배정된 309호실로 들어가니 객실도 미술 작품으로 꾸며져 있다. 침대 머리맡에 걸려 있는 그림은 최영욱 작가의 백자 달항아리 그림. 조선 백자를 꽤나 세밀하게 그렸다. 그런데 현실의 달항아리와는 뭔가 다르다. 그렇다. 조선의 달항아리의 표면은 순백으로 깨끗한 담백한 맛을 주는데, 최영욱의 달항아리는 표면에 무수한 실금이 가있다. 이러한 실금은 고려청자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인데, 최작가는 조선의 백자를 그리면서 그 표면에는 고려 청자의 실금을 입힌 것이다. 그리고 욕실이 따로 있건만 침대 발치에도 분위기가 그윽한 욕조가 놓여있다. 이건 또 뭐야? 아니 혼자 외로이 투숙한 사나이에게 이런 야릇한 방을 주면 어떡하노? ^.^;;
짐만 놓고 얼른 밖으로 나와 대기하고 있는 차에 올라탄다. 아트페어에 참석하지 않는 시간 동안은 어떻게 보내나 내심 걱정했는데, 다행히 호텔까지 타고 온 승용차 운전사와 흥정이 되어 남는 시간에 이 차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조선족 운전사가 가이드가 되어 준다고 하니 우리는 부르는 요금에도 두말 않고 OK! 아트 페어 행사는 저녁에 참석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 우리는 그 사이 비는 시간을 이용하여 자금성에 다녀오기로 하였다. 2:25경 천안문 광장 앞에 섰다. 1989년 이곳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중국 민중을 향하여 발포하는 천안문 사건이 발생하였단 말이지? 당시 전진하는 탱크 앞에 섰던 한 청년의 사진이 지금도 뇌리에 선명하다. 그 청년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천안문 사태의 많은 희생자처럼 그 청년도 죽음을 면치 못했을까?
광장에는 인민 영웅 기념비가 38m의 높이로 우뚝 서있다. 저 기념비에 주은래의 자필 비문이 새겨져 있어 1976년에도 주은래를 추모하는 민중들은 이 기념비에 꽃을 바쳤는데, 꽃과 함께 문혁파를 비난하는 구호가 나붙자 중국 당국이 이를 철거하면서 이때에도 소요가 일어났었지. 이 때문에 등소평이 배후 조종 혐의를 받고 실각했다가 강청, 왕홍문 등의 4인방이 체포되면서 등소평은 다시 살아났었고... 당시 시위대를 향하여 발포하였던 총탄 자국이 저 기념비에 남아 있다고 하는데, 어디에 있는 것이지?
천안문을 향하여 다가간다. 천안문의 벽에는 좌우로 걸린 ‘중화인민공화국 만세’와 ‘세계인민 대단결 만세’ 구호 사이로 모택동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초상화만 걸려 있나? 모택동의 시신도 방부 처리하여 유리관에 넣어 모택동 기념관에 안치하여 지금도 중국 인민들은 모택동 시신에 참배하려고 줄을 선다고 하지. 모택동이 죽은 지 36년이 지나고 있건만 모택동은 여전히 중국 인민의 한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구나. 참, 모택동 기념관이 이 근처라는데 어디인가?
가이드 할 줄 알았던 운전사는 우리가 나올 자금성 반대편 문에서 기다리겠다고 가버렸고, 중국말을 모르니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지하도로 내려섰다가 천안문으로 나있는 계단을 오르는데,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 같은 복장을 한 소녀 둘이 같이 계단을 오른다. 이런 걸 코스프레라고 하던가? 일본의 소녀들이 이런 복장을 많이 하여 그 유행이 우리나라에까지 들어왔었는데, 공산국가인 중국에까지 이런 복장의 소녀가 등장하네! 천안문 위에서 내려다보는 모택동이 이런 모습을 보면 뭐라 할까?
해자를 건너 천안문 앞으로 다가간다. 우리의 궁궐은 해자가 없는데 중국과 일본은 해자가 성을 두르고 있다. 궁궐의 담도 중국과 일본은 적이 못 올라오도록 높게 두르고 있는데, 조선의 궁궐은 마음만 먹으면 타고 넘을 수 있을 정도이다. 이렇게 담을 높이 하면 적을 방어하고, 황실의 위엄을 나타내는데 좋겠지만, 여기서도 나는 우리 궁궐의 담이 좋다. 우리 궁궐의 담은 어느 정도 위엄을 담아 경계를 두르고 있기는 하지만, 왕실과 백성의 마을은 서로의 정과 기운이 통할 수 있도록 그 높이를 낮춘 것은 아닐까? 하긴 자금성(紫禁城)이란 말이 자주색을 금지하는 - 자주색은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색 - 성이란 뜻이니, 아예 성을 만들 때부터 한껏 위세만 부리려고 하지 백성들과 소통할 생각은 전혀 없는 성이라 하겠다.
