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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화 초길종란(初吉終亂)-1
혈방 총단에서 십여리 떨어진 작은 구릉에 근 백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그들
은 승려와 도사, 속인으로 구성돼 있었고 대부분 중년인과 장년, 노인들이었다. 승려들은
대략 40여명에 달했고 이마에 박힌 계인과 승복은 소림사의 소속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리고 60여명에 달하는 도사와 속인의 소매에 활짝 피어난 매화문양과 검의 수실에 매여진
독특한 매듭은 화산파의 소속임을 드러냈다. 그들은 조덕환이 불러들인 소림사와 화산파의
인물들이었다.
"이상하군요."
"아미타불."
붉은 도관을 쓴 늙은 도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구심을 드러내자 하얀 수염이 배꼽까지
내려온 승려가 불호를 외었다.
"일영(一永)대사님. 여기가 동창이 합류하자고 약속한 장소인데, 아무도 없으니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현진 도우, 조금 더 기다려 봅시다."
일영대사는 화북대평원에 모인 소림사 승려들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소림사에서도 열 사람
이 채 남지 않은 일자배의 고승이었다.
"그러나 이건 너무 하지 않습니까?"
"노납도 이번 처사에 불만을 가지고 있소이다. 그러나 상대는 동창이외다."
"아무리 동창이라 해도 이번은 좀 심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진은 동창의 호출을 받고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출사를 한 것이 심히 못마땅했다. 게다
가 약속장소에 심부름꾼조차 보이지 않았고, 연락이 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신
세가 됐으니 화가 나는 것도 당연했다.
"현진 도우, 참으시구려. 다른 일도 아니고 혈방을 치는 대사를 앞두고 있소."
"흠... 숙적인 혈방을 타도하는 일만 아니었다면 빈도는 이번에 오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동창의 오만방자한 처사를 보아하니 괜히 발걸음을 한 것 같습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현진 도장은 동창이 마중을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일영 대사도
현진 도장의 생각과 별 차이가 없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들은 조덕환이 동창
의 수반에서 해임되고 수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청룡대주는 50여명에 달하는 부하들을 이끌고 갈대밭에 매복하고 있었다. 그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매복했는지 일 리 밖에서 인기척만 들려도 도망간다는 뇌조(雷鳥)들이 평화롭게
놀고 있었다.
푸다닥.
뇌조들이 인기척을 느끼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순간 매복을 하고 있던 청룡대주는 표적
이 가까이 온 것을 인지했다. 청룡대주는 각 대원들 사이에 연결한 실을 당겨 주의를 줬다.
푸르릉. 푸르릉...
끼익~. 끼익~.
멀리서 마차의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와 말들의 투레질이 땅을 통해 청룡대 전원에게 전달해
주었다. 청룡대 대원들은 일제히 숨을 멈추었다.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긴장이 고조되었다.
상대는 홍면금살군과 혈방의 정예였기 때문이다.
"타!"
표적의 선두가 매복 안에 들어오자 청룡대주는 기합소리를 내며 땅속에서 튀어나와 하늘위
로 솟구쳤다. 청룡대 대원들은 청룡대주의 기합소리가 나자마자 일제히 땅속에서 튀어나오
더니 표적을 향해 달려갔다.
"막아라!"
"기습이다. 모두 전열을 유지해라."
"어서 방주님을 모셔라!"
갑작스런 기습에도 혈방의 정예는 흔들리지 않고 전열을 유지했다.
파바박.
"으아악!"
"커억."
그러나 상대는 만반의 준비를 맞춘 청룡대였다. 순식간에 선두에 있던 사, 오십여명에 달하
는 혈방의 고수들이 피를 뿜어내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사방이 처절한 전장으로 변모했다.
선두에서 벌어진 전투로 행렬이 멈추자 홍면금살군이 타고 있던 마차 안에서 싸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냐?"
"선두가 기습을 당했습니다."
"허... 기습이라고."
"그렇습니다."
"흐흐흐, 패전지장이 됐다고 별 하루살이들마저 나를 무시하는구나."
