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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타 1피
봄엔 바다에서 육지로 바람이 불지만 가을엔 섬에서 바다로 바람이 분다. 오후가 되어 쌀쌀한 가을바람이 섬에서 불어왔지만 황소우럭 한 마리 때문에 혜림과 도치씨가 탄 선상은 봄바람처럼 훈훈했다.
혜림의 황소우럭을 낚시 선에 탄 꾼들의 점심만찬에 헌납 받았다는 소식을 사무장으로부터 들은 선장이 머리털 나고 처음 있는 일이라고 방송한 후, 고동을 길게 세 번 울려 감사를 표했다.
점심식사가 낚시선의 앞뒤에 반반 나뉘어 시작됐다. 일한 뒤의 밥맛도 좋지만, 낚시하느라 물 한모금도 제대로 마시지 못했던 꾼들의 선상식사는 프랑스뷔페 못잖았다. 간이 안 맞아도 꿀맛이고, 재료가 부실해도 진미다. 혜림이 제공한 황소우럭이 주연 급으로 등장한 오늘의 선상식사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수퍼특식이다.
혜림의 황소우럭과 꾼들이 제공한 우럭으로 사무장이 조리한 회와 매운탕이 선미와 선수의 갑판에 차려지자 순위가 없는 숟가락 경쟁이 시작됐다. 형제 많은 집 식탁은 머리 먼저 박는 놈이 한 숟갈이라도 더 먹고, 선상식사엔 숟가락 먼저 든 놈이 한 수저라도 더 챙기게 돼 있다.
낚싯배의 갑판은 점심 식사하는 떠들썩한 소리와 종이컵을 입으로 부딪치는 소리가 뒤섞여 왁자지껄했다.
50대도 그 속에 섞여 한몫 챙기고 있었다.
마침 지나가는 사무장에게 50대가 우럭 회 접시를 가리키며 물었다.
“어느 것이 황소여유?”
살아 있을 때 황소우럭이지 썰어놓으면 그게 그거다. 허지만 50대는 황소우럭 근육을 구분하고 싶은 모양이다.
“허연게 놀래미고 붉으스럼한 게 우럭이오”
“아가씨가 잡은 황소우럭은 어떻게 구분혀유?”
사무장이 웃으며 기막힌 표정으로 말했다.
“황소기운이 고루고루 베어 들으라고 전부 섞었소.”
“뭐여유? 황소우럭을 섞는다고 그냥 우럭이 황소 되남유?”
사무장이 핀잔하듯 말했다.
“그것 참, 얼굴가리고 살 섞어 봐. 그년이 그년이지.”
아줌씨라고 불러 혜림을 서운하게 했던 노익장이 말을 받았다.
“뭐라? 얼굴가리고 살 섞는 다는 말은 처음 들어보네.”
사무장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나는 우리 마누라하고 살 섞을 땐 꼭 두 눈을 감소. 그게 얼굴가리는 거지 뭐긴 뭐요?”
“살다 별 소리 다 듣겠네? 그렇게 마누라가 보기 싫은데 장가는 왜 갔능고?”
사무장이 버럭 큰 소리로 말했다.
“어르신 모르는 소리마소. 꽃도 향기가 좋아야 보는 맛이 있지 시들면 누가 쳐다 본답디요? 그러니까 눈 감는 것이지요.”
“허허, 시들어도 꽃은 꽃이요. 그러면 못써요. 천벌 받을 짓이지.”
마주 앉은 중년이 두 사람의 입씨름에 제동을 걸었다.
“와따. 쓰잘데없는 헛소리 그만하고 잔이나 돌리소.”
50대가 앞에 놓여 있던 잔을 재빠르게 나눠 줬고 사무장이 술을 따랐다. 술이 가득 찬 잔을 들고 중년이 말했다.
“술 마실 때 눈 뜨는 놈 봤소? 아무리 독한 놈이라도 반은 감는 법이오.”
중년의 말에 소주잔을 입으로 가져 간 꾼들이 저마다 중년의 말처럼 술을 마시며 자신은 눈을 감는 가 아니 감는가를 가늠하며 술잔을 비웠다. 술잔을 비운 꾼들이 모두 웃었다. 웃음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아, 알 듯 모를 듯 애매모호했다.
선상에서 한자리 앉아 식사하면 모두 동서가 된다. 동서는 형제라는 의미다. 형제라는 뜻은 혈통을 상징하고 피는 하나란 동질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이신일체異身一體란 뜻이다. 그래서 한배타면 동서란 옛말이 딱 들어맞는다. 물론 그 배와 이 배는 종류가 다르지만. 어쨌거나 발음은 똑 같으니까 그게 그거다.
남자들이 모여 뜻만 맞으면 이렇게 동서지간이 되는 낚시 선상이다. 이런 사이에 이런 농담은 필수나 다름없다.
혜림은 남자들 틈에 끼어 남자들의 허물없는 농담을 조용히 듣고 만 있었다.
보통여자라면 꾼들의 대화에 얼굴을 붉힐 만하지만 혜림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내숭이 없는 여자여서 그렇다. 도치씨를 낚았을 때, 불알에 박힌 바늘을 뺄 때도 혜림은 부끄러워하거나 미안해하지 않던 여자다. 만약 내숭이 심한 여자였다면 병원까지 가는 동안 고통에 못이긴 도치씨는 기절하거나, 아니면 불알이 터져 고자가 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혜림의 낚싯바늘에 도치씨가 불알을 꽂힌 것은 운명이고, 도치씨 불알에서 낚싯바늘을 빼준 혜림은 하늘이 내려 준 은인인 셈이다.
