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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931
11월1일 [모든 성인 대축일/연중 제31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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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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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I6Eg_fOJNO0(노동준 안토니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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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인들, 우리보다 조금 더 따뜻했던 사람들>
우리 가톨릭 교회 안에는 참으로 많은 성인들이 계시고, 또한 그 후보자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 한 가지는 그 성인 후보자들 가운데 우리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큰 죄인이고 한없이 나약한 우리에게도 성화에로의 초대장을 보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인들에게 각별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에게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구체적인 길을 친절하게 가르켜주십니다. 또한 성인들의 생애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거룩하고 충만한 삶을 살아가도록 자극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인들은 삶 자체로 우리에게 아주 좋은 성덕의 이정표가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인전을 참 많이 읽었습니다. 시간이 날때면 아무도 찾지 않는 수도원 도서관에 박혀 셀수도 없이 많은 성인들의 전기를 읽었습니다. 한분 한분 만날때 마다 각별한 기쁨과 감동을 맞보았습니다.
성인전을 읽으면서 특별히 크게 느낀 점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들도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나약한 한 인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부족함 투성이였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인간적 미성숙을 안고 자기와의 기나긴 투쟁을 계속했다는 것입니다.
성인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와 완전 동떨어진 별세계 사람들도 아닙니다. 우리가 감히 범접하지 못할 정도로 어마무시한 사람들도 아닙니다.
대신 성인들은 우리 보다 조금 더 기도에 집중했던 사람들, 그래서 우리보다 조금 더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보다 조금 더 긴 호흡을 지녔던 사람, 우리보다 조금 더 넓은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봤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보다 조금 더 겸손했고, 우리보다 조금 더 따뜻한 인간미를 지녔던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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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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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지향에 따라 성인도 되고 악마도 된다>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특별히 일 년 동안 지켜주시고 기도해주신 저희 자신들의 주보 성인께 감사드립시다. 오늘 복음은 진복팔단입니다. 성인은 행복하신 분들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행복하려면 마음이 가난해야 하고, 슬퍼해야 하고, 온유해야 하며, 의로움에 주려야 하고, 자비로워야 하며, 마음이 깨끗해야 하고, 평화를 이루고, 박해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의 단어로 통합하자면 ‘어린이’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4) 영성이란 주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일을 말합니다. 주님께 더욱 나아갈수록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방법이 ‘기도’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기도가 그 사람을 더 큰 어른으로, 더 하느님과 멀어지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한 번은 본당에 있을 때 사목회 위원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물론 누구인지 알게 하지 않기 위해 구체적인 인적사항은 바꾸었습니다.) 약속도 하지 않고 와서는 신부님을 꼭 만나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전화를 받고 어쩔 수 없이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상담을 위해 내려갔습니다. 그 형제의 얼굴은 화가 잔뜩 나 있는 듯했습니다. 아들에게 화가 나 있었습니다. 사실 모든 것에 화가 나 있는 듯도 했습니다. 저를 찾아온 이유는 나중에 아들과 면담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재수생인데 그 착했던 아들이 어느 날부터 반항을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봐도 말도 안 하고 문을 걸어 잠그기도 합니다. 언제부턴가 학원도 빠지고 방에서 게임만 합니다. 게임 하느라 불러도 대답하지 않고 문을 꽝 닫아버리길래 키보드를 부신 적도 있습니다. 심지어 그날은 잔소리 좀 했더니 아버지 앞에서 거울을 주먹으로 쳐서 뼈가 다 보일 정도로 손에 상처를 입은 것입니다. 성당에서 복사도 하고 착실했던 아이가 그렇게 되어서 신부님이 말씀하시면 들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십계명에도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이 있으니 말입니다.
아버지는 본당에서 열심한 신자입니다. 성경도 1년에 1번 이상은 통독하는 분이고 묵주기도도 열심히 합니다. 세상 적으로도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수억의 연봉을 받는 사람이었고 엘리트 코스만 밟아온 사람입니다. 그 아이의 형은 그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형도 전교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고 일류대 의대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둘째 아들이 문제입니다. 그분은 기도하는 중에 환시와 같은 것을 본다고 했습니다. 성당에 앉아있으면 예수님께서 나타나 위로도 해 주시고 미래의 이런저런 일을 알려주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대로 하면 하는 일도 잘 풀리는 기적을 많이 겪었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성공한 것은 순전히 기도 덕분인데 둘째 아들을 위한 기도만은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여기서부터 이분의 영성이 의심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형제는 자신의 세속적인 것들을 기도로 채우고 심지어 기도로 자신도 커지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기도를 잘해서 가정이 이만큼이나 사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현재 상황이 안 좋아진 것도 자신이 그런 환시를 따르지 않은 벌이라고 여겼습니다.
일단 저는 아들에게 무슨 잘못한 일이라도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마 비싼 학원에 넣어달라고 했는데 형 등록금 때문에 안 된다고 한 것에 화가 난 것 같다고 했습니다. 지금 아파트를 더 큰 곳으로 옮기고 사업을 확장하느라 빚까지 져서 조금 돈이 달리는 때인데, 공부도 못하는 아들이 너무 비싼 기숙학원을 원하기에 안 된다고 했던 것입니다.
저는 아들이 아버지와 말을 안 하는 이유가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가난해서 라면만 먹은 적도 있고 맨밥만 먹은 적도 있으며 어머니 잠바를 입고 학교 다니고 돈이 없어서 공책도 사지 못한 경우도 많았지만,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형제님은 약간 당황한 듯 보였습니다. 물질적으로 자녀에게 충분히 못 해 준 것 때문에 자신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없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아들을 위해 하느님께 이렇게나 기도를 열심히 하고 물질적으로도 사실 남들보다 잘해준다고 생각하는데 아들이 그러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말씀드렸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으니 알아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우선 위원장님께서 하시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내 의견을 주님께 관철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뜻이, 그것이 비록 내 뜻과 맞지 않는다고 해도 다 받아들일 힘을 키우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님은 기도를 통해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거나 집값이 오르기를 바라셨습니다. 더군다나 하느님의 자유뿐만 아니라 아들의 자유까지 인정해 주지 않고 많은 것을 강요하셨습니다. 아들이 이미 성인이 되었는데도 아들의 인생에 간섭하고 계십니다. 아들이 말을 안 하겠다면 이젠 성인이 된 아들의 결정을 인정해주셔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나의 뜻대로 움직이게 만들고 싶은 근본적인 이유는 형제님께 열등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열등감을 기도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느님도 형제님에게 이용당하는 소와 같이 됩니다. 여물 줄 테니 밭 갈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 앞에서 하느님도 자유를 빼앗기십니다. 이것을 우상숭배라 합니다.
