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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화 초길종란(初吉終亂)-4
무당산은 짙은 녹색의 수림(樹林)과 새하얀 기암괴석으로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게다가 팔
백리에 이른다는 무당산 전역에 세워져 있는 수많은 도관은 자연과 어울려 빼어난 풍광을
자랑했다.
그런데 석양으로 인해 더욱 아름다운 경치를 풍기는 무당산의 자태를 무심히 바라보며 하염
없이 걷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정체는 악소채였다.
"거의 다 왔군."
수십여개에 달하는 도관과 사당을 지나 우진궁을 눈앞에 두었다. 이제 삼백여장을 걸어가
면 우진궁의 대문 앞이었다. 아직 내상을 다스리지는 못했지만 움직이는데 제약을 당할 정
도는 아니었다. 걸어오면서 내상을 어느 정도 치료한 덕분이었다.
악소채는 우진궁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갔다. 정문에 도착한 악소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진궁의 정문에 단 한 명의 문지기도 없었던 것이다. 악소채는 의문을 속으로 삭히고 양
손으로 우진궁의 대문을 밀었다.
끼이익.
뜻밖에도 닫혀 있던 문은 가볍게 열렸다. 우진궁의 정문은 잠겨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열
려진 정문을 중심으로 좌우에 무당파의 도사들이 정렬해 있었다.
"우~."
악소채가 우진궁 안으로 들어오자 무당파 도사들은 일제히 낮은 음성으로 위압적인 소리를
냈다. 수백여명에 달하는 도사들의 합창은 기세를 꺾어버리는 힘이 실려 있었다. 그러나
악소채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한치의 흔들림 없이 우진궁의 대전을 향해 꼿꼿하게 걸어갔다. 우진궁의 대전 앞에는 열두
명의 늙은 도사들이 악소채를 기다리고 있었다. 악소채가 면전에 도착하자 늙은 도사들은
일제히 도호를 암송했다.
"무량수불."
그들은 위압적인 기세에서도 굴하지 않고 당당한 자태를 보여주는 악소채에게 경의를 느꼈
다. 무당파의 장교가 열 두 명의 늙은 도사를 제치고 앞으로 걸어나왔다. 근 백여년 만에
팔대관문을 돌파하고 무당산 본원까지 들어온 악소채와 면담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무량수불. 빈도는 무당을 책임지고 있는 담운이외다. 소저는 무슨 일로 본 파를 방문하셨
소?"
"제 이름은 악소채입니다."
악소채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것으로 대신했다. 짧은 대답에 숨어 있는 많은 뜻을 담운
도장은 단번에 파악했다. 악소채를 간자가 되도록 몰고 간 사람들 중에 하나가 담운 도장
이었던 것이다. 또한 열두명의 늙은 도사들도 악소채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
라워했다.
무당의 장로들인 그들 역시 악소채를 간자가 되도록 주도했던 인물들이었다. 담운 도장은
악소채의 투명한 눈동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깊게 탄식했다. 어린 여자아이를 협박해
간자로 써먹었던 추한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던 것이다.
"하아~. 무량수불. 무량수불..."
무당의 열 두 장로들의 심정도 담운 장교와 별 차이가 없었다.
"업보로다. 업보..."
태극삼검혜를 회수해야 한다는 목적에 정신이 팔려 도리를 벗어난 수단을 감행한 과거가 재
앙으로 돌아온 현실 앞에 무당의 장로들의 가슴은 암담하게 변해버렸다.
"저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무당산에 올랐습니다."
"말하시오. 악 소저."
"첫째는 제 동생을 만나려고 왔습니다."
"악 소저의 동생은 빈도의 제자로 있소이다. 지금 도학을 수련중이오만 언제든지 만날 수
있소. 혈육의 정을 본 파는 막을 생각도 없고, 막을 방법도 없소."
"제 못난 동생을 제자로 삼아 친히 훈육하신 것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악소채는 감사의 뜻이 담긴 인사를 담운 장교에게 했다.
"아니올시다. 정진(正眞)은 정자 항렬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리지만 최고의 인재이오. 본디
뛰어난 제자를 기르는 기쁨은 삼락(三樂)중에 하나이니, 빈도가 악 소저에게 감사를 받을 이
유는 없소."
