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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형께
K형, 무척 오랜만에 편지를 씁니다.
이 곳 남녘은 가을이지만 무척 따사롭습니다.
아마 서울의 늦여름 정도로 생각하시면 비슷할 것입니다.
그 동안 평안 하셨지요?
가끔 매스컴을 통해 형의 동정을 반갑게 보고 있습니다.
제가 강단을 내려와 이 곳, 진도에 온 지도 벌써 두 해가 되었군요.
그 동안 이 섬 곳곳을 돌아보며 새롭게 공부한 것이 참 많습니다.
여행은 「발로 하는 공부」라 하였지요.
그런데 그 향토에서 생활하는 것은 「몸으로 하는 공부」, 지역사회에 참여하고 부대끼는 것은 「영혼으로 하는 공부」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 몸으로 하는 공부에서 영혼으로 하는 공부로 들어가려는 참입니다.
그리고, 이 곳 보배섬 진도에서 발견한 보물 몇 가지를 보냅니다.
먼저「진도구기자」,
구기자(枸杞子)는 한방에서 최상의 익수보정(益壽補精)하는 영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구기자는 정말로 특별한 구기자이니 절대로 남에게 나눠 주지 마시고 꼭 혼자서 다 잡수셔야합니다.
형께 드릴 구기자라서 좋은 구기자를 찾느라 이곳저곳 기웃거리다가 아주 오래된 구기자 밭을 소개 받아 구기자를 사려고 했었습니다.
그 구기자밭 주인영감님이 「이 구기자는 수명을 늘려주는 약이므로 나쁜 사람에게 전해지면 세상에 큰 해악을 끼치게 된다」며 누가 쓸 것인지를 꼬치꼬치 물어 왔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면접시험 치르듯 형의 신분과 철학, 민주화와 민권운동 업적을 자세히 설명했더니 돈을 안 받고 거저 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복은 최근 인공양식에 성공하여 선풍을 일으키고 있으니 술안주로 삼으면 제격일 것이고, 울금은 강황이라고도 하는데, 구기자의 뒤를 잇는 뛰어난 건강식품이니 진도농민을 위해 널리 홍보해 주십시오.
그리고, 홍주(紅酒) 몇병과 함께 특별히 그 사연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홍주는 이 곳에서 처음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선홍색 고운 빛깔, 잡냄새 전혀 없는 순수, 도수가 높으면서 착 감기는 맛, 숙취 없이 시원한 뒤끝, 흠잡을 것 하나 없는 세계수준의 품질, 저는 홍주에 반했습니다.
그래서, 홍주의 역사와 유래를 찾아 보았는데, 문헌이나 자료로 남아있는 것이 없고, 구전되는 전승도 모두 다 흩어지고 사라져 아무도 모르고, 고증할 방법이 없기에 제가 직접 나서서 찾았습니다.
문헌이나 유물같은 실체적 증거에 집착하는 것은 자연과학의 기초과학분야나 형사재판의 증거주의에 한정되는 것이고, 인문과학이나 역사연구에서는 정황증거와 방증, 추론, 논리적 연역이 증거로서 더 큰 힘을 갖는 것은 누구나 다 알지요.
제가 텍스트로 삼은 1차 자료는 진도군지(珍島郡誌),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조선총독부 문서, 향토사 연구서, 중국의 사서, 그리고 선행 연구서 들입니다.
이 자료들의 직·간접 기록과 표현, 당시의 시대상황 등을 분석, 종합하고 진도의 인문지리를 연계시켜 홍주의 유래와 역사를 밝히고 재구성 했습니다.
홍주가 빚어지기 훨씬 이전, 선사시대에 탁주가 먼저 있었고 점차 약주와 청주로 발전해 간 것은 한반도는 물론, 세계의 공통적인 사실(史實)입니다.
그 후, 삼국시대에 홍주의 원형인 증류주가 아랍에서 들어와 토착화 했고(아락주), 통일신라때 증류주가 다양화하고 홍주로 발전했으며, 고려시대에는 대량 생산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증류주인 소주(燒酒)가 전래된 것이 몽골의 침입 이후이고, 고급증류주인 홍주는 고려말, 조선초에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소주의 몽골전래설은 이제현 선생의 역옹패설(櫟翁稗說)을 맹종한 것으로 다른 사서의 기술이나 출토된 문물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제현 선생은 원나라에서 벼슬을 한 친원파(親元派) 지식인으로 원나라의 문화에 기울어짐이 크고, 역옹패설은 역사서가 아닌 수필집이기에 역사연구의 참고서일 뿐, 중요한 지침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서와 문물을 널리 상고하건대, 증류주는 중국 당나라 초기 서역(페르시아)과 섬라(暹羅,타일랜드)에서 수입되어 곧 자체 생산되었고,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후기 포도주와 함께 들어왔으며,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자체 생산된 주요 교역품이자 상층부의 필수품이었습니다.