형제님이 이렇게 된 데에는 어렸을 때 어떤 상처를 받았거나, 혹은 부모님으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해 자존감을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돈과 명예로 나의 부족한 자존감을 극복하려 합니다. 아마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으려 했지만 인정해주지 않으신 상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과 가족들을 이용해 낮은 나의 자존심을 세우려 하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그러지 않습니다. 부모님으로 충분합니다. 이런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이 어른입니다. 어른은 하느님 앞에서도 내가 원하는 것을 얻게 해 달라고 떼를 씁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가족들의 자유도 빼앗습니다. 자녀를 위한다고는 하지만 아버지의 뜻이 강하기에 아마 자녀들의 많은 것을 간섭하실 것입니다.
가장 큰 도둑질이 사람의 자유를 빼앗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를 빼앗길 때 물건처럼 됩니다. 아드님은 이것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아들을 인정해주십시오. 둘째는 형처럼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것입니다. 기도하실 때 어린이처럼 되려고 하셔야지, 계속 하느님 앞에서 어른이어서는 안 됩니다. 당분간 나의 뜻을 하느님께 주장하기보다는 주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청하시고, 아드님에게도 생각할 수 있고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찾아갈 자유를 주시는 것은 어떠신가요?”
이렇게 말씀드리니 얼굴이 좀 더 일그러지셨습니다. “네, 다 제 탓이죠. 저는 아들이 제 말을 좀 잘 듣고 부모에게 순종하도록 설득해 달라고 신부님을 찾아온 것인데. 일단 알겠습니다. 제가 더 기도해야겠네요.” 저는 마음속으로 이 형제가 기도의 지향을 바꾸기를 기도했습니다. 기도로 자신이 더 큰 어른이 되어가는 것을 모르며 기도하면 기도가 그 사람을 더 악하게 만듭니다.
세속-육신-마귀는 사춘기 때부터 급격히 증가합니다.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것들을 청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기도를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그것들에서 벗어나 더 어려지기 위해 바치는 것입니다. 어려질수록 하늘 나라에서는 더 큰 성인입니다. 어려질수록 하느님께서 아버지시기에 내게 없던 자존감이 넘쳐납니다. 그리고 그 자존감의 수준이 곧 나의 행복의 수준이 됩니다.
이와 상반되는 사례가 있습니다. 독일 루르 한인성당의 고정아 막달레나 자매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글의 내용입니다. 그 자매는 간호사로 독일에 와서 정착한 분입니다. 하지만 남편의 뇌세포 소멸로 인한 장애증세가 나타나면서 그 자매의 삶은 더 힘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성당도 열심히 다니고 간호사로서 돈을 벌며 남편도 잘 간호하였습니다.
이때 자식 없이 사는 옆집 할머니로부터 희망의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자신이 자립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때 자신을 도와주면 남은 재산을 다 주겠다는 유언장을 변호사 앞에서 쓴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뒤 바로 풍을 맞아 쓰러졌습니다. 사람들은 그 자매가 일하며 남편과 옆집 할머니까지 간호하는 게 불가능하니 요양병원에 입원을 시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자매는 약속이 더 중요하다고 하며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겠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할머니의 서류를 정리하던 그녀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사실 쓰러지기 전에 자신의 모든 재산을 조카에게 넘긴 상태였습니다. 지금 사는 집도 조카 명의로 되어있었습니다. 할머니는 가진 돈도 없이 이 자매를 속인 것입니다. 자매는 돈 때문이 아닌 무엇보다도 할머니에게 배신당한 것이 마음이 더 아팠습니다. 조카들은 할머니에게 사실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매는 며칠 동안 처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이 자신 안에서 이뤄지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할머니가 불쌍하게 보였고 이젠 아무 대가 없이 더 극진히 간호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 자매는 바보 소리를 들어가면서 끝까지 할머니를 돌보았습니다. 몇 년이 지나 장례를 치룬 이후에도 무덤 관리까지 자매가 다 했습니다. 자매는 때가 되면 무덤에 가서 꽃을 꽂아줍니다.
이 자매의 기도는 분명 위 형제의 기도와 달랐습니다. 한 형제는 자신이 커지기 위해 기도했고, 한 자매는 어린이처럼 작아지기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기도하면 자매처럼 조금 슬프지만 그래도 가난하고 작아지고 순결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가끔 ‘성인’(聖人)이란 말도 합니다.
이것이 선교의 방법입니다. 성인들은 기도로 자신들을 어린이처럼 만든 분들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모습이 자신을 통해 드러나게 하신 분들입니다. 혹시 우리는 위 두 예 중 어떤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기도하면 성인이 됩니다. 그렇지만 기도한다고 다 성인이 되지는 않습니다. 더 어려지려고 기도해야 성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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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은 하늘 나라의 모든 성인을 기리는 대축일이다.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을 기리며, 또한 우리가 성인이 되어야 함을 일깨워주는 날이다. 아무리 많은 성인을 모시고 그분들을 공경한다 하여도 내가 성인이 되지 못하면 그 성인들과 나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내사 성인이 되도록 결심하는 날이어야 한다.
