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1929년의 대공황은 인류 문명사에도 한 가지 큰 변화를 몰고왔으니, 그건 바로 소비(consumption)라는 개념의 재탄생이었다. “소비”는 14세기 초에 만들어진 단어로 ‘consume’이라는 동사의 본래 뜻은 파괴하고, 약탈하고, 정복하고, 소진시킨다는 의미였다. 19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소비(consumption)’라는 단어는 낭비, 약탈, 탕진, 고갈 등과 같은 부정적인 뜻으로 쓰였으며, 심지어 폐병을 뜻하는 말로 쓰이기도 했다. 그러나 ‘소비’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는 대공황 이후 대중광고와 마케팅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긍정적 이미지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소비’라는 단어는 ‘선택’과 동일시되면서 ‘축복’으로 다시 태어났다.
(74)
“반민생단투쟁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열광으로 전개되어 심지어 4살짜리 어린애까지도 죽였다. 결국 자신을 보호하고 적극성을 표현하기 위해 고문, 타살까지 자행했던 것이다. …… 자기보호 혹은 지나친 불안감이나 과시욕에서 나온 적극성의 과잉표현으로 중국인들 앞에서 조선인을 믿을 수 없음을 고백하며 조직에 자신의 청백함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심리가 민생단 적발과 비판투쟁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자기의 혁명성을 나타내기 위해 조그만 일도 큰 문제로 고발하고 또 거짓진술을 해댄 것이 반민생단투쟁을 확대, 지속시킨 중요한 원인이라고 인정된다.”
(116-117)
당시 신문이 누린 권력과 신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로 월간 <동광> 1931년 12월호에 실린 <신문 비판 특집>은 주목할 만하다. 이 기사는 대화형식으로 신문에 대한 세평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조선의 신문계에 사장이면 판서 격은 되고 중역이면 참판 격은 된다는 말을 못 들었나? 그 밑에 국장도 있고 부장도 있으니까 벼슬 못한 조선 민간 유지에게는 이것이나마 훌륭한 벼슬자리인 줄을 모르는가? …… 연전에 모 신문에서 수재금을 모집하니까 푼푼이 들어온 것이 5만여 원이요, 또 요새 이충무공 성금모집도 2만 원을 돌파했으니, 이 돈 없는 조선에서 그만한 돈을 모은다는 것은 신문의 위력이 아니고는 못할 일이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시골 가서 보면 석유 등잔 희미한 불빛 밑에서 동리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 신문지가 해지도록 돌려가며 읽고, 신문에 난 말이면 만고의 진리로 듣는 형편이니.”
(138-139)
167센티미터의 큰 키를 가졌던 최승희는 1937년부터 5년간 세계 공연을 나섰으며, 이때에 ‘반도의 무희’ ‘동양의 진주’ ‘동양의 이사도라 던컨’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전성기 당시 최승희는 ‘톱스타’답게 각국의 최정상급 명사 예술인들과 교류를 맺었다. 그와 교류한 서양인으로는 미국 공연 시절 사귄 지휘자 스토코프스키, 소설가 존 스타인벡, 루이스 레에나, 존 그로프, 영화배우 찰리 채플린, 로버트 테일러, 게리 쿠퍼 등이 있다. 유럽에서는 화가 피카소를 비롯하여 시인 장 콕토, 소설가 로맹 롤랑, 미셀 지몽, 영화배우 샬 보아에이 등이 그녀와 친교를 맺었다. 파리 공연 때 파카소로부터 그림 한 점을 선사받았는데, 시가로 수억대를 호가하는 이 그림의 행방을 두고 나중에 안씨 집안(시댁)과 최씨 집안(친정) 간에 한 때 불화가 있었던 적도 있다.
(161-162)
그러나 1929년 주식시장 붕괴는 우생학의 기본 사상에 큰 충격을 주었다. 제레미 리프킨에 따르면 “이탈리아계, 폴란드계, 유태계 이주민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금융 엘리트들의 실직사태가 벌어지고, 중산계층 전문가와 학자들도 이들과 나란히 실업자 대열에 들어서게 되자, 어떤 인종은 다른 인종보다 생물학적으로 우월하다는 신화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되었다. 대공황은 수백만 미국인들을 평등하게 하여, 북유럽계 인종이든 남유럽계 인종이든, 백인 앵글로색슨 신교도들이건 유태인이건 모두 똑같이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에 처하게 되었다.
