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224)- 새로운 풍랑 이는 현해탄을 오가며(2)
9월의 마지막 월요일, 하늘은 푸르고 대지는 풍성함이 가득한 가을기운이 완연하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라고 쓴 김현승의 시 '가을의 기도'가 떠오른다. 다가오는 추석 명절 잘 쇠기를,,,
제3일 자연과 사람이 하나 되는 곳을 찾아서
셋째 날(9월 21일), 골프 텔에서 잘 자고 아침에 일어나니 산자락에 아지랑이처럼 엷은 안개가 평화롭고
구름 위로 떠오르는 아침 해가 눈부시다.
대욕탕에 내려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니 이완된 심신이 새 힘을 얻는 듯 상쾌한 기분이다. 욕탕에 한글로 당부의 말이 적혀 있다. 한, 일간의 목욕문화 차이로 무심코 행하는 몇 가지 사례를 열거하며 이에 주의를 기울여 달라는 내용이다. 목욕 만이겠는가, 외양은 닮았으나 속내는 다른 것이 얼마나 많으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공통의 요소를 가꾸면 좋으리라.
호텔의 아침식사가 풍성하다. 한식, 양식, 일식의 여러 음식을 골고루 맛보며 젓가락에 잘 먹었음을 표시하였다. 음식을 든 후 젓가락을 담은 종이에 가지런히 넣어서 1/3쯤 끝부분의 종이를 젖혀놓으면 맛있게 잘 먹었다는 감사의 뜻이 담긴다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일행 중에는 부산에 사는 88세의 할아버지가 있다. 지팡이를 짚고 친구와 함께 여행을 즐기는 노익장의 모습이 늠름하다. 첫날 늦게 탑승하여 뒤쪽에 앉은 것이 마음에 걸려 맨 앞자리를 잡아드렸다. 나이 들어서도 좋아하는 것을 즐기는 건강과 열정이 보기 좋다. 언행에 품격이 담겨지면 금상첨화일 터.
오전 8시 20분에 호텔을 출발하여 일본에서 가장 선호하는 자연친화 마을로 알려진 유후인으로 향하였다. 동생이 스마트폰으로 살핀 현지의 낮 기온은 섭씨 27도. 창밖의 울창한 삼림이 눈을 시원하게 해주는 청명한 날씨다. 두 시간여 유후인에 이르는 길에 일본의 이모저모를 해박한 지식과 유창한 언변으로 종횡무진 풀어내는 김송이 가이드의 열정이 돋보인다. 일정수준의 고객들에게 나름대로 정확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하려는 자세와 노력이 가상하고 일본인의 강점(질서, 친절, 매너 등)과 약점(얄미움, 표리부동, 냉정 등)을 고객들과 토론식으로 끌어내는 화술도 능란하다.
유후인에 도착하니 오전 10시, 조용한 마을 주차장에 여러 대의 버스가 먼저 와 있다. 유후인은 산세가 아름답고 주변이 고즈넉한 온천지대를 사람과 자연이 편안하게 어울리도록 조화롭게 개발한 휴양지다. 온천수가 흐르는 연못에 물고기가 서식하는 긴린코 호수와 주변경관이 수려하고 남녀가 공동으로 이용하는 욕탕들도 눈에 띈다.
여동생은 호수 주변에 몇 송이 피어있는 꽃무릇을 바라보며 어릴 적의 추억에 빠져든다. 초등학교 시절 가을 소풍 길에 자주 갔던 불갑사에 이 무렵이면 지천으로 피어있던 꽃무릇을 이국땅에서 바라보는 감회가 별다른 듯, 꽃망울처럼 아름답고 화사한 소녀가 꿈결 같은 세월을 건너 어느새 손자의 재롱이 흐뭇한 할머니가 되었구나. 사랑하는 동생이여, 남은 때를 더욱 건강하고 아름답게 가꾸게나.
한적한 마을길을 걷는 중에 나이 지긋한 일본여성 둘이서 '안녕하세요'라며 한국어를 연습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다가서서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건네니 '고맙습니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아 머뭇거린다. 천천히 '고맙습니다'는 발음을 반복하여 일러주니 밝은 표정으로 웃는다.
11시 넘어 버스에 올라 30분 거리에 있는 일본 제일의 온천도시 벳부로 향하였다. 벳부 시내로 들어서니 곳곳에서 뿌옇게 피어오르는 수증기가 온천지에 이른 것을 알려준다. 면세점방문과 점심식사를 끝내고 온천 순례에 나섰다. 처음 들른 곳은 가마토라는 지옥온천(벳부에 8개의 지옥이라 이름 붙인 온천수 명소가 있다.)인데 입장료가 꽤 비싸다. 40여 분간 머물며 온천의 이모저모를 살피면서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고 80도가 넘는 뜨거운 온천수를 마시기도 하였다.
지옥온천에 이어 찾은 곳은 유노하나, 온천수의 효능을 살린 유황재배로 유명한 곳이다. 유노하나는 온천지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이들이 온천수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 찾아낸 발상전환의 사례, 오늘처럼 창조적발상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세태에 힌트를 주는 방문지이기도 하다.
유노하나 방문을 끝으로 이틀간의 규슈관광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오후 3시 20분에 벳부를 출발하여 부산행 배를 타는 시모노세키로 향하였다. 차창으로 보이는 산야의 풍광은 잘 익은 들판, 스기나무 등 고급수종이 울창한 삼림, 2층 이하의 아담한 주택 등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과 지진으로 불안을 안겨주는 일본의 이미지와는 딴판인 평온함이다. 누구나 우울과 불안의 증세가 있기 마련, 이를 바라보며 우리의 일상에서도 불안을 털어내고 평온을 유지하는 지혜가 필요함을 되새긴다.