"정진이라... 제 아우가 도사가 됐나요?"
담운 장교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예상지도 못한 일에 악소채는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바로 당혹한 감정을 숨기고 무표정한 얼굴로 되돌아간 악
소채는 두 번째 목적을 밝혔다.
"제가 목적한 둘째는 무당의 오만과 독선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복수구려."
"물론 복수라는 감정이 전혀 없다고 말한다면 거짓이겠지요. 그러나 더 큰 목적은 내 손으
로 무당파의 위세를 부셔버리는 것이에요."
"해검지를 농락하고 팔대관문을 뚫은 이상 본 파의 위엄은 충분히 모독당했고 무너졌소. 지
금부터 악 소저는 그 대가는 치러야할 것이오."
담운 장교의 얼굴에 섬뜩한 기운이 일었다. 그런데 악소채는 담운 장교가 내뿜는 기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닙니다. 무당파의 위세를 대표하는 것이 아직도 남아 있어요."
"본 파에 아직도 남은 위세라? 서, 설마 일양 사백님을..."
악소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자하구나."
"헉! 이 음성은 일양 사백님!"
우진궁 전체에 울리는 웅장한 음성의 주인은 검성 일양자였다. 폐관 수련을 한다며 근 십
년 동안 칩거하던 일양자의 갑작스런 등장은 무당파의 도사들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휘익.
일양자는 바람처럼 날아와 우진궁의 대전 지붕에 착지했다. 명치까지 내려온 새하얀 백발,
긴 은빛의 눈썹과 달리 주름하나 없는 얼굴에 푸른 도포를 입은 일양자는 하계로 내려온 신
선 같았다.
"일양 노선배님을 뵙습니다."
악소채는 냉엄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일양자에게 인사했다. 차갑고 도도한 기세를
뿜어내면서...
"나와 싸우기 위해 온 것이 아니더냐. 그렇다면 인사 따위는 필요 없는 법. 자아~ 덤벼라."
일양자가 양자 항렬의 첫째로 최고의 무력을 지녔음에도 사제에게 장교의 자리를 뺐긴 것은
오직 무학에만 심취해 도학(道學)을 멀리했기 때문이다. 또한 일파의 주인에 단순한 무공에
미친 광인일 세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일양자는 사제에게 장교의 자리를 빼앗긴 한을 무
공에 쏟아 부어 삼대이인의 하나가 됐다.
그러나 장교의 자리를 빼앗긴 한이 가슴 깊은 곳에 숨어 있었고, 나이가 들수록 괴팍하게
변하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게다가 임백령에게 당한 패배는 일양자가 가지고 있던 무공에
대한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고, 그로 인해 성격은 더욱 괴팍해졌다.
"천하에서 존경을 받은 검성이 괴승보다 더 괴팍한 것을 아는 사람은 없죠."
"너는 입방아를 떨려고 무당산에 올랐느냐?"
"물론 아닙니다."
"그럼 덤벼라."
일양자는 검을 뽑았다.
스륵.
절반 이상이 잘려 나간 반검(半劍).
일양자가 뽑은 검은 뜻밖에도 절반 가량이 동강나 있었다. 푸른빛이 감도는 명검이 동강난
모습으로 드러나자 무당파 도사들의 안색이 어둡게 변했다.
"무당파가 자랑하는 다섯 자루의 보검 중에 하나인 청평검(淸平劍)이군요."
악소채가 검의 이름을 말하자 일양자의 안색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무당파의 도사들도 악
소채가 청평검을 너무 쉽게 알아보자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청평검이 두 동강난 사연은
무당파의 그 누구도 모르는 비밀이며 수치였다. 무당파의 인물들은 두 동강난 청평검은 일
양자가 패배했다는 흔적일거라 짐작만 하고 있었다.
"말이 많구나. 선공을 허락했거늘..."
악소채가 청평검에 관해 말하자 가슴 아픈 과거가 떠오른 일양자는 노화가 치밀었는지 분노
를 발산했다.
"네가 선공을 하지 않겠다면 빈도가 먼저 하겠노라."
일양자는 악소채를 향해 날아갔다.
