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너무 많다. 아직도 많다./사사기 7:1~8
효자제일교회 :홍 순관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 그를 좇은 모든 백성이 일찌기 일어나서 하롯샘 곁에 진쳤고 미디안의 진은 그들의 북편이요 모레 산 앞 골짜기에 있었더라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고하여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서 떠는 자여든 길르앗 산에서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일만 명이었더라 여호와께서 또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 그들을 인도하여 물가로 내려가라 거기서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 무릇 내가 누구를 가리켜 이르기를 이가 너와 함께 가리라 하면 그는 너와 함께 갈 것이요 내가 누구를 가리켜 이르기를 이는 너와 함께 가지 말 것이니라 하면 그는 가지 말 것이니라 이에 백성을 인도하여 물가에 내려가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무릇 개의 핥는 것같이 그 혀로 물을 핥는 자는 너는 따로 세우고 또 무릇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도 그같이 하라 하시더니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는 삼백 명이요 그 외의 백성은 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지라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 먹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그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 이에 백성이 양식과 나팔을 손에 든지라 기드온이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을 각각 그 장막으로 돌려 보내고 그 삼백 명은 머물러 두니라 미디안 진은 그 아래 골짜기 가운데 있었더라 [개역, 사사기 7:1~8]
앞뒤로 본문을 좀 더 읽어야 좋겠다 싶습니다만 너무 길까 싶어서 이 부분만 읽었습니다. 어제 수련회 마치고 많이 피곤하시지요? 몸은 피곤하고 마음은 한없이 기쁜 이런 모습이 아마 예수 믿는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할 바른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냥 아무 걱정 없이 누워 몸과 마음이 편한 상태가 최상의 모습은 아닙니다. 수련회에서 받은 피곤과 은혜로 우리 모두가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한없이 기쁜 이런 상태가 예수 믿는 우리에게 가장 어울리는 모습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무 걱정도 없이 편안하게 누워지내는 것이 진정한 행복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지금은 이런 상태일 겁니다.
잘 아는 사사기 말씀, 기드온이 삼백명 용사를 데리고 이스라엘을 구원했던 놀라운 일을 보면서 기드온이 어떻게 해서 이런 위대한 사사가 되었는지 한번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서론을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전에 하던 이야기하고 조금 다른데...’ 하는 느낌이 들지 않으세요? 한번 더 할까요? 기드온이 삼백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어떻게 이스라엘의 위대한 사사가 되었는지 한번 살펴봅시다. 이상하지 않아요? 아무렇지도 않으면 아직도 문제가 있습니다.
기드온의 이야기를 쭉 해나가면서 기드온이 어떻게 해서 위대한 사사가 되었느냐? 이렇게 생각해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이 어떻게 어떻게 하다보니까 위대한 사사가 되었다는 것보다 성경은 다른 쪽으로 설명합니다. 어떻게요?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불러서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느냐를 보아야 합니다. 여러 번 말씀 드렸고 앞으로도 그렇게만 말씀을 드릴 것 같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에 사사기 7장에 제목이 무엇이라고 붙어 있는지 한번 보십시요. 뭐라고 붙어 있을지 저도 여전히 궁금합니다. 가령 ‘기드온과 삼백 용사’이거나 아니면 ‘기드온의 소명’이라고 붙어 있을 테지요. 뭐라고 붙어 있을지 궁금합니다마는 제가 이름을 붙인다면 절대로 그렇게 붙이지 않겠습니다. 조금 어색하더라도 ‘기드온을 불러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 정도는 돼야죠. 좌우간 우리의 시각이 늘 하나님 쪽으로 가 있어야 합니다. 자세히 살펴보시면 저절로 그렇게 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런 점에서 기드온이 어떻게 위대한 사사가 되었는가?라는 질문은 다소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사기가 어떤 시대에 어떻게 쓰여진 책인지 잘 아시죠? 지난주 새벽기도 때 사흘 정도 사사기를 쭉 읽어 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벌로 다른 이방 민족에게서 압제를 받게 하고 그러다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는 일을 반복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셔서 평안하게 잘 지내다 보면 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러다 보면 또 다른 이민족이 쳐들어와서 압제를 받게 되고 그러다가 또 하나님께 잘못했습니다 하면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시고. 이렇게 사사기는 똑같은 얘기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사기에는 한 사건이 시작할 때마다 또, 또, 또라는 표현이 계속 이어져 나옵니다. ‘또’를 세 번이나 하고 보니까 너무 많이 나와서 그 다음 ‘또’ 대신에 다른 말을 썼죠. ‘다시’라는 말이 나옵니다.
