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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니아 여행1 - 시라쿠사에서 기차를 타고 바로크풍의 도시 카타니아에 가다!
5월 16일 아침에 시칠리아섬 남동부 의 옛 그리스인들의 도시 시라쿠사 에서
기차역에 배낭을 맡기고는 고고학구역 에서 그리스 시대 극장이며 채석장과 옛 교회를 본다.
그러고는 다시 시라쿠사 중앙역으로 돌아와 10시 30분에 출발하는 IC 기차를
타고는 오른쪽으로 지중해 바다를 끼고 북상한다.
앞자리에 앉은 서양 할머니는 멀리 나폴리 못미쳐 살레르노에 딸네 집 까지 간다는 데,
그럼 6~7 시간이나 걸린다지만... 그리 걱정하는 눈치는 아니다.
기차는 한시간 남짓 달려서는 카타니아 역 에 내려 라기쥐 라커 를 찾는데 만약에 없으면
시라쿠사에서 처럼 택시를 대절해 배낭을 트렁크에 넣고 다닐 판이라 걱정스럽네?
다행히도 선로 옆에서 라기쥐 라커 를 발견하기는 했는데 문이 잠겨 있어 순간
실망스러운데 자세히 보니 Campanello Bell 이라는 표시가 보이네?
이건 도대체 뭘하는 것이람? 해서 옆에 붙어있는 설명문을 읽어보니....
인터폰 을 하면 15분 이내에 오겠다는 뜻인가 보네?
해서 인터폰을 누른 다음 두리번 거리고 있는데 마침 청소하는 사람이 지나가다가
우릴 보고는 저 멀리 있는 사람을 불러 다행히 배낭을 1개 3유로씩에 맡긴다.
기차역을 나와 광장을 지나 시내 지도를 보고는 지나가는 행인에게 물어서
확인을 한후 Corso Martini d. Librera 거리를 걷는다.
공화국 광장 Piazza della Repubblica 을 찾아가는 길에 어느 건물에서
다리가 셋 달린 시칠리아의 상징인...... 메두사“트리나 크리아”를 발견한다.
메두사 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데,
여신 아테나의 신전에서 해신 포세이돈과 함께 정을 통하던 중 아테나 여신에게
들키게 되면서 여신의 저주로 흉측한 괴물 로 변하게 되었다.
저주 받은 메두사의 머리카락 한올 한올은 꿈틀거리는 뱀의 형상 을 하고 있으며,
메두사를 직접 보는 사람은 돌로 변하게 되는 마법 이 걸려 있다.
아테나 여신은 영웅 페르세우스 를 시켜 청동 방패에 비친 메두사의 목 을
치도록 일러주었으며 이로서 메두사는 단칼에 목이 잘려 죽게 되었다.
페르세우스의 손에 목이 잘릴 때, 그 피에서 포세이돈의 자식인 날개 달린
천마 페가소스와 크리사오르가 태어났다고 한다.
한편 메두사의 잘린 목은 여신 아테나의 방패에 장식 으로 붙여졌으며....
이후 여신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과 경외심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로마의 론다니니궁에서 뮌헨으로 옮겨진 메두사의 대리석 마스크는
조각예술의 걸작으로 꼽힌다는 데.....
시칠리아 섬이 삼각형 이므로 “트리나” 라는 말이 들어가는가 보네?
그러고는 벽보가 어지러운 도로에서 할아버지 손을 잡고 걷는 어린 소녀가 장난기인양
도로옆 턱을 따라 위태롭게 걷는 모습에 웃음이 나온다.
공화국 광장 로터리를 지나니 야자수가 우거져 따뜻한 나라 남국을 실감하는 데,
건물들은 아직은 현대식 상가건물이다.
5분여를 더 걸어 날개달린 사자상 이 보이더니 건물은 바로크식 으로 바뀌고
드디어 광장 Piazza Stesicoro 이 나타나고
동상이 서 있으니... 명문으로 적힌 글씨는 파트리아의 빈첸쪼 벨리니 라?
Vincenzo Bellini 라면 로시니를 계승한 위대한 벨칸토 창법의 후계자 로 1,835년에
서른 다섯 살 나이로 요절한 오페라 작곡가 를 말함일러나?
갸름한 얼굴, 잘 다듬어진 곱슬머리에 총명해 보이는 눈빛을 한 작곡가 빈첸초 벨리니 는
파리 사교계 여성들에게 대단한 사랑을 받았다던 데.....
그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기품 있고 단정한 외모와 완벽한 차림새,
그리고 뭔가 상처나 그늘을 지닌 듯한 우수 어린 표정이었다고 하는 데....