홍면금살군은 이를 갈았다. 엄청난 피해만 봤을 뿐 아무런 이득조차 없이 끝나버린 장강대
수전 때문에 적들이 자신을 공격할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기습을 감행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치욕만 얻은 장강대수전으로 인해 적들이 자신을 얕잡아 본다고 생각하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타올랐다.
"누구냐?"
"아직 정체를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홍면금살군의 두 눈동자에 시퍼런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곧바로 알아보겠습니다."
"촌각의 시간도 지체하지 마라."
"존명(尊命) 받들겠습니다."
홍면금살군의 호위를 책임진 자는 사색으로 변한 얼굴을 풀지 못하고 선두를 향해 달려갔
다. 평상시라면 부하에게 시켰겠지만 홍면금살군의 노한 표정에 겁을 먹고 직접 움직인 것
이다. 얼마 후 선두에서 치르고 있는 전투를 확인한 호위 책임자는 홍면금살군 앞에 부복
했다.
"방주님. 적은 화산파로 추정됩니다."
"화산파!"
"그렇습니다. 기습한 자들의 복장과 사용하는 검에 화산파의 표식이 있습니다."
화산파의 이름은 홍면금살군의 흥분을 가라앉히는 효력을 가졌다. 비록 소림사와 무당파에
밀리긴 하지만 화산파의 이름은 컸다.
"화산파가 나섰다... 하긴 그들이라면 자신의 문파 표식을 당당하게 드러내겠지."
"지금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럴 것이다. 화산파가 그리 쉽게 상대할 세력이 아닐 터... 그런데 그들 중에 도를 사용하
는 노인이 있지 않았느냐?"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검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홍면금살군은 대답을 듣고는 눈을 감고 고심했다. 무엇인가 걸리는 부분이 있는데 명확하
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나서겠다. 앞장서라."
"알겠습니다."
홍면금살군의 무리는 모두 사백여명에 달했다. 그들은 일백명의 선발대와 이백여명에 달하
는 본 진과 백여명에 달하는 인원으로 구성한 후속부대로 나누어져 있었고, 각각 십 리 정
도의 거리를 두고 움직였던 것이다.
"전원 전속 질주하라."
"와아~. 와아~."
이백여명에 달하는 인원이 일시에 지르는 함성은 천지를 진동시킬 정도였다. 그들도 승패
를 가리지 못한 장강수전의 개운치 못한 끝마무리로 인해 사기가 저하돼 있었다. 많은 피
해만 입고 얻은 것 없이 복귀하는 자신의 모습에 참담함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상지도 못했던 전투가 벌어지게 되자 그들은 마음 속에 묻어둔 응어리를 풀 수 있
다고 생각해 흥분했다. 홍면금살군은 사기가 충천했다기보다 피에 굶주렸다는 표현이 정확
한 혈방의 정예를 이끌고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저, 저런..."
격전지에 도착한 혈방 본진의 인물들은 선발대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격분해버렸다. 선발
대는 청룡대의 공격을 받고 거의 몰살한 상태였다.
"후퇴하라."
청룡대와 혈방의 본진이 부딪치기도 전에 후퇴명령이 울려 퍼졌다. 전투는 순식간에 끝나
버렸다.
"추적하라."
"우아아~."
청룡대는 고양이에게 쫓기는 생쥐처럼 정신 없이 도주했다. 혈방은 쉽게 청룡대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청룡대는 갈대밭 사이로 종횡무진하면서 일부로
흔적을 남겼다.
그런데 흔적을 남기는 방법이 얼마나 교묘한지, 혈방은 청룡대가 일부로 남긴다는 것을 생
각지도 못했다. 청룡대는 유인(誘引)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혈방이 청룡대의 기습을 당한 시점에 소림사와 화산파도 비슷한 일을 당했다. 그들은 혈방
의 방도로 변장한 현무대의 기습을 받았다. 현무대는 기습을 감행해 대략 30여명을 참살하
고 곧바로 후퇴를 감행했다.
소림사와 화산파는 제자들의 죽음에 이성을 잃고 정신 없이 현무대를 추적했다. 현무대는
청룡대가 혈방을 유인하는 장소로 도주했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달하는 순간 현무대는 자
취를 감추었다.