>6장 1절에 보시면 시작할 때에 ‘또’라는 글자가 하나 나오죠? 이 ‘또’가 사사기에 세 번째 ‘또’입니다. 얼마나 지독한 백성들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우리 중에도 또, 또, 또 하고 계시는 분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사기에 나오는 만큼은 안 그러시겠죠? 좌우간 사사기는 그런 책이었고 지금 또 6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함으로 미디안 족속에게 압제를 받는 이야기가 시작이 됩니다. 1절부터 6절까지 읽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 상태를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1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붙이시니
2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을 인하여 산에서 구멍과 굴과 산성을 자기를 위하여 만들었으며
3 이스라엘이 파종한 때면 미디안 사람, 아말렉 사람, 동방 사람이 치러 올라와서
4 진을 치고 가사에 이르도록 토지 소산을 멸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식물을 남겨 두지 아니하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니
5 이는 그들이 그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서 메뚜기 떼같이 들어오니 그 사람과 약대가 무수함이라 그들이 그 땅에 들어와 멸하려 하니
6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인하여 미약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사사기 6:1~6)
이런 상태에 빠져 살고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요? 이럴 때 적합한 우리말이 있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뭐와 같아요?
청개구리.
청개구리요? 사사기 전체를 보면 말 안 듣고 옆으로 자꾸 빠져나가는 게 청개구리 맞습니다. 넓게 보지 말고 이 부분만 보면요?
방랑자.
방랑자 같아요? 집 다 빼앗기고 떠돌아다닌단 말이죠. 방랑자는 그래도 멋이나 좀 안 있겠습니까? 괴나리봇짐 하나 울러메고 다니면서 여기저기 구경이라도 하고요. 그런데 이 처지는 그런 처지보다 더 못한 것 같습니다.
피난민.
거렁뱅이.
거지란 말이죠? 저는 이걸 보고 동네북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동네북이 뭐죠? 예전에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동네북이 많았습니다. 요즘은 왕따라고 하는데 느낌이 좀 달라요. 무슨 의미로 동네북이라고 하죠? 원래 북이란 두들겨 맞는 게 임무잖아요. 그런데 개인 것이 아니고 동네(마을) 공동 소유란 말입니다. 그러니 지나가면서 애꿎게 이 놈도 한대 쿡, 저 놈도 한대 쿡, 쥐어박죠. 그러면 하는 말이 “내가 동네북이냐?” 그러죠. 이스라엘이 농사 실컷 지어 놓으면 먼저 보는 게 임자예요. 왜요? 온갖 이민족들이 다 들어와서 토지 소산을 아예 멸해버렸다 했으니까 있는 족족 다 걷어가 버리는 겁니다. 왜 이 모양이 됐어요?
하나님을 잊어버렸어요.
그럼요. 이스라엘이 행한 악의 제 1번이 하나님을 잊어버린 겁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다면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봐도 이런 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산다면 동네북이 안될 수 없습니다. 내가 가진 것 전부 누구든지 먼저 보면 임자가 되는 겁니다. 월급에서 세금을 워낙 많이 떼니까 봉급쟁이 월급 봉투는 유리알이란 말도 있지만 제가 들은 가장 재미난 얘기는 ‘내 월급 봉투가 어디 찐쌀 주머니가?’라는 말입니다. 찐쌀 주머니! 찐쌀 구경 못하신 분 많이 계시죠? 찐쌀 주머니란 이 놈도 한줌 집어가고, 저 놈도 한줌, 눈에 띠는 사람마다 한줌씩 집어가 버리면 자기가 먹을 게 별로 없습니다. 툭하면 위에서 무슨 세금이 그리 많은지, 뭐 떼고 뭐 떼고 다 떼버린다고 “내 봉급 주머니가 어디 찐쌀 주머니냐”고 투덜대는 분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남는 게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잊어버렸을 때는 남는 게 없이 다 털려버립니다. 전형적인 예가 하나님의 백성이 흉년이 들었다고 해서 예루살렘을 떠나고 가나안을 떠나서 이웃나라로 갔다가 완전히 망해서 돌아온 사람이 더러 있죠? 가장 대표적인 예가 누구죠?
나오미.
예. 나오미요. 권사님께서 앞에서 잘 맞추십니다. 제가 처음 오던 날 권사님 보고 놀랬는데 할머니들이 많아서 은근히 걱정이 되더니 실력은 결코 할머니가 아니더라구요. 나오미가 흉년이 들었다고 해서 하나님 앞을 떠나서 모압으로 갔습니다. 남편과 아들 둘,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이 나오미가 돌아왔다고 하자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말라. 뭐라고 부르라구요? ‘마라’라 불러라. 슬프다는 말입니다. 나오미란 말은 ‘희락’이라는 뜻이거든요. 마라, 즉 ‘괴로움’이라고 부르라는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떠나가서도 잘 되어서 돌아온 사람도 있긴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경우는 그렇게 갔더라도 오히려 거부가 되어 돌아온 경우가 있긴 있습니다. 그것 믿고 한번 버티어 보는 것도 어떨런지 모르겠지만 좌우간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서 혹은 하나님을 잊었을 때에는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이 모습, 동네북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백성이 이 모양인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그 아래쪽에 있는 7절부터 10절까지를 보면 설명이 잘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어려울 때 과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셨던 걸 생각하면 고통스럽습니다. 예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인도하셨고 이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 주셨는데 그 기적들 다 잊어버리고 이런 형편없는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은 상당한 고통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얘기를 되풀이하시는 것은 너희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린 그것이 바로 이 고통의 시작이다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렵고 힘든 고통 가운데서라도 하나님을 기억하는 그 순간이 다시 복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말씀드렸던 집나간 탕자의 이야기도 그렇죠? 탕자가 다시 그 복을 누리게 된 출발점이 어디였었죠? 돼지 우리를 치면서 면목도 없고 돌아갈 낯짝도 없지만 그래도 머리 속에 문득 떠오른 생각, ‘아, 우리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얼마나 많은고’라는 생각이 드는 그 순간에 바로 이 아들의 희망이 거기서 싹트기 시작하는 겁니다. 혹시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어려운 형편에 처했다 할지라도, 어떤 형편에 처해 있든지 하나님의 모습을 떠올리는 그 순간부터 그것이 복의 근원이 됩니다.