당시 극단과 엽기를 추구하던 낭만주의 예술가들의 제멋대로인 외모와는
거리가 있는 벨리니의 단아한 모습은 홀림 자체였다고 하지만 여기 왜 그의 동상이 서 있나?
왜냐하면 벨리니는 애트나 화산이 바라다 보이는 이 도시 카타니아 에서 태어났는 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작곡가로 활동한 탓에 6살 에 벌써 작곡을 시작한다.
일곱 살 때부터는 교회음악 작품을 발표했으니......
이때부터 벨리니는 모차르트 처럼 귀족들의 살롱에 연주자로 불려 다니기 시작했다고 한다.
열여덟 살이 되자 카타니아시 영재 장학금을 받아 고향을 떠나 나폴리 음악원에 입학하였으며
모차르트 오페라에 반하고 1,824년 로시니의 공연 을 보고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스물 다섯 살이된 1,826년에는 유서 깊은 나폴리 산 카를로 극장에서
오페라 “비앙카와 페르난도”를 공연할 기회를 얻게 된다.
다음해에 오페라 “해적”으로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에 진출하게 되며
“이방인”, “캐퓰렛과 몬태규”, “노르마”, “텐다의 베아트리체” 를 작곡한다.
1830년 3월 베네치아 라페니체 극장에서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인
“캐퓰렛과 몬태규”로 성공을 거둔
벨리니는 스물아홉의 나이로 이탈리아 벨칸토 창법 거장의 반열에 들어선다.
테너가 로미오 역을 노래하는 구노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비해
벨리니는 메조 소프라노가 로미오 역을 노래하고 소프라노가 줄리엣 을 연기한다.
"내 스타일의 오페라 가 이제 전 세계 유수의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된다.
관객은 깊은 감동을 받고 있다" 라고....
자신감에 찬 글을 남겼지만 위장병이 발발해 5년후 죽음을 맞이한다.
다음해인 1,831년에는 밀라노 카르카노 극장에서“몽유병자”를 올리는 데,
여주인공 아미나가 마을 호텔에 묵고 있는 백작 방에 들어가
몽유병 상태로 잠들었다가 약혼자 엘비노의 오해를 사는 이 오페라는.....
정감 있는 벨리니의 선율에다가 당대 최고의 벨칸토 가수였던 소프라노
주디타 파스타 와 테너 조반니 루비니가 출연하여 성공을 거둔다.
같은 해에 비극 “노르마”를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 올려 주디타 파스타(노르마) 와
줄리아 그리시(아달지사) 주역으로 초연되어 성공하니 전세계를 휩쓸게 된다.
벨칸토 오페라의 대가로 “세비야의 이발사” 의 로시니,
70여편을 작곡한 도니체티에 비해 부족해 보이지만
그보다는 선율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자면 리듬이 뛰어난 벨리니 가 앞선다나?
*** 당대 최고의 노르마를 선보였던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 ***
벨리니의 동상 뒤편에는 로마 원형극장 Anfiteatro Romano 이 자리잡고 있는데
기원전 2세기 때의 경기장 유적으로 용암으로 만들어진 객석이 보이지만 훼손이 심하다!
아마도 이 도시 카타니아가 북쪽에 이웃한 애트나 화산 의 여러차례 폭발로
피해를 입었는데다가 시칠리아 2위의 인구를 자랑하는 도시로 성장하면서 입은 피해이리라...
올리비아 핫세가 열연한 로미오와 줄리엣 을 찍은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이 이 도시
카타니아와 애트나 화산 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가 있으니 "수녀의 사랑" 이다.
시칠리아의 멘탈리티가 젖은 영화로
사랑하던 남자가 사촌과 결혼하는걸 결국은 받아들이는 수녀 이야기라.....
옆쪽으로 학교 로 보이는 큰 건물에서 창을 열고 내다보던 학생들이
손을 흔들며 크게 외치는 말!!!“
아리가또!”..... 그런데도 우리 부부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번에는 입을 모아 한꺼번에 터쟈 나온 말! “니 하오!”
그동안 숱하게 유럽을 여행하면서 경험하기로는
우리를 일본인으로 보는게 60%, 중국인 30% 에 코리아 10% 정도쯤 될러나?
이는 중국 이라는 나라는 원래 동양의 중심으로 예전부터 실크로드 교역등을 통해
비단과 한자, 화약과 종이며 나침반 을 서양에 전해준 나라라...
또 “차이나” 라고 하면 "도자기" 를 뜻하는 고유명사가 되었듯이
유럽의 식탁을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켰으며....
중국 홍차 는 ‘차“ 나 ”티“ 로 유럽에 일찍 소개 되었음에랴!
일본 은 마르코폴로가 쓴 “동방견문록" 에 ”황금이 널린 나라 지팡구“ 로 알려져
콜럼부스 가 인도와 더불어 중국과 일본으로 가는 길을 찾고자 했으며....