복음: 마태 5,1-12 : 참 행복: 산상 설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1절) 산으로 올라가셨다는 것은 사람들을 더 높은 삶으로 데려가시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제자들로 하여금 가장 높은 영적 덕을 갖추고서 그분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이다. 우리도 진리의 신비를 배우고자 한다면 교회라는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 거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신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3절)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회개하여 어린아이처럼 겸손해진 사람을 말한다. 세상의 부보다도 하느님 안에서 부유하게 된 사람이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 하늘 나라는 이미 덕을 실천하고 있는 이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삶이다. 이렇게 복된 사람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가난해진 사람들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4절) 슬퍼하는 사람은 슬픔이라는 고통이 끝남으로써 위로를 받는다. 여기서 ‘슬퍼한다.’는 말은 죽음이 아니라 죄 때문에 슬퍼한다는 의미이다. 나의 죄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 그리고 온 세상의 죄 때문에 슬퍼하는 이들은 더욱 복된 이들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5절) 복음 정신으로 젖은 온유한 사람은 주님의 온유함을 본받는다. 온유한 이들은 모욕을 하기보다는 모욕을 견디는 사람들이며, 그들은 이 세상과 앞으로 올 세상에서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세상이 타락의 종살이에서 풀려나 하느님 자녀의 영광에서 오는 자유를 얻으면, 살아있는 온유한 이들의 땅이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6절) 이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의로움만을 생각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의로움에 대한 목마름은 가난도 배고픔도 두려워하지 않는 참된 부를 낳는다. 하느님을 뵙는 것은 우리가 무로 사라지는 종말이 아니라, 우리가 완전해지는 종말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7절) 하느님께서 주시는 보상은 인간의 선행에 대해 다른 이들이 내리는 어떤 보상보다 뛰어나다. 거지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나도 하느님 앞에서 거지임을 기억하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거지를 대하는 대로 당신의 거지를 대하실 것이다. 참으로 자비로운 사람은 자신의 원수들에게도 자비를 베풀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8절)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죄를 끊고 믿음과 의로움을 실천하여 쌓는 행실로 하느님 마음에 든 사람을 의미한다. 바르게 행동하며 그렇게 하고자 생각하는 이는 누구나 하느님을 본다. 인간의 정의는 하느님의 정의와 닮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으로 만족하지 못하면 어느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한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9절) 평화는 믿음이 빛나고 희망이 굳게 자리 잡고 자비의 불이 타오르는 곳에 있다. 평화를 이루는 이들은 사도들의 가르침, 말씀 아래 하나 되어 교회의 평화를 지키는 이들이다. 이 평화가 있는 곳에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모든 일에 질서가 잘 잡혀있으며, 다툼이 없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다스림을 몸소 보여주는 이들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10절)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견디는 이들에게는 불안에 떨지 않고 그것을 견디는 은총이 주어진다. 사도들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의로움을 위하여 받는 박해의 복됨을 가장 잘 보여준다. 이 박해는 외국인에게서 만이 아니라, 자기 백성에게서도 의로움 때문에 받을 수 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11-12절)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늘 나라를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영광에 걸맞은 동료가 될 수 있도록 어떤 고통이라도 견뎌 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땅에서 걸림돌에 부딪히면 하늘의 영광을 그것에 비교해 보아야 한다.
이 행복한 사람들을 묵상하며 우리 자신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 하늘 나라를 얻는 우리, 즉 성인이 되도록 노력하고 참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결심하고 열심히 살도록 노력하는 오늘이 되도록 주님의 도우심과 은총을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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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는 성인들을, 또는 그 성인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일을 기념하고 경축하는 축일입니다. (전례력에 없는 성인들과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성인들을 특별히 더 기억하고 기념하고 경축하는 축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는 분들은 모두 다 성인들입니다.) 동시에 우리도 그분들처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고, 들어가기를 희망하고, 들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묵시록을 보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의 수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그들은,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손에는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어좌 앞에 또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묵시 7,9).” <이 말 앞에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라는 말이 있는데(묵시 7,4-8), ‘십사만 사천’은 실제 숫자가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들의 수가 많다는 것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 라는 말과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 ‘좁은 문’에 관한 말씀이(마태 7,13-14) 모순된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좁은 문’에 관한 말씀은, 구원받는 사람들의 수가 적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구원받으려면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문이 좁다고 해서 적은 수의 사람들만 들어가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격을 갖춘 사람들은 모두 그 문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떤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가? 그 자격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삶’인데, 우선 먼저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회개해야 하고(루카 24,47), 그리고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44-45).”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여기서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라는 말씀은, ‘아버지의 집에 들어갈 수 있다.’,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는, 그런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믿음이 없어도 사랑만 실천하면 된다는 것은 아니고, 믿음 안에서 실천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또 여기서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은 “완전하신(거룩하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처럼”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우리가 하느님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씀은,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로 해석할 수도 있고, “믿음과 사랑 실천을 통해서 신앙생활을 완성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5,17). (그 말씀에서 ‘율법’은 ‘신앙생활’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곧 신앙생활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들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라고 말합니다.(로마 13,8ㄷ.10ㄴ) 만일에 사랑 실천이 없으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으면 신앙생활이 완성되지 못하고, 그러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함으로써 신앙생활을 완성한 분들, 또는 완전한 신앙생활에 도달한 분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라고 믿는 것,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1)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불완전하고 부족한 존재입니다. 살면서 실수를 할 때도 있고, 본의 아니게 죄를 지을 때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자신의 부족한 점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완전’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처음부터 완전한 존재로 태어나는 사람도 없고, 태어날 때부터 성인인 사람도 없습니다. 성인들은 모두 끊임없이 노력해서 ‘완전’에 도달한 분들입니다. 우리는 그 노력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러진 갈대’ 같기도 하고, ‘연기 나는 심지’ 같기도 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니(마태 12,20), 우리도 포기하면 안 됩니다.
2) 신앙생활은 ‘이론’이 아니라 ‘삶’입니다. ‘말’만 하지 말고, 또 ‘생각’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말’이나 ‘생각’만으로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들어가고 싶다고 희망한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실천’ 없는 희망은 ‘죽은 희망’입니다.)
3) 신앙생활은 ‘끝까지’, 즉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하다가 멈추면, 처음부터 하지 않은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루카 14,29) 중간에 지칠 때도 있고, 주저앉아서 쉬고 싶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도 극복해야 할 유혹입니다. 힘들어도 다시 일어나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도움을 받는 일이고, 힘들다고 그냥 멈추는 것은 주시는 도움을 안 받겠다고 거부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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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9월 23일입니다. 하와이에서 국군의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중에 신원이 확인된 김석주 일병과 정환조 일병의 유해 봉환식이 있었습니다. 유해가 한국으로 오기까지는 긴 여정이 있었습니다. 미국과 북한은 전쟁 중에 숨진 군인들의 유해를 발굴하면 서로 보내주기로 했습니다. 남한에서 숨진 북한의 군인은 북한으로 보내주었고, 북한에서 숨진 미군의 유해는 미국으로 보내 주었습니다. 미국으로 송환된 유해 중에 한국군으로 확인된 유해를 하와이에서 한국으로 모시고 온 것입니다. 지난 8월 15일에는 멀리 카자흐스탄에서 대한 독립군 홍범도 장군의 유해도 모시고 왔습니다. 나라를 위해 헌신하다 숨진 호국의 영웅들을 끝까지 찾아서 모시는 것은 국가의 책임입니다. 대한민국의 영공으로 들어올 때, 대한민국 공군 전투기들이 호위하는 모습은 감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찾지 못한 국군 사망자는 12만 3천명이 있다고 합니다.