우리와는 별 상관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의 아이들이 교회를 통해서 아니면 교회 행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기억할만한 일을 많이 경험하게 하는 것이 그래서 필요합니다. 중, 고등학교 때 공부에만 매달려 있다가 대학을 갔습니다. 혹은 군대에 갔습니다. 홀로 나가 있으면 있던 신앙까지 다 털어먹기가 참 쉽습니다. 단단하게 교육을 시켜서 어떠한 경우에 처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자신있게 내어 놓을 수 있을만한 자녀를 만들어서 내보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엉뚱한 무장만 잔뜩 시켜서 내어보내 놓죠. 신앙 다 잊어버리고 제 멋대로 살기가 아주 쉽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유년 주일학교와 관련된 자그마한 기억 하나, 아니면 부모님과 함께 교회에서 있었던 작은 일 하나가 머리 속에 떠오르면 그것이 신앙을 다시 회복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소중한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아이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교회를 통해서 아름다운 기억들을 남기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노력을 많이 해야 합니다. 특별히 전교인 수련회 가서 아마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드신 분이 더러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포항 송도에서 컸지만 해수욕장에 5년만에 한번 가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올해는 바다와 강으로 간 것이 합쳐서 다섯 번이나 여섯 번 되는 것 같습니다. 웬 횡재냐 싶어요. 더군다나 제가 태어나서 한밤중에 물에 가서 풍덩거리는 것은 나고 처음입니다. 전도사 되니까 복이 많네요.
저하고 비슷한 분들 더러 계실 겁니다. 캠프파이어 행사 다 끝나고 철수하려는 마당에 하라고 할 때는 안 하시더니 혼자서 춤 연습도 하더군요. 아름다운 기억들입니다. 이런 기억들이 이런 행사들을 통해서 우리 속에 남아 있는 것이 경우에 따라 큰 복이 될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어쨌든 교회 일이나, 교회의 이런 수련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좋은 추억이 될 뿐만 아니라 좋은 복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특별히 우리 자녀들에게 이런 소중한 추억을 물려 줄 수 있도록 애를 많이 써야 합니다. 우리 교회 중, 고등부 학생들을 보면서 참 안타까운 마음도 있고 어떻게든 한번 해보자라는 생각이 꿈틀꿈틀 합니다. 특별히 우리 부모님들이 아이들에게 올바른 신앙을 심어주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해야 된다는 것을 결코 잊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12절부터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준비를 시키십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기드온이 그 말을 듣고 대답한 말씀이 6장 13절입니다. 하나님께서 ‘큰 용사여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도다’ 이러니까 기드온이 그 말을 듣고 뭐라고 대답을 했어요? 간단하게요? 길게 하지 말고 아주 짧게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셨는데 왜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그걸 반으로 팍 줄여보세요. 반으로 줄이면 내용이 산뜻해서 좋습니다. “하나님이 있긴 어디 있어요?” 이런 말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 말은 곧 하나님이 있긴 어디 있어요? 일종의 반항 비슷하게 대꾸를 합니다. 14절을 봅시다.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15절, 여전히 짧게 말씀해보세요. 뭐라고 그랬어요?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너무 그렇게 길게 하지 마세요. 더 줄이면? “내가 어떻게 해요.” 이 말이죠. 내가 뭔데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내가 어떻게 합니까? 그 얘깁니다. 우리하고 좀 닮은 구석이 있을 겁니다. 1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이 말은 “반드시 이기게 해줄께 가라.” 이 말이죠. 그랬더니 대답이 17절입니다. 뭐라고 그래요?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읽지 말고 자신의 말로,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바꾸어 보세요. 하나님께서 “꼭 이기게 해줄께. 가서 붙어.” 이러시거든요. 그러니까 뭐라고 그래요?
증거 대 봐라.
하나님 보고 증거 대봐라? 무슨 증거요? 이기게 하신다는 증거요? 당신이 하나님 맞긴 맞아요? 이 말입니다. 이기게 해 주는 증거를 대보란 말이 아니고 당신이 하나님 맞는지 증거를 보여달라는 겁니다. 아니 하나님 보고 이래도 괜찮나 모르겠어요. 21절을 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전병에 대매 불이 반석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전병을 살랐고 여호와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 기드온의 말이 정말 당신이 하나님 맞긴 맞습니까? 이랬더니 하나님께서 제물에 지팡이를 갖다 대니까 불이 나와서 타더라. 요약하면 내가 이래도 하나님이 아니냐?는 거죠. 이 하나님과 기드온의 대화를 지켜보면 기드온이 주인공이에요? 하나님이 주인공이에요?
