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 차춘호
배가 고프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고생인데 늘 이렇게 끼니도 제 때 못 챙기다니.
아무리 대장간 칼이 녹이 슨다지만
식당에서 일하면서 밥을 굶는다고 하면 믿을 사람은 몇이나 될까.
오죽하면 밥조차 얻어먹지 못하느냐고 나를 오히려 비웃을 것이 틀림없겠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계제가 아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 아침에 끓여 놓은 배추 된장국에 밥을 말아
김 시금치나물 고추조림 오이무침 등의 반찬을 얹어 맛있게 먹는 일이다.
전기 밥솥에는 내가 좋아하는 흑미를 넣어 지은 밥이
적당히 데워진 채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침이 꿀꺽 넘어간다.
식당 일은 언제나 바쁘다.
손님이 많고 적고 상관없이 할 일이 끊이지 않는다.
파 다듬고 마늘 까고 고기 삶고 나물 무치고 김치 깍두기 담고
전 부치고 닭다리 튀기고 갈비 굽고 생선 손질하고
손님이 들면 요리 보조하고 손님이 가면 쌓이는 설거지하고
그 많은 일을 어찌 다 적겠는가.
손은 물에 퉁퉁 불기 마련이고
더러는 끓는 물에 때로는 튀김 기름에 데기 십상이고
신발에 꽉 낀 발에서는 불이 붙는 듯하고 가름 때를 놓친 오줌통이 넘쳐서
한 방울 쯤 흘러도 느끼지 조차 못하는.
그래도 밥만 제때 제대로 먹을 수 있다면 이렇게 긴 말 늘어놓지 않겠다.
바쁘게 돌아 칠 때는 사실 허기도 느끼지 못한다.
잠깐 숨 돌리는 사이 쪼로록하는 뱃속의 공명을 들을라치면
순간 눈물이 핑 돌고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참은
오줌을 펑 싸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일생 해 온 일이 부엌일이고
이곳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식당 주방뿐인 것을.
나는 다만 이토록 배가 고프고 싶지 않을 따름이다.
아침저녁은 집에서 먹고 점심 한 끼만 일하는 식당에서 해결한다.
정해진 시간은 없다.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들 각자 알아서 먹어야 한다.
그것은 홀에서 일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주인이 밥 먹으라는 소리를 하지 않아서 굶었다.
의아했다. 어째서 주인이 부리는 사람을 챙기지 않을까.
주방장에게 물었다.
여기는 알아서 챙겨 먹는 거예요. 아줌마가 알아서 먹어요.
솥에 밥 있고 또 있는 반찬에. 허지만 어떻게 먹어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하는 모양을 살펴보니 그냥 큰 접시에 밥은
많이 반찬은 몇가지 얹어서 국도 없이 주방 빈자리
5갤런 짜리 간장 통을 깔고 앉아 황급히 먹는 것이었다.
그럴 수는 정말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그래서 차라리 점심을 굶고
참았다가 집에 와서 식탁 위에 요것 조것 늘어놓고 먹기로 했던 것이다.
아직 배가 덜 고파 봐서 그래.
식당 식구들 중에서 그렇게 소곤거리는 사람도 있겠지.
그래도 상관없다. 나는 나니까.
시간은 여덟 시를 지나고 있다. 그런데 차가 밀린다. 사고인가.
그렇다면 낭패다. 돌아갈 수도 없고 길도 모른다.
다른 길로는 가 본 적도 없다. 마침 맥도날드 앞이다.
차라리 햄버거로 때울까. 이젠 배가 고프다 못해 쓰리다.
집으로 가는 길목에는 서너 개의 패스트 후드 가게가 있다.
제대로 간다고 해도 집에 도착하려면 이십여 분 걸릴텐데
그 시간 동안 내 배가 참아 줄지는 나도 장담 못한다.
나는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애쓴다. 좋았던 때 한국에서 살 때
아이들을 앞세우고 가서 먹던 갈비, 시원한 물냉면,
커다란 왕만두, 빙빙 돌아가는 컨테이너에서 골라 먹던 회전 초밥.
아아 배만 더 고파질 뿐이다.
식당 주인에 대한 원망을 비켜갈 수가 없다.
어째서 그만한 식당을 경영하는 재력이 있는 자가
부리는 사람들의 배를 이렇듯 곯릴 수가 있단 말인가.
월급제가 아니고 시급제라서 그런가. 도대체 종업원들이
잠시 잠깐 앉아 있는 꼴을 못 본다.
화장실에 가서 변기를 타고 앉아 있는 시간이 유일하게 쉬는 순간이다.
다른 사람들은 불만이 없는 것일까.
자의 건 타의 건 끼니를 걸르면서까지 식당 일은 할 수가 없다.
차라리 집에 가만히 앉아서 굶는다고 해도 이처럼
슬프고 분노가 생겨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 그만 두자. 다른 일 할 곳을 알아보자.
다 그렇지는 않겠지 먹는 인심이 후한 주인들이 더 많을 거야.
애초에 그런 대접을 받았을 때 알아봤어야 했어.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자 이상하게 배도 좀 덜 고픈 것 같고 앞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파트 문을 열자 전자 밥통의 보온 불빛이 정답게 나를 반긴다.
나는 국냄비에 불을 붙인다. 상을 차리는 동안 적당히 데워질 것이다.
식구들이 아직 돌아와 있지 않은 것도 다행이다.
이것저것 있는 반찬 다 늘어놓고 아주 우아하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혼자만의 만찬을 즐길 것이다.
나는 오직 오늘의 저녁 식사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정성 들여 밥상을 차렸다.
냅킨 위에 수저를 놓고 냉장고 속의 반찬도 통 채로 놓지 않고
한가지씩 접시에 덜어냈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국을 이민 올 때 가져온 행남자기 국화 문양 대접에 담았다.
밥공기 또한 세트다.
이제 밥만 푸면 된다.
밥 솥 뚜껑을 열었다. 순간 나는 뚜껑을 닫았다.
빈 솥이다. 밥이 없다.
밥이 없다니 그럼 보온 불빛은 무엇이란 말인가.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아이들이 밥만 퍼먹고 코드를 뽑는 것을 잊은 것이리라.
그 많던 밥을..... 누구 친구라도 다녀갔나보다.
배가 고프면 머리는 잘 돌아가는 법이다.
그런데도 눈물은 핑 돌고 어쩔 수 없이 무릎은 꺾이고 나는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냄비의 물은 쉬 끓지 않았다.
라면을 찾느라고 캐비넷을 뒤지는 내 입에서 투덜거림이 새나왔다.
전기 스토브는 정말 싫어.
한국에서 쓰던 가스렌지조차 그리운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