한국 천주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된 복자 윤지충 바오로(1759~1791)와 권상연 야고보(1751~1791)의 유해가 사후 230년 만에 발견되었습니다. 뒤이어 순교한 윤지충의 동생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1764~1801)의 유해도 함께 확인되었습니다. 천주교 전주교구장 김선태 주교님은 “올해 3월 전북 완주군 이서면 초남이 성지의 바우배기에서 성역화 작업을 하다가 순교자로 추정되는 유해와 유물을 찾았다”며 “유해를 면밀하게 검사한 결과 세 복자의 유해로 판명됐다”고 밝혔습니다. 우리가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시고, 공경하는 것은 그분들의 뜨거운 신앙과 열정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분들이 흘린 순교의 피와 땀으로 지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이 순교한 자리에 성지를 조성하고, 순례하는 것은 우리들 또한 그분들의 신앙을 본받기 위해서입니다. 한국교회는 103위의 성인과 124위의 복자를 모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순교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우리가 왜 그분들을 기억하는 것일까요? 그분들이 행복했기 때문일까요? 그분들이 하느님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때문일까요? 저는 그분들의 삶이 우리가 보기에 행복했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이 우리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행복한 삶을 살기 때문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은 주어진 길을 충실하게 걸어갔고, 감사하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를 채우는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행복은 제가 원하는 것을 채워서는 얻을 수 없었습니다. 행복은 주어진 시간을 충실하게 보내고, 감사하며 지낼 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행복은 마치 길과 같아서 내가 걸어가는 순간이 바로 행복이었습니다. 길은 가지 않으면 풀이 돋아나고, 없어지게 됩니다. 길은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오솔길이, 시골길이 되고, 차량이 다니는 길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신학교에 있을 때도, 보좌신부로 있을 때도, 본당 신부가 되어서도, 교구청에 있을 때도, 외국에서 지낼 때도 그랬습니다. 제가 감사하면 감사드릴 일들이 생겼고, 제가 사랑하면 사랑받을 일들이 생겼습니다. 제가 이해하니, 남들도 저를 이해 해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나라는 어느 특정한 시간과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나라는 지금 내가 감사하면, 지금 내가 사랑하면 바로 그곳이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행복도 그렇습니다. 원하는 것들이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이 행복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참된 행복을 이야기 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이런 삶은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삶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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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
#별지기 신부의 복음 묵상#
유튜브 듣기 : https://youtu.be/BitRA0tsxNQ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행복이란 단어는 모든 이가 바라는 것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의 감탄이고, 사람이 세상에서 자신의 거들짝을 만났을 때의 기쁨이며, 창조된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것을 만나고 그들의 이름을 지을 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에게 주고 싶어하셨던 가치도 이 ‘행복’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향하여 오는 것을 보시고 주님은 이야기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예수님은 당신을 만나러 오는 이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계십니다. 하느님을 찾는 이들이지만 그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힘겨운 삶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나 왠일인지 그들은 현실에서 그리 순탄한 모습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고,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자비롭고, 마음이 깨끗하며,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행복선언 속에 들어있는 이들은 이 세상에 가장 필요한 이들입니다. 욕심 없이 세상을 살아가며 하느님께 받은 가치를 지키고 살아가는 이들은 모두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이며,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하는 우리에게도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곧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살아간다면 우리는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모든 성인은 하늘나라에 사는 이들을 말합니다. 곧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 속 주인공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의 모습처럼 완전한 세상에서 그 가치가 말하는 참된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 하느님을 향해 사는 것은 세상에서 이미 천국의 삶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 첫 사람으로부터 내려온 자신에 대한 연민과 욕심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끊지 못하고 선하고 정의로운 이들을 박해하고, 그로부터 얻어낸 것들을 지키고 불리려 애를 씁니다.
그런 이유로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이들이 박해받고 손해를 보며, 상처받고 희생당하는 상황이 여전히 이어집니다. 어떤 이들은 견디다 못해 자신의 걸음을 되돌려 그들과 같이 싸우고 더욱 독하게 나빠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죄책감을 잊기 위해 더욱 허기진 사람처럼 선한 이들을 미워하고 조롱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행복한 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안타까운 이들처럼 살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결국 하늘나라에서만 이루어지는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압니다. 모든 성인은 성인품에 오른 누군가의 존경과 기억 속의 사람들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힘겨운 삶의 풍파 속에서도 가족을 위해 온 몸을 희생하며 가족들의 미소를 지키는 수많은 부모가 그러하고 모두를 위해 스스로 잘못의 위험과 유혹 앞에서도 당당히 고된 삶을 걷는 우리의 자녀들이 그렇습니다.
세상이 여전히 행복을 말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기쁨의 참된 길을 놓지 않는 것은 그런 성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땅으로부터 하늘로 연결된 그 길을 이어가는 주님을 향한 그 숱한 성인들에게 내려진 축복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행복선언 속에 들어간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오늘은 성인들의 삶을 이 세상에 전하며 살아가는 성인의 형제 자매의 삶을 이어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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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김경진 베드로 신부님]
행복은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서로의 마음이 닿아 있을수록 더해집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저도 가난하게 살고픈 소망 때문입니다. 나를 드러내는 가난이 아니라 영적인 단순함과 소박함 안에서 누리는 풍요로움을 통해 진정한 가난을 몸으로 살고 싶은 바람 때문입니다.
슬퍼하는 사람들과 슬픔을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세상의 슬픔과 절망이 반으로 줄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가 그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면 반드시 슬픔과 절망은 반으로 줄어들 수 있을 겁니다.
온유한 사람들의 따스함을 느끼고 싶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다가오는 추위에 마음만큼은 따뜻하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은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힘이 있습니다.