증류주는 당시 국제무역항인 청해진, 그러니까 현재의 완도와 진도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 서남부에서 주로 생산되었는데, 이는 당시 증류주 제조에 필수적인 정교한 도자기 제작, 불가마 기술, 대량의 곡물과 땔감, 발효에 적당한 온난한 기후, 판로확보와 운송의 용이성 등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곳이 바로 진도와 완도를 중심으로 하는 서남지방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로 같은 지역인 해남, 강진이 우리나라 최대, 최고의 청자생산지인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최고수준의 청자는 지극히 정교한 도자기 제작기술, 높은 화력을 내는 불가마, 도자기 유약이나 염료의 산화와 환원 매카니즘의 이해와 통제, 수많은 장인과 기능공을 부양할 농업생산과 풍부한 곡물, 작품을 평가하는 예술적 안목과 교양, 교역과 교류를 위한 국제 감각, 소비시장 출하와 교역의 용이성 등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이는 곧 고품질 증류주의 생산조건과도 일치합니다.
또, 초기 증류주는 어느 것이나 불냄새, 눌은 냄새, 탄냄새 등 잡냄새를 피할 수 없기에 2차 증류나 3차 증류를 하고, 또 오크향 첨가, 허브 첨가, 장기 저장과 숙성 등의 과정을 거칩니다.
중국 증류주의 다양한 향내음, 스카치위스키의 오크통 저장 등은 모두 잡냄새를 처리하는 기술이고, 안동소주 특유의 불냄새는 증류후처리가 미숙하기 때문입니다.
진도에서는 증류주에 감국(甘菊), 백출(白朮), 지초(芝草), 후박(厚朴), 우슬(牛膝) 같은 약재를 첨가하여 향미와 약효를 갖게 한 여러 가지 약술이 개발되어 고급화되고, 또 민간의 상비약이 되었습니다.
여러 약술 중 홍주가 이 곳에서 오랫동안 전승된 유래를 진도의 역사와 지리를 바탕으로 약간의 상상력을 첨가하여 재구성 해 보았습니다.
증류주가 약술로 발전하고 있을 때, 우리나라는 갑자기 전후 6차례에 걸친 몽골의 침입을 맞아 전 국토가 쑥대밭이 되고 온 백성이 전란의 참화를 입게 되었습니다.
당시 고려는 조정을 강화도로 옮겨 40여년간 항전하였으나 국력의 열세와 국론의 분열로 결국은 굴복, 몽골과 화의를 이루어 몽골의 속국이 됩니다.
그러나 도저히 항복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항복이나 개경 귀환을 거부하고 삼별초군단과 함께 강화를 떠나 진도로 옮겨가서 저항을 계속합니다.
이들은 진도 용장산성을 거점으로 삼아, 종묘 사직과 왕궁을 새로 건설하고 왕족 중에서 덕망이 높은 사람인 왕온(王溫)을 새임금으로 모시고 조정을 세워 자주정부를 꾸리게 됩니다.
새 조정의 각종 의식과 행사에 술이 빠질 수 없는 일, 진도에서 만들어지던 약주와 증류주는 생산이 크게 증가하고, 제조기술 역시 큰 발전을 보게 됩니다.
종묘와 사직에 대한 제사에는 백주(白酒)가 쓰였고, 크고 작은 연회에는 약주(藥酒)와 홍주가, 민간의 행사나 농주(農酒)용으로는 탁주(濁酒)가 각각 쓰였습니다.
진도 조정, 곧 자주정부는 호남, 영남, 탐라(제주) 지역을 장악하고 경기, 충청지방의 해안까지 세력을 뻗쳐 조세를 거두며, 왜(倭 일본), 류구국(琉球國, 오키나와), 안남(安南, 베트남), 아랍 등과 외교사절을 교환하고 교역을 하면서 크게 기세를 떨쳤습니다.
몽골의 토벌군이나 개경정부에서 보낸 토벌부대가 일곱 차례나 진도를 공격하였으나 자주정부의 군민은 합심단결하고 복병과 기습으로 전투를 전개하여 연전연승, 모두 물리칩니다.
