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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화 시이불견(視而不見)-1
대운하를 거슬러 북으로 향하고 있는 어느 여객선에 악삼이 타고 있었다. 복수를 마친 악
삼은 여객선에 몸을 싣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쓸쓸히 바라보고 있었다. 목표가 사라지자
가슴이 텅 빈 것처럼 느껴져 참을 수 없는 허무에 빠져 버린 것이다.
게다가 지겨운 선상 생활과 끝없이 흐르는 강물은 악삼의 허무한 심정을 더욱 부추겼다.
악삼은 시간이 마치 멈추어 버린 공간에 홀로 있는 듯한 느낌에 탄식을 하다가 갑자기 들려
온 익숙한 단어에 귀를 쫑긋하게 세웠다.
"천장별부!"
악삼은 자기의 귀가 잘못된 것인가 의심했다. 그러나 천장별부란 단어가 여러 차례나 들리
자 악삼은 찰향적의 기공을 사용했다. 순식간에 악삼의 청력으로 들을 수 있는 범위가 수
백장까지 확산됐다.
"지금 하북성은 푸른 늑대조각을 찾으려는 무인들로 인해 피바다로 변해 있네. 그러니 조심
해야 한다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천장별부라는 그런 흉험(凶險)한 곳과 인연이 있겠는가. 게다
가 여기는 하남일세. 비록 하북과 맞다있지만 하남이란 말이네."
"하긴 그렇지... 하지만 무공비급이야 우리 같은 촌무지렁이에겐 필요 없지만 황금은 욕심이
나네."
"나도 그렇다네. 허허허."
"자네도 그런가. 하하하..."
배가 앞으로 나갈수록 웃음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악삼이 엿듣던 두 사람은 선상에 있
지 않고 밖에 있었다. 그들은 대운하의 옆에 있는 둑 위를 걸어가던 평범한 농부들이었다.
두 농부를 관찰하는 악삼의 눈은 깊게 가라 앉아 있었다. 마치 심연의 눈동자 같았다.
"평범한 농부들이군... 그런데 천장별부와 푸른 늑대조각을 알고 있다... 누군가 장난을 치고
있군."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숨겨져 있던 비밀이 갑자기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됐다면 누군
가 목적을 가지고 일부로 유출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누구일까?"
무료함에 지쳤던 악삼의 두뇌가 무서운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장별부는 사불상에서 알아낸 정보이고... 그 당시 사불상에 있던 사람들 중에 누군가 흘
렸다고 본다면... 척금방이군. 그럼 척신명이 흘렸다고 봐야겠군."
악삼은 척씨 부녀에게 비중을 두었다.
"만약 사불상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천장별부의 비밀을 알아낸 자가 유출시켰다면... 이거
문제가 복잡해지는군... 정보가 너무 부족해."
악삼은 청도로 향하려던 여정을 바꾸기로 했다. 천장별부를 생각하자 칠대금지무공의 폐해
를 제압하는 칠살기가 생각났고, 동시에 음시조를 익힌 갈운영이 뇌리에 떠오른 것이다.
"영매가 집법원주처럼 광기에 빠지다가 살아 움직이는 시체가 되게 할 수는 없지."
악삼의 두 눈에 시퍼런 광채가 번뜩였다.
악중악은 북해방주를 만나러 갔다. 북해방의 비밀 거점에 있는 조덕환의 집무실은 어둠에
묻혀 있었다.
"방주님. 북풍각주입니다."
"무슨 일이냐?"
집무실이 환해지더니 북해방주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푸른 늑대조각에 관해 보고할 내용이 있어 왔습니다."
"들어오너라."
북해방주의 허락이 떨어지자 악중악은 집무실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악중악은 환하게
타오르는 촛불이 놓여진 탁자를 등지고 서 있는 북해방주를 노려보며 싸늘한 비웃음을 던졌
다.
"방주님께 인사 올립니다."
"보고하라."
"푸른 늑대조각을 가지고 있는 뇌염은 현재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고 있습니다."
"한 방향?"
