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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육지호혈(六指呼血)-4
어설프게 끝나버린 장강전투의 여파로 홍면금살군이 타고 있는 선박은 무거운 분위기로 가
득했다. 그러나 전서구로 날아온 세 장의 첩지는 무거웠던 분위기를 암담하게 만들었다.
첫 번째 첩지는 북해방의 공격으로 강북 전역에 깔려 있는 분타들이 괴멸 당했다는 내용이
었다. 게다가 강북의 정파 세력이나 가문들까지 공격에 합류했고 북해방의 정예가 총단을
포위했다는 내용은 홍면금살군을 미치게 했다.
두 번째는 관군이 황하72수로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이었다. 황하 전역에서 동시다
발적으로 일어난 관군의 대대적인 공격은 황하72수로채의 뿌리를 뽑으려고 작정을 한 듯 그
동안 벌였던 형식적인 토벌과 전혀 달랐다.
그 소식을 접한 황하수로채의 총채주는 사색이 되어 안절부절했다. 그러나 관군이 동원된
이면을 생각하는 홍면금살군의 굳은 안색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홍면금살군은 누군가 강
호전역을 뒤엎을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는 예감에 전신을 떨고 있었다.
마지막 세 번째 첩지는 남해방 총단을 공격한 혈영대가 몰살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혈영
대가 강하긴 했지만 남해오각의 정예들이 깔려 있던 남해방 총단의 공격은 무리였던 것이
다. 홍면금살군은 암담한 소식에 할 말을 잃고 멍하니 흐르는 강물만 바라보았다.
북해방주 역시 갑자기 변화된 상황에 넋이 빠져버렸다. 처음에는 북해방 총단을 궤멸시킨
세력을 찾겠다고 움직이던 악중악이 굳은 안색을 하고 들어와 보고하면서 시작됐다. 악중
악이 먼저 알려준 소식은 북마각의 몰살이었다.
북해방주는 북마각이 몰살당한 자세한 사정을 듣고 어이없어 했다. 북마각주가 그렇게 어
리석은 행동을 했다는 사실에 할말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북사각의 장렬한 최후는 또
다른 의미로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근 일 각 동안 침묵하던 북해방주는 허공을 바라보며 넋
두리를 했다.
"도정각... 자네야말로 북해방의 유일한 무인이야. 그런 자네가 사라졌다면 북해방은 무엇이
되겠는가..."
사자철권 도정각의 죽음은 북해방주에게 큰 충격이었다. 북해방주의 특이한 성정은 인재가
모이기 힘들어 사해방 전체를 통 털어 북해방의 세력이 가장 약했다. 그런 와중에서 도정
각은 그 열세를 만회해주던 인물이었다.
"누구냐? 도대체 누가 도정각을 죽였느냐?"
"북마각과 총단을 없앤 세력입니다."
북해방주의 이글거리는 눈동자는 악중악도 받아 내기 힘들었는지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흐흐흐... 그렇다면 본 방의 최대 원수로구나. 도대체 누구냐? 말을 해라. 중악."
"이원의 서문종입니다."
"서문종!"
"그렇습니다."
북해방주는 의자에 앉아 한참을 고뇌했다. 동창의 수반으로 오랜 시간을 보낸 조덕환은 이
원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비록 정확한 내용을 알지는 못했지만 이원의 존재와 좌장과 우
장, 신녀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들이라... 그렇다면 동창이 위험하다!"
북해방주는 이원의 등장이 주는 의미를 알고 있었다. 황실과 나라에 위험이 되는 요소를
발견하면 즉각 공격해 멸망시키고, 황제에게 위험한 인물이라고 판단하면 곧바로 암살해버
리는 세력이 이원이었다. 그런 이원이 움직였다는 건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북해방주는 이원이 대놓고 자신을 노렸다면 자금성 내부에서도 엄청난 문제가 생겼다고 직
감했다. 그 직감은 정확했다. 혈방 공략을 포기하고 자금성으로 되돌아가려고 움직일 때
동창에서 보낸 마지막 서한이 도착했던 것이다.