이에 몽골은 10만 대군으로 여·몽연합 토벌군을 구성, 세 방향으로 진도에 침입하니 자주정부의 기개와 정예군 삼별초의 힘으로도 더 견디지 못하고 매복이나 기습전술도 더 통하지 않아 결국 밀리게 됩니다.
바로 그 마지막 전투, 자주정부 임금 왕온(王溫)은 총사령관 배중손과 태자 환(왕환 王桓)에게 주력군과 백성을 이끌고 진도 남단의 남도성을 거쳐 탐라(제주)로 퇴각하도록 명령하고, 김통정 장군에게는 수군과 선단을 지휘하여 민관군의 수송을 전담케 하였습니다.
그리고 임금 자신은 소수의 친위군만 이끌고 왕궁과 종묘가 있는 용장산성에 남아 토벌군과 대치합니다.
토벌군 사령관인 몽골장수 홍다구는 원래 고려인인데 몽골에 귀화한 사람이고, 개경정부가 보낸 고려군 총관(총사령관)은 김방경이라는 장수였는데, 그들이 임금인 왕온에게 외쳤습니다.
“왕온 왕자는 들으시오. 왕실과 조정이 모두 항복하여 화의를 이루었는데 홀로 무리를 모아 저항하는 것은 역도(逆徒)가 되는 길이니 옳지 않소. 지금이라도 대국(大國)에 항복하시오.”
“벼슬한 자가 나라의 위기를 맞아 목숨을 바쳐야 마땅하거늘 거꾸로 항복을 권하다니 부끄럽지 않은가? 나라의 위기에 적국에 항복한 너희가 역도 아니겠느냐?”
“너무나 긴 전란에 백성들의 고초가 막심하여 불가피합니다.”
“백성들을 팔아 그대들의 재산과 지위를 온존하려 한것이 아니더냐? 백성들이 그리 하라더냐? 백성의 뜻을 한번이라도 물었더냐?”
“진도의 군사 수천으로는 10만 대군을 대적하지 못하오. 항복하여 목숨을 보전한 후 옳고 그름을 하나하나 따져보시오.”
“승패는 숫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고, 옳고 그름은 훗날 역사가 평가할 일이다. 삼남지역의 백성들이 입을 모아 말한다. 고려군사는 창부리를 돌려 침략자 몽골군을 무찌르라. 그 것이 고려에서 남아로 태어난 너희가 가야 할 길이니라.”
왕온 임금이 소수의 병력과 단기필마로 대군과 맞서면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꾸짖음에 몽골 사령관 홍다구와 고려군 총관 김방경은 급히 군사를 뒤로 물리고 ‘분명히 복병이나 계략이 있다.’ 며 용장산성을 포위한 채 며칠을 지켜보기만 합니다.
남도성에서 백성들의 제주 철수를 지휘하던 태자 왕환은 부왕이 용장산성에 겹겹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에 ‘부모의 위험 앞에 자식이 어찌 살기를 바라겠는가.’하며 단신으로 부왕의 진지를 찾아 합류하게 됩니다.
배중손 장군은 남도성에서 백성과 군사들을 김통정의 선단에 모두 태워 보내면서, 자신은 마지막으로 떠나는 배에도 오르지 않고 남도성까지 몰려온 토벌군을 맞아 끝까지 싸운 끝에 장렬히 전사합니다.
진도 백성 대표인 노인들이 음식과 술을 마련, 토벌군의 포위를 피해 용장산성에 들어가 남도성의 소식을 전하고 임금께 피신을 권하였습니다.
“임금님, 장병 모두와 문무백관, 백성들중에 탐라로 갈 사람은 모두 다 무사히 배를 탔습니다. 이제 임금님께서 가실 차레입니다.”
임금께서 말씀하십니다.
“적이 나를 향하고 있을 동안, 내가 적을 붙들고 있을 동안, 군사와 백성은 한 사람이라도 더 탐라로 피하도록 하고 물자와 장비 기구를 옮기도록 하시오.”
임금은 토벌군의 주력을 자신에게로 집중시켜 배중손과 김통정이 이끄는 주력부대와 백성들이 퇴각할 틈을 만들어 주려 했던 것입니다.
“대부분이 이미 무사히 피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의 형세가 너무나 위급합니다. 일단 난을 피하심이 합당합니다.”
“나는 참다운 임금이 어떻게 살고, 또 어떻게 죽는지 보여 줄 것이오.”
“임금님은 나라의 근본입니다. 만약 잘못되면 저희는 앞일을 기약할 수 없나이다.”
