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2024. 11.3) 말씀/ 마 10:39 어떻게 살 것인가?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질문은 우리가 평생 살아가면서 스스로에게 던져야할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을 하지 않게 되면 우리는 사는 것이 아니라 생존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생존이란 죽을 때까지 생명을 유지하다가 때가 되어 생명을 마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배우 김수미가 심정지로 75세 나이에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25일 별세한 배우 김수미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56년 동안 예수를 믿지 않다가 뒤늦게 회심했다고 합니다. 김수미는 지난해 CTS에 출연해 “6~7년 전 쯤 하나님을 본격적으로 알게 됐다고 간증하였습니다. 너무 일찍 떠난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아쉬워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알고 떠났으니 다행입니다. 그래도 연예인으로서 늦으나마 잘 살다 간 것입니다
법정 스님 글 중에 ‘미리 쓰는 유서’라는 글이 있습니다. “죽게 되면 말없이 죽을 것이지 무슨 구구한 이유가 따를 것인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지레 죽는 사람이라면 의견서(유서)라도 첨부되어야겠지만, 제 명대로 살 만치 살다가 가는 사람에겐 그 변명이 소용될 것 같지 않다. 그리고 말이란 늘 오해를 동반하게 마련이므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그런데 죽음은 어느 때 나를 찾아올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많은 교통사고와 가스 중독과 그리고 원한의 눈길이 전생의 갚음으로 나를 쏠는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죽음 쪽에서 보면 한 걸음 한 걸음 죽어 오고 있다는 것임을 상기할 때, 사는 일은 곧 죽는 일이며, 생과 사는 결코 절연된 것이 아니다. 죽음이 언제 어디서 나를 부를지라도 "네" 하고 선뜻 털고 일어설 준비만은 되어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유서는 남기는 글이기보다 지금 살고 있는 '생의 백서白書'가 되어야 한다.” 아주 공감이 되는 글입니다. 살만치 살다간 사람이라면 무슨 유서가 필요하겠는가, 진정한 유서는 생의 백서가 되어야 하지 않는냐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몇 마디 충고가 아니라 지나온 삶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 유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죽는 순간의 심각한 교훈에 사람들이 눈물도 흘리고 삶의 자세도 새롭게 하지만 그 유서가 얼마나 영향을 주겠습니까? 법적 효력 외에는 다른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살아온 삶이 감동이 되었다면 그런 삶은 죽음 후에도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변화를 줍니다. 북간도의 태통령이라 하였던 김약연 선생은 실ㅈ로 나이 삶이 유언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법정 스님 이야기를 읽으면서 특이한 몇몇 사람들의 유언이 생각났습니다. 소크라테스; 제자 풀라톤에게 생전에 닭을 한 마리 빌렸는데 갚아 달라고 하였습니다. 철학가의 유언이 너무나 단순합니다. 철학도 어려운 것 같지만 결국 삶과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철 스님; 내가 남녀를 속인 죄를 지었는데 수미산보다 높아 나는 지옥에 떨어진다 했습니다. 너무 솔직합니다. 인간은 어떤 사람도 온전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교훈을 줍니다. 볼테르 ; 그는 프랑스의 유명한 계몽주의 자였습니다. 그러나 아주 교만했습니다. 성경을 성경은 거짓이라고 박해했습니다. 100년만 지나면 성경의 모든 것이 거짓으로 판명되고 모든 교회는 이 땅위의 모든 교회는 박물관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그는 죽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사 선생님 만약 6개월만 생명을 연장시켜주신다면 나의 전 재산을 주겠습니다. 나는 하나님과 인간에세 버림을 받았습니다. 오, 나는 지옥으로 떨어지눈구나.” 결과가 아주 비참했습니다. 또 무디의 유언; “여러분 내가 오늘 죽으면 내일 신문은 저 유명한 무디가 죽었다고 대서 특필을 할 것입니다. 믿지 마십시오. 저는 안 죽었습니다. 죽음이 너무나 밝고 감동입니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라는 책을 남겼습니다. 이 책은 인세만도 10억이 된다고 했는데 모든 것을 다 ‘맑고 향기롭게'라는 봉사활동의 시민모임의 이름으로 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정작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는 병원비가 없어 다른 사람이 대신 대주었습니다. 정말 무소유를 실천한 분입니다. 죽을 때 사리도 거두지 말라, 책도 출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 바람에 책을 구하느라고 요지경이었습니다 하지 말라니까 더 합니다. 헌 책 한 권이 5만원,7만원까지 경매로 팔린답니다. 재미 삼아 경매에 오린 것이 22억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말하는 무소유라는 것은 무조건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소유하지 않는 것이랍니다. 사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불필요한 것들이 참 많습니다. 불행한 이유를 보면 필요한 것이 없어서 때문도 있지만 불필요한 것을 너무 많이 소유해서 불행한 경우도 많습니다. 지혜롭다는 것은 불필요한 것을 처분하고 정말 필요한 것을 소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아주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옷을 팔아서 책을 산다고 합니다. 사실 옷이 얼마나 필요하겠습니까? 구두가 얼마나 필요하겠습니까? 또 사람들은 집에 애착을 갖습니다. 30평, 40평, 50평.... 사실 큰 집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클수록 관리가 힘들 뿐입니다. 그리고 땅이 얼마나 필요하겠습니까? 톨스토이의 <사람에게 땅이 얼마나 필요한가> 단 편 글이 있는데 거기 보면 1.5평밖에 필요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돈이 얼마나 필요하죠? 쓰기 나름이지만 지국촌에 하루 1달라로 살면서도 웃으며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사람들은 너무 욕심이 많습니다. 문제는 필요이상의 욕심을 갖게 될 때 진정 필요한 것을 위해서 쓰지 못하고 그렇게 살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세상 처세술이 능하고 남보다 더 힘을 많이 써서 천하를 소유하고, 천하를 호령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정작 자기 생명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상에서는 손가락 안에 드는 억만장자가 되어 남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고 합시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만 배부르게 먹고 살고 다른 사람에게 베푼 사랑이 없다면 얼마나 인색한 삶입니까? 