서한에는 조덕환이 동창의 수반에서 파직됐고 역적으로 몰렸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게
다가 오군도독부가 직접 나서서 동창에 존재하는 자신의 심복들을 모조리 제거한 사실에 북
해방주는 할말을 잃어버렸다.
"끝났군... 모든 게 끝났어."
북해방주는 힘없이 주저앉았다.
"아닙니다. 아직은 역전의 기회가 있습니다."
"무슨 소리냐? 북풍각주."
"방주님은 아직도 충성을 받치는 일 만이 넘는 북해방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천장별부가 있
지 않습니까."
"천장별부."
계속되는 타격에 잠시 실의에 빠져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낸 북해방주를 악중악은 다시 한번
불타도록 기름을 부었다.
"중악."
"하명하십시오. 사부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사제지간이고 지위를 부르면 북해방의 방도가 되는 관계. 갑자기 이름
을 부르며 가까이하려는 북해방주의 뜻을 악중악은 잘 알고 있었다.
"지금부터 오행도와 남은 푸른 늑대조각 2개를 얻는데 모든 전력을 다한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혈방 총단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국가에서 추적이 시작될 것이다. 이제 혈방 총단 공략이니 강북을 장악하니 하는 건 무의
미하다. 이제 모든 것은 천장별부에 달렸다."
북해방주는 세력을 보호하기 위해 최대한 숨겨야한다고 결론지었다. 다시 한번 도약의 발
판을 삼기 위해 북해방의 세력을 숨겨야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슬쩍 흘렸을 때 악중악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살짝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북해방주는 악중악의 미소를 그만 보지 못했다. 연이은 충격으로 인해 집중력이 떨
어졌던 것이다. 특히 동창의 수반에서 파직된 일도 충격이지만 오군도독부가 자신을 추적
할 거라는 예측이 북해방주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조덕환은 오군도독 한우령의 진면목을
유일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점창파의 장로는 불안과 초조로 차를 마시던 손까지 떨고 있었다. 그러나 장로와 같이 점
창산에 오른 청귀조장은 눈썹 하나 까닥이지 않고 평안하게 앉아 있었다.
"잘 해결할 수 있으시오?"
점창파 장로는 청귀조장에게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동행하는 동안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청귀조장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 그동안 대화를 자제했지만 대사를 눈앞에 두자 마음이 불
안했던 것이다. 그러나 청귀조장은 일언반구도 없이 싸늘한 안색을 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정말 답답하구려."
점창파 장로는 속이 타는지 가슴을 두들겼다.
"장로. 안에 계시오?"
"자, 장문인."
"계시구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갑자기 나를 보자고 했소?"
점창파 장문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순간 문가에 무릎을 끓고 앉아 있던 청귀조 대원
이 점창파 장문인을 껴안았다.
"무슨 짓이냐?"
청귀조 대원의 포대공은 강력했다. 점팡파 장문인이 분노하며 내공을 뿜어내 청귀조 대원
을 날려버리려는 순간 청귀조장의 환도가 무서운 속도로 뽑혔다.
착.
가공할 발도였다. 언제 칼이 뽑히고 휘둘렀는지 보이지 않았다.
툭. 투툭.
"허억!"
두 개의 수급이 떨어지자 점창파의 장로는 경악하다 못해 두려운 눈으로 청귀조장을 바라보
았다. 청귀조장은 점창파 장문인과 자신의 부하의 목을 한꺼번에 갈라버렸던 것이다.
"갑시다. 어른께서 기다리시오."
"무, 물론 그래야 하지요. 하지만..."
청귀조장의 섬뜩한 안광에 오금이 저린 점창파 장로는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멈추어야했다.
'무, 무슨 눈이 저렇단 말인가... 이건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다. 귀신...'
점창파 장로의 눈에 목적을 위해서 부하의 목까지 서슴없이 치는 청귀조장이 사람으로 보이
지 않았다. 그러나 애써 장문인을 살해했는데 자리를 피한다면 점창파를 장악할 수 없었다.
잘못하다가는 다른 인물에게 점창파를 뺏길 수도 있었다.
"점창파를 장악해야 합니다. 그냥 간다면 죽을 쒀서 개에게 준 꼴입니다."
점창파 장로는 어느새 체면조차 버렸는지 청귀조장에게 공손하게 대하고 있었다.