하나님.
이 일을 추진하는 분이 누구입니까? 확실하게 하나님입니다. 기드온이 어떻게 주인공이 될 수 있어요? 답답한 분이 누구죠 지금? 하나님이 왜 답답해요? 모처럼 나타나셔서 내가 니한테 이기게 해주겠다 하는데 “하나님 맞긴 맞아요?” 답답한 노릇입니다. ‘큰 용사여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는데 “하나님이 있긴 어디 있어요?” 누가 답답해요?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인 증거까지 보여주시면서 이 일을 하셨겠습니까? 이 일 후에 기드온이 용기를 냈습니다. 용기를 내긴 냈지만 많이는 못 내고 조금 냈습니다. 그래서 바알과 아세라 상을 찍기는 찍는데 언제? 밤에. 어쨌든 용기를 내서 하나님께서 시키신 대로 우상을 다 찍어 넘기고 그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서 출전을 합니다. 그 출전하는 얘기가
7장입니다.
7장 얘기는 우리가 워낙 잘 아니까 제가 이렇게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기드온이 데리고 간 군사는 처음에는 삼만이천명 정도, 많이 왔죠. 그래서 1차로 두려운 사람, 겁나는 사람은 돌아가거라. 그래서 이만이천명이 돌아가고 만명이 남았습니다. 그 중에 또 추려서 삼백명만 데려갑니다. 하나님께서 삼만이천명이 모였을 때 뭐라고 하셨냐니까 너무 많다. 그러면 적군은 몇 명이기에 삼만이천명을 보고 너무 많다고 할까요? 삼만이천이 너무 많을 정도 같으면 적군은 몇 명쯤 될까요? 대충 짐작을 하십시오. 이런 건 못 맞춰도 됩니다.
십사만. (장진호 집사)
십사만요?
오만명.
오만명 있는데 삼만명이 너무 많아요? 장진호 집사님이 정확하게 대답하시는 거 보니까 미리 예습을 하셨나 봐요. 8장 10절에 보면 미디안 군사 숫자만도 십삼만오천입니다. 대강 십사만으로 합시다. 십사만명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데 삼만명이 너무 많습니까? 그래서 돌려보내고 만명만 남았습니다. 만명만 남았으니 자그마치 14:1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뭐라고 그래요? 아직도 많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 돌려보내고 삼백명 남겼습니다. 그 다음에 다른 말씀 없어요? 그 삼백명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셨을까요? 됐다. 딱 알맞다. 여러분, 십사만하고 삼백명이면 비율로 치면 몇대 일쯤 되나요? 제가 계산을 한참 해봤는데...
45:1
제 계산으로는 450:1이에요. 450:1! 이게 싸움이 됩니까? 요즘 모양으로 대량 살상무기가 있어서 저쪽은 아직 구식 무기를 가졌고 나 혼자 신무기를 지녔으면 450:1도 싸움이 될 수는 있습니다. 나는 폭탄 한방, 저기는 전부 어설픈 옛날 칼 들고 설치면 가능할 수는 있죠. 그러나 이 당시의 전쟁이라는 게 그런 게 아니지 않습니까? 무기가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 이런 상황에서 450:1의 싸움이 가능합니까? 말이 안 되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걸 보고 하나님께서 ‘됐다. 알맞다.’ 하시는 거예요. 도대체 하나님의 기준은 뭐길래 450:1로 줄여놓고 이제 됐다고 하시느냐는 얘깁니다. 하나님의 마음에서 한번 대답해보세요. 어떻게 해서 이제 알맞다 하시는 거예요?
지기에 알맞다.
그거 말 되네요. 하지만 전쟁을 재미로 합니까? 지기에 알맞다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좀 군사같지 않은 군사들이 많아서...
그러니까 삼만명 모여 있는데 싸움이 시작되면 도망 갈 사람이 거기 수북이 섞여 있으니까 그런 군사는 다 빼고 이제 됐다는 얘깁니까? 집사님! 정예 군사 삼백이면 어중이떠중이를 상대로 450:1로 싸우면 될까요?
이 삼백명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희 힘으로는 도저히 붙어서 이길 수 없다고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숫자니까 ‘됐다’ 그 얘깁니다. 어디에 그 근거가 있느냐 하면 2절 끝에 한번 보십시오.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이게 무슨 말씀이죠? 삼만명이 십사만을 상대로 싸워서 이기면, 이길 가능성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어찌어찌 잘 하다 보면 이길 수도 있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십사만을 상대로 삼만이 싸워서 이기면, “좀 어려운 거였지만 그런대로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서 용기를 냈더니 이렇게 이겼다.” 이 소리 하는 거 하나님이 싫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줄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만명을 데리고 갔는데 만명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직도 많은 거예요. 왜? 만명 가지고 십사만과 싸우면 14:1인데 이건 이기기가 글쎄요. 이기기가 거의 불가능한 숫자일 겁니다. 그럼에도 눈꼽만큼의 이길 가능성도 하나님 보시기에 있을 수 있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할 때에 그래도 만명니까 잘만 하면 어쩌다가 이길 수도 있다 하는 그것조차도 하나님은 싫으신 겁니다. 그래서 다 줄이고 마지막 삼백명을 데리고 가는데 이 삼백명 가지고는 어떤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결코 이길 수 없다라고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 숫자가 되니까 하나님께서 딱 알맞다고 하시는 겁니다.