“나라의 근본은 임금이 아니라 백성이오. 통치는 혈통이나 신분으로 하는 게 아니오. 위험에서 먼저 목숨을 내놓는 것이 참 임금의 길이라오. 나는 처음부터 오늘의 사태가 올 것을 알면서 임금을 맡았던 것이오.”
비장한 임금의 말씀에 백성대표 모두가 눈물범벅이 되어 업드렸습니다.
“임금님, 정 그러하시면 태자마마라도 피신하심이..... ”
“태자는 효(孝)와 충(忠)을 함께 이루려 하는 것이니 괘념치 마오.”
“지도자가 없으면 저희는 길을 찾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지도자가 아니라 뜻이오. 내가 진도 조정의 임금을 맡은 것도 임금노릇이 좋아서가 아니라, 백성과 한마음된 참정치, 참세상을 꿈꾸었기 때문이오. 백성을 위에 두고 다함께 한뜻으로 역사를 생각하며 미래를 가꾸고자 하였던 것이오.”
“옳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 백성 모두가 임금님을 부모처럼 따르고, 조정의 일은 내일처럼 생각했으며, 나라를 위해 힘과 재물, 목숨까지 아끼지 않았습니다.”
“고마운 일이오. 그 점이 개경조정과 우리 진도조정이 다른 점이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백성 위에 군림하는 지도자는 백성을 위하지 않았고, 백성을 가르치고 이끌려 하는 정치는 독선(獨善)에 흘렀소. 군림과 독선은 모두 통치자를 위한 것, 백성에게는 학정(虐政)이고, 침략자의 약탈과 다르지 않소. 그리고, 백성을 위한다는 위민(爲民)은 곧 백성을 속이는 기민(欺民)이고, 세상과 역사마저 속이려는 사술(詐術)에 불과한 것이오. 우리는 모든 것을 백성의 뜻에 따르고 기쁨과 슬픔 배부름과 배고픔가지도 백성과 한가지로 더불어 하는 여민(與民)정치를 실천했지요.”
“임금님과 함께하는 그 동안 참으로 즐겁고 신명나는 세월이었나이다.”
“그러한 정치, 그렇게 신명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오. 우리는 다시 일어설 것이오. 지금은 비록 힘에 눌리지만, 백성 중심의 삶, 위 아래 차별 없는 「더불어 세상」, 우리의 꿈과 길이 옳기에 세월이 흐르더라도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다시 살아날 것이오. 아니, 꼭 살아나야 하오.”
“그러면, 그 때를 위해 저희는 어찌해야 합니까?”
“싸움과 정치는 맡을 사람이 따로 있으니, 여러분은 생업에 힘써 민생을 살찌우시오. 「더불어 세상」을 실현할 힘이 절실하오. 그리고, 이 술, 바로 이 홍주를 많이 만드시오. 군사용으로 요긴하여 내가 일부러 자주 찾았던 것이오.”
홍주는 여러 종류의 약술 중에 효능과 맛이 가장 뛰어나기도 했지만, 임금은 중요한 군수품임을 일찌기 터득, 맛이 좋다며 의식적으로 생산을 늘리게 했던 것입니다.
홍주는 한 모금으로 백성과 병사들의 감기 몸살 배탈 설사 같은 자잘한 질병과 불면증, 신경통 등 만성질환을 두루 다스리는 영약입니다.
특히 창칼에 다친 상처(金瘡 금창)의 치료에 요긴하고, 부상자를 위로할 때, 병사들의 용기와 힘을 북돋우는데 이만한 것이 없으며, 며칠씩 계속되는 전투와 행군과 항해 때 끼니를 대신해 주고, 추위와 더위 갈증과 배고픔까지도 해결해 줍니다.
뿐만 아니라, 전투 중에 겪어야 하는 공포, 전장의 참혹한 모습, 슬픔과 울분, 극심한 피로와 스트레스를 이겨내는 데 더 없이 요긴한 것이지요.
백성들을 돌려보낸 임금은 계속 토벌군의 주력을 유인하며 대치하였고, 토벌군은 포위한 채 멀리서 활만 쏘았는데, 임금 부자는 마침내 토벌군의 소나기 화살에 고슴도치 모습이 되어 함께 전사했습니다.