"당신은 어른께 약속했소. 점창파 장문인만 해결되면 끝난다. 곧바로 돌아와 도와드리겠다.
나는 약속을 지켰소. 이번에는 당신이 약속을 지켜야 할 때요."
"그, 그렇지만..."
"점창파를 한족에게 돌린다. 그게 당신의 목적이오. 점창파에는 당신말고도 한족 출신의 장
로가 있다고 들었소."
청귀조장의 손이 슬그머니 칼자루에 가는 것을 보는 순간 장로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놈에게 갖다 받친 꼴이구나...'
청귀조장이 말한 한족 출신의 장로야말로 장문인보다 더한 적수였다. 자신이 장문인이 되
는 순간 그부터 정리하고 운남을 제패하려던 장로의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어서 갑시다."
"그러시죠..."
장로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의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청귀조장이
장문인과 자기 부하 시체를 놔두고 움직이자 깜짝 놀란 장로는 한마디했다.
"시체를 정리해야 하지 않습니까?"
"사람이나 짐승이나 죽으면 똑같이 고깃덩이에 불과하오. 치워야 할 이유가 없소."
청귀조장의 대답은 삭막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이대로 사라진다면 장문
인 살해혐의로 평생을 점창파에게 쫓겨다녀야 한다. 점창파를 장악하려다 거꾸로 처단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장로는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하기로 했다.
"그래도 부하의 시신은 묻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청귀조장이 제 부하의 시신을 묻는 동안 장문인의 시체를 처리해 증거를 인멸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쓸데없는 일이오. 어차피 무사는 칼로 살다가 칼에 죽어야 하는 법. 시체는 까마귀에게 맡
기면 모든 것이 끝이오."
"그, 그런..."
장로는 청귀조장의 사상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물러설 수도 없는 입장이었
다. 그러나 청귀조장의 손이 칼자루에 가는 순간 장로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몇날며칠이 지난 뒤 청귀조장과 장로는 귀면도 동문보에게 돌아왔다.
"수고했다."
"네."
청귀조장은 짧은 한 마디를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장로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
다. 청귀조장과 동행하는 동안 몇 번에 걸쳐 목숨이 왔다갔다했었기 때문이다. 장로는
볼멘 목소리로 동문보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동문 선배님. 너무 하지 않습니까?"
"뭐가 말인가?"
"장문인을 살해해놓고 바로 빠져 나오게 하면 어떻게 합니까? 지금 점창파는 나를 장문인
살해범으로 생각하고 추적하고 있을 겁니다."
"나와 함께 있는 동안 누구도 자네를 해치지 못하네."
"그게 아니라..."
장로는 답답한지 가슴을 쳤다.
"나는 약속을 지켰네.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한족 출신의 장문인이 점창파에 나타날 거네.
그럼 이번에는 자네가 약속을 지켜야지."
"그게 무슨 약속을 지... 헉!"
장로의 목은 자라목이 돼버렸다. 청귀조장의 눈빛은 동문보의 눈동자에 쏟아지는 안광에
비하면 순한 양이나 토끼 수준이었던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곧바로 움직이겠습니다."
장로는 후다닥 일어나 달려나갔다. 동문보는 이제야 답답한 운남에서 벗어나겠구나 생각하
자 기분이 좋아 입술을 실룩거렸다.
열흘이 지나 동문보와 사귀조는 밀림의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었다. 선두에는 오독문주가
12명의 제자를 이끌고 있었고 옆에는 동문보와 점창파 장로가 있었다.
"얼마를 더 가면 되는가?"
"다 왔습니다. 저 언덕을 올라가면 단가의 본거지인 대천성채(戴天城砦)가 나옵니다."
장로가 가리킨 언덕은 작은 동산이었다. 기암괴석 사이로 울창하게 자란 나무들이 그 높이
를 추정할 수 없을 정도였다.
"대단하군..."
언덕위에 올라간 동문보는 눈앞에 펼쳐진 대천성채의 위용에 감탄했다. 새하얀 대리석(大
理石)으로 만들어진 오장 높이 성채는 붉은 석양으로 인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성채의 전면길이는 대략 200장 정도입니다. 그리고 측면은 300장 정도로 매우
큰 성입니다."