파바박.
극한의 빠름, 거칠고 사나운 검세, 눈으로 쫓아갈 수 없는 화려한 변화, 강함과 부드러움이
기묘한 파형을 그리는 흐름, 일양자가 퍼붓는 공격이었다.
채챙. 챙...
공손팔검과 공손팔결이 융합돼 펼치는 64초의 검형, 악소채가 쏟아내는 공손검법은 일양자
의 공세와 격돌했다.
"가, 가공할 공방이로다."
일양자와 악소채의 검법은 경이였다. 자유로운 공수전환과 강렬한 기세의 대결은 보는 이
들의 가슴을 졸이게 했다. 한 호흡이 끝나기도 전에 두 사람은 무려 오십여수를 나누었다.
"장문인. 지금 일양 사백님은 양의문과 삼절황, 사상류, 구궁영을 한꺼번에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사제가 정확히 보았네. 각기 성격이 다른 네 종류의 검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지
빈도의 사고로도 이해가 가지 않네."
담운 장교와 무당파의 장로는 그동안 알고 있었던 상식이 무너지는 현장 앞에서 놀라워했
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일양자와 악소채의 대결은 벌써 백여수가 넘
는 공방을 나누었다.
"대단하구나. 어린 나이에 이런 역량을 소유하다니. 정녕 놀라워. 그러나 지금부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아... 하아..."
냉소를 날리는 일양자와 달리 악소채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악소채는 백여수가 넘는 공방
을 전력을 다해 펼쳐 어느새 내력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위잉.
반 토막의 청평검에 맑고 푸른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한자 반에 불과하던 청평검이 다섯
자 길이의 광채가 쏟아져 나와 장검과 다름없어졌다.
"검강!"
푸른 광채의 정체는 강기였다. 악소채는 거친 숨을 가라앉히고 공손팔결과 이합진결을 암
송하기 시작했다.
"무엇을 중얼거리느냐?"
일양자는 악소채를 노려보며 외쳤다. 그러나 악소채는 일체의 대꾸 없이 끊임없이 암송을
되풀이했다.
"귀찮군..."
일양자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악소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악소채를 향해 맹
렬한 속도로 달려갔다. 푸른빛이 감도는 청평검을 들고서...
콰쾅.
단 일격에 악소채를 두 동강내려는 듯 내려치던 청평검이 흑인검과 격돌하면서 굉음을 터져
나왔다. 굉음과 함께 강력한 충격파가 발생하더니 반경 십여장의 공간을 뒤흔들어버렸다.
"허억!"
"이, 이건..."
청평검과 흑인검의 두 주인들은 이를 악물고 아무런 말없이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간접
적으로 충격파를 받은 무당파의 도사들은 땅바닥을 굴러야 했다. 그들은 겨우 고개를 들어
검을 맞부딪친 채로 서로를 노려보는 일양자와 악소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검강대 검강의 대결이라니..."
무당파 도사들의 표정은 아연실색 그 자체였다. 그들이 아는 한 강기는 말로 들어봤지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두 사람이 강기를 사용한 결투를 목격하자 넋을 잃어버린 것
이다.
"대단하구나. 네 나이에 검강을 사용하다니... 정녕 믿을 수가 없구나."
새카만 흑인검의 표면에 새하얀 빛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비록 일양자처럼 강기로 다섯
자 길이를 만들지는 못하고 검의 표면만 덮은 수준이지만 악소채가 사용한 것은 강기였다.
그러나 검강을 사용하면서도 말을 할 정도로 여유가 있는 일양자에 비해 악소채는 내력이
부족해 온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공손팔결의 상반된 힘을 이합진결로 충돌시켜 증폭시킨 덕분에 겨우 흉내낸 검강으로는 버
틸 수가 없어.'
순간적으로 증폭된 내력으로 목숨은 구했지만 악소채의 상황은 악화일로(惡化一路)를 달리
고 있었다. 부드러움 속에 강함이, 강함 속에 부드러움이 내재한 일양자의 현문정종내공은
도도하게 흐르는 장 강의 흐름이었다.
파직.