"현 상태로 한 십여 일 정도 움직이면 하북팽가의 본거지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북해방주는 뇌염의 이상한 행동에 의문이 생겼다. 푸른 늑대조각을 노리는 강호인들에게
추적을 당하고 있는데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리저리 방향을
틀어 가며 도주해 추적자들을 혼란에 빠트리면서 따돌리는 것이 기본이어야 했다.
"이상하군. 매우 이상해."
"저도 처음에는 하북팽각와 뇌염이 무슨 밀약을 체결한 것인가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하북
팽가의 인물들도 뇌염을 추적하고 있는 상황이라..."
"벽력당과 가족들까지 버리고 도주한 뇌염이 팽가와 손잡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누군가 뇌염이 움직이는 경로를 조종하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북해방주는 눈을 감고 숙고했다. 그러나 명쾌한 해답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움직여야겠다."
"푸른 늑대조각을 직접 회수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렇게 해야겠다. 아무래도 무언가 이상해..."
왜 하필 하북팽가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갑자기 푸른 늑대조각과 천장별부에 관한 비
밀이 한꺼번에 퍼졌을 때부터 흑막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목표가 하북팽가라는 것은 북해방
주의 예상을 벗어난 일이었다.
"언제 출발하실 생각이십니까?"
"새벽에 출발한다. 그리고 정체를 숨겨야하니 소수의 정예만 같이 가도록 한다. 중악아."
"하명하십시오. 사부님."
이름을 부르면 사제지간이고, 직위를 부르면 상관과 부하가 되는 냉정한 관계가 다시 한번
나타났다.
"북룡각주와 북혈각주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고 준비시키도록 하거라."
"알겠습니다. 사부님. 그럼 제자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북해방주가 친밀감이 느끼도록 두 사람은 직위로 부르고 악중악은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악중악은 북해방주의 그런 모습이 위선자의 장난 내지는, 더 큰 것을 노리려고 달콤한 말로
속이는 것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북해방주의 집무실에서 나온 악중악은 심한 욕지기가 느꼈지만 사냥감을 함정으로 향하게
만들었다는 기쁨 덕에 참을 수 있었다. 악중악은 등곡이 거처하는 장소로 향했다. 등곡은
북룡각주의 인피면구를 제작하느라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등 사형. 소제가 왔습니다."
"들어오시게."
등곡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악중악을 반갑게 맞이했다.
"물건은 어떻게 됐습니까?"
"완성했네."
"고생하셨습니다."
"여기 있네."
악중악은 차갑게 웃었다. 이제 모든 것은 준비가 끝났다. 지금까지 해왔던 고생의 대가를
받기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일을 해야하지만 남은 일들은 쉬웠다.
"매우 잘 만드셨군요."
"목소리만 잘 흉내내면 누구도 북룡각주가 가짜라는 것을 모를 걸세."
"모용수빈은 훌륭하게 해낼 겁니다."
등곡이 들고 있는 상자 안에는 북룡각주의 얼굴가죽이 기괴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울고
있는 듯하지만 웃고 있는 그 모습은 너무나도 기괴했다.
의식을 잃고 허공을 날아가던 악소채를 중간에 받은 사람은 고 파파였다. 고 파파는 악소
채의 맥을 잡고 이상이 없는지 알아보았다. 악소채는 심한 내상과 약간의 자상(刺傷)을 입
고 의식을 잃었지만 혈맥이나 뼈에는 큰 이상이 없었다.
"다행이구나..."
고 파파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급하게 달려왔지만 악소채가 일양자와 겨루
는 것을 막지 못했을 뿐 아니라 상황이 종료된 시점에 도착해 아찔했던 고 파파는 큰 사고
없이 끝난 것이 고마웠다.
그러나 악소채를 이 지경으로 몰아 넣은 일양자를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고 파파는 악소
채를 한적한 장소에 눕혀놓고 일양자에게 다가갔다. 일양자는 갑자기 나타난 고 파파를 당
혹해 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일양 도사."
"무슨 일인데 오셨습니까?"
"저 아이 때문에 왔네. 솔직히 저 아이만 아니라면 내가 무당산에 올 리가 없지."
"저 여아가 고 파파의 제자입니까?"
"제자라 할 수도 있지만 손녀에 가깝네."
고 파파는 휘적휘적 걸어가 어느새 일양자의 면전까지 도착했다.