청룡대 역시 혈방을 목적지까지 유인하고 자취를 감추고 현무대와 합류했다. 소림사와 화
산파의 정파 무리와 혈방 무리는 갑자기 종적을 감춘 청룡대와 현무대를 찾는데 전력을 다
했다. 청룡대주와 현무대주는 그들을 바라보며 싸늘한 비웃음을 던졌다.
"예측한대로 움직이는군."
"생각보다 어리석지 않은가."
"그건 아니네, 현무대주."
현무대주는 청룡대주는 멀끔하게 바라보았다.
"홍면금살군이나 소림사와 화산파의 인물들이 어리석지는 않네."
"글쎄..."
"혈방이나 정파의 무리가 우리의 유인에 넘어간 것은 저들이 정보가 부재와 난처한 입장에
처해 이성적으로 생각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네. 절대로 방심할 인물들이 아니네."
"알겠네."
청룡대주의 냉철한 판단은 현무대주도 인정하고 말았다.
"그만 가세. 저들이 싸우도록 자리를 마련했으니, 이젠 불이 잘 붙도록 우리가 기름을 부어
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하세."
"좌장 어른과 주작대주가 눈이 빠지도록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네. 어서 가세나."
청룡대주와 현무대주가 사라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혈방과 소림사와 화산파가 조우했다.
그들은 동료를 잃은데다 지금까지 추적을 하는 동안 매우 흥분해 있었다. 상대가 지금까
지 쫓던 인물인지 아닌지 분간도 하지 않고 격돌했다.
"쳐라."
"공격하라."
그들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병기를 들고 뛰어들었다.
챙. 챙. 채챙...
"아악!"
"죽어라."
갈대밭은 인마들이 내뿜는 피로 인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멈추지 않았
다. 상대를 모두 피바다 속에 처박지 않고는 끝내지 않겠다는 살상의 욕망에 빠져 허우적
거렸다.
"아미타불."
웅장한 불호. 천지를 진동하는 거대한 사자후는 일시에 혈전을 멈추게 했다. 일영대사의 가
공할 내력이 담긴 사자후는 양 세력이 빠져든 광기에서 벗어나도록 했다.
"가공할 내력이군. 대사의 정체가 궁금하오?"
"시주의 정체부터 밝히시구려."
"이 사마 모는 강호에서 홍면금살군이라 불리는 사람이오. 대사의 가사를 보니 소림사에서
오신 것 같은데, 법명이 어찌 되시오?"
홍면금살군은 늙은 승려의 사자후에 깔려있는 내력이 심상치 않아 나선 것이다.
"사마 시주. 노납은 일영이오."
"일영!"
홍면금살군은 소림사에서 채 열 사람도 남지 않은 일자배의 고승이 기습에 참여했다는 사실
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흑막에 걸렸다는 생각이 뇌리에 퍼뜩 스쳐 지나
갔다.
'이건 잘못됐다. 아무래도 누군가 친 장난에 걸려든 것이야. 분명해.'
단순한 유인책에 걸렸다는 생각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아~."
그러나 상황은 기호지세였다. 홍면금살군은 소림사와 화산파가 혈방을 공격할 목적을 가지
고 집결했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눈앞에서 동료들의 죽음을 보고 살기
가 충천한 방도들의 기세를 꺾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어차피 치러야할 전투였기에, 홍면금살군은 제 삼의 적에게 유인을 당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홍면금살군은 소림사와 화산파의 연합세력을 제물을 삼아 떨어진 자신의 권위와
혈방의 사기를 되찾기로 마음먹었다.
"혈방의 자랑스런 방도들이여."
홍면금살군은 뒤로 돌아 혈방의 방도를 향해 외쳤다.
"정도의 위선자들이 본색을 드러내고 우리를 기습해왔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저들을 쳐야 합니다."
"옳소. 형제들의 원한을 갚자."
"와아~, 와아아~."
혈방의 방도들은 홍면금살군의 선동에 즉각 반응했다. 그것도 매우 열렬하게...
"저, 저건 무슨 말입니까?"
홍면금살군의 선동을 본 화산파의 현진 도장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일영 대사에게 질문
했다.
"노납도 모르겠소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군요. 저들이 대대적으로 우리를 공격한다는
것입니다."