이런 책은 성경 외에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숫자를 가지고 딱 알맞다고 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실 자격이 있는 분입니다. 왜요? 너희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너희가 인정을 하면 그 다음 붙기만 붙어라. 그러면 이기게 하는 것은 내가 하면 되니까. 그러면 그 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에 이스라엘이 무슨 고백을 할거냐 말이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이 틀림없다고 고백을 할 것 아니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이란 얘깁니다. 어떻게 이기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이 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에 이스라엘이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느냐에 하나님의 관심이 가장 크게 머물러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만 의지한다고 하면서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게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는, 말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도 실제 내용에 들어가 보면 뭔가 다른 걸 믿고 있는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순수하다고 생각하는데도 나도 잘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하나님보다는 다른 걸 의지하는 경우가 적지 않게 많이 있는 것이 어쩌면 사람의 약점인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기다리고만 계십니다. 네가 나를 믿는다고 하지만 아직도 군사가 너무 많다. 줄이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이런 노력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잘 모를 때는 하나님 섬기는 것이 참 쉬워요. 하나님 믿습니다. 한마디로 끝날 때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처음 시작할 때 얼마나 기쁘고 좋은지 몰라요. 그러나 하나님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그 하나님을 바르게 섬긴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돼죠. 사실은 그래야 합니다. 뭐 좀 알고 났더니 정말 교회 다니는 거 하나님 믿는 거 참 쉽네. 그렇게 되면 믿는 재미가 쉽게 없어질지도 모릅니다.
아이들 오락하는 거 봤죠? 처음에는 못해서 그렇게 헤매며 잘 안될 때는 밤을 새가면서 하죠. 그런데 한번 마스터하게 되면 잘 안 해요. 우리 하나님을 다 알고 이만하면 하나님 마음에 들었다고 우리 자신이 고백 할 수 있기는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은 불가능할 겁니다. 왜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그렇게 호락호락 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우리가 정말 하나님만 의지하고 있는지 아니면 내가 다른 그 무엇을 은연 중에 더 의지 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늘 살펴보아야 합니다. 굉장히 어려운 겁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 사실은 큰 수술를 받았습니다 수술을 받게 되면 일주일 전에 통보를 합니다. 통보를 해주면 대강 마음 정리해서 내려오라 하는데 수술 통보를 받으면 일주일 사이에 평균 체중이 10㎏정도 주는 게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군인들이 뭐 그렇게 겁이 많은가 싶은데 사실 군인들이 겁도 많고 울기도 많이 울어요. 그런데 그렇게 신경이 곤두서는 일인데 전날 저녁에 준비해서 내려오니까 갑작스럽게 사고가 생겨서 피가 모자란다고 연기되었더라구요. 그래서 1차 연기하고 두 번째 다시 날 잡아서 통보 받아서 내려갔는데 그 날은 준비를 다 했습니다. 준비를 다 하고 수술실 들어가기 전에 몸에 호스도 몇 개 꼽고, 목사님과 신우회 친구들 다 와서 기도하고 갔습니다. 저쪽 문만 덜커덩하고 열리면 수술실로 갈 참인데 아따 그날 따라 되게 힘들데요. 문이 덜컹하면 ‘오는 모양이다’ 싶은데 그냥 바람에 흔들린 겁니다.
이러니 얼마나 초조했겠어요? 수술 날짜만 잡아 놔도 일주일에 살이 10㎏씩 빠지는데 예정시간을 한 시간쯤 넘기더니만 간호 장교가 와서 “죄송합니다. 오늘 담당 의사가 병원장한테 꾸지람을 많이 들어서 지금 기분이 참 안 좋거든요. 이런 날 수술하면 위험합니다.” 취소하잡니다. 그럽시다. 그래서 다 다시 뺏어요. 빼고는 오후에 멀쩡하게 돌아다니니까 아침에 기도했던 친구들이 “야 끝났냐?” 하더라구요. “응 그거 별거 아니더라.” 이러고 하루종일 돌아다녔는데 병원 생기고 그런 일이 없었다고 그래요. 민간 병원에서 이랬다가는 난리나지요.
사실은 제가 살이 하나도 안 빠졌거든요. 하나님이 날 필요하시면 살려 놓을테고 안 그러면 일찍 갈 수도 있을테고... 한쪽에 이런 마음이 있으면서도 또 한편에서는 그 병원에서는 그 수술만 늘 하거든요. 갈비뼈 한 짝 떼내고 하는 수술이 크긴 큽니다만 거기서 늘 하던 수술이니까 별 일 없을 것이다. 내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 건지 아니면 의사가 늘 하던 일이니까 그걸 믿는 건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지금도 어느 쪽이었냐고 분명하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만 그런 일을 당할 때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분명한지 아닌지 자신을 살피는 노력이 늘 있어야 합니다. 굳이 병원뿐만 아니라 우리 생활 속에서도 아니면 가정에서 뭔가를 결정할 때도 이런 노력이 늘 있어야 한다는 걸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예가 기드온의 경우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얼마 전에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래도 또 한번 확인해 봅시다. 여호수아 11장요. 337쪽 입니다. 이상한 점을 찾아보세요.