"손녀라... 어쨌든 고 파파에게 무공을 배웠군요."
"그게 문슨 문제라도 되는가?"
"사숙조께서 고 파파에게 일자혜검을 전수해 줬다는 것은 몰랐소이다."
"일자혜검? 아하!"
고 파파는 일양자가 무슨 오해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무당파의 인물들은 악소채가 경운
도장에게 일자혜검을 전수 받은 것을 알 리가 없었으니 당연한 오해였다.
"아버님은 무당파의 도사가 된 후에 부녀의 정을 끊었지. 그런데 내게 무당파의 무공을 전
수하리라고 생각하는가. 무당파는 아버님을 너무 모르는군. 목표비마로 활동할 때 사용했던
무공을 전부 내놓은 바보짓까지 했거늘..."
일양자가 말한 사숙조는 고 파파의 부친인 목표비마였다. 고 파파는 부친의 진심마저 믿지
않고 오해를 하는 일양자의 속 좁음에 노기가 치솟았다. 악소채를 부상시킨 일로 생긴 분
노와 합쳐져 이성을 잃을 정도로 격분했다.
"이래서 그 도사 놈이 무당산이 엎어져야 한다고 했구나. 어린 소채에게 무리한 부탁을 한
이유를 알겠다."
"무슨 말이오?"
"무당산의 아집과 네 정신을 뜯어 고쳐 달라는 부탁을 내가 대신 하겠다는 뜻이다."
고 파파는 악소채가 누워 있는 장소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악소채 옆에 세워져 있던 흑인검
이 살아있는 것처럼 자기 혼자 검집에서 나오더니 고 파파를 향해 날아갔다.
"격공탈물(隔空奪物)!"
고 파파는 공손팔결의 요결 중에 인(引)과 탄(彈), 조(造), 방(放)을 적절히 혼용해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흑인검을 쥐었다. 예상을 초월한 고 파파의 능력을 목격한 일양자의
가슴은 당혹함으로 가득 찼다.
"자, 그럼 지금부터 시작해볼까."
싸늘한 고 파파의 음성은 일양자의 투지를 불태웠다. 두 번 다시 패배는 맛보고 싶지 않았
다. 상대가 누가 됐든 전력을 다해 싸우기로 했다.
위잉.
섬뜩한 소리와 함께 흑인검이 새하얀 검강에 휩싸였다. 강렬한 검강으로 인해 흑인검은 새
하얗게 빛났다. 그 어디에도 검은 색은 보이지 않았다. 검게 빛나는 손잡이가 고 파파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이 흑인검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 줄 뿐이었다.
검강으로 표면만 살짝 덮어 새하얀 빛 속에 검은 검신이 그대로 드러났던 악소채와는 전혀
달랐다. 일양자도 검강을 일으켜 청평검을 감싸버렸다. 만물을 베어버리는 검강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같은 강기밖에 없었다.
고 파파와 일양자는 허점을 찾아내기 위해 상대를 훑어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일체의
허점도 보이지 않았다. 악소채와 상대할 때와는 달리 전력을 다하는 일양자와 공손검보를
연구해 역량이 급증한 고 파파의 결전은 숨막히는 긴장을 조성했다.
"할!"
"갈!"
콰콰쾅.
누가 먼저 선공을 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두 사람은 동시에 공격했다. 박투가 가능한 근
접거리에서 벌어진 검강의 격돌은 가공할 폭음과 함께 거대한 충격파를 생성시켰다. 반경
이십여장의 공간이 두 사람의 충돌로 발생한 충격파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 있었다.
"으아악!"
"아악~."
격돌한 두 사람은 말짱한데 오히려 주위에서 구경을 하고 있던 무당파 도사들이 충격파에
휘말려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그들은 온 몸이 거대한 망치에 맞은 것과 같은 충격을 받
고 대부분 내상을 당했다.
"훌륭해. 과연 삼대이인의 한 사람답군. 하지만 송자헌에 비하면 약해."
"크윽..."
일양자는 송자헌에게 패배를 당했던 기억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스승에게 받은 무당파의 보물인 청평검이 두 동강나고 무공에 대한 자존심마저 짓밟혔던 과
거가 떠올라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빠져 버렸다.