"어처구니없군요. 기습은 우리가 당했거늘... 거꾸로 자기가 피해자라고 우겨."
"아미타불."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숙적. 더 이상 할말도 들어줄 말도 없습니다. 전력을 다해 싸워 저들
에게 진정한 도의가 무엇인지 보여줘야 합니다."
현진 도장은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하고는 검을 들고 있는 손을 번쩍 들었다. 화산파의 사
람들은 현진 도장이 손을 들자 전원 검을 꺼내 들고 앞으로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나갈 때마다 살기가 폭발적으로 증가돼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아미타불."
일영 대사의 불호는 탄식이 실려 있었다. 부처님을 모시는 불제자의 몸으로 피의 아수라장
을 만들어야 하는 현실이 가슴아프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할 길은 어디에도 없었
다.
"허허, 나는 죽어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일영대사의 독백은 슬픔이 배여 있었다.
"나무아미타불."
일영 대사는 불호를 외우며 혈방의 세력을 향해 소림사 특유의 반장호궤의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소림사 승려들은 일제히 불호를 외치며 들고 있던 선장과 계도를 들고 앞으로 전진했다.
일영 대사의 반장호궤와 불호가 전투명령이었던 것이다.
"전원 전투준비."
"와아아~."
홍면금살군의 격앙된 음성은 혈방의 방도들을 흥분시켰다. 그들의 흥분은 폭발적으로 내뿜
는 살기와 맞물려 강대한 기세를 만들었다. 소림사와 화산파의 고수들이 서서히 전진하면
서 내뿜는 강렬한 기세와 혈방의 방도들이 쏟아내는 살기의 기세가 중간 지점에서 격돌해
보이지 않는 벼락과 폭풍을 만들었다.
60인대 290인의 혈전이 새롭게 막이 올랐다. 청룡대와 현무대의 기습에 이은 혼전으로 상
당수가 사망한 뒤라 그들의 인원이 줄어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두 세력이 내뿜는 기세는 줄
어들지 않고 더욱 강대해져 있었다.
그런데 이런 폭풍전야 속에서도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 사람은 오십대 중반의
노인으로 화산파 속가제자로 특이하게 검이 아니라 거대한 장도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다
른 한 사람은 홍면금살군이었다.
홍면금살군은 두 세력이 격돌보다 장도를 들고 있는 화산파의 노인에게 시선을 향하고 있었
다. 화산파의 노인은 시선을 하늘을 향한 채 유유자적하는 듯 보여도 신경은 홍면금살군의
행동을 파악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신경전은 두 세력의 기세 싸움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
정우와 무당파의 제자 세 사람은 최대한의 속도로 악소채를 추적했다. 그러나 악소채의 그
림자도 그들은 볼 수가 없었다. 해검지에서 근 십리의 거리까지 추적했지만 악소채가 남긴
사소한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정우 사형, 조금만 더 가면 1차 관문입니다."
"알고 있네."
"비상종을 쳤으니 1차 관문에서 그 괴녀를 막고 있을 겁니다."
"그러기를 빌고 있네."
정우의 안색이 흐려졌다. 악소채의 무위를 생각하자 불안했던 것이다.
"헉!"
"이럴 수가!"
불안한 생각은 적중했다. 1차 관문을 지키는 여덟 명의 고수들이 검을 든 채 석상처럼 뻣
뻣하게 변해있었다.
"혈도를 제압 당했군."
"제대로 싸운 흔적도 없습니다."
"그만큼 그 괴녀의 무공이 높다는 뜻이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비상종을 듣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을 건데... 이렇게 쉽게 제압을
당하다니..."
이를 갈면서 혈도를 제압 당해 움직이지 못하는 1차 관문의 고수에게 다가갔다.
"잠시 멈추게."
"왜, 그러십니까? 정우 사형."
"자네가 혈도를 풀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검기점혈(劍氣點穴)을 풀 수 있겠는가?"
정우의 한 마디는 세 사람을 경악 속으로 몰아버렸다. 악소채는 검기로 1차 관문을 지키는
무당파 제자들을 점혈해 버린 것이다.
"거, 검기점혈이라니요?"
"이 현장은 괴녀의 무력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네. 결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
라는 증거이기도 하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단 사제들은 해검지로 되돌아가게."