6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말라 내일 이맘 때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붙여 몰살시키리니 너는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불로 그 병거를 사르라 7 이에 여호수아가 모든 군사와 함께 메롬 물가로 가서 졸지에 습격할 때에 8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신고로 그들을 격파하고 큰 시돈과 미스르봇 마임까지 쫓고 동편에서는 미스바 골짜기까지 쫓아가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쳐죽이고 9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여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불로 그 병거를 살랐더라 (여호수아 11:6~9)
여호수아가 싸운 전쟁 기록인데 이 전쟁에서 가장 위력적인 무기는 병거입니다. 말이 끄는 병거는 지금식으로 말하면 탱크에 해당됩니다. 전차요 최신형 무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족속들과 싸우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다 이기게 해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싸움을 시작하지 않은 경우가 있었는데 이 철병거가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신무기를 가지고 있는 저들과 싸워서 이길 수가 없겠다 싶어서 겁을 내서 싸우지 않았다가 졌습니다. 그만큼 이 철병거는 무시무시한 무기입니다. 여호수아가 싸워서 이 철병거와 말을 아주 많이 노획했습니다. 그 다음 이걸 어떡해요? 아니 우리 같으면 이걸 어떡해야 돼요?
다음에 싸울 때...
다음에 써 먹어야지요. 하나님이 정 보기 싫으시다면 하다 못해 이걸 외국에다 팔아먹어도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은 말의 힘줄을 다 끊어버리라는 겁니다. 저도 이거 잘 몰라서 어디서 물어보니까 누가 가르쳐주는데 말의 힘줄을 끊어버리면 말이 서나요? 못 서나요? 저도 참 궁금했는데 누가 자신 있게 말하길래 그런가 하고 생각은 합니다. 힘줄을 끊으면 서기는 서는데 뛰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그 다음 병거는요? 전부 불살라 버린답니다. 왜 신무기, 그 좋은 무기를 노획해서 이걸 전부 폐기처분 하느냐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의도가 뭐겠어요?
무기를 의지하지 말라.
그렇죠. 너희는 이것 없어도 된다. 뭐만 있으면요? 이 일 하는 거는 나니까 하나님만 의지하면 된다. 이걸 없애란 말입니다. 이거 놔두면 그럼 안되나요? 이거 놔두고 하나님 의지하면 될 거 아닙니까? 사람이 어디 그렇습니까? 사람이 좀 안 그렇거든요. 하나님이 그것 다 없애라고 합니다. 나중에 한번 찾아보기로 하고요. 신명기 17장 1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왕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왕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라고 합니다. 말은 뭐하는 거죠? 여전히 전쟁에서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는 좋은 무기입니다. 적어도 이스라엘의 왕된 사람은 말을 많이 두지 말라는 겁니다. 심지어 이 말을 구하기 위해서 애굽으로 가지도 말라는 겁니다. 지금식으로 말하면 무기 수입도 하지 말라고 그러죠. 왜요?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라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 이런 이야기가 곳곳에 나옵니다. 군사력, 아니면 다른 어떤 것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란 말입니다. 이 이야기 기억하실런지 모르겠네요. 사무엘하 24장에 보면 다윗이 나라를 다 튼튼하게 건설을 하고 나라가 평온해진 후에 하루는 궁금해진 것 있죠. 내가 통솔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군사가 몇 명이나 될까? 이게 궁금해진 겁니다. 그래서 요압을 시켜서 전쟁이 나면 나가서 싸울 수 있는 백성의 수를 한번 헤아려 오라고 시켰습니다. 요압이 “이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아닙니다 하지 맙시다.” 하는데도 “해와” 그래서 조사를 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됐죠? 나중에 선지지가 찾아와서 문제를 세 개 낼 테니까 하나를 찍으십시오 하는 거죠. 첫째, 7년간 이 땅에 기근이 있을까요? 둘째, 석달간 왕께서 대적에게 쫓기실랍니까? 셋째, 삼일간 이 땅에 온역이 있을까요? 온역은 우리말로 하면 급성 전염병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요즘은 전염병 해도 별로 겁 안 나죠? 옛날 전염병은 무서운 겁니다. 이 셋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겁니다. 어느 것이 제일 낫습니까? 놔 둡시다. 궁금하시거든 24장을 찾아보세요. 이 셋 중에 그래도 다윗은 선택을 잘 합니다. 혹시 무슨 기준으로 선택했는지 아세요?
백성들을 위해서.
백성을 위해서요? 에이, 다윗이 설마 백성들을 위해서 그런 좋은 말을 했을까요? 채찍 맞아 아파도 주님의 손으로... 하는 찬양 있죠? 맞을 때 맞더라도 차라리 난 하나님께 맞겠습니다. 어느 거예요? 삼일간 온역을 선택하겠습니다. 맞을 때 맞더라도 하나님의 손에 맞겠습니다. 이래서 이 온역을 선택했는데 잘 골랐어요. 결국 하나님 손에 빠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적당한 선에서 또 용서를 하시죠. 자, 다시 돌아옵니다. 다윗이 뭐를 잘못했는데요?