청평검에서 쏟아지는 검강의 세례를 흑인검의 백색 검강이 버티지 못하고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얇은 표피의 검강으로 두텁고 깊은 일양자의 검강을 막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흐윽..."
악소채의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나마 남아 있던 내력을 균열된 검강을
원상복구를 하는데 사용해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진 것이다.
주르륵.
악소채는 뒤로 밀렸다. 불리한 상황의 연속에서 악소채는 결단을 내렸다. 내공으로는 일양
자를 이길 수 없다는 판단과 함께 모험을 감행했다. 공손팔결의 여덟 가지 요결을 이합진
결을 이용해 한꺼번에 충돌시켜 순간적으로 강력한 내공을 끌어냈다.
"타!"
기합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흑인검을 감싼 백색 검강이 찬란하게 빛을 뿜어냈다.
탕.
맹렬하게 타오르는 백색 검강은 쇠가 끊어질 때 나는 소음을 내며 청평검을 세 치 정도 퉁
겨냈다. 악소채는 잠깐 무너진 대치 상황을 놓치지 않고 호접무를 사용해 일양자와 멀어졌
다.
"본 파의 제운종과 비슷한 신법이군."
일양자는 바람을 타고 하늘거리는 나비처럼 부드럽게 방향을 전환하며 뒤로 물러간 악소채
의 신법에서 무당파의 신법인 제운종과 유사한 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호접무의 특징과 허
점을 곧바로 파악했다는 의미였다.
일양자는 제운종을 사용해 악소채를 쫓았다. 느린 듯 하지만 어느새 사라졌다가 나타나며
천변만화의 변화를 보여주는 구름처럼 움직이는 일양자의 신법은 환상 같았다. 어떤 위험
이라도 회피하던 호접무가 일양자의 추적을 피하지 못하자 악소채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
다.
휘리릭.
청평검이 춤추자 검강이 작열했다. 피할 수 있는 모든 공간을 검강의 궤적이 가득 차자 악
소채는 절망했다. 더 이상 피할 곳은 없었다. 악소채는 이를 악물고 일자혜검을 펼쳤다.
빛도 없고 변화도 없이 단순하게 검으로 수평선을 그어버렸지만 놀라운 변화가 나타났다.
"일자혜검!"
검으로 그려진 수평선 안으로 청평검에서 쏟아진 검강이 사라져 버리자 일양자의 놀라움은
컸다. 근 백년만에 나타난 일자혜검이 무당파와는 관련이 없는 여인이 펼쳤기 때문이다.
윙.
일양자는 검병을 명치의 선상에 두고 청평검으로 원을 그렸다. 태극혜검을 펼친 것이다.
공간을 가르며 날아오던 일자혜검의 힘은 일양자가 그린 원 안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져버렸
다.
'이, 이것이다. 이게 바로 태극혜검이야.'
악소채는 눈앞에서 펼쳐진 태극혜검을 바라보며 희열감에 빠졌다.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태극삼검혜의 비밀 일부가 풀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악소채는 태극삼검혜의 비밀을 모두
풀려면 태극혜검의 전부를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차!"
악소채는 태극혜검의 전부를 보기 위해서 맹렬한 공격을 가했다. 공손팔검의 마지막 초식
인 풍운변색(風雲變色)을 공손팔결의 모든 요결을 사용해 연속으로 펼쳤다. 일결부터 시작
해 팔결에 도달할 때까지 펼쳐진 풍운변색은 천지를 뒤엎어버리는 검풍과 검기를 쏟아냈다.
그러나 일양자는 태풍처럼 몰아치는 공격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마치 장난치듯
검으로 끝없이 원을 그리기만 했다. 원은 큰 것과 작은 것이 교차됐고 원 속에 원이 그려
졌다.
따따따당.
원과 원의 교차와 연속은 무한의 변화와 힘을 뿜어내면서 악소채가 펼친 공격을 무력화시켰
다. 악소채는 태극삼검혜의 요결을 태극혜검의 흐름을 보면서 해석한 덕분에 일양자의 공
격을 어느 정도 피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팔십일개의 원이 그려지자 또 다른 변화가 발생했다. 원들이 생명처럼 움직이면서
상생상극의 변화를 일으켰다. 갑자기 약화되던 원이 커지면서 강해지고, 거대한 원이 갑자
기 축소를 하더니 약해지며 천변만화를 일으켰다.