정우의 명령을 세 사람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사문이 급박한 상황에 빠진 것을 목격했는
데 손놓고 되돌아 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사제들이 간다고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 그건 아니지만..."
"해검지를 지키는 게 우리의 본분이네. 게다가 해검지에는 인사불성이 된 정원사형이 계시
네. 해검지가 뚫리는 일은 한 번으로 족하네. 그리고 한 사람은 남아서 점혈을 당한 형제들
을 지키게."
정우의 설명을 들은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문인 해검지를 비운 것도 모자라 의식
을 잃은 정원을 방치했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이다.
"정우 사형께서는 어찌 하시렵니까?"
"빈도는 본산에 가겠네."
"사형!"
"오해하지 말게. 최대한 빨리 본산에 가서 보고를 해야 본 파가 제대로 대응하지 않겠는가."
"알겠습니다. 사형."
그들은 정우에게 포권을 한 뒤 한 사람은 남고 두 사람은 재빠르게 해검지를 향해 달려갔
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주의하게. 그럼 빈도는 본산에 가보겠네."
"알겠습니다. 정우 사형."
정우는 검기점혈로 의식을 잃은 채 석상처럼 굳어버린 사형제들을 훑어보고 한숨을 내쉰 뒤
무당파 본산을 향했다. 2차 관문에서 제발 악소채를 잡아두기를 기원하며 전력을 다해 달
렸다.
"이런..."
2차 관문에 도착한 정우는 다시 한번 절망을 느꼈다. 그들은 1차 관문과 똑같이 당한 상태
였다. 오히려 검조차 뽑지도 못한 채 전원 혈도를 제압 당해 있었다.
"사형, 사제들. 본 파가 화급한 상황이라 이만 가야합니다. 빈도를 용서하십시오."
정우는 점혈을 당한 열두 명의 도사에게 포권을 취하고는 3차 관문을 향했다. 그러나 3차
관문도 별 차이가 없었다. 그나마 4차 관문은 격전을 벌인 흔적이나마 남아 있었다. 5차
관문부터는 격전의 흔적이 심해지기 시작했고 상처를 입은 도사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설마 본 파의 8대 관문이 모두 뚫린 것은 아니겠지."
6차 관문을 향하는 정우의 가슴에 불길한 상상이 가득했다. 8대 관문은 해검지와 함께 무
당의 자랑이요, 자부심이었다. 해검지가 무당산을 방문자를 맞이하는 관문이라면 팔대관문
은 적을 막는 방어의 상징이었다.
"6차 관문까지..."
정우는 6차 관문 앞에서 주저 않아 버렸다. 6차 관문마저 악소채의 힘 앞에서 무력하게 뚫
려 있었다.
"소칠성검진(小七星劒陣)마저 그 괴녀를 막지 못했단 말인가..."
6차 관문부터 8대 관문의 정수라 할 수 있었다. 나한진과 쌍벽을 이룬다는 무당칠성검진이
6차 관문이었다. 그러나 사방에 쓰러져 있는 일곱 도사와 격전의 흔적은 명백하게 무당칠
성검진이 파해됐다는 증거였다.
"으으..."
"벽운 사숙님."
쓰러져 있던 일곱 도인 중에 한 사람이 신음성을 내자 정우는 달려갔다.
"누구...요?"
"벽운 사숙님. 정우입니다."
"정... 우 사질... 인가..."
"그렇습니다."
벽운 도장은 눈조차 뜨지 못하고 말조차 띄엄띄엄 했다.
"어, 어서 본산에... 달려.. 가서 위급을.. 알리게... 7차 관문을 맡고.. 있는 하운 사형이라면
그 마녀를 조금이라도.. 잡아 놓을..."
"벽운 사숙님!"
벽운 도장은 의식을 잃어버렸다. 정우는 온 몸을 부르르 떨다가 무당 본산을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사숙. 조금만 기다립시오."
정우는 벽운 도장의 머리를 땅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무당파 본산을 향해 달려갔다.
정신 없이 달린 정우의 앞에 참혹한 격전의 흔적이 나타났다. 주위는 태풍이 쓸려간 듯 초
토화 돼 있었고 사방에는 49인의 도사들이 쓰러져 있었다.