"크아아~."
일양자는 비명인지 기합인지 분간이 안가는 괴성을 지르며 고 파파에게 돌진했다. 고 파파
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일양자를 싸늘하게 노려보며 돌진했다.
콰쾅. 쾅. 쾅...
검과 검이 맞부딪칠 때마다 벼락이 치고 폭풍이 발생했다. 수십합이 넘는 격돌이 순간적으
로 벌어졌다. 그러나 누구도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끝없는 격돌로 이어졌다. 격돌의 장소
는 어느새 본전의 지붕 위로 옮겨졌다가 공중으로 이동했다.
쩌쩡.
귀가 찢어지는 금속성과 함께 고 파파와 일양자가 허공에서 지상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두
사람은 서로 검을 맞댄 채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반검이 아니라면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것인데... 쓸데없는 자학이 승부를 앞당기게 하는
군."
"흐윽..."
일양자의 꽉 다문 이빨 사이에 진한 선혈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정상적인 길이의 흑인검
을 사용한 고 파파와 달리 절반으로 잘려진 청평검을 사용하는 일양자가 불리했던 것이다.
또한 고 파파의 내공이 일양자보다 더 두터웠고 깊었다.
"이만 가보게나."
공손팔결의 인결을 이용해 주변의 기류를 당겼다가 탄결을 사용하자 강력한 폭발이 발생했
다.
쾅.
"허억..."
일양자는 뒤로 이십여 걸음이나 밀려나갔다. 무당의 깊고도 넓은 내공이 고 파파에게는 아
무런 소용이 없었다.
"타!"
그러나 일양자는 간단하게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무당면장의 극치인 십단금(十段錦)이
일양자의 손에서 펼쳐졌다. 부드러우면서도 굳건한 장력이 열 겹이나 함축돼 고 파파를 향
해 날아갔다.
팍.
새파란, 너무도 푸르러 눈이 부시는 비취빛 광채가 고 파파의 손바닥에서 방출됐다. 그건
목표음장이 극치에 오르면 사용할 수 있는 취라수(翠羅手)였다.
퍽.
취라수는 십단금을 뚫어버렸다. 그러나 십단금은 내가장력이 열 겹으로 압축돼 쏟아지는
것이다. 취라수의 가공할 힘은 아홉 겹까지는 뚫어버렸지만 남은 하나를 해결하지 못했다.
십단금의 마지막 벽과 취라수는 허공에서 맞부딪쳐 사라져 버렸다.
일양자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태극혜검을 펼쳤다. 끝없이 펼쳐지는 동심원의 흐름은 무
한의 힘이 내재돼 있었다. 그러나 공손검법도 태극혜검에 못지 않은 희대의 검법이었다.
고 파파는 풍운변색의 초식에 공손팔결을 하나로 묶어 쏟아냈다.
쿠아앙.
두 개의 힘이 격돌했다. 그리고 잠시 후 결전의 끝이 드러났다. 고 파파가 십여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 있었지만 일양자는 수십여 걸음이나 밀려난 채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고
파파의 승리가 명쾌하게 드러났다.
"허억, 사백... 일양 사백님."
"이, 이럴 수가... 일양 사백조가 패배하다니..."
무당파의 도사들은 일양자의 패배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는 무너지는 가슴을 잡고 탄식했다.
담운 장교를 비롯해 무당파의 장로들이 일양자에게 다가가자 고 파파는 악소채에게 향했다.
악소채는 어느새 의식을 회복하고 자기에게 다가오는 고 파파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할머니..."
"괜찮으냐?"
"네. 할머니."
"그대로 있거라. 억지로 일어설 필요는 없단다."
악소채가 억지로 일어서려고 하자 고 파파는 손사래를 치며 막았다.
"그보다 이걸 복용하도록 해라."
"무엇인가요?"
고 파파가 품속에서 커낸 작은 목갑에는 신녀에게 받아낸 설삼단이 들어 있었다.
"내상을 치료하는 약이란다."
"고맙습니다. 할머니."
설삼단의 정체를 알면 악소채가 사양할 것을 고 파파는 알고 있었다.
"어서 복용하거라."
