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활란
모리의 천연기념물 지정을 학자적 양심의 관점에서 조사 연구하여 보고한 것으로 인지하였다면, 모리의 행적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나요!.
그렇다면 한일합방조항을 국내의 후학들이 친일파의 동조로 일제의 침략적 강압에 의한 불법이요 무효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일제의 모자라고 양심없는 학자님들이 쓴 것이라 그러하나요.
김활란 이광수 최남선 등이 기고한 글이나 지방을 돌며 유세한 친일행적도 당시 조선 최고의 지성인들로 잘못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여야겠군요.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안으로 일제의 조선합방에 따른 문서행적들이 조선을 위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런 것 들의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며 일제에게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한다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근자에 일부에서 진돗개 관이 바뀌어 진돗개의 옛 모습이 일제에 의해 왜곡되었고 진돗개는 인근육지와 교류하며 육지개와 진배없는 혈통으로 육지의 역사와 전통을 같이 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스스로 지금까지 진도개의 독자적인 역사성부여와 특성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하는 것이지요.
지금 와서 육지의 견역사와 문화와 전통을 따르며 육지개의 아류라 자칭한다면, 굳이 더러운 일제가 부여한 명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우리토종개 역사에 어떤 의미가 있겠는지요!.
마치 친일 동조자들처럼 바른 역사를 알고도 이리저리 편리하게 처신하니, 일제 강점기 주입된 세뇌교육의 위력을 실감케합니다.
김활난 (金活蘭 1899-1970)
- 총독부 '조선 교육회' 산하 조선인 학자의 활동 -
1931년 9월 일제 만주침략.
1932년 3월 일제 만주국 수립.
1936년 11월 독 ·일 방공협정(防共協定) 체결
1936년 12월 '조선총독부 사회교육과' 주관 사회교화진흥간담회에 참석.
1937년 1월 '조선총독부 사회교육과' 주관 방송교화선전협의회의부인강좌반 강사.
1937년 1월 '조선총독부 학무국' 주관 조선부인문제연구회 상무이사.
1937년 7월 일제 중국본토 침략이 일어나자 '애국금차회'의 발기인 및 간사.
1937년 7월 조선신궁을 중심으로 국가안태 무운장구(國家安泰 武運長久) 기원제 조선인 유지 26명이 발기해 조직한 기원제 거행 준비회의 발기인 및 위원.
1937년 10월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출정군인가족간담회 참석.
1937년 11월 독일·이탈리아 ·일본 3국 방공협정(防共協定) 체결
1937년 12월 "남경함락 전첩봉고제" 발기인.
1938년 2월 '교육회개정 간담회' 참석
1938년 3월 '제3차 조선교육령'이 개정 공포 되자 그해 6월 '이화애국자녀단'을 결성 단장을 맡음.
1938년 5월 경성기독교연합회 평의원 맡음.
1938년 6월 조선 YMCA 를 회장의 자격으로 일본 YMCA에 귀속시킴.
1938년 6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정동연맹 발기인 및 이사.
1938년 7월 '생활정도를 낮추라' 매일신보 기고.
1938년 9월 '가정보국운동으로서의 국민생활 기본양식' 조선부인문제연구회 강연.
1939년 4월 조선총독부 정책에 따라 아펜젤러의 뒤를 이어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이화보육학교의교장에 취임.
1939년 4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평의원 겸 참사를 맡음.
1939년 6월 '부인들끼리의 애정과 이해 - 내선부인의 애국적 협력을 위하여' 동양지광에 기고.
1939년 7월 조선일보사 강당에서 비상시국 생활합리화에 대한 시국강연.
1939년 8월 제2차 세계대전.
1940년 3월 일제 남경정부 수립(왕징웨이)
1940년 11월 국력총력조선연맹의 사무국 훈련부 참사를 맡음.
1941년 2월 조선의 청년을 국방의 전위전사(前衛戰士)로 양성한다는 조선청년단(朝鮮靑年團)의 참여(參與).
1941년 4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겸 평의원.
1941년 8월 임전대책협의회(임전대책협력회로 개칭) 위원.
1941년 9월 임전대책협의회와 흥아보국단을 통합한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
1941년 9월 조선교화단체연합회가 주최한 부인궐기촉구대회에 강사.
1941년 10월 전위여성 격려대 강연위원으로 평안남도 평양, 진남포 안주, 평안북도 신의주, 선천, 정주에 파견되어 "일본여성의 갈 길"이라는 주제로 강연.
1941년 11월 국력총력조선연맹의 유일한 여성 이사로서 전선(全鮮) 중앙지방여성회 개최에 앞서 "황국의 여성으로서 미래 지원병, 황군용사 어머니로서 심신 모두가 건전한 여성을 창조하도록 노력" 하겠다는 포부를 밝힘.