'이, 이건...'
태극혜검이 일으킨 예측할 수 없는 변화를 악소채는 어떻게 막아야 할지 몰랐다. 원들은
악소채를 포위하더니 강대한 힘을 발생시켰다. 악소채는 전력을 모아 최후의 수단을 펼쳤
다. 검으로 상하좌우에 네 개의 원을 그리고는 그 원안에 다시 작은 네 개의 원을 그렸다.
콰콰쾅.
원에서 뿜어져 나온 검파(劍波)의 충돌은 우진궁 지붕의 기와가 들썩일 정도의 폭음을 일으
키며 강력한 충격파를 발생시켰다.
"아악~."
서 있을 힘조차 남지 않은 악소채는 충격파에 그대로 노출되어 피를 토하며 날아가 버렸다.
'안 돼.... 더 싸워야 해... 나는 싸울 의지가 남아...'
악소채는 허공을 날아가면서 의식을 잃어버렸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밤하늘에 빛
나는 밝은 달과 별빛이었다. 그리고 누군가 "아가야." 라고 다급한 음성이 귀에 들렸다.
매우 정겹고 그리운 음성이라고 생각한 것이 악소채의 마지막 의식이었다.
등곡은 상자 안에 있는 북룡각주의 수급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인피면구입니다."
"북룡각주로 변장해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북해방주를 공격하려면 먼저 처리해야 할 세력이 북룡각입니다. 그들은 북해방주에게 절대
적인 충성을 받치고 있으니 우선적으로 없애야 합니다."
"좋네. 하지만 인피면구라면 자네 형제가 나보다 더 잘 만들텐데..."
등곡이 말한 인물은 악기영이었다. 괴의 공손찬의 진전을 이은 악기영은 비록 내공이 전폐
돼 범인과 별 차이가 없어졌지만 의술과 독술에 관해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인피
면구를 만드는 정도는 장난에 불과했다.
"기영은 제가 하는 일을 돕지 않습니다."
"나를 치료하지 않았는가. 원수인 나를 말이네."
"등 사형을 치료한 것은 의원이기 때문에 나선 겁니다. 기영은 저를 도울 생각을 가지고 있
지 않습니다."
"알았네. 내가 직접 인피면구를 만들어주겠네. 그러나 그 전에 한 가지 알고 싶은 게 있네."
등곡은 흑의 복면인를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같은 배를 탔으니 상대를 알아야겠지요."
"내 이름은 모용수빈이오."
악중악이 말이 끝나자마자 흑의복면인이 복면을 벗으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흠..."
복면을 벗은 모용수빈의 외모는 너무나도 수려했다. 화려한 외모를 빛내는 투명한 살결과
고아한 자태는 남자로 보기에 어려웠다. 오히려 남자의 혼을 뺐는 절세가인이라 할 수 있
었다. 그러나 등곡이 신음 소리를 낸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명공강과 혈염공을 융합시켰군."
"과연 등 각주의 눈은 대단하군요. 한 눈에 내 정체를 파악하다니... 정말 놀랍소. 악 형이
왜 등 각주를 합류시키려고 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요."
모용수빈은 요마 모용혜의 본명이었다. 여자로 살던 지난날의 껍질을 벗어 던지고 새롭게
탄생한 모용수빈은 등곡을 감탄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무도 쉽게 정체를 파악했기 때문
이다.
"사부가 찾던 세 가지 무공이 있소. 하나는 음양팔반장을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이합진결
이고, 다른 하나는 비밀리에 내려온다는 자객들의 문파가 소유한 살인도법, 그리고 마지막이
나부파의 비전인 명공강과 혈염공이오."
"나부파의 비전을 북해방주가 계속 찾고 있었군요."
"그렇소이다. 하지만 모용세가에서 도적질을 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소."
"나에 대해 자세히 파악하고 있군요."
모용수빈의 눈동자에 새파란 광채가 번뜩였다.
"내 예상이 맞았군... 걱정할 필요 없소. 모용 공자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환객의 음시조를 파해할 때 사용한 명공강을 보고 그동안 조사한 것이오?"