정의를 위해 세상의 편의를 마다하고 세속에 영합하지 않는 그들의 고결한 정신을 응원하고 싶습니다. 입으로만 정의를 부르짖는 게 아니라 삶도 정의로워야 한다는 것을 늘 잊지 않게 해 주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자비로운 사람들과 함께 자비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지금 아프고 굶주린 이에게 머리로 계산하고, 따지고 묻기 전에 먼저 따뜻한 밥 한 공기 대접하고 싶습니다. 그래야 사람 사는 맛이 날 것 같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을 더 자주 만나고 싶습니다. 그들을 만나면 덩달아 깨끗해지는 느낌입니다. 서로가 녹슨 영혼을 깨우는 자명종이 되어준다면 비 온 뒤 맑게 갠 청명한 하늘처럼 세상은 더 깨끗해 질 것입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가운데 서고 싶습니다. 그러면 저도 평화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을 대변하고 싶습니다. 그게 아니라고...용기 있게 그들의 편에 서고 싶습니다. 그분 때문에 받는 지금의 모욕이, 지금의 박해가, 우리에게 행복이 되어 돌아올 날을 기다려 봅니다. 설령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더디다 해도... 세상이 우리를 알아주지 않아도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행복합니다.
지금 우리가 행복하다고 얘기할 수 있는 건 세상이 가르쳐 준 행복이 아니라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 마음이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아 있기만을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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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조중원 다니엘 신부님]
<여러분! 성인 신자 되세요>
높고 푸른 하늘과 형형색색의 단풍을 뒤로하고 달력을 넘겨보니 올 한 해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11월의 첫날인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이며, 위령 성월을 시작하는 날입니다.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을 지내며 하느님과 함께 하늘 나라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을 기리고 그분들을 본받아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로 보냅니다.
영명 축일이나 사제 성화의 날이면 “신부님! 성인 사제 되세요.”라는 말씀을 신자분들께 듣게 됩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면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살아야지 하며 자기반성을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신자분들께도 ‘OOO 형제/자매님 성인 신자 되세요.’라고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목표인 하늘나라의 영광을 신자들과 함께 누려야지 어찌 신부만 누려서야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몇 년 전 모든 성인 대축일에 “성인이 되는 것은 소수들만의 특권이 아니며 세례를 통해 성인들의 유산을 물려받은 모든 이들은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성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완벽한 사람으로 영웅적인 삶을 살았던 분들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난 뒤 하느님 곁을 절대로 떠나지 않았던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성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나와는 거리가 먼 특별한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성인이 되고자 하는 인생의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인생의 목표가 분명하고 올바른 사람은 오늘 그리고 매일 마주하는 일에 소홀할 수 없고, 그 시간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지 않습니다. 적당히 타협하거나 자기합리화에 빠지지 않습니다. 쉽게 포기하지도 낙담하지도 않습니다. 혹여 목표에서 멀어진다고 할지라도 자신을 바로잡아 목표를 향해 나아갑니다.
성인이 되고자 노력하는 우리에게 성인들께서는 이렇게 격려하실 것입니다. ‘우리도 그대처럼 넘어지고 힘들었습니다. 두려웠고 때로는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과 그분의 도우심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었고 마침내 이렇게 그분을 마주 뵙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힘을 내십시오!’
성인들의 격려와 전구에 힘입어 인생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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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백호연 다미아노 신부님]
<행복선언>
어릴적 은총 시장을 위해 여동생과 함께 열심히 모은 은총표를 당일 날 모조리 잃어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은총표를 많이 모으기 위해 평일 미사까지 거의 빠지지 않고 열심히 모아 동생과 합쳐 당시 성당 아이들 중 가장 많이 모았는데, 물건을 사려고 보니 은총표가 없었습니다. 동생과 저는 곧 울음을 터뜨릴 같은 표정으로 구경만 하고 있었습니다.
은총 시장 판매를 담당하던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우리 남매를 보더니 '왜 그러냐'고 자초지종을 듣더니 그랬어? 에고 괜찮아'라며 떡볶이와 김밥 등 먹거리를 주고 필통과 기타 학용품도 거저 주시며 시무룩한 우리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사진도 공짜로 찍어주셨는데, 사진 속에 은총시장을 위해 예쁜 옷을 입고 있는 것과는 상반되게 울상을 짓고 있는 우리 남매의 모습을 보면 지금도 웃음이 나오곤 합니다. 그날 선생님들께서 괜찮다며 은총표 없이 주신 물건들보다, 평소 열심히 성당에 나간 우리 남매의 노력을 헤아려주시고 상처받지 말라고 위로해 주셨던 따뜻한 마음들이 저에게 더 큰 선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지나간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참 행복했음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들이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고 하십니다.
솔직히 주님께서 열거하신 사람들은 객관적으로 볼 때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어렵고 힘들어 보이는 사람들, 그래서 불행한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만 같습니다.
나에게 있어 아프지만, 참고 감내해야 할 순간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소중한 무엇'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이 소중한 가족이 될 수도, 사랑하는 연인이 되기도 하고 평생을 바쳐온 지식이나 신념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의 온 삶을 대변할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 소중한 가치를 위해 살아온 우리의 삶의 자리는 다른 이들에게 불행하게 비춰질 지라도 나에게 있어 행복한 삶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인들의 모습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가 하느님임을 깨닫고 평생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삶이었습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노고를 헤아리시고 하늘에서 갚아주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고, 주님께서 보시기에 '행복하다'고 말씀하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성당에 나오고 미사를 드리고 싶어도 할 수 없어 너무나 안타까워하시는 많은 분들을 만나곤 합니다. 그럼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하느님을 놓치지 않고 꾸준히 신앙생활 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하느님께서는 분명 헤아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분은 아픔을 감내하고 옳은 것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에게 '행복하다' 고 선언하시는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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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성성’에로 나아가라는 강력한 호소를 듣습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성성’에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제1독서>인 <요한묵시록>에서는 말합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란을 겪어낸 사람들입니다. 어린 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묵시 7,14)
구원에 이르는 길은 쉽지만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길은 부딪혀야 하는 수많은 시련들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참된 ‘성성’은 언제나 순교의 형태를 띠기 마련입니다. 인장을 받은 이들의 손에 들려있는 ‘야자나무’는 바로 이 시련에 대한 승리를 상징한다 할 수 있습니다.