목갑이 열리자 강렬할 향기가 퍼져 나가자 악소채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내상을 치료하
는 약같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과 고 파파 단 둘이 무당산의 중심부에 있
어 언제 위험할지 모르는 다급한 상황에 최대한 빠른 속도로 내상을 치료하는 것이 우선할
일이라고 생각한 악소채는 의심 없이 설삼단을 받아먹었다.
"헉! 이, 이건..."
"어서 운공을 하렴."
설삼단의 가공할 약력이 퍼져 나가자 고 파파는 악소채의 등에 손을 대고 기의 흐름을 유도
했다. 순식간에 내상을 치료해 버리고 기혈을 들끓게 하는 설삼단의 약력은 가공할 파도를
일으키며 악소채의 전신을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이건 열양단보다 몇 배나 강한 약이야... 정신을 집중하고 운기조식에...'
악소채가 무아지경에 빠진 채 운기조식을 하자 고 파파는 그제 서야 안심이 되는지 등에 댄
손을 뗐다.
"됐어. 이제 소채가 눈을 뜰 동안 기다리면 되는구나."
고 파파는 운공조식을 하는 악소채를 부드럽게 바라보다가 갑자기 신녀의 마지막 말이 뇌리
에 떠올랐다. 악소채가 설삼단을 복용했기 때문인지 신녀의 독한 모습이 가시지 않았다.
"흠... 모든 것이 운명이 만드는 장난이야. 다만 두 아이가 서로를 다치지 않고 원만하게 해
결되도록 내가 노력해야지."
신녀와 악소채, 이 두 사람은 피붙이 하나 없는 고 파파에겐 혈육이나 다름없었다. 고 파파
는 부드러운 눈으로 악소채를 마냥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악소채가 운공에 돌입한지 한 시
진이 지나자 일양자가 의식을 회복했다.
일양자는 눈을 뜨자말자 청평검을 찾았다. 청평검의 검신은 가루가 되어 사라졌고 남은 것
은 일양자가 굳게 잡고 있던 손잡이 뿐이었다. 일양자는 손잡이만 남은 청평검을 무시무시
한 눈빛으로 쏘아보다가 갑자기 미친 듯이 웃다가 울음을 터트렸다.
주변에 무당파의 도사들이 몰려 있는데도 일양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희노애락의 모든 감정
을 쏟아냈다. 근 일 다경 동안 광인처럼 울고 웃고 기뻐하다가 화를 내던 일양자는 갑자기
손잡이만 남은 청평검을 던져 버렸다.
"모든 것이 집착이었구나... 한 사람의 일생이 한순간의 꿈이거늘... 나는 무엇을 얻으려고 발
버둥 친 것인가..."
일체의 감정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일양자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길이 없었
다. 수시로 돌변하는 일양자의 상태가 담운 장교와 무당파의 장로들을 불안하게 했다. 그
들은 일양자의 행동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장문인."
"말씀하십시오. 일양 사백."
"오늘에 와서야 빈도가 미망(迷妄) 속에서 헤매고 있었음을 알았소이다."
"일양 사백..."
"허허허..."
일양자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더니 고 파파에게 다가갔다. 고 파파는 일양자를 한 번 힐끗
바라보더니 악소채에게 시선을 다시 돌렸다. 일양자는 자신을 외면하는 고 파파의 등에다
고개를 숙였다.
"빈도의 어리석음을 깨뜨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엉?"
전혀 생각지 않은 말이 일양자의 입에서 나오자 고 파파는 눈이 동그랗게 변해 고개를 돌렸
다. 일양자는 벌써 자신의 거처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뭔 소리인지 모르겠군. 패했는데 저렇게 밝아지다니... 참으로 이상한 도사로다."
고 파파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악소채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일양자가 어떤 말이나 행동
을 하든 고 파파에게 흥미가 없었다. 고 파파에게 지금 당장 소중한 것은 악소채였다. 게
다가 악소채는 중대한 고비를 막고 있었다. 가지고 있던 내력과 설삼단의 약력을 이합진결
을 이용해 변신을 꾀하고 있었다.
"조그만... 조그만 더하면 너는 일양자를 능가하게 된단다. 소채야 꾹 참고 계속 진행하거
라."