17세기에 만주족 청나라의 침입으로 중국이 대혼란에 빠져 경덕진 도자기가 끊기자
대타로 수출된 일본 이마리 도자기 는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는다.
이때 도자기를 쌌던 종이가 바로 일본 민화를 그린 판화가 찍힌 “우키요에“ 였는데
14세기 무로마치 시대로 부터 19세기 에도시대 까지 서민의 애환 을 그려 찍어낸 목판화이다!
이 그림들이 유럽의 인상파 화가 들을 열광시켰으니...
모네 는 부인 카미유를 모델로 “일본 옷을 입은 여인”을 그렸다.
그외에 우키요에 그림 “오하시 아타케의 소나기”를 모방해
“ Bridge in the Rain" 을 그리는 등 그 수가 수십편에 이른다고 한다!
또 고흐 는 자기 방을 우키요에 그림으로 장식했으며 귀를 자른후 그린 “자화상”에도
배경은 우키요에 그림 이 덮고 있는등 수백편에 이른다고 하네....
마네, 고갱, 드가 등 수십명의 인상파 화가들이 우키요에 그림에
열광했던 것이니 당시 프랑스는.....
“일본 도자기와 우키요에 그림” 등으로“자포니즘”의 광풍에 휩싸였던 것이다!
일본은 청일 전쟁과 노일 전쟁의 승자로 1차대전 연합국 일원이며 2차대전에서는 미국과
전쟁했고 소니등 가전제품과 자동차 로 유럽시장을 석권하면서 인지도 를 높였던 것이다.
반면에 한국은 고려가 “꼬레”로 전해지기는 했으나 일반인들이
최초로 접하기는 1,950년의 6.25 전쟁 기사 로 전쟁과 기아로 굶어죽는 사람들의 사진이라!
이후 유럽에는 잊혀졌다가 1,988년 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 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는 데,
삼성이며 LG 와 현대가 냉장고와 TV, 에어컨이며 휴대폰과 자동차로 명성을 높였으나
기업들이 한국의 낮은 인지도를 우려해 한국 국적을 철저히 숨기고 오직 상표로만 광고 하니!
저들 제품을 수십년동안 사용하는 사람들도 그게 한국제품인 줄 모르는지라....
다행히도 최근에 "일본에서 시작된 한류" 가 중국과 동남아를 거쳐 유럽에 퍼지기
시작하고... 특히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으니 앞으로는 나아질려나?
엊그제 고현정의 모래시계와 배용준을 주연으로한 태왕사신기를 제작했던
김종학 감독 이 한류 스타 김희선을 발탁한
“신의”를 제작하다가 빚더미에 올라서는 "자살" 했다는 기사를 본다.
그럼 이제 “한류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것일러나?
배용준의 겨울연가 이후 일본에서 탄생한 한류 는 중국과 동남아를 거쳐
전세계로 퍼져 마침내 싸이를 낳았는 데.....
한류 덕분에 외주 제작사가 난립하니 연기자와 작가의 출연료 는 천정부지로
치솟아 제작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미국과 일본의
30% 에 비해 우린 70% 를 점하는데 방송사는 50% 밖에 주지 않는다.
나머지 부족분을 PPL과 외국에 판권수출 로 메워야 하는 데....
주요 시장인 일본에서 한류붐이 꺼졌으니 김종학의 드라마는 이제 수익을 낼수 없게된지라
DVD 는 10만장 팔리던 것이 장근석의 “사랑비”는 고작 1만장 이었다나?
일본에서 한류붐이 꺼지고 서울에 일본 관광객이 40% 나 줄어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 있으니
독도를 전격 방문하고“일왕 사과운운”발언을 한 MB 라....
친구로 지내든 적이 되든간에 손자병법에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했는 데,
일본에서는 일왕이 “천황”으로 신적인 존재인데도 건드렸으니
그럼 MB는 일본과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라도 있었나???
며칠 전에 8.15를 맞아 동아일보가 도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극우파 인물과 인터뷰를
했는데 북한과 한국이 잠자던 일본의 혼을 깨워주어 고맙단다.
그러니 일본 우경화의 동력을 제공 한 인물들이 시진핑과 김정은 그리고 MB 인가 보네?
이러저러한 상념에서 깨어나 로마 원형극장을 뒤로 하고는....
번화가인 에트네아 거리를 걸어 대학을 지나고 두오모 광장 으로 향한다.
즐거운 유럽여행! 함께 나누는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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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길잡이★유럽 배낭여행
(http://cafe.daum.net/bpguide)
첫댓글 즐감,,,감사,,,^^
여기도 참 오래된 도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