<제2독서>인 <요한의 첫 번째 편지>에서는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 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3,2)
여기서, ‘성성’은 ‘신적 자녀 관계’로 드러납니다. 곧 ‘성성’은 우리의 생명 안에, 신적 현존이 더더욱 명백히 드러나도록 하기 위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상호 ‘추구행위’의 결과로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삶의 어떤 한 순간의 영웅적 행동에 의해 우연히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 항상 계속되어지는 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참된 행복”을 통해 ‘성성’이란,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나약성’과 ‘그분을 극단적으로 필요로 함’ 외에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는 곳에서 실현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가난을 사는 일’입니다. 이미 그분을 차지한 까닭입니다. 그러면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할 것입니다. 또 ‘슬퍼할 줄을 아는 일’입니다. 그것은 자신과 세상의 죄를 슬퍼하되, 자비 안에서 위로를 받고 기쁠 것입니다. 이미 깨어, 임을 바라보며 기도할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 ‘온유해 지는 일’입니다. 그것은 진정, 있어야 할 하느님 품에 이미 안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감미로움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은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일’입니다. 곧 그분 외에는 아무 것에도 목마르지 않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극단적으로 필요로 하는 일 외에는 결코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은 ‘자비를 베푸는 일’입니다. 이미 주님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깨끗이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손길에 매만져진 까닭입니다. 그리고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일’입니다. 그분의 영에 끌려 다스림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고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진정,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클 것입니다.
오늘, “모든 성인의 대축일”에, 이토록 우리는 복된 삶에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의 <수도규칙>의 성구를 새겨봅니다.
“성인이 되기 전에 성인으로 불리기를 바라지 말고, 참으로 성인으로 불리어지도록 먼저 성인이 되십시오.”(수도규칙 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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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행복하여라,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12)
주님!
제가 가난을 살게 하소서. 비록 ‘쓸모없는 종’이지만, 당신 앞에서는 부유하게 하소서.
슬퍼할 줄을 알게 하소서. 측은히 여기는 당신의 마음이 제 가슴에 부어지게 하소서.
온유하게 하소서. 겸손하고 양순하신 ‘당신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르게 하소서. 당신 외에는 결코 아무 것에도 목마르지 않게 하소서.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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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2)
평화를 빕니다. 오늘은 11월의 첫 날인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천상교회에서 기뻐 즐거워하고 있는 모든 성인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우리 모두의 영명축일입니다. 함께 축하합시다!
큰 환난을 겪어내고, 천상교회에서 영원한 기쁨과 행복 속에 사는 이들의 숫자는 신천지 이단이 주장하는 144,000명이 아니라,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묵시 7,9)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래서 '나약한 우리도 성인들의 뒤를 따라 영광을 기뻐하며, 그들의 도움과 모범으로 힘을 얻어, 활기찬 믿음으로 영원한 고향을 향하여, 나그넷길을 서두르고 있습니다.'(오늘 감사송)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하는 진복팔단(마태 5,1-12), 곧 '참행복에 이르는 여덟 가지의 길'입니다.
'진복팔단'은 하느님을 첫째 자리에 두고 산 사람들,
곧 하느님 생각으로 가득 찬,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들! 하느님의 마음인, 온유와 자비와 깨끗한 마음을 간직하고, 평화를 이루려고 애쓰는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 건설이라는 복음적 사명 때문에, 모욕과 박해를 받는 사람들!
참행복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큰 은총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부터 11월 '위령성월'을 시작됩니다. 우리보다 앞서 죽음의 다리를 건너간 이들, 연옥에서 단련 받고 있는 영혼들을 특별히 기억하면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자비가 내려지기를 청하는 달입니다. 그리고 곧 다가올 나의 죽음에 대해서도 깊이 묵상하는 달입니다.
'방하착!'
이 말은 '손을 내려 밑에 둔다.'는 뜻으로, '무엇인가에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입니다.
지금 자연의 피조물들이 방하착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때를 잘 인식하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피조물들을 본받아 '방하착'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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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 하느님!>
마태오 5,1-12ㄴ(참행복)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오! 하느님!>
마음이 가난하신 하느님!
슬퍼하시는 하느님!
온유하신 하느님!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르신 하느님!
자비로우신 하느님!
마음이 깨끗하신 하느님!
평화를 이루시는 하느님!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으시는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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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연히 제가 있는 강화군의 출산 지원금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첫째 아이를 낳으면 500만 원, 둘째는 800만 원, 셋째는 1,300만 원, 넷째부터는 2,000만 원을 준다는 것입니다. 또 양육비도 지원하는데, 첫째는 1년간 매월 10만 원, 둘째는 2년간 매월 10만 원, 셋째는 3년간 매월 15만 원, 넷째 이상은 3년간 매월 20만 원 제공한다고 합니다.
전국에서 최고의 혜택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도 강화도에 살면서 아이들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출생인구와 사망인구를 찾아보니, 사망인구가 출생인구보다 2.5배 높았습니다.
혜택이 많아도 왜 자녀를 낳지 않을까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실 행복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서민적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특별한 사람만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자기 나름의 행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행복의 정의를 어떻게 내릴 수 있을까요? 아마 ‘좋은 것을 정당하게 소유한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좋은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리고 그것을 소유하는 확실성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행복도 달라집니다.
지금 막 태어난 아기에게 돈다발을 준다면 행복할까요? 아닙니다. 아기에게는 엄마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커다란 행복을 얻습니다. 이처럼 어떤 처지에 있느냐에 따라 무엇이 행복한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나라 과거의 순교자들도 행복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부귀영화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찾았기에 순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8가지 행복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필두로 말씀하시는 8가지 모습은 행복보다 고단함이 더 많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를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 고단함을 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이 행복한 사람이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하늘 나라의 모든 성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관점이 아닌, 주님의 관점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제2독서의 요한 사도가 말씀하시듯이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되었습니다. 이를 ‘지복직관’의 상태라고 합니다. 하느님을 직접 보게 되는 가장 큰 행복의 상태에 다다를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 행복을 얻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내게 좋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찾고, 이를 소유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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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은 악하지 않다.>
비행기가 추락해서 두 동강이 났습니다. 객실은 연기로 가득 찼고, 언제 폭발할지 모르기에 생존자들은 빨리 이 비행기에서 탈출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때 사람들은 주위 사람에게 도움을 줄까요? 아니면 패닉 상태에 빠져서 자기만 살려는 아수라장이 될까요?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답합니다. 그곳은 아수라장이 되고 사람들은 자기만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실제 상황에서 이런 사람은 아주 드물다고 합니다. 오히려 남을 먼저 생각하고, 그 남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희생했습니다.