천안문 앞에는 암수 사자가 좌우에서 관광객들을 째려보고 있다. 오른쪽에서 오른발로 공을 가지고 노는 숫사자는 황실의 위엄을 상징하고, 왼쪽에서 아기 사자를 쓰다듬고 있는 암사자는 황실의 후손이 대대로 번창함을 상징한다고 한다. 명나라 때인 1,420년 만들어진 사자상이라는군. 그런데 이런 사자상은 북경을 다니면서 여기저기서 만난다. 빌딩 앞에서, 식당 앞에서... 중국인들은 집을 지키는 영물로서 이런 사자상을 집 앞에 두는 것인가? 요즈음 중국과의 교류가 많다보니 서울에서도 이런 사자상이 앞에 놓인 건물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글쎄... 우리나라에선 이왕 놓을 거라면 우리에겐 이런 위압적인 사자상보다는 우리에게 친숙한 호랑이상 같은 것을 놓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중국은 땅덩어리가 커서인지 도깨비나 동물상이 좀 위압적인데, 이런 도깨비나 동물상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친근하고 해학적인 모습으로 변하지 않는가? 나는 우리 민족의 정서에 녹아들어간 그런 친근한 모습이 더 좋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한마디 더한다면, 저 천안문이 우리의 숭례문보다는 크고 웅장할지는 모르지만 나는 저 꽉 찬 듯한 천안문의 모습보다는 우리의 숭례문이 더 정겹다. 지붕선은 또 어떠한가? 끄트머리만 살짝 올라간 천안문의 지붕선 보다는 내려오다가 부드럽게 휘어져 하늘로 올라가는 숭례문의 지붕선이 훨씬 아름답지 아니한가?
천안문 뒤로도 작은 광장이 있고, 자금성은 이 광장을 가로 질러 오문(午門)을 통하여 들어간다. 여기서부터는 입장권을 사야한다. 그런데 왜 오문(午門)이라고 하는 것이지? 중국에서는 옛날에 북(北)을 자(子), 남(南)을 오(午)라고 하였단다. 아하! 자오선(子午線)이란 말이 여기서 나온 것이구나. 그러니까 ‘오문’이란 것도 남대문을 뜻하는 것이고... 오문으로 들어가니 앞에 조그만 천(川)이 나오고, 사람들은 그 위의 다리를 건너간다. 금수하와 그 위의 금수교이다. 우리의 경복궁 흥례문을 통과하여도 이런 천과 다리가 나오지. 경복궁에서는 이러한 천이 왕의 공간과 속세의 공간을 가르는 역할을 하는데, 자금성도 마찬가지이겠지? 금수교를 건너 다시 태화문을 통과하니 앞에는 또 광장이 나오고 그 건너편에 태화전이 있다. 저 태화전이 경복궁의 근정전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태화전을 지나고 중화전과 보화전을 거치니 건청문이 나온다. 지금까지는 황제가 공무를 보는 외전(外殿)이고, 이 건청문을 지나면 황제와 황비가 사는 내전이다. 내전에서는 먼저 건청궁이 나오고 이어서 교태전, 곤녕궁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까지 오는 동안 바닥은 온통 돌로 되어 있다. 그러니 나무 또한 볼 수 없고... 혹시라도 황제를 해치려는 자객들이 숨어 들어올까봐 바닥도 돌로 하고 나무도 심지 않은 것이라나? 그리고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보이는 건물들의 지붕은 황색이고, 기둥이나 문틀, 창틀은 자주색이다. 황제를 상징하는 색깔이다. 그런데 매끈한 자주색 기둥이 나에게는 답답하게만 보인다. 우리네 궁궐의 기둥도 이렀던가? 우리네 기둥은 나뭇결의 모양이 그대로 살아있지 않은가? 게다가 눈앞에 보이는 기둥 중 칠한 지 오래된 기둥에서는 자주색 껍질이 꼭 가뭄에 논바닥 갈라지듯이 갈라져 있는 것이 눈에 거슬린다. 단청도 황제의 위엄을 나타내려 한껏 위엄 있게 칠하였지만, 이 또한 우리네 단청이 나에게는 더 정다운 것은 내가 어쩔 수 없는 김치 먹는 한국인이라서일까?
내전을 돌며 교태전(交泰殿)을 본다. 황후가 거처하는 곳이다. 가만있자... 경복궁에도 왕비가 거처하는 곳은 교태전이 아니던가? '교태전' 하니까 교태(嬌態)가 생각나는데, 자고로 여인은 교태(嬌態)가 있어야 하기에 교태전이라 한 것인가? 아니지, 우리야 '交泰'와 '嬌態'가 발음이 같지만 중국도 그런지는 알 수 없지 않은가?
