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 쏘는 맛처럼 떠오르는 여자가 있다. 코카콜라 CF에서 팔꿈치로 남자를 때리며 앙증맞게 웃는 여자, 그 몇 프레임 안 되는 장면 하나가 방영되자마자 연예가 일번지 압구정동 일대가 술렁였댄다. 그것 땜에 애인 있는 남자들의 옆구리가 순식간에 멍들었다는데…’(유하의 시 ‘콜라 속의 연꽃’ 중)
나는 그녀가 누구인 줄 몰랐다. 그랬더니 유하는 마치 나를 외계인을 바라보듯 쳐다보면서 요즘 압구정동 아이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자 연예인을 모르냐고 했다. 그 후 나는 그녀가 등장하는 코카콜라 CF를 유심히 봤고, 최민수와 방송국 복도에서 섹시한 엉덩이를 부딪치는 신세대 트렌드 코미디 〈결혼 이야기〉를 재미있게 보았다.
심혜진은 1990년대 초 신세대 담론이 우리 사회에 사회학적 논쟁을 불러일으킬 무렵, 의식주의 고통에서 해방된 압구정 아이들의 새로운 가치관을 대변하는 여자처럼 보였다. 그녀의 웃고 있는 얼굴은 절대 무겁지 않았고, 삶의 고뇌를 양 어깨에 짊어진 피곤한 그늘도 없었다. 그녀의 트레이드마크는 경쾌함이었다.
1990년대 한국 영화사에서 심혜진은 거의 독보적 위치를 차지한다. 여배우 중에서는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그녀는 박광수 감독의 〈그들도 우리처럼〉(1990년), 정지영 감독의 〈하얀 전쟁〉(1992년), 김의석 감독의 〈결혼 이야기〉(1992년), 여균동 감독의 〈세상 밖으로〉(1994년), 강제규 감독의 〈은행나무 침대〉(1996년),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1996년), 김태균 감독의 〈박봉곤 가출사건〉(1996년) 등 한국영화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수작 필름을 찍었었다.
물론 1990년대 후반부터는 TV로 활동 무대를 옮겨,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나 드라마 〈궁〉, 그리고 2006년 화제의 드라마였던 〈돌아와요 순애씨〉 등을 찍었고, 〈심혜진의 파워 인터뷰〉(KBS)나 〈심혜진의 시네타운〉(SBS) 등 방송 프로그램까지 진행했지만 그래도 심혜진은 영화배우다.
“지난여름, 드라마 〈돌아와요 순애씨〉를 찍느라고 너무나 힘들었다. 그래서 2006년 가을, 겨울은 조금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일종의 휴식 기간이다. 방송 드라마는 시간에 쫓겨 촬영을 해야 하기 때문에 밤샘 촬영이나 새벽 촬영도 많다. 그래서 나처럼 영화로 시작한 연기자들은 적응하기가 매우 힘들다.”
그래도 심혜진은 현재 매일 오전 11시부터 12시까지 SBS FM 〈심혜진의 시네타운〉을 진행하고 있으며 케이블 TV XTM에서 신인 연예인을 선발하는 프로그램, XTMI를 진행하고 있다. 2007년 상반기에 영화 한 편을 찍기 위해 지금 대본을 검토하며 차기작을 고르고 있고 2007년 가을에는 TV 드라마를 찍을 예정이다.
차가운 외모 속 따뜻한 내면
〈파워 인터뷰〉 |
내가 그녀를 가까이서 만나게 된 것은 1998년이었다. 1년 반 정도 거의 매주 출연했던 〈심혜진의 파워 인터뷰〉를 통해서 나는 그녀를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났다. 그녀는 이웃집 처녀처럼 편안하게 대본을 보며 앉아 있다가, 조명을 받는 방송 무대로 등장할 때는 선녀처럼 나타나서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방청석에 앉아있던 여학생 방청객들은 비명을 지르며 “언니 너무 이뻐요” 같은 멘트를 반복해서 던졌었다.
1967년생으로 심상군이 본명인 심혜진은, 1988년 유영진 감독의 〈추억의 이름으로〉를 통해서 데뷔를 했으니까 벌써 20년 가깝게 우리 곁에 있었다. 데뷔한 다음해 〈물의 나라〉를 찍으면서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들도 우리처럼〉에서는 연기력까지 인정을 받으며 심혜진의 1990년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정말 한국 영화계에서 1990년대는 심혜진의 시대였다. 그녀와 경쟁할 만한 여배우는 거의 없었다.
〈안녕, 프란체스카〉 |
하지만 지금 대중들은 심혜진을 ‘프란체스카’로 더 기억한다. 검은 옷을 입고 무표정한 얼굴로 “즐 쳐드셈”이라고 일갈하던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에서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파격이었고 의외였지만, 또한 지금까지 그녀가 맡은 배역 중에서도 너무나 잘 어울리는 역할 중 하나였다.
정통 연기자로 출발한 그녀가 시트콤 출연을 결정할 때, 왜 망설임이 없었겠는가. 결과적으로 도박에 가까운 승부수에서 그녀는 대박을 터뜨린 셈이 되었다. 2006년 화제의 드라마, 일명 ‘돌순씨’라는 애칭으로 불린 〈돌아와요 순애씨〉는 나와 같은 대학(동서대학교 미디어창작과)에 교수로 있는 최순석 작가가 대본을 썼다. 최순석 교수와 나는, 학교에서도 비교적 넓은 방을 나누어 쓰고 있는 사이다. 그리고 지난 가을 개편 때부터 나는, SBS FM 〈심혜진의 시네타운〉에서 매주 수요일 출연해 신작 영화들을 소개하고 있다.
나는 세 번째 영화평론집 《하재봉의 시네마 클릭》을 출간하면서 책 앞머리에 게재할 추천사를 심혜진에게 부탁했었다. 출판사 쪽의 부탁사항이었다. 내가 심혜진의 파워 인터뷰에 출연하는 것을 알고 있는 출판사 측에서 심혜진의 추천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해 조심스럽게 부탁했는데, 그녀는 너무나 흔쾌히 응낙을 했고 멋진 추천사를 써주었다. 나중에 출판사에 물어보니까 원고료도 차마 밝히기 민망할 수준으로 주었다고 했다. 너무나 미안해서 그녀에게 지금까지 고맙다는 말도 못 했는데, 아직도 나는 마음 깊숙이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돌아와요 순애씨〉 |
심혜진의 외모는 차가워 보이는 도시인의 특질을 가지고 있지만, 내가 겪은 그녀는 실제로는 수더분하고 따뜻한 내면을 가졌다. “다시 태어나면 평범한 여성으로 생활하고 싶다. 사람들이 알아봐 주고 사랑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늘 1층에 있는 아파트를 구해 살고, 슈퍼에 갈 때도 그 동네 산다고 소문이 날까봐 다른 동네에서 장을 봐야 하는 일상이 너무나 피곤하다”고 그녀는 고백한 적이 있다.
심혜진은 고등학교 때 공부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방송통신대학 03학번으로서 방송정보학과에 재학 중이다. 심혜진은 3년 전, 집을 청평으로 옮겼다. 청평댐 위의 호반에 있는 그녀의 집에는, 강에서 불어오는 강바람, 산에서 불어 내려오는 산바람이 항상 넘실거린다. 늘 맑은 공기 속에 살고 있는 그녀가 부러웠다.
“너무 일찍부터 연예 활동을 하기 시작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내가 겪어보지 못한 것들을 표현하느라고 스트레스를 너무 받았다. 이제는 내 일을 즐기며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