역사 안에서 ‘타이타닉호 침몰’, ‘911 테러’를 비롯한 커다란 재난 속에서 사람들은 사랑의 본성을 드러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본성은 절대 악하지 않습니다. 악하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일 뿐입니다. 그 본성을 유지하고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살아있는 모든 이의 몫입니다. 특히 주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그렇게 살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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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행복하십시오!>
교회가 어떤 사람을 ‘성인’으로 선포하는 것은 ‘성인들의 생애에서 드러나는 은총의 위대한 업적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하느님을 흠숭하고, 성인들의 거룩한 생애나 업적을 일부라도 본을 받도록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미 하느님과 일치하여 영생에 참여하고 있는 성인들이 아직 현세에서 구원의 길을 순례하는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 전구하여 주기를 청원하기 위한 것입니다’(정하권).
다시 말하면 현세를 사는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인들의 모범을 우리가 살아감으로써 성인들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성인을 올바로 공경한다는 것은 외적 행사의 복잡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사랑의 깊이에 있는 것입니다.
가경자 알베리오네는 “날마다 쉬지 않고 조금씩 주님께로 발길을 옮기는 것, 이것이 성인이 되는 비결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닮고자 노력하지 않는 한 결코 성인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자 앙투안 슈브리에도 성인의 길을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님에 대한 앎이 모든 것의 열쇠입니다.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님을 아는 것, 바로 그것만이 성인의 길을 걷는 신앙인의 목표요, 지름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인은“어쩌면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을 이 세상에서 사신 분들입니다”(함께야).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 험난한 고난의 길,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순명과 사랑의 길을 묵묵히 걸으신 분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1요한 1,12-13)이기에 성인입니다.
“행복합니다. 당신께서 뽑아 가까이 오도록 하신 이!
그는 당신의 뜰 안에 머물리이다. 저희도 당신 집의 좋은 것을, 거룩한 당신 궁전의 좋은 것을 누리리이다.”(시편 65,4)
그러나 그 성인의 거룩함을 잃어가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거룩함을 잘 간수하여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음의 가난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희망을 두기에 그에게 온전히 의탁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1.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음의 가난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희망을 두기에 그에게 온전히 의탁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것이기에 행복합니다.
2.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고 자기의 죄에 애통해 할 줄 아는 사람이기에 행복합니다.
3.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
온유하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상황, 처지, 여건에 흔들림 없이 평상심을 유지할 줄 아는 사람, 자제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4.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진선미를 갈망하며 천상 것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5. 행복하여라,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자비는 사랑입니다. 애간장을 녹이는 안타까움을 간직하며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을 베푸는 사람, 이웃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사람입니다.
6.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주님은 ‘내가 완전한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고 하셨습니다. 거룩함을 지닌 사람, 죄에 물들지 않은 맑은 영혼을 지닌 사람은 행복합니다.
7.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외형적인 평온에 앞서 내 마음 속에 있는 욕심과 무질서, 불의와 미움을 거두고 화해를 전해주며 갈라진 사람을 맺어주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8.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선한 일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시기와 질투, 모욕과 중상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도들은 주님 때문에 모욕을 당하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기뻐하였습니다.(사도 5,41)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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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인이 됩시다”>
-궁극의 희망이자 목표-
오늘은 11월 위령성월의 첫날이자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천상에 있는 또 지상에 있는 ‘이미 그리고 아직은 아니지만(already and not-yet)’ 하느님의 승리를 드러냈던 드러내고 있는, 드러낼 천상에 또 지상에 있는 모든 성인성녀들을 기념하는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대축일입니다.
하느님을 지극히 사랑하며 성인이 되고자 분투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대축일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의 나라는, 성인이 되는 것은 우리 모두의 궁극의 희망이자 꿈이요 목표입니다. 그리하여 하늘 향해 ‘희망의 문’을 활짝 열어 준, ‘희망의 빛’이 쏟아지는 11월 첫날, 모든 성인의 날을 기점으로 하여 저는 감히 11월을 ‘희망성월’이자 ‘성인성월’이라 칭하고 싶습니다.
참으로 희망과 기쁨이 샘솟는 모든 성인의 대축일입니다. 우리 모두 이제 지상에서 성인이 되어 천상의 기쁨을 앞당겨 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 11월 위령성월을 희망성월이자 성인성월로 삼아 참으로 한달 깨어 알뜰하고 보람있게,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바야흐로 성인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품위있게 사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과제로 주어졌습니다. 성인이 되라 불림 받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제2독서에서 요한 사도가 우리를 격려하며 고무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날로 주님을 닮아 순결해 가는 성인의 여정, 희망의 여정에 오른 우리의 복된 발걸음입니다. 오늘 제1독서 요한 묵시록의 하느님 어좌 주변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모든 성인들과 모든 천사들과 원로들은 바로 우리 궁극의 미래를, 희망을 보여줍니다.
“구원은 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양의 것입니다.”
“아멘. 우리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영예와 권능과 힘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이미 지상에서 이런 천상 성인들의 하느님 찬미를 앞당겨 사는 우리들입니다.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야자나무 가지를 든,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성인들은 바로 우리의 미래상이기도 합니다. 이들에 대한 원로의 해명이 은혜롭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바로 분투의 노력을 다해 순교적 삶을 사는 우리 모두를 상징합니다. 크고 작은 고통과 시련, 환난중에 정화와 성화의 여정을 통과해 언젠가 성인들이 되어 그분곁에 있게 될 우리들의 영예스런 미래상입니다. 바로 이런 궁극의 희망이 우리를 용기백배, 백절불굴, 날마다 새롭게 영적 승리의 파스카 삶을, 성인다운 삶을,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영혼들은 성인이 되고 싶은 궁극의 희망을 선택하여 한결같이 정진하는 이들입니다. 오늘 입당송도 어제 저녁성무일도시 신명나게 불렀던 마리아의 노래 후렴도, 또 오늘 감사송도 우리의 희망의 기쁨을 배가하며 우리 모두 성인답게 살도록 용기를 북돋웁니다.
“주님 안에서 다 함께 기뻐하세. 모든 성인을 공경하며 축제를 지내세. 천사들도 이 큰 축제를 기뻐하며, 하느님의 아드님을 찬양하네.”-입당송
“성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는 그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흰옷을 입고 어린양을 따라가는 도다.”-(마리아의 노래 후렴)
“오늘 아버지께서 저희 어머니인 천상 도읍 예루살렘을 보여 주시니, 거기서 저희 형제들은 이미 승리의 월계관을 받아 쓰고, 아버지를 영원히 기리고 있나이다. 나약한 저희도 성인들의 뒤를 따라 영광을 기뻐하며, 그들의 도움과 모범으로 힘을 얻어, 활기찬 믿음으로 영원한 고향을 향하여, 나그넷길을 서두르고 있나이다. 그들의 모범은 나약한 저희에게 힘이 되나이다.”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한 궁극의 희망이자 꿈이요 비전인지요! 신임 서울 대교장이 된 정순택 대주교의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문장 말마디, “하느님 아버지(Deus Pater), 어머니 교회(Mater Ecclesia)”도 우리의 궁극의 배경이자 희망을 상기시켜 줍니다.