오독문주는 대천성채의 외곽 성벽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했다.
"붉군."
동문보의 감상은 짧았다.
"본 문과 뜻을 같이하는 세력들은 지금 운남성 전역에 퍼져 있는 단가의 세력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인력이 부족해 대천성채를 공격하는데 저희들이 큰 도움을 드릴 수 없
습니다. 죄송합니다. 동문 선배님."
"걱정할 필요 없네. 어차피 나와 우리 애들 손으로 끝낼 예정이었네."
"그러나..."
"됐네. 오독문주. 자네는 여기서 구경이나 하고 있게."
동문보는 차갑게 말하고 앞으로 걸어나가 언덕 끝에 튀어나온 바위를 향했다. 바위에 앉은
동문보는 화려하게 지고 있는 석양의 빛으로 점차 붉은 빛에서 어두워져 가는 대천성채의
성곽을 바라보다가 상의를 벗어 던졌다.
"술."
차가운 한 마디. 동문보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백귀조장이 맑은 술이 담겨져 있는 넓은
대접을 가지고 왔다. 백귀조장은 동문보 앞에서 무릎을 끓어 대접을 양손으로 갖다 받쳤다.
"좋은 술이구나."
동문보를 술을 보고 한 마디 했다. 대천성채를 향해 건배를 하더니 고개를 뒤로 제치고
대접을 하늘 높이 올렸다.
콸. 콸...
술을 마신다고 표현하기 보다 붓는다는 것이 정확했다. 목구멍을 넘지 못한 가느다란 술
줄기들은 동문보의 턱을 지나 가슴을 적셨다. 술을 다 부운 동문보는 술잔을 집어던졌다.
쨍강.
사기로 만든 대접은 바위와 부딪치며 산산조각이 나면서 술잔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동문
보의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투명한 유리와 같았다. 바위에서 일어선 동문보는 오척 길
이의 장도를 칼집에서 뽑아 어깨에 걸쳐 맸다.
"가자."
동문보는 한 마디를 남기고 대천성채를 향해 달려갔다. 청귀조와 백귀조, 흑귀조, 황귀조의
네 조장들은 서로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동문보의 뒤를 쫓았다. 네 조장은 동문보를
중심으로 일렬횡대로 달려갔다.
각 조장과의 간격은 30여장이었다. 사귀조의 대원들은 조장들이 달려나가자 일제히 각 조
별로 일렬종대를 달리며 맞추었다. 그들은 일제히 상관인 조장의 뒤를 따랐고 각 개인마다
이 장 정도의 간격을 유지했다.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 밀림을 가로지르는 그들의 모습은
네 마리 용이 꿈틀대는 것 같았다.
"저런 무식한 돌진 방식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오독문주는 동문보와 사귀조의 돌격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은밀하게 이동할 생각은 코빼
기도 없다는 듯이 당당하게 위치를 알려주며 돌진하는 방식에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저들은 하나 같이 미치광이들이 당연하지요."
점창파의 장로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두 사람이 어이없어 하는 것보다 더 황당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천성채의 망루에 있는 수문장이었다. 청의와 백의, 흑의, 황의를 입은
사백여명이 옷 색깔별로 줄을 지어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찬란한 석양이 지면서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시점이라 가시거리나 시각 능력에 약간 문제가
생기는 시점이라 처음에는 환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우거진 밀림을 이용해 은밀하게
공격해 오는 것도 아니고 딸랑 칼을 차고 대로를 이용해 공격해 오는 미치광이는 생각한적
이 없었던 것이다.
"북을 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응! 그렇군... 어서 쳐라."
적이 쳐들어오면 신호를 알리는 북을 치자고 부하가 말하지 않았다면 수문장은 하염없이 사
귀조를 바라만 보았을 것이다.
둥. 둥. 둥...
북이 울리자 대천성채는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무장을 갖춘 무인들이 성곽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사귀조는 북이 울리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면서도 별 반응이 없었다. 그저 조금이
라도 더 빨리 달려 대천성채에 도착하겠다는 모습만 보였다.
"무슨 일이냐?"