"반은 맞고 반은 틀렸소."
"조사 반, 예측 반이었군."
등곡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수빈도 자신에 관한 정보나 자료가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등곡이 벌써 알아냈다는 사실에 경각심을
가졌다. 한 번 정체를 파악 당했다면 두 번째는 쉽게 알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은
정체가 드러나면 안 되는 게 모용수빈의 입장이었다.
"그런데 악 사제. 누가 북룡각주로 변장할 것인가?"
"모용 형이 할 것입니다."
"음... 체형이 비슷하니 금상첨화로군."
여성스런 체형을 가진 북룡각주로 변장하는데 모용수빈 이상 가는 사람은 없었다. 등곡은
모용수빈의 체형을 이리저리 확인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시작한 일이라면 철저하게
처리하자는 것이 등곡의 생각이었다.
"북룡각의 인원은 오백 명이 넘는데 그들 전원을 처리할 것인가?"
"물론입니다. 작은 불씨가 태산을 태우는 산불이 될 수 있는 법입니다. 단 한 명도 살려두어
서는 안 됩니다."
"그렇군. 그렇다면 북혈각의 살수를 동원해야겠군."
"고수들은 모용 형과 제가 나서서 보낼 생각입니다. 남은 자들을 북혈각에서 처리해 주십시
오."
악중악은 오백 명이나 되는 생명을 마치 좌판에 널려 있는 생선처럼 취급했다.
"알겠네."
"그리고 북풍각은 우리와 합류할 세력들을 규합할 겁니다. 북해방의 세력 중에 최소한 4할
정도는 흡수해 우리의 발판이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4할이면 너무 많은 인원이 아닌가?"
"소제가 말한 것은 인원이 아니라 능력입니다. 실재 인원은 1할도 안 됩니다."
포섭할 자와 살해할 자가 벌써 정해져 있는 듯했다. 악중악이 어느새 살생부의 작성을 끝
낸 것처럼 말하자 등곡은 은연중에 두려움에 떨었다.
'무서운 놈이다... 내가 이놈과 함께 대사를 벌이는 게 옳은 일인지 모르겠군...'
등곡은 기호지세에 빠진 자신의 신세에 한탄했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응... 아 그게... 내가 몇 년 전에 우연히 신산자(神算子) 노선배를 만난 적이 있었네."
뜬금없이 다른 말로 유도하는 등곡의 행동에 악중악은 어이가 없었지만 신산자라는 이름이
나오자 달라졌다. 신산자는 강호십대고수 중에 한 사람으로 가장 무공이 약했다. 그러나
기관지학과 토목건축, 산학등의 달인이면서 천하 제일의 점쟁이로 유명했다.
"신산자 노선배님이 등 사형의 점이라도 쳐주었습니까?"
"그렇다네."
신산자는 천하 제일의 점쟁이이지만 웬만해서는 점을 치지 않기로도 유명했다. 아무리 친
분이 있어도 운세가 맞지 않으면 점을 치지 않았고 생면부지의 인물이라도 대길이나 대흉의
운세, 즉 특별한 운을 가진 사람은 무료로 점을 쳐주었다.
"등 사형의 운세가 특별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신산자가 알려준 내용은 무엇입니까?"
"내 운세였네. 간단하게 알려주더군."
"궁금하군요?"
신산자의 점괘는 악중악은 물론 모용수빈마저 귀를 기울이게 했다.
"초길종란(初吉終亂)이라고 하더군."
"재미없는 점괘로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사실 고아나 다름 없던 내가 사부의 눈에 발탁돼 무공을 익혔으며,
비록 암중이나마 천하를 활보했으니 초길(初吉)이라 할 수 있네. 단지..."
"무엇을 그리 고민하십니까?"
등곡의 눈동자에 떠오른 미망(迷妄)의 빛이 마음에 걸린 악중악은 진지하게 질문을 던졌다.
"내가 자네들과 손을 잡은 이 날이 내 운세의 초인지, 아니면 종인지 몰라서 그런 것이네."
간단한 표현이지만 섬뜩한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어쩌면 거사의 승패가 달렸다는 뜻마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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