어떻게 지상에서 성인다운 삶을 살 수 있겠는지요? 바로 그 지름길을 오늘 복음의 주님 행복선언이 보여줍니다. 우리에 앞선 모든 성인들이 참행복을 좌우명 삼아 살아 마침내 하느님 나라에 갔습니다. 십계명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구무진한 깊이의 참행복 대헌장입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매일 분투의 노력을 다해 영적승리의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참행복 선언의 수행입니다.
-“1.행복하여라, 마음의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2.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3.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을 땅을 차지할 것이다.
4.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할 것이다.
5.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6.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을 하느님을 볼 것이다.
7.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8.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우리 내면의 모습을 환히 비춰주는 거울같은 말씀입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영성대가들이 극찬極讚하고 격찬激讚했던 말씀입니다. 한번 자신의 성덕聖德 점수를 100점 만점에 20점은 기본점수, 각항목당 10점 만점으로하여 계산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성인이 되라 불림받고 있습니다. 성인이 되는 것은 바로 우리 궁극의 목표이자 희망이요 보람이자 행복이요, 우리의 의무이자 권리요 책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참행복의 성인이 되어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시며 격려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5,12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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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행복이 어디 있는지 들려 주십니다.
"행복하여라."(마태 5,3)
예수님께서 행복하다고 부르시는 이들이 누구인지 들어 봅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며, 온유한 이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르며 자비로운 이들, 마음이 깨끗하며 평화를 이루는 이들입니다.
이런 이들은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는커녕 뒤쳐지고 무시당하고 없는 듯 살아갑니다. 더 가지기 위해 큰 소리를 내거나 남을 짓밟지도 못하고 권모술수로 제 배를 불리지도 못하는 이들이지요. 남이야 죽건 말건 자기만 성공하면 그만인 세상에서 이들은 점점 더 약해지고 가난해집니다. 필요할 때는 그들을 찾아 조언을 구하지만 그들의 지혜와 중재로 상황이 나아지면 그들은 이내 잊혀지고 말지요. 그런 이들에게 행복하다 하시는 예수님 마음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너희가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1)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은 세속이 규정하는 행복과 꼭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은 돈이 많으면, 건강하면, 권력이 있으면, 외모가 출중하면, 높은 자리에 있으면, 욕망이 충족되면, 타인의 주목을 받으면 행복할 거라며 유혹하지요.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언젠가 우리가 본향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성삼위 하느님과 함께 누리게 될 영원한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 찐 행복을 위해서 세상이 제안하는 경쟁과 독식, 향락과 이기심을 견제하며 영육의 균형을 잡아나가지요. 더 취할 수 있어도, 더 이기적일 수 있어도, 더 큰소리칠 수 있어도 스스로 내려놓고 뒤로 물러서고 침묵하며 주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너는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는 말씀보다,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는 말씀을 듣고 싶어, 내 것 아닌 것은 미련 없이 내려놓지요. 그 말씀을 들을 때 영혼에 충만히 번지는 행복을 이미 체험한 까닭입니다.
제1독서에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바로 그 영광스런 하느님 나라를 마주합니다.
"저들은 어링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묵시 7,14)
구원의 어좌에 앉아 계신 하느님과 어린양의 앞에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이들이 늘어섰습니다. 희고 긴 겉옷은 그들의 순결과 일편단심, 열렬한 사랑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그 흰 빛이 어린양의 피로 빨아서 나온 색이라고 합니다. 눈물과 가난과 고통과 박해와 죽음으로 얼룩진 옷이 어린양의 피를 통해 희어졌다는 사실이 참 신비롭지요. 우리가 세상에서 겪는 고통은 예수님의 피를 통해 우리를 더 정화되고 성화된 존재로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이는 믿음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진리지요.
제2독서는 우리에게 지복의 희망을 선사합니다.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3,2)
지상의 순례 여정을 마치고 주님을 뵙게 되는 날, 우리에게 새겨진 무수한 눈물 자국과 상처들과 고통의 얼룩들이 우리를 증거할 것입니다. 그분은 단박에 우리를 알아보시고 우리가 당신처럼 되기를 허락하실 것이지요.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고 그분처럼 되는 건 우리와 그분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그때가 바로 하느님의 모상인 피조물로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완전한 귀향의 절정이 되리라 믿습니다
"행복하여라."
여러분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행복하다면, 아니, 행복하지 않다면 세상의 기준으로 그런 건지, 믿음의 기준으로 그런 건지 곰곰이 살펴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모든 성인들의 행복을 관상하며, 성인들과 한 목소리로 행복을 노래하고 주님을 찬미하면 좋겠습니다. 이 탐욕스롭고 유혹 많은 세상에서 말씀을 꼭 붙잡고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성인이 되어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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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HxBYfP7AL2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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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마태 5, 12)
삶의 시간은
짧다.
그러기에
소중하고
의미있다.
영원한
절망은
없다.
절망을
치유하는
실천의 삶이
있다.
모든 성인들은
진실한
실천에서
복음의 삶을
기쁘게 사셨다.
진실한 뜻은
진실한
실천으로
이어졌다.
기쁨을
실천하는
분들이었다.
성인들의
양심을
만나는
은총의
아침이다.
깨끗한
마음을
만난다.
마음이 맑아지면
세상도 맑아진다.
성인들의 삶은
과거로서만
남는 것이
아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기쁨을
전달한다.
저마다
고유한 삶으로
하느님을
사랑하였다.
삶을 다르게
보게 된다.
고통을 다르게
보게 된다.
이것이
모든 성인들이
만난 새로운
기쁨이다.
하느님 안에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낡은 생각
낡은 마음을
떠나 새로운
삶을 시도하였다.
새로운 시도가
필요한 삶이다.
이것이 깨어있는
일상의 삶이다.
모든 성인들이
실천한 사랑의
길 위에 우리가
있다.
오로지 사랑의
실천이 진정한
행복이며 참된
기쁨임을
보여주고 있다.
감당할 수 있는
십자가에서
자유를 체험한
모든 성인들의
삶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길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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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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