그런데 북적이는 한 무리의 관광객 위로 한 남자가 들고 있는 깃발은 태극기이다. 보통 여행사 깃발을 들 텐데, 이 남자는 자금성을 정복하였노라 하며 태극기를 들고 있는 것인가? 어쨌거나 자금성에서 태극기를 보니 반갑다.
내전을 지나쳐 나오니 이제야 나무들이 보인다. 어화원(御花園)이다. 아무리 경비를 위해 자금성에 나무들을 심지 않았다지만, 이 넓은 자금성에 나무 한 그루 없다는 것은 너무 삭막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여기에 이런 정원을 만들었다는 것은 어화원 주위로는 철통같은 경계망이 펼쳐져 있었다는 것이겠지. 괴석(塊石)도 있다. 그런데 이 또한 우리와 다르다. 경복궁에도 괴석이 있지만 아담하게 편안한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는 괴석이다. 그러나 자금성의 괴석은 작은 것도 있지만, 큰 것은 사람의 키를 넘을 뿐 아니라 옆으로도 10m 정도는 펼쳐져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런 괴석에선 소담스러운 미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괴기(怪氣)를 느낄 것만 같다.
자금성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으로 나온다. 이 또한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과 이름이 같다. 자금성의 오문을 통과하여 그대로 일직선으로 자금성을 설렁설렁 훑어보며 신무문으로 나왔다. 아쉽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자금성 구석구석을 어슬렁거리며 명, 청 시대의 대륙의 역사 숨결을 좀 더 느껴볼 수 있었을 것을...
신무문을 나서는데 앞에 동산이 보인다. 경산공원이다. 평탄하기만 한 북경에서 어찌 이곳만 이렇게 솟아올랐을까? 자연적으로 솟아오른 것이 아니다. 금나라 때 이궁(離宮)을 만들면서 지금의 북해(北海)를 만드느라고 파낸 흙을 여기에 쌓았고, 그 후에도 명나라 때 자금성의 퉁쯔허(筒子河)를 만들면서 파낸 흙을 여기에 더하여 5봉을 만들었단다. 저 정도로 쌓으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인원을 동원하였단 말인가? 높이가 45.7m밖에 안 된다지만 저기에 올라가면 자금성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겠다.
경산공원은 또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숨을 거둔 곳으로 유명하다. 명이 청나라에 망했으니 청나라 때문에 죽었나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니다. 황제는 농민반란군 이자성의 부대에 쫓겨 신무문으로 나와 경산 동쪽 기슭에 있는 홰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했단다. 당시 나이 33세. 나라가 망하려면 기강이 해이해지고 백성이 도탄에 빠져 반란군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기도 하는데, 명은 이렇게 청에 멸망하기 전에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하겠다. 저 경산공원을 오르고 싶은 마음 간절하나 이 또한 시간이 나를 잡는구나.
신무문을 나서니 널따란 호성하(護城河)가 자금성을 두르고 있다. 넓이 50m가 넘고, 깊이가 6m나 된다고 하니 단순한 해자(垓字)가 아니라 ‘호성하’ 이름 그대로 하나의 강(河)이다. 아까 오문을 들어설 때에도 이 호성하가 있었는데, 오문이 ‘凹’ 모양으로 된 안쪽에 있어서 우리는 호성하가 있는지도 모르고 오문을 들어섰었다. 자금성을 저렇게 강 같은 해자가 두르고, 또 성벽의 높이도 10m가 넘으니 적이 어떻게 침입한담? 그뿐인가? 자금성 안에도 바닥을 온통 돌로 깔아 나무 하나 없으니 아무리 유능한 자객이라도 황제 암살을 위해 자금성을 넘어 들어갈 엄두를 못 낼 것만 같다.
가이드에게 전화로 우리가 나왔음을 알리고 얘기해주는 장소로 걸어가는데 왼쪽 팔을 잃은 장애자가 길거리에 앉아 동정을 구하고 있다. 단지 팔만 없는 것이 아니라 얼굴 왼쪽 부위와 상반신 왼쪽 부위는 심각한 화상을 입은 듯 불로 지져져있다. 아무래도 바라보는 마음이 불편한데, 한 청년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이 사람 옆에 멈추어 한참을 쳐다보다가 간다. 그 청년은 저 거지를 보며 무얼 생각하기에 그리 오랫동안 오토바이도 멈추고 한참을 쳐다보다 간 것일까?