(181)
“첫째, 신채호의 무정부주의는 사회진화론의 내적 모순을 해결하는 이념으로서 수용되었다기보다는, 시대적 조건의 변화와 독립 이후의 새로운 사회 건설에 대처할 수 있도록 저항적 민족주의의 내용과 방법 그리고 목표를 심화하는 발전적 계기로서 수용되었다. 둘째, 신채호의 무정부주의는 그의 민족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양자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신채호에게 있어서 무정부주의가 민족주의의 방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무정부주의는 민족주의의 발전된(혹은 민족주의가 지양되는( 단계로서 간주함이 타당하다. 셋째, 신채호의 무정부주의는 좌우 양쪽을 모두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과정에서 수용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종합하여 지양하는 제3의 가능성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193)
브나로드운동을 주도한 것은 편집국장 이광수였으며, 그 운동의 시범작으로 쓴 것이 <흙>이다. 지수걸은 <흙>에 대해 “이광수가 <흙>에서 표방한 ‘하면 된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아는 것이 힘’ ‘티끌 모아 태산’ 등의 헛구호는 제국주의 지배모순을 은폐하기 위하여 일제가 선전한 자력갱생운동 구호와 거의 동일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며 “이러한 구호는 ‘안 해도 이미 되어 있는 자’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잘 안 될 사람’들에게 안주 삼아 내뱉는 비아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215)
시인 심훈은 8월 10일 새벽 <조선중앙일보>가 발행한 신문 호외를 받아들고 그 뒷장에 “그대들(손기정, 남승룡 선수)의 첩보를 전하는 호외 뒷등에 붓을 달리는 이 손은 형용 못할 감격에 떨린다. 이역의 하늘 아래서 그들의 심장 속에 솟음치던 피가 2300만의 한 사람인 내 혈관 속을 달리기 때문이다.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세계의 인류를 향해 외치고 싶다. 인제는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라고 갈겨썼다. 감격에 몸을 떤 심훈은 그 즉흥시를 들고 <조선중앙일보>의 편집실을 찾아가 한바탕 읽어 들려주고는 사라졌는데, 그 이튿날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실렸다.
(226)
<동아일보>는 일장기 말소 사건 후 일제의 압력에 굴복하여 친일 어용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물론 <조선일보>의 경우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조선일보>는 일제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찬양하기에 바빴다. 1937년 1월 1일 <조선일보>는 일왕 부부의 사진을 1면에 크게 싣고 같은 지면에 총독의 새해 기념사와 휘호를 실었다. 이후 해마다 1월 1일자 1면에 일왕 부부의 사진을 커다랗게 실었다.
(249)
김원봉은 1937년 12월 초에 김구 중심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에 가담하지 않은 중간파, 좌파세력을 결집해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했다.
한상도는 “이로써 1930년대 후반기, 중국 관내 지역 한인들은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김구의 우파그룹과, 상대적으로 진보적 민족주의 성향으로 가던 김원봉 중심의 중간좌파그룹으로 양극화되어갔다.”고 했다. 1938년엔 장제스가 직접 나서 한인세력의 단결과 재편성을 촉구하게 된다. 끝없는 분열! 당시 독립군세력이 처해 있던 최악의 열악한 상황을 감안하면 이해 못할 것도 없지만, 잘했다고 박수를 쳐주긴 어렵겠다.
(252)
1934년 사할인에서 출생해 <고려일보>의 사장을 지낸 조영환은 “러시아는 한인 이주민을 교묘히 이용하여 연해주 일대의 미개간지를 개척한 후에는 이 개간지에 러시아인을 이주시킨 다음 한인들을 다시 오지인 미개간지대로 추방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35년 이후 연해주에 상주하는 한민족 수가 근 30만 명이었는데 그 후에도 인구수가 증가하고 있었다. 조국이 인접한 이 지대가 장래에는 한민족의 자치지역으로 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스탈린 체제는 1932년부터 한민족 중 인텔리, 기술자, 농업전문가, 당 관리요원, 군무자 등 민족의 두뇌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일제 스파이라는 것이다. 한평생 조선의 독립을 위해 반일투쟁에 몸바쳐온 연해주 한민족들에게 역사의 철천지원수인 일제의 스파이라는 혐의는 만인의 단죄를 받는 야수적인 행위였다. 그 때문에 1932~1937년까지만해도 한민족의 핵심 지식인 2000여 명이 학살되었다.
(306-307)
<한국통사>는 대원군시대부터 한일합방까지 50여년의 뼈아픈 망국사로, 국가는 비록 망하였지만 국혼(국가의 정신적인 힘)인 국교, 국가 등을 보존하고 교육과 독립투쟁을 통해 끊임없이 노력하면 결국 국백인 국가를 되찾을 수 있다는 정신사적인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이어 박은식은 1920년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간행했다. 이 책은 글자 그대로 쓴 독립운동사다. 1919년 3.1독립운동에 고무되어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까지의 독립투쟁사를 서술했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선 민중의 힘과 민의의 결집이 독립실현의 중요수단임을 강조했다.
(337-338)
로마 교황청은 1932년 9월 일본 천주교회에 “신사참배는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교육목적으로 실시되는 것이므로 신자들의 신사참배는 정당하다”는 해석을 내렸다. 이 결정을 기초로 교황청은 1936년 5월 18일 천주교 신자들이 신사에 참배하여도 좋다는 훈령을 내렸다. 이 훈령이 나오기 1개월 전인 1936년 4월 한국 천주교회는 기관지 <경향잡지>를 통해 천주교 신자들의 신사참배를 공식 허락하였다. 천주교는 중일전쟁 이후엔 신사참배를 더욱 강조하였고, 1940년 다시 한번 신자들에게 신사참배를 권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