세상에서는 장 자리에 오르고 국회의원 대통령까지 이르러 큰 일을 많이 했다고 하더라도 영적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한 일이 없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악하고 게으른 종입니다. 예수님은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한 라오디아 교회를 향하여 너희 곤고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가련한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회개치 않으면 토하여 내치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에 것을 다 소유했어도 주님이 토하여 내치는 인생이라면 가장 비참한 인생입니다. . 법정 스님이 그렇게 하나도 남김없이 무소유의 삶을 살아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감동을 남기고 떠났지만 그 삶을 인정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필요한 것은 비우고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잘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필요한 것은 붙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무소유가 그렇게 중요한 진리라면 그는 그 책을 계속 출판해서 널리 전해서 사람들에게 읽도록 권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책의 출판을 금지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버리라는 교훈은 있지만 소유하고 붙들도록 가르치는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 후에까지 남길 수 있는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 분의 인생도 교훈도 죽음과 함께 끝난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의 진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비우는 것이 아닙니다. 비우고 채우는 것입니다. 놓고 붙드는 것입니다. 많이 벌고 베푸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 점입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배와 그물과 부친까지 버리고 따르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생계 수단을 버렸고 심지어 부친마저 버렸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잡았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것은 중요해도 한 세상으로 끝나지만 주님은 영원하신 생명의 주이십니다. 우리에게는 인생 사는 날까지 그리고 그 후까지 본받고 쫓아야 할 분이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5장에 주님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보물을 좀도 도적도 없는 하늘에 쌓아두라는 것입니다(마 6:19-20). 세상 살면서 학문도 지식도 필요합니다. 사람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거의 반은 지식을 쌓는 과정입니다. 얼마만큼 공부를 하는가에 따라서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그러나 많은 학식으로 선망의 대상이 된다 해도 하나님도 하나님 나라도 모른다면 어찌 아는 자라 하겠습니까? 니고데모가 그런 사람입니다. 주님은 영적으로 아직도 태어나지 않은 어린 아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울 서신서를 보면 끊임없이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합니다(엡 4:22-23).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합니다(롬 13:12). 딤전 6:12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이처럼 기독교는 비울 것이 있고 채울 것이 있고, 버릴 것이 있고 반드시 취 할 것이 있는 종교입니다. 인생이 긴 것 같지만 그리 길지 않습니다. 길어야 30년 길어야 20넌 길어야 10년 우리가 일할 수 있는 때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인생이 안개와 같아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일년 후의 일을 계획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짧은 인생 집착해봐야 다 비우지도 못하고 다 채우지도 못하고 끝납니다. 이런 인생을 지혜롭게 사는 길은 버리고 비워야 할 것과 채우고 붙들어야 할 것을 구별할 줄 아는 것입니다. 먼저 해야 할 것과 나중에 해야 할 것을 구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땅에 사니 땅이 중요하고, 땅에 사니 집이 중요하고, 땅에 사니 돈이 중요합니다. 땅에 사니 세상의 즐거움과 행복이 더 피부에 다가옵니다. 문제는 너무나 지나치게 땅에 마음을 쓰고 땅에 일에 힘을 쏟다가 주님이 홀연히 오시는 것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마시며 살다가 홀연히 홍수 심판을 만났습니다. 소돔 고모라에서 롯의 처는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돌아서서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영생을 얻고자 예수님께 나아왔던 부자 청년은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나를 좇으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하였지만 버리지 못하고 근심 중에 돌아섰습니다. 지금은 지혜로운 것 같지만 잠시 후면 어떤 삶이 지혜로운 삶이었는가 하는 것은 금방 증거됩니다. 히브리서를 믿음의 순교자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중에 어떤 이는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히 11:35-36).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살았습니까? 더 나은 본향 하늘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히 11:13-16). 이들은 세상에서 누린 것이 별로 없는 자들입니다. 어쩌면 가장 불쌍한 자들 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보니 가장 지혜로운 자들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만일 이 땅의 삶이 끝이고 부활이 없고 이생 뿐이라면 차라리 먹고 마시며 최대한 기며 사는 것이 지혜로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의 삶으로 끝이 아니고 또한 짧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삶의 지혜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죽음은 어느 때 나를 찾아올는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옵니다. 