사해방주의 세 아들 중에 차남인 단궁조가 망루로 뛰어 오르자마자 질문했다. 수문장은 설
명을 하려다가 직접 보는 게 더 빠르겠다고 생각했다.
"직접 보십시오."
"아니... 저게 무엇인가?"
"적인 것 같습니다."
"허! 저런 미치광이들이 적이라..."
단궁조는 밀림을 통해 침투할 적을 봉쇄하기 위해 깔아 논 수많은 함정과 암기들이 무용지
물로 변해버렸다는 생각에 허탈감이 들었다. 세상에 어느 누가 훤히 보이는 길을 따라 돌
격하겠느냐는 상식이 여지없이 파괴된 상황에 할 말을 잃어버린 것이다.
"상식밖의 기습이라 함정이나 암기도 소용이 없군..."
단궁조는 사귀조를 멍하니 쳐다보며 앞으로는 길에도 함정과 암기를 깔아놓아야하나 고민했
다. 그러나 항상 돌아다니는 길을 죽음의 통로로 만들면 누가 다니겠는가라는 생각에 쓴웃
음을 짓다가 사귀조가 활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 온 것을 목격하고 고함을 쳤다.
"모두 무엇을 하느냐. 어서 쏴라."
성곽의 궁수병들은 그제 서야 현실을 인식하고 서둘러 활시위를 걸었다.
"쏴라."
푸슝. 푸슝. 푸쉬융...
순식간에 수백발이 넘는 화살들이 허공을 갈랐다. 그러나 선두에 있는 사귀조의 조장들은
화살에 당할 자들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칼을 뽑아 휘둘러 화살들을 갈라버렸다. 사귀조의
조장들은 50장 이내까지 접근하자 갑자기 열에서 이탈해 동문보를 향해 달렸다.
"크아악."
조장이 사라지자 각 열의 선두에 나선 사귀조의 조원들은 순식간에 고슴도치가 됐다. 그런
데 그 뒤를 달리던 사귀조의 조원은 고슴도치가 된 선두의 동료를 가슴에 안고 달려가기 시
작했다. 죽은 동료의 시신을 인간방패로 사용했다.
사귀조가 대천성채의 30장 거리에 올때까지 사귀조에서 죽은 자는 모두 합해 십여명에 불과
했다. 그러나 30장 이내의 거리는 문제가 발생했다. 성곽의 궁수병들이 사귀조의 전열의
머리에 직사로 화살을 날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파바박.
"크아악."
"으아악."
사방에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사귀조 전원은 팔에 비갑을 차고 있어 화살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지만 대천성채에는 궁수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강력한 노를 사용하는 자들도
가득했던 것이다. 팔에 차는 비갑따위는 노에서 발사하는 화살 한 방이면 가볍게 관통됐다.
그러나 사귀조 대원들은 동료의 시신을 머리에 이고 돌격을 멈추지 않았다. 인간방패의 변
형은 참혹한 지경을 만들었지만 많은 수의 사귀조 대원들이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저... 저 지독스런 놈들은 도대체 무엇들이냐?"
"인간이라기보다 귀신에 가깝군요."
단궁조가 사귀조의 인간방패에 전율하자 어느새 서해방주의 셋째 아들인 단궁우가 올라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있었다. 두 형제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사귀조의 지독함에 안색을
찌푸렸다.
"셋째야 아무래도 느낌이 안 좋다. 너는 내려가서 서혈각(西血閣)과 서천각(西天閣)의 병력
을 집결시켜 입구를 포위해 두어라."
"작은 형님.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성곽에 병력을 모아 지금처럼 방어하는 게 낫
지 않겠습니까?"
"아니다. 먼가 이상하다. 저들의 움직임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리고 느낌이 안 좋아..."
단궁조의 시선은 대천성채의 성문에 멈추었다. 한 자두께의 성문이 마치 허약한 종이 문처
럼 보인 것이다.
"알겠습니다. 형님."
단궁우는 망루에서 내려가 서혈각과 서천각을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서혈각과 서천각이 모
두 집결하자 단궁우는 두 세력을 입구의 좌측과 우측에 포진시켰다. 포진을 끝낸 단궁우는
망루를 바라보았다. 망루에는 단궁조가 궁수병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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