"7차 관문마저 뚫렸는가... 무당이 자랑하는 대칠성검진(大七星劒陣)이 이리도 무력했단 말이
냐..."
벽운 도장의 예상과 달리 7차 관문은 뚫려 있었다. 그러나 악소채가 지금까지 관문을 쉽게
뚫고 나갔지만 7차 관문은 고전의 흔적을 남겼다. 7차 관문은 무당의 장로급인 운자 항렬
의 고수 일곱 명과 정자 항렬의 마흔 두 명이 펼치는 대칠성검진이었다. 악소채도 쉽게 통
과하기는 힘든 관문이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정우는 최대한 빨리 본산에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더 이상 늦다가는 8대
관문에서 벌어진 참사가 본산에도 일어날 수 있음을 상기한 것이다. 정우는 8차 관문을 향
해 정신 없이 달려갔다.
그런데 정우가 사라진 뒤 한 식경 정도 지나자 한 늙은 도사가 7차 관문에 나타났다. 늙은
도사는 7차 관문에 벌어진 참경을 보고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아~, 원시천존. 원시천존."
늙은 도사는 쓰러져 있는 도사 들 중에 한 사람에게 다가갔다.
"악 소저의 무예가 예상을 벗어날 정도로 급증했구나. 하운 사제의 무공은 본 파에서 30위
권 안에 드는 강자인데, 너무나 쉽게 제압해 버렸군. 게다가 내가 칠성검진에 대해 알려줬다
고 하지만..."
늙은 도사의 정체는 경운 도장이었다. 한 때 무당에서 10위 권 안에 드는 강자였고, 현재는
검성 일양자를 제외한 최고수로 악소채의 두 번째 스승이었다.
"아직까지는 살생이 없으니 다행이지만... 앞으로 어이 될지..."
경운 도장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무당파가 도를 추구하는 진정한 도량이 되기를 기원
하며 악소채에게 무당의 자존심 세 개를 무너뜨려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무당의 세 자
존심은 해검지와 8대 관문, 그리고 검성 일양자였다.
"일단 사제들과 사질들을 치료해야겠군."
경운 도장은 7차 관문을 지키는 도사들을 치료하면서도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8차 관문을
몇 번씩 바라보았다. 상대에 따라서 8차 관문은 일곱 관문을 모두 합친 것보다 어려운 관
문이었다. 그리고 문제는 악소채에게 해당된 일이었기 때문에 경운 도장이 불안해하는 까
닭이다.
8차 관문 앞에 도착한 정우는 악소채를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악소채는
8차 관문 앞에 우두커니 서있었던 것이다. 한숨을 돌린 정우는 악소채를 차근차근 바라보
았다.
"허! 일곱 관문을 돌파했는데... 큰 탈이 없다니..."
정우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말았다. 입고 있는 옷에 피가 점점이 묻어있고 칼날에 베
인 흔적은 있지만 큰 상처를 입거나 내상을 당한 흔적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십대 고수급의 무인이라 할지라도 8대 관문을 돌파하려면 중상을 각오해야 할텐데..."
악소채의 무력에 감탄과 함께 경이를 느끼던 정우는 8차 관문을 지키는 두 늙은 도사를 발
견하자 곧바로 엎드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사숙조께 인사드립니다."
정우가 오체투지를 한 두 노도사는 각각 새하얀 도북과 검은 도복을 차려 입고 관문의 좌우
에 있는 바위에 정좌해 있었다. 두 노도사는 검성 일양자의 사제인 현양자(玄陽子)와 백양
자(白陽子)였다.
강호인들은 두 노도사와 적양자(赤陽子), 일양자를 합쳐 무당사자, 또는 무당사선이라 부르
며 존경했다. 무당에 남아 있는 최고 배분으로 소림사의 일자 항렬보다 반배가 높은 나이
를 가진 강호의 대선배들이었다.
악소채가 8차 관문에서 나가지 않고 멈추어 선 것은 두 노도사의 가공할 무력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멈추고 되돌아갈 수는 없는 악소채에게 남은 길은 오직 정
면돌파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악소채와 두 노도사 사이에 긴장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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