인구 조사.
인구 조사가 뭐 그렇게 잘못된 겁니까? 나중에 성경에 그런 것이 있더라해서 집에 인구 조사 하러 왔습니다 하거들랑 쫓아내고 그러십시오. 그것은 성경하고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때는 정확하게 말씀 다 하셔야 합니다. 다윗의 잘못은 단순한 인구 조사가 아니고 내가 가지고 있는 내 군사가, 내 힘이 어느 정도일까 여기에 잘못이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왕은 인구 조사 하면 안되네요. 실제로 인구 조사는 왕이 하는 게 아니고 제사장이 합니다. 제사장이 인구 조사를 하고 한 사람당 세를 꼭꼭 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인구 조사는 그렇게 하는 것이지 왕이 자기의 힘을 알아보기 위해서 하는 것은 잘못됐더란 얘깁니다.
성경에 이런 이야기들을 다 종합해 보면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란 뜻입니다. 혹시 조용한 시간에 한번 생각해보세요. 내가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도 실제로 내게 있어서 내가 의지하는 것은 뭘까? 내 머리, 혹은 내 미모 이런 것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 1번, 우상이죠? 2번, 나 자신을 믿고 자긍하는 것, 자만심을 가지는 것.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을 눈 뜨고 못 보시는 겁니다.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께 모든 걸 의지하고 살라는 뜻에서 기드온의 군사 삼백명을 허락하시면서 알맞다고 하시는 겁니다. 알맞다. 뭐하기에 알맞아요? 기드온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 측에서 보실 때 딱 알맞다. 하나님께서 뭐하시기에요? 내가 활동하기에 딱 알맞은 숫자다 그 얘깁니다. 삼백명. 기드온이나 이스라엘 백성 측에서 보면 딱 알맞다 뭐하기에요?
지기에.
이건 지는 정도가 아니고 이건 일 망쳐 놓기에 딱 알맞다. 하나님 보실 때는 뭐라고 그래요? 하나님께서 몸소 나가셔서 도와줘야 하기에 딱 알맞은 숫자다. 그래서 이긴 겁니다. 삼백명 가지고 사실은 어떻게 이겨요?
또 이렇게 한번 질문 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삼백명을 선발하는 기준이 뭡니까? 물론 간단하게 하면 물가에 내려가서 물을 마시겠죠. 왜 하나님께서 이쪽 삼백명을 선택하셨을까요? 두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한쪽 그룹은 예를 들어서 물가에 가서 손을 짚고 입을 갖다 대고 물을 마셨고 또 삼백명은요. 물을 손으로 떠서 마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어떤 사람이죠?
준비.
무슨 준비요?
적이 나타나면 즉시 싸울 수 있는 주도 면밀한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
저도 그런 설명을 많이 들었습니다. 가만히 한번 따져 보세요. 앉아서 물을 퍼 먹는 거나 엎드려서 물을 핥아 먹는 이 차이가 전쟁을 치루는데 큰 영향을 줄까요? 조금 차이는 있겠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한 요소는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필요한 삼백명은 굳이 전쟁 잘 하는 사람일 필요가 없지 않을까 싶거든요. 왜 그런고 하니까 하나님이 삼백명 뽑는 이유가 뭔데요? 지는 게 목적인데요. 지는 게 목적인데 굳이 좋은 군사 선발할 이유도 없지 않겠느냐 하는 느낌이 들어요. 어떡하든지 좀 좋은 거 찾을려고 하니까 아마 해석을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데 제가 무리한 생각일런지 모르긴 몰라도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적은 숫자를 데려가는데 있습니다. 굳이 유능하고 잘 싸우는 군사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 요소에 우리가 너무 관심을 많이 두지 말고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가 이 삼백명이 얼마나 용감 무쌍하게 싸웠느냐는 것보다는 이런 삼백명을 데리고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어떻게 이기게 하셨느냐에 있다고 한다면 이들의 물 먹는 자세에서 우리가 어떤 교훈을 찾아볼려고 애를 쓰는 것은 그렇게 도움이 되는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처리 하실려고 하시느냐 그 의도가 중요한 것이지 사람 측에서 자꾸 뭔가 의미를 찾지 않아야 된다는 뜻이죠. 삼백명이냐 구천칠백이냐 아니면 꿇어 앉아 물을 퍼 먹었느냐 아니면 물에 입을 대고 핥았느냐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어떤 방식으로 처리하실 것이냐 하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 더 옳은 일이다라고 여겨집니다. 우리의 관심이 항상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고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 것인가 그걸 늘 염두에 두면 내가 능력이 얼마나 있고 없고 하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우리 중에 머리가 좋은 사람과 머리가 나쁜 사람 그게 얼마나 차이가 나겠습니까? 미안합니다. 좋은 사람은 섭섭할지도 모르겠네요. 우리끼리는 차이가 좀 나긴 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일하시는데 있어서 그게 그렇게 큰 차이는 아닙니다. 엎어져서 물을 떠 먹는 사람이나 핥아 먹는 사람이나 그 차이라는 것이 전쟁을 치뤄내는데 차이가 있긴 있겠죠. 그러나 그 차이를 이용해서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차이에 우리가 집중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아니면 이런 일을 어떻게 해 나가실 거냐에 우리의 관심을 더 기울이는 것이 좋겠다라는 뜻입니다.