잘 죽는 길은 잘 사는 길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추앙받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에게 칭찬 받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주님이 가르쳐주신 교훈의 말씀 한마디를 새겨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9절을 보면 주님은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이 땅에서 문제가 끊임없이 발생하는 이유는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는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잠시 잠깐 후면 타락한 육신의 아담은 다 죽습니다. 그 죽음은 죄의 결과 심판입니다. 이런 죽을 인생이 사는 길은 바로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는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잘 죽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함께 살게 됩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더 이상 세상에 매이지 않게 됩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아도 됩니다. 발버둥치지 않아도 됩니다. 부활의 소망 속에 살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소유하였기에 사소한 것들을 비울 수 있습니다. 자연히 베푸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딤 전 6:17-19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 6:17-19). 사람들이 세상 욕심에 매이는 것은 영적인 생명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인생은 그런 삶을 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자는 자연히 삶도 달라집니다.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되고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지난 주 28-30 cmi 수탭수양회가 있어서 다녀왔습니다. 가서보니 프로그램 교제시간 나눔 주제가 어떻게 살았습니까? 어떻게 살고 싶습니까? 였습니다. 같은 조에 계신 고계자 사모님 나이들수록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 하셨습니다. 저도 어떻게 살고 있는가 물으시길레 저도 건강관리 이야기를 했습니다. 건강해야 주님을 위해서 더 열심히 살 수 있고, 이웃을 위해서도 살 수 있다고 저의 건강관리 삶도 이야기 했습니다. 모두 공감을 하며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더욱 은혜스러운 것은 개회 예배 형준우 목사님 간증 설교 어떻게 목회생활하는가 위로하고 격려하시는 하나님의 간증은 모두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김명수 목사님의 부부관계 삶을 이야기하면서 전하는 교회사 특강도 은혜가 되고, 박중용 목사님의 삼귐과 사귐의 주제로 전한 폐회 애배 말씀도 은헤가 되었습니다. 저도 수양회를 위해 무화과 홍시. 포도등 과일을 준비하고 시간마다 바리톤 색소폰 찬양연주로 섬겨서 즐거운 예배를 섬길 수 있음이 감사가 되었습니다. 예배 마치고 저는 다시 2차 수양회를 위해서 호주 오누가 선교사님과 함께 무안으로 내려왔습니다. 이미 제 안에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그림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모모가 생각났습니다. 모모처럼 살아야겠다는 생각이들었습니다. 모모가 어떻게 살았습니까?
모모에게는 특별한 재주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입니다. 모모에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힘이 생기고 생기가 돌아 매우 유쾌하고 재미있어하였습니다. 모모가 그렇게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고 행복하게 소통할 수 있는 이유는 남들이 갖지 못한 단 하나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간' 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누구나 시간이 없다고하는데 모모는 시간이 아주 많았습다. 모모에게는 해야만 하는 것들이 없었습다. 모모의 삶은 웃고, 즐기고, 만나고, 하고싶은 것들을 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이것을 하기 위해 저것을 준비하고, 저것을 하기 위해 또 다른 것을 준비하는 그런 어른들의 사고방식이 모모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많은 시간을 가지게 되었고 그 시간들 전부가 온전히 모모의 삶.자체가 되었습니다. 모모가 주는 교훈은...시간과 삶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시간은 아끼는 것이 아니라 잘 써야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을 아끼는 대신 주어진 시간을 알차게 보내면 덜 계획하고, 덜 노력하면서도 더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을 아끼면 삶도 줄어들지만 나눌 수 있고 줄 수 있다면 우리의 삶도 넉넉해지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즐길 수 있는 시간은 바로 지금입니다. 그러므로 모모처럼 살려면 시간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기회를 포착해서 잘 써야한다는 것입니다. 불필요한 일들을 줄여야 하고, 가장 중요한 일을 집중하고 덜 중요한 일들을 가지치기 작업을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3일동안 수양회를 하고, 어떻게 다시 2차 수양회를 할 수 있겠습니까? 바쁘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시간이 모자라 아끼고 다음 기회로 미루기 쉽습니다. 그런데 모모처럼 시간을 잘 쓰면 바빠도 시간이 남고 넉넉하고 여유가 있게 됩니다. 덜 노력하면서도 더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한 주간 오누가 선교사님, 지홍집사님 천권사님 재중집사님 함께 맛있는 것고 먹고 마시고, 금당도 섬트래킹도하고, 주 안에서 아주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도 자신을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짧은 인생 어떻게 하면 넉넉하게 잘 살 수 있을까? 아낄 것인가 잘 쓸 것인가? 비우고 놓아야할 것들이 무엇이며 생명 걸고 붙들어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주님께 칭찬받고 인정받는 지혜로운 삶이 어떤 삶인지 시간 관리를 아주 지혜롭게 잘 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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