한참 우럭회와 매운탕에 빠져 있던 혜림이 주위 꾼들이 권하는 소주잔을 3잔이나 비운 후 식사를 끝냈다.
아이스박스를 깔고 앉은 혜림이 도치씨에게 스마트폰에 담긴 인증 샷 그림을 감상하자고 제안했다.
도치씨는 황소우럭의 머리통에 가려졌을 자신의 얼굴을 생각하고 한사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잔꾀를 부렸다. 얼굴이 정통으로 나온 혜림과 달리, 황소대갈통에 가려진 자신의 얼굴에 시비가 붙을 게 뻔하다고 생각해서 쉽사리 스마트폰을 꺼낼 수 없었다.
그러나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일단 한번 고집을 부리면 양보는 없고, 한번 한다면 하는 혜림이다.
기어코 요리조리 빠져 나가려는 도치씨를 어르고 협박해서 스마트폰의 갤러리에서 인증 샷을 불러냈다.
도치씨는 인증 샷을 확인한 즉시 터져 나올 혜림의 무차별원점포격에 대비하며 눈을 딱 감았다. 그리고 굳게 다짐했다. 내 얼굴이 사라진 것은 무조건 잡아떼자. 50대의 실수라고.
허지만 50대가 찍은 인증 샷은 정교했다. 혜림이 웃으며 말했다.
“자기야 사진 너무 잘나왔다.”
도치씨는 두 귀를 의심했다. 황소우럭의 머리통에 가려 졌을 자신의 얼굴을 보고 비꼬는 뜻에서 잘나왔다는 건지, 아니면 혜림 자신의 인물이 잘 찍혔다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아 실눈을 뜨고 혜림이 들고 있는 스마트폰의 그림을 옆 눈으로 훔쳐봤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야?
분명히 혜림이 꼬리 부분을 들게 하고 자신은 머리 쪽을 들었다. 거기까지는 맞다. 그리고 50대가 셔터를 누르는 순간 정확히 자신의 얼굴을 황소우럭 대갈통 뒤에 숨겼다. 허지만 없어야 할 자신의 얼굴이 황소우럭 머리통위에 선명하게 나와 있지 않은가?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단 말인가? 도치씨는 후닥닥 눈을 떴다.
혜림이 말했다.
“봐! 자기! 잘나왔지? 황소머리통하고 참 어울린다. 역시 자기는 사진발 잘 받아! 난 꼬리하고 잘 어울리고.”
이런? 이럴 수가 있나?
도치씨는 가드레일 앞에서 낚시 준비하는 50대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치를 떨었다.
기는 놈 위에 뛰는 놈 있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50대가 그랬다.
오랫동안 아마추어 사진모임에서 활동했던 50대는 사진실력이 보통수준을 넘어 프로실력이었다. 날아가는 총알도 찍는 사람이다. 도치씨가 몰랐을 뿐.
셔터를 누르려는 순간 도치씨가 황소우럭 머리통 뒤로 얼굴을 내리자 반사적으로 스마트폰을 도치씨의 얼굴이 내려간 만큼 민첩하게 올려 찍었던 것이다.
도치씨는 열린 창문 안을 기웃거리는 도둑놈 표정으로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우럭의 대갈통 위에서 긴장해 있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 도치씨는 놀란 정도가 아니라 심장이 멎는듯했다.
허지만 더 놀라운 사실이 도치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스톱으로 치면 분명히 스리고 피박이 확실해 고 했는데, 3타 1피도 건지지 못하고 계속 설사한 꼴이 된, 더 놀라운 사실에 도치씨는 거의 초죽음이 됐다.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만 해도 엄청난 행운이었다.
첫댓글 혜림은 그런대로 행복해 하는 모습이지만
우아영에게는 또한 문제가 생겼군요..
아무튼 선상에서 이루어진 황소우럭 때문에
모두 포식을해서 행복한 모습 이네요..
날씨가 흐립니다
허지만 젠틀맨님은 신나는 날되세요
낚시배에서 황소우럭이 아니어도 맛있을텐데
서로 더먹을려고 하는 모습이 더욱 맛있어 보입니다.
선상의 식사 정말 죽입니다
재미있구요
오늘도 행복하기입니다
60대 그사람 사진 한번 잘찍었네요~ㅎㅎ
그러나 도치에게는 또하나의 걱정 거리가 아닐수가 없네요.
으악!
오늘은 세상미님이? 60대?
어제는 젠틀맨님이 60대...진짜 죽이네요...ㅋㅋㅋㅋ
행복한 하루되세요
작가님 프랑스 요리도 들어 보셨군요..
모르시는게 없으세요..
화기애애한 선상의 모습을 그려 봅니다.
ㅎ
저 먹는거 밝히지 않지만 프랑스뷔페는 먹을 만합니다. 특히 현지식사...
허지만 아주 고급호텔 아니면 잠자는 건 우리보다 못합니다
오늘도 즐겁고 신나는 날되십시오
술을 마시는데 왜 눈을 감고 술을 마실까요
저는 안그러는데요..
주독 걸린사람들이 술맛을 음미 하는 걸까여~~~ㅎㅎㅎ
앗!
립스틱님은 술마실 때 두 눈 부릅뜨고 마시나요? 음마야!
반쯤 눈을 감고 마셔야 제 맛인데...이상하네요
두눈 부릅뜨고 마시는 분은 성질이 거시기하다던데....ㅋㅋㅋㅋㅋ
소설도 제미있슴니다./
그런데 댓글이 더우습네요..
ㅎ
소설보다 댓글이 더 재미있다고 하셨지요? 두고 볼 참입니다. ㅋㅋㅋㅋㅋ
오늘도 남은 시간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