고 파파는 악소채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이제는 도와주고 싶어도 아무 것도 할 수 없
는 상태였고 그저 바라만 보며 기도를 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우진궁 밖에서 한 노소
(老少)가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잘 됐구나. 무량수불. 무량수불... 이 모든 것이 삼청의 은덕이로다."
"경운 사숙님."
"좀더 참거라. 네 누이가 깨어나면 가도록 하자. 지금 네 누이는 중대한 고비를 맞이했다."
"알겠습니다."
노인은 경운도장이었고 이십대 청년도사는 악소채가 그리도 보고 싶어하는 동생이었다.
자금성의 외곽에 급하게 걸어가는 늙은 환관이 있었다. 그는 이마에 송글거리는 땀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급하게 작은 전각에 뛰어 들어갔다.
"무슨 일이오. 한 도독."
"어서 오시구려. 고 태감."
늙은 환관은 사례감의 수장인 고신이었다. 그리고 그를 기다리고 있단 사람은 전신을 갑주
로 무장한 오군도독 한우령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그리 급하다며 나를 이곳으로 불렀소."
"별일은 아니외다. 다만 소개시켜줄 장수들이 있어 오시라 했소."
"내게 소개해줄 장수라니..."
짝. 짝.
한우령이 두 번 박수를 치자 열 명이 넘는 무장한 젊은 장군들이 나타났다.
"이, 이게 뭐 하는 짓이요?"
고신이 당황해 하며 질문했지만 한우령은 일체의 대꾸도 없이 젊은 장군들을 바라보았다.
"실행하라."
"네. 도독."
젊은 장군들은 고신을 포위하더니 칼과 창을 겨누었다.
"한 도독. 이 무슨 짓이요?"
고신이 떨리는 음성으로 항변했지만 한우령은 먼산을 쳐다보듯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겨버
렸다. 젊은 장수들은 일제히 고신을 향해 돌진했다. 그런데 갑자기 고신의 그림자에서 흑
의를 입은 복면인이 튀어나오더니 앞을 가로막았다. 또한 고신이 있는 자리에서 반경 이십
여장 안에서 수십여명에 달하는 검은 그림자가 쏟아져 나왔다.
챙. 챙. 챙...
격돌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젊은 장군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무예를 자랑했지만 흑의 복면
인들 역시 만만치 않았다. 흑의 복면인들은 이원의 암살부대인 화영이었다.
"놀랍군. 오군영에서 가장 무예가 뛰어난 인물들을 추려냈건만 과연 이원은 무섭군."
암중에서 고신을 보호하고 있는 화영의 존재를 한우령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암살이라면 몰라도 드러난 자객은 아무리 무서워도 막을 수 있지."
화영은 어느새 젊은 장수들에게 밀리고 있었다. 한 명, 한 명 젊은 장수들의 도검 앞에 쓰러
져 버렸다.
"고 태감 어서 피하십시오. 제가 앞을 막겠습니다."
고신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복면인이 앞을 막았다.
"윽... 어째서..."
고신의 앞을 막던 복면인의 복부에서 칼날이 튀어나오더니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복면인
의 등뒤에서 칼로 찌른 자는 놀랍게도 고신이었다.
"이제 화영은 모두 해결한 것인가..."
고신은 사악하고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네놈의 얼굴이 보고 싶었지."
죽은 복면인의 얼굴이 궁금한지 고신은 손을 뻗었다. 복면이 벗겨지자 아름다운 여인의 얼
굴이 나타났다.
"화영(花影)이란 이름이 붙은 이유가 여자였기 때문이었나... 하긴 여자였으니 자금성에서 궁
비나 나인으로 위장해 숨어 있을 수 있었군."
전멸을 당한 화영의 복면인들도 모두 여자였다. 고신은 그동안 자신을 보호한다며 주위를
맴돌던 화영이 껄끄러웠다. 게다가 앞으로 진행할 일을 이원에서 알면 안 된다는 이유도
포함돼 화영을 몰살시키기 위해 한우령과 연극을 벌였던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감!
즐독입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잘보았습니다.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독입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즐독 입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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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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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독이랍니다
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