마지막 한 가지만 더 부언하고 마치겠습니다. 삼만이천명이 모였다가 삼백명만 남고 다 돌아가 버렸습니다. 이 사람들은 나중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삼만천칠백명은 어떻게 됐을까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집에서 잤다? 아니면 그 이튿날 다시 와서 전쟁에 합세했다? 어느 쪽일까요? 기드온의 이야기는 잘 아는데 이걸 모르셨군요. 어느 쪽일 것 같습니까? 1번, 그래서 삼백명이 전쟁 다 끝낼 때까지 구경만 했다. 2번, 그 이튿날 다시 와서 함께 싸웠다.
2번.
집으로 간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돌아가셔서 한번 자세히 읽어 보세요. 삼백명이 끝까지 전쟁을 다 치룬 게 아니고 이 삼백명이 전쟁을 시작하고 패주하기 시작하는 미디안 족을 따라잡기가 워낙 부족하니까 아무리 해도 삼백명으로는 도망가는 적을 처치하기도 곤란합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갔던 그 무리들이 다시 전투에 참여합니다. 합세해서 그 적을 밀어냅니다. 좀 싱겁지 않습니까? 두려운 사람 돌아가거라 할 때 눈치도 좀 보이긴 하지만 옆의 사람이 슬금슬금 빠지니까 그래도 내가 뭐 꼭 갈려고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돌아가라 하니까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하고 돌아갔는데 전쟁에 이기고 있단다. 그리고 손이 모자란다. 그 말을 듣고 다시 몰려옵니다. 그래서 끝내 다 나와서 전쟁을 해요.
전쟁이 다 끝났습니다. 삼백명 용사는 뭐라고 얘기할까요? 나중에 몰려온 사람들을 향해서 뭐라고 그랬을까요? “잘 한다 임마! 무섭다고 다 돌아가 놓고 이긴다 싶으니 돌아오고 사람이 그렇게 지조가 없어서야...” 이랬을까요? 이 삼백명도 그들을 향해서 아무 말 할 수가 없습니다. 왜요? 그때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일을 이렇게 하셨거든요. 그 삼백명이 자기들의 능력으로 싸움에 이겼다고 말할 수 없기에 돌아갔다고 나중에 참전한 동족을 향해서도 원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돌아갔던 사람이나 끝까지 싸웠던 사람들이 다 합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도우셨다는 고백을 하도록 되어 있는 거죠.
교회에 어려운 일이 생기고 또 해야 할 큰 일이 있을 때에 적당한 기회에 슬쩍슬쩍 빠져 나가는 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 어려운 문제가 다 해결이 되고 나면 그 다음에 어디선가 또 슬금슬금 잘 모여듭니다. 그것은 옛날 이스라엘 이야기 뿐만 아니라 우리 얘기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혹시나 교회 앞에 어려운 일이 있고 힘든 일이 있겠다 싶거든 삼백명 쪽에 들어가십시오. 그런데 구천칠백은 억울합니다. 빠질려고 빠졌나요? 물좀 핥아 먹었는데 빼서 그렇지. 그럴 수도 있죠. 중요한 것은 교회에 어려운 일이 있고 힘든 일이 있다 이럴 때에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먼저 파악하고 그 뜻대로 하겠다고 해서 용감하게 나서는 사람들이 끝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놀라운 체험을 누리게 되는 것이고 나머지 사람들도 나중에 승리의 기쁨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한때 동네북이 되어서 온갖 민족들에게 다 압제를 당하고, 있는 것 다 뺏기고 서럽게 서럽게 살던 그들이 아마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감격했을 겁니다. 그러나 아무도 너 그때 왜 집에 갔었냐고 묻지도 않고 말도 안 할겁니다만 속으로 자기 혼자 좀 미안한 구석이 남아 있겠죠. 구원을 얻되 좀 부끄러운 구원도 있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섬길 때에 우리 모두가 기드온의 삼백 용사처럼 이런 단계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잘 나서 되는 건 분명히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뭘 원하시는지 그것만 늘 염두에 두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면 우리 모두가 기드온의 삼백용사처럼 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기도합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수많은 압제를 당하는 일을 계속 반복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또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사 구원하시고 유능한 사사를 보내서 이들을 다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러한 일을 당할 때에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하나님 뜻에 적합하게 사용된 군사 삼백명이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삼백명처럼 사용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가 잘나서 사용된 것도 아니고 우리에게 능력이 있어서 사용된 게 아니라 하나님의 귀한 뜻이 있어서 사용되었음을 말씀을 통해서 확인합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것 많고 능력이 없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잡혀서 하나님의 귀한 도구로 사용되어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교회에, 하나님의 나라에 어려움이 있고 힘든 일이 있고 또 마땅히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을 때에 하나님의 손에 잡혀서 용감하게 이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저희 효자제일교회 성도들이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