백성을 위해 스스로 죽음을 맞은 임금과 태자의 시신을 수습하여 용장산성 어귀에 장사지낸 진도사람들은 임금의 유언대로 묵묵히, 그러나 열성으로 홍주를 빚어 두고 탐라로 간 자주정부 군사들이 힘을 회복하여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탐라, 제주에도 토벌군이 상륙하였고, 삼별초의 마지막 거점인 항파두리까지 함락되면서 마지막 남은 15인이 한라산에 들어가 자결, 전원 순국(殉國)하였기에 진도 백성의 홍주는 주인을 만나지 못했답니다.
그래도 진도 백성들은 매년 홍주를 빚어 몰래 저장해두고 그들을 기다렸는데, 해마다 새로 빚어져 찾아갈 주인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홍주는 수백년 후, 임진왜란을 당해 이순신 장군의 수군함대에서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에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쌀과 좋은 술(良酒)을 보내와 각 부대에 나누어 주었다.’든가, ‘진도에서 보급선이 당도했다. 매우 요긴하고 반갑다.’는 표현이 있는데, 적의 염탐과 노출을 염려해 「홍주」라는 이름은 일부러 쓰지 않고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일제(日帝)침략기에 홍주는 큰 수난을 당했습니다.
일제 관헌(官憲)의 금주단속이 얼마나 집요하고 혹독했는지 섬 전체의 누룩틀과 술독, 소줏고리가 남김없이 깨뜨려지고 관련 문헌은 모조리 불태워졌습니다.
일제가 홍주에 특별히 가혹했던 것은 식량인 곡식을 절약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민족혼의 말살정책」이었던 것입니다.
일제가 홍주와 함께 말살하려 했던 우리 문화유산을 보면, 한글, 조선 역사, 문헌과 문집, 택견, 18반 무예, 전래 무기, 화약 등인 것을 보면 그들의 의도와 참뜻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진도사람들은 수많은 전란과 가난, 시련과 냉대, 탄압과 말살책동 속에서도 양조장비와 누룩을 헛간바닥에, 대나무 숲에, 뒷산에 파묻고 감추며 홍주의 양조법을 잊지 않고 지켜 오늘에 전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 진도 예술혼(藝術魂)의 공로를 빠뜨릴 수 없습니다.
진도에는 특이하게도 남종화(南宗畵), 문인화(文人畵), 서예(書藝), 판소리, 민요 등이 무척 발달했는데, 이 예술가들이 척박한 현실을 홍주로 위로받고, 또 예술로서 홍주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서로가 서로의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이와 함께, 이 지역 토박이의 굳세고 강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새로 섬에 들어온 입도민(入島民), 유배자(流配者), 낙향(落鄕)한 사대부(士大夫), 지식인들이 가져온 높은 정신문화가 향토문화와 홍주를 만나 결합한 것도 홍주 수호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제 K형께 그 홍주를 올립니다.
홍주와의 만남은 진도 자주고려 임금 왕온의 애민정신과 여민정치(與民政治)를 되살리고, 삼별초의 민족 자주 의지, 민초들의 「더불어 평등세상」 염원이 7백년 만에 부활하는 것입니다.
형께서는 학문으로 일가를 이루었고, 그 동안 조국의 민주화, 민권의 신장, 시민사회의 성숙에 큰 업적을 남긴 이 시대의 행동하는 지성이자 국민의 사표(師表)이기에 이 술을 받을 자격이 충분합니다.
삼별초를 대신해서, 아니 「21세기 지식인 삼별초」가 되어 받아 주시고, 그 뜻을 새기며, 멋과 맛을 즐겨 주십시오.
아마도 머지않아 형께서도 이 곳 보배섬 진도의 새로운 입도민(入島民)이 되실 것입니다.
은퇴한 지사(志士), 고결한 선비가 우리 전통의 멋과 정신아래 향토의 맛을 즐기며 평화와 안락을 누릴 수 있는 곳이 바로 진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와 함께 진도고려의 사적(史蹟)을 복원하고 용장성 전투를 재현하여 그 뜻을 되새기는 일에 함께 여생을 바치도록 합시다.
다시 만나게 될 그 날을 기다리며, 오늘 다시 구기자와 홍주를 새로 마련해 갈무리 하겠습니다.
그 날까지 평안하시고 건강하소서
가을 날, 보배섬에서 J 올림.
토지사랑 http://cafe.daum.net/tozisarang/
추천부탁드립니다 .
첫댓글 좋은역사적 고찰에 박수를 보내며 더녀갑니다 고맙습니다
저도 홍주 좋아합니다. 그 빛깔이 예술이지요~
중학교과서인가?삼별초의난?이라고 배웠던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홍주속에 이렇게 깊은뜻이 담겨있는줄은 ,,,,, 감사히 배워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