오후 6시에 출국수속을 마치고 부산행 성희호에 올라 우리 일행에게 배정된 넓은 선실에 짐을 풀었다. 김치찌개를 곁들인 선내식으로 저녁을 들고 이틀 전 무승부로 끝난 윷놀이를 재개하였는데 역시 1대1 무승부, 결과적으로 승패가 없었지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윷놀이는 모두의 스트레스를 날려준 유쾌한 시간이었다.
TV를 켜니 이명박 대통령이 내곡동사저 특검법안을 수용한다는 뉴스가 전해진다. 대통령이 자신의 비리를 수사하는 특검법에 서명하는 아이러니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대통령의 불행이 온 국민의 고통으로 연결되는 악습이 뿌리 뽑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어수선한 9시 뉴스를 들으며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아마 세상 떠나는 날에도 이처럼 어수선함을 등지고 스르르 사라지겠지. 그래도 지구는 여전히 돌아가리라.
제4일 여행의 미진함을 채워준 부산의 생태탐방
제4일(9월 22일), 새벽에 일어나 갑판에 올라가니 칠흑처럼 어두운 바다에 고기 잡는 배에서 나오는 불빛들이 여럿 눈에 들어온다. 밤하늘을 살피니 미명의 별들이 어둠속에서 하나둘 자태를 드러낸다. 선내의 항해표지판에는 이미 대마도를 지나 부산이 가까운 것을 가리킨다. 갈 때와 마찬가지로 파도가 별로 일지 않는 잔잔한 물결이다.
아침 식사시간이 여섯시 20분으로 빠른 편이다. 방송안내를 따라 식당에 들어서니 먼저 온 이가 없어 맨 앞이다. 콩나물국과 김치, 콩자반, 김을 곁들인 단출한 메뉴인데 쌀이 좋아서일까, 잘 익힌 밥맛이 좋다. 로비로 내려와서 커피로 입가심을 하고 선실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하선 시간은 아침 8시, 갈 때보다 빠른 입국수속이 이루어진다. 밖으로 나와 승차 홈에서 대기 중인 버스를 타고 부산역에 이르니 8시 반이다. 서울로 가는 가족들의 기차시간은 오전 11시 출발이어서 두 시간 이상 여유가 있다. 서울 팀은 부산역 수하물보관소에 가방을 맡겨놓고 가까운 곳에 있는 자갈치시장, 국제시장, 책방골목 등을 돌아보았다.
일행과 작별한 후 부산에 거주하는 친지의 권유를 따라 부산시티투어 프로그램의 일환인 송도해수욕장, 암남공원, 낙동강하구에 있는 아미산전망대, 철새들의 도래지인 을숙도를 경유하는 낙동강하구에코센터를 찾기로 하였다. 시티투어는 해운대, 태종대를 왕복하는 순환버스코스와 역사문화, 생태탐방의 테마코스가 있다.
9시 40분에 출발하는 을숙도 행 버스에는 초등학생과 보호자 등 단체예약자들이 대부분이다. 송도대교와 남항대교를 지나 암남공원에서 20분 쉬고 몰운대와 다대포항을 거쳐 아미산전망대에서 20분, 종착지인 을숙도에서 한 시간을 머문다. 을숙도에서는 낙동강하구에코센터가 주된 탐사코스다. 한 시간여 2층의 전시실과 3층의 영상실을 돌아보며 알레스카 등지의 철새가 이곳을 거쳐 호주와 뉴질랜드까지 날아간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같은 시간, 서울에서 내려온 아들 내외와 손녀는 아내와 함께 순천만생태공원을 찾았다. 두 곳 다 람사르 협약에 의한 습지생태지역이다.
12시 반에 을숙도를 출발하여 부산역으로 향하였다. 부산지리를 잘 아는 친지는 시내중심가를 거쳐 광주행 버스를 타는 사상시외버스터미널까지 가려면 거리도 멀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며 하단에서 내려 사상으로 가도록 길안내를 한다. 하단의 시장골목에서 점심을 들고 사상터미널에 도착하니 오후 2시, 2시 반에 출발하는 고속버스를 타고 광주로 향하였다. 외국여행치고는 짧은 3박4일의 일정 중 중간기착지인 부산의 역사와 문화, 생태를 살필 수 있어서 더 알찬 여행이 되었다.
추신,
둘째 날, 시모노세키에 도착하기 전에 한 시간 넘게 여행기를 정리하고 나서 선실에 돌아와 지갑을 찾으니 행방이 묘연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글 쓰는 중에 점퍼에 넣은 지갑을 떨어뜨렸다. 배안에는 여수에서 온 초등학생 30여명이 탑승하였는데 그중의 한 어린이가 지갑을 주워 인솔교사에게 가져갔고 인솔교사는 프론트에 이를 맡겼다. 잃을 뻔한 지갑을 고스란히 찾게 되어 인솔교사와 어린이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였다.(인솔교사에게 내가 쓴 '인생은 아름다워 3편'을 전하며 학생들의 친절에 감사하다는 글을 적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교장 선생에게 치하와 감사의 전화를 드렸다. 교장 선생도 저간의 이야기를 들었다며 전교생에게 사연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지겠다고 말한다.