이제 아트페어가 열리는 곳으로 가야지. 가는 도중 박회장이 배가 출출하다 하여 음식 포장마차가 줄지어 늘어서 있는 거리 한쪽에 차를 세운다. 으~음~~ 역시 중국인들은 못 먹는 것이 없다더니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진기한 먹거리들이 좌판에 늘어서있다. 한 포장마차는 꼬치구이를 늘어놓았는데, 꼬치에 꾀인 것은 큰 귀뚜라미, 전갈, 큰 번데기, 그밖에 이름을 알 수 없는 곤충 등등... 바싹 말린 불가사리들도 있다. 웬만한 것은 다 잘 먹는 나도 이들을 보면서는 도저히 식욕이 동하지 않는다. 우린 이런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나마 우리에게 익숙한 만두를 사서 차로 올라탔다.
5:30경 아트 페어가 열리는 중국 국제무역센타에 도착하였다. 깜빡 잊고 초대권을 호텔에 두고 오는 바람에 부득이 이관장님에게 전화를 하여 수고를 끼치고서야 입장하였다. 들어서는 나의 머리에는 서울보다 큰 국제 아트페어가 그려지고 있었는데, 어? 생각보다 크지 않다. 이 정도면 코엑스 태평양홀과 인도양홀을 모두 터서 하던 서울 국제아트페어보다 작으면 작았지 커보이지는 않는다. 전시장을 돌아보는데 생각보다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 많다. 한국이 초대국가라 한국 화랑들이 많이 참여하였단다. 선 컨템퍼러리 화랑에서도 부스를 2개나 전세 내어 전시를 하고 있다.
아까 호텔 객실에서 본 최영욱 작가의 그림을 또 여기서 볼 수 있었고, 몬드리안의 면 분할 추상화를 좀 더 복잡하게 발전시킨 것 같은 황창하 작가의 추상화는 한 부스를 통째로 차지하고 있다. 선 화랑에서 황작가를 이번 전시회에서 뜨여주고 있구나.
선 화랑 전시품에는 조각 작품도 있다. 사람을 날씬하게 즐겁게 만드는 여류 조각가 김경민씨의 작품이다. 김작가가 창조한 키가 6m가 넘는 날씬한 한 신사가 내 사무실 근처 미래의료재단 건물 앞에서도 오가는 행인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여기서도 김작가의 작품을 만나게 되니 반갑다.
요즈음 중국에서 뜨고 있는 작가라면 펑정지에, 위에민준, 덩샤오강 등이 아닌가? 북경에 올 때는 이들의 작품을 그들의 본국에서 만나게 된다는 기대감이 컸었는데, 전시장에선 이들의 작품을 만나볼 수가 없다. 어떻게 된 일일까? 이관장은 이들은 이미 국제적으로 크게 뜬 작가들이라 굳이 이런 아트페어에 참가하지 않는단다. 글쎄... 배가 부르단 얘기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전시 부스를 돌아나가는데, 한 전시 부스에서는 얼마 전에 죽은 스티브 잡스의 사진이 보인다. 그런데 그 뒤로는 난데없이 한 남자의 벌거벗은 발이 보인다. 누가 저렇게? 궁금하여 뒤로 돌아가 보니 한 중년남자가 벌거벗고 편안하게 두 팔에 의지하여 앉아있다. 밀랍인형처럼 정교하게 만들어 젊은 처자들이 보면 얼굴을 붉힐 만도 한 작품인데, 예술은 예술로만 보아서인지 이를 보며 지나가는 젊은 처자 중에 얼굴을 붉히는 이는 한 명도 없다. 오히려 흥미로운 미소를 띠는 이들은 있지만... -_-;;
돌다보니 최근에 권력을 승계한 북한의 김정은이 근엄하게 박수를 치는 사진이 있다. 이것도 작품? 얀레이의 작품이라는데, 애써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권력 승계 후의 작품인가?
전시 작품들을 두루두루 돌아보고 건물 밖으로 나간다. 이렇게 밤중에 미술 작품으로 포식을 해보기도 처음이다. 호텔로 돌아가기 위하여 건물 현관으로 나오는데 마침 차 한 대가 우리 앞으로 미끄러져 들어온다. 아무리 봐도 택시 표시가 없는데, 박회장이 의심 없이 타길래 할 수 없이 따라서 올라탔다. 차 안에는 요금 미터기도 없다. 가만히 보니 한국에서는 요즈음 볼 수 없는 속칭 ‘나라시’ 택시를 우리가 탔구나. 호텔에 도착하여 요금을 물으니 우리가 전해들은 택시 요금의 몇 배나 된다. “이 자식이 외국 관광객이라고 바가지를 씌우는군.” 잠시 항의해 보았으나 인상을 쓰면서 자기가 말한 요금을 그대로 내란다. 어쩌겠나? 주어야지. 괜히 계속 뻗쳐댔다가 이놈이 우릴 싣고 어디로 내빼면 어떡하누. 여기까지 잘 데려다 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겠지. 북경에서의 첫날밤을 씁쓸한 기억을 안고 객실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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