1941년 12월 여성들을 전쟁에 보다 효율적으로 동원하기 위해 조선임전보국단 산하 기관으로 부인대가
결성되었을 때 지도위원을 맡음.
1941년 12월 조선임전보국단이 애국 반원과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회원들을 대상으로 주최한 결전부인대회의 강연회 연사.
1942년 1월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1942년 2월 대동아 건설과 우리 준비" "英 싱가폴 공략 대강연회" 강연.
1942년 5월에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겸 평의원 재 선출 및 훈련부 이사 겸직.
1942년 8월 징병제를 실시하는 환영 담화발표.
1942년 11월 전위여성격려대(前衛女性激勵隊)에 참여 평안북도 신의주, 정주, 선천 강연.
1942년 12월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 「신시대」기고.
1943년 5월 '가정도 전장이다' 방송
1943년 6월 '남자에게 지지 않게 큰 결의를 갖고 있다' 강연.
1943년 8월 '거룩할 대화혼을 명심 - 적 결멸에 일로 매진' 「매일신보」기고.
1943년 11월 학병제 지원 독려 강연반 연사.
1943년 11월 '조선교화단체연합회'학병지원 부인계몽 독려반 연사.
1943년 12월 '뒷일은 우리가'「조광」기고.
1943년 12월 '남자에 지지않게 황국 여성으로서 사명을 완수'「매일신보」기고.
1943년 12월 '여성도 전사다' 부민관 강연.
1944년 1월 '감격과 가중한 책임' 여자특별연성소 지도자 양성기관 지정관련 기고.
1945년 6월 '조선언론보국' 이사
'조선의 학도여'
이광수(李光洙, 1892~1950)
그대는 벌써 지원하였는가
특별지원병을
내일 지원하랴는가
특별지원병을
공부야 언제나 못하리
다른 일이야 있다가도 하지마는
전쟁은 당장이로세
만사는 승리를 얻은 다음날 일
승패의 결정은 즉금(卽今)으로부터
시각이 바쁜지라 학교도 쉬네
한사람도 아쉬운지라 그대도 부르시네
일억이 모조리 전투배치에 서랍시는 오늘
그대는 벌써 뜻을 정하였으리
나가리이다, 나가싸우리이다
싸워서 이기리이다
미영(米英)을 격멸하고 돌아오리이다
조국의 흥망이 달린 이 결전
민족의 운명이 결정되는 마루판
단판일세, 다시 해볼 수 없는 끝판
그대가 나가서 막을 마루판 싸움
아세아 십억
칠같은 머리
흑요석 같은 눈
황금색 살빛
자비와 인과 맑은 마음과
충과 효와 정렬과
예의와 겸손과
근면과 평화와
이러한 정신
이러한 문화
운순하고 순후한
십억의 운명이 달린 결전
거룩한 우리 향토
아세아의 성역을
지르밟아 더럽히던
적을 쫓으라 하옵신 결전
이 싸움 이기고 나서
아세아 사람의 아세아로
천년의 태평이 있을 때
그 어떤 문화가 필 것인가
아세아는 세계의 聖殿
세계의 낙원, 이상향
신앙과 윤리와 예술의 원천
그러한 아세아를 세우랴고
맹수독충을 몰아내는 성전(聖戰)
일본 남아의 끓는 피로
아세아의 해(海와) 육(陸)을
깨끗이 씻어내는 성전(聖戰)
이 성전의 용사로
부름받은 그대 조선의 학도여
지원하였는가, 하였는가
특별지원병을
그래, 무엇으로 주저하는가
부모때문인가
충 없는 효 어디 있으리
나라없이 부모 어디 있으리
그래 처자를 돌아보는가
자손의 영광이 번창이
이 싸움 안이기고 어디 있으리
부모길래, 처자길래, 가라, 그대여
병역의 의무 없이도
가는 그대의 의기(義氣)
그러매로 나라에서
특별지원병이라 부르시도다
의무의 유무(有無)를 논하리
이 사정 저 형편 궁리하리
제만사(除萬事) 제잡담(除雜談)하고
나서라 조선의 학도여
그대들의 나섬은,
그대들의 충의(忠義) 가문의 영화
삼천만 조선인의 생광(生光)이오 생로(生路),
일억 국민의 기쁨과 감사
남아 한번 세상에 나,
이런 호기(好氣) 또 있던가,
일생일사는 저마다 다 있는 것
위국충절은 그대네만의 행운
가라 조선의 육십학도여
삼천만 동향인(同鄕人)의 압잡이 되라
총후(銃後)의 국민의 큰 기탁(寄託)과
누이들의 만인침(萬人針)을 받아 띠고 가라
『매일신보』1943. 11. 4.
첫댓글 더러운~~ㅎ
김할란,모윤숙,이광수,등은 모두 아교같은 친일로 알고 있읍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