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
작가 ; 프랑수아즈 사강(1935-2004)
초판 ; 1954
조숙한 열다섯 소녀 세실은 기숙학교를 나와 홀아비에 난봉꾼인 아버지 레이몽과 함께 살게 되면서 엄격한 수도원학교 시절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퇴폐적인 세계로 발을 들여놓는다. 파리와 프랑스령 리베에라를 왔다. 갔다 놀러 다니며 황금빛 피부를 갖게 된 두 부녀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사치와 쾌락, 그리고 단기 연애와 같은 향락적인 생활을 거리낌 없이 즐긴다.
열 다섯 소녀인 세실은 젊고 미남인데다 바람둥이인 아버지와 행복하게 살았다. 그녀는 아버지의 생활을 이해했으며 가끔은 공범자가 되어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아버지의 애인인 엘리와 셋이서 지중해 연안으로 피서를 가게 되었다. 거기에서 세실은 시릴을 만나 사랑에 빠졌으며 아버자에게는 죽은 어머니의 친구이자 이지적이고 어딘가 냉가가 도는 안느가 나타난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 총명하고 세련된 여인에게 끌려 결혼을 결심한다. 세실은 공부를 강요하고 시릴과는 사이를 멀어지게 한 안느는 싫어하게 되었다.
안느가 새 엄마가 된 후 평온하지만 지겹기만 한 생활에 두려움을 느낀다. 마침내 세실은 계략을 꾸미고 시릴과 사이를 멀어지게 한 안느를 싫어하게 되었다. 그들의 음모는 계획대로 되어 아버지를 오해한 안느는 휴양지로 떠나가던 중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결국 세실과 아버지는 예전의 생활로 돌아오지만 1년이 지난 지금 잠이 오지 않을 때 문득 죽은 안느의 기억이 되살아 나 의식하지 못했던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낀다.
주인공 세실은 시니컬하고 잔혹하다. 날카로운 눈으로 어른들을 바라본다. 총명하고 우월한 사람의 성숙된 여성을 증오한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완성된 것에 대한 반감을 지닌 것이다.
사강이 열 여덟 살에 쓴 이 소설은 발간되자 마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공공연한 성 묘사와 부와 풍요에 대한 찬미, 그리고 동성애적 욕망의 암시 때문에 이 책을 처음 읽는 독자들은 충격가 자극을 동시에 받았고, 이를 포용적인 프랑스 사회로 나아가는 길을 닦았다. 상투적인 천진난만한 소녀의 겉 껍질 아래에는 그가 유일한 부모가 제시한 삶의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불불을 가리지 않는 어린아이의 불안정한 자화상이 반짝이고 있다.
(작가 - 프랑수아즈 사강)
프랑수아즈 사강(1835-2004)은 프랑스 소설가, 극작가, 시나리오 작가이다. 본명은 프랑수아즈 쿠아레이다. 남프랑스 카라르크에서 출생하여 소르본 대학을 중퇴하였다. 18세 때 <슬픔이여 안녕>을 발표하여 작가로서 인정을 받고 같은 해 문학 비평상을 받았다. 남녀간의 심리 전개를 세심한 관찰력을 통해 담담한 문체로써 묘사하였으며, 섬세하고 권태로운 분위기를 조성시켜 좋은 평을 받고 있다.
사강은 2년 뒤 두 째 소설 '어떤 미소'를 발표해 첫 소설 '슬픔이여 안녕' 못지않은 수작이라는 평을 받으며 세간의 의혹을 일축했고, '운이 좋은 소녀'란 오명을 벗고 진정한 작가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프랑스 소설가 프랑수아 모리악은 사강을 두고 "유럽 문단의 매혹적인 작은 악마"라 평했고, "지나칠 정도로 재능을 타고난 소녀"라고 불렀다. 어린 나이에 데뷔해 발표하는 작품마다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사강은 당시 '천재 소녀'로 불리며 하나의 아이콘이 되었
그 밖의 작품으로 <어떤 미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뜨거운 사랑> 등이 있으며, 희곡으로 <스웨덴의 성> <발라틴의 등색 옷> 등을 발표한 외에 발레느 샹송을 쓰기도 했다. 현대의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의 한 사람이다.
2000년대 마약 복용 혐의로 이슈가 되었을 때,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말을 하여 마약에 대한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했었다.
이후 '어떤 미소' '뉴욕' '한 달 후 일 년 후' 등을 연달아 발표하다가 1959년, 그의 대표작이자 프랑스 현대소설의 대반향으로 손꼽히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발표한다.
예술가답게 온갖 비행(?)을 일삼았는데, 1957년 교통사고로 인해 사용한 모르핀에 중독되기도 하거나, 한때 도박 중독으로 정부에 카지노 입장 금지를 스스로 요청하기도 했다. 모르핀 중독에 못이겨 이후 약물 중독에 여러 번 빠졌는데, 극우 정치가 장마리 르 펜은 사강을 상대로 "단두대에 보내야 한다"고 까지 말했다. 비행의 절정은 1995년 코카인 소지 혐의로 체포되었을 때인데, 그녀는 한 TV쇼 프로그램에 나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며 자신을 변호했고, 이후 두 차례 기소에서 모두 선고유예 처분을 받았다.
이후 그녀는 재기하여 당시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과 함께 정치 개혁에 뛰어들며 사회 현안에 있어 자신의 목소리를 강하게 냈다. 그러다 개발회사인 Elf의 우즈베키스탄 매장 석유 개발 관련 민원을 대통령에게 전달해 외교부에 압력을 넣어 해소한 대가로비선실세? 약 9백만 프랑 가량의 금품을 수수했다. 1991년에 불탔던, 노르망디에 있는 자신의 대저택을 증개축하면서 탈세한 혐의가 인정되어 금고형을 받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그의 말년은 재산 몰수로 인해 궁핍했으며, 사강의 동료들은 참작해 줄 것을 청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던 2004년 심장 및 폐질환으로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사강의 장례는 국장급으로 치뤄졌으며 당시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프랑스의 가장 감각적인 작가를 잃었다며 직접 애도를 표했다.
생애 두 번 결혼했는데 모두 이혼했다. 첫 남편은 편집장이던 기 스콸레르, 두 번째 남편은 조각가 로버트 웨스토프였는데, 웨스토프와의 이혼 후 인터뷰에서 "결혼이란 아스파라거스에 비니그레트 소스냐 네덜란드식 소스냐를 곁들이